이수. 아트나인. 행복한 라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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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기만의 인간을 위로하고 짖이겨지는 신화의 이미지(4.0)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영화를 보고 나면 어딘가 공허해지는 기분과 함께 미안함과 그리움이 함께 떠오른다. 영화를 보다 경험한 적이 없어 남아 있을리 없는 기억이 떠올라 그리워지고, 그 기억을 잊고 있었다는 것에, 잃어버렸다는 것에 미안해지고, 그러한 그리움과 미안함 사이를 헤메이다 공허함에 부유한다. 겪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기억이라니.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본 <키메라>(2023)와 라이카시네마에서 본 <더 원더스>(2014)에 더해 올해 초 아트나인에서 본 <행복한 라짜로>(2018)까지 모두 그러한 기억을 떠오르게 해 영화관을 나설 때면 매번 당혹스럽다. 스스로가 돌아봐도 웃긴 것은 고개를 저으며 착각이라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너무나 생생한 이 모순에 대처하지 못한 채 일격을 당할 때 이유 모를 후련함까지 떠오른다는 것이다. 대상이 없는 기억에 대해서 그리움, 죄책감,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 정상일리 없건만 거기에 후련함까지. 돌이켜보면 후련함의 정체는 무엇이 혹은 무엇에 후련한지도 모름에도 마치 그러한 기억을 떠올리고 다시 잊지 않겠다는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인 듯하다. 하지만 일련의 감성적 경험을 돌이켜보면 단순한 환각은 아님에 분명하다. 기억이 반드시 어떤 실재를 물리적, 육체적으로 경험해야 생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러한 인식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상이 없는 기억은 일차적으로 너무 모순적이라 바로 와닿지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답을 <행복한 라짜로>에서 찾아보면, 개인적으로는, 그리고 단편적으로 답하면 신화의 이미지라고 할 듯하다.
<행복한 라짜로>의 시공간을 먼저 돌이켜보자. 가짜 후작 부인이자 마을의 지주 '알폰시나 데 루나(니콜레타 브라스키 분)'에게 수십 년을 속고 있는 마을 인비올라타는 시공간적으로 완전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인세의 현재와 단절되어 있기에 소작농이 사라지고 누구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으며 아이들은 당연하게 학교를 갈 수 있는 세상에서 인비올라타는 계급제 아래에서 노동의 착취와 세습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탈리아어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순진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인비올라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역사와 문명이 변화했음에도 현대에 도달하지 못한, 단절된 공간인 것이다. 모순적이지만 이러한 단절을 통해 인비올라타는 현대와는 무관한 순수가 아직 살아있을 수 있는 시공간, 즉 현대와 신화의 경계에 위치한 신화적 시공간이다. 거짓에 기반한 착취와 세습이 만연했지만 반대로 현대 문명의 영향을 온전히 받지는 못했기에 정체되어 있는 인비올라타에는 순수한 무언가 살아있을 수 있다.
순수한 무언가로서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분)'는 한 마디로 신화적 존재이다. 라짜로는 인세와 완전 무관하게 인식되는 와중에 이용되는 것은 당연한 인세 외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즉, 개인에 따라 자연 그 자체든, 최후로 미뤄봤을 때 예수와 같은 신적 존재든 라짜로는 인세 외의 존재로서 신화적이다. 단적으로 그의 성품을 보면 순박하다는 말로 부족하며 언어화한다면 순수하다는 말이 가장 적합하지만 여전히 모자를 정도로 인세와 동떨어져 있다. 루나에게 수십 년을 속고 있는 인비올라타 마을 주민들에게조차 라짜로는 가장 이용하기 쉬운 대상이다. 겉으로 보기에 마을의 일원 같으나 라짜로는 인식적으로 노동력은 착취 당하나 마을의 중요한 행사나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어도 무관한 존재이다. 그의 존재는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는 인비올라타 마을의 현재든, 그 보다 더욱 현재인 스크린 너머 어느 시점의 관객이 살고 있는 현재든 잊힌 존재이다. 순수함이라는 말조차도 부족해보이는 라짜로의 성품을 포함해 그의 존재는 필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이든, 나이를 31살에서 33살 사이라고 밝히는 지금이든, 어떤 시점에서든 이미 잊히고 잃어버린 그 무엇이다.
하지만 신화적 존재가 있기에 인세의 존재들은 살아있을 수 있다. 라짜로를 대하는 인비올라타 마을 주민들, '젊은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 분)' 혹은 '늙은 탄크레디(톰마소 라뇨 분)', 은행의 직원들과 고객 등의 태도는 모두 관객에게 당연하고 익숙하다. 앞서 말했듯 그들에게 라짜로는 이용하기 쉽다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이용되는 것이 당연한 존재이다. 그들에게 라짜로는 자신들에게 이득을 주기에 좋고 낯설기에 흥미로운 놀이감과 같다. 하지만 실제로 살펴보면 라짜로의 노동력을 착취하던 인비올라타 마을 주민들은 당연하다는 듯 언제나 담배 농사일을 도운 라짜로에게, 납치극 자작을 위해 자신이 하라는 대로 라짜로에게 명령한 탄크레디는 자신을 친우라 생각하며 당연한 듯 도와준 라짜로에게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내어주는 신화적 존재가 인세의 존재 자신들에 의해서 이용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들이 그의 도움을 받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장난감일지언정 총부리를 겨누어 공포감을 일으키는 때에는 때리고 밟아 죽여야 한다. 인세 외의 존재, 즉 신화적 존재는 인세보다 아래라 여겨질 때 받아들일 수 있다. 인세와 동일하게 혹은 인세보다 위로 올라서려 하면 실제로는 웃고 넘어갈 수 있을 어린아이와 같은 행위더라도 존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마치 신화적 존재의 너무나 순수한 장난같은 행위에 공포감을 느꼈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 말이다.
깡촌에 온 것만으로도 지겨워 어머니 루나에게 반항하는 탄크레디가 납치극을 자작한 가운데 이를 돕던 라짜로는 메마른 계곡을 달이라 하는 탄크레디의 말에 그곳이 실제 달이라고 생각하는 듯 주변을 둘러본다. 마을 사람들이 이따금 말했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이를 흉내낸 탄크레디에게 늑대 울음소리가 화답된다. 자작극으로 인비올라타를 찾아온 경찰이 찾아오면서 현대와 경계가 허물어져 '어린 안토니아(아녜제 그라치아니 분)'가 나이 들어 마을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골동품이라 속여 파는 '늙은 안토니아(알바 로르바케르 분)'가 될 정도로 시간이 흐른다. 하지만 라짜로에게 그러한 시간은 찰나와 같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라짜로 덕분에 모두가 늙고 죽어 이제는 몇 명 남지 않은 인비올라타 주민들과 만난 나이든 탄크레디는 작은 달님으로 칭한 둥근 냄비를 손으로 들어 올린 채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내고 도시에서 있을리 만무한 늑대가 이에 화답한다. 익숙하지만 실제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나아가 지금은 있을리 만무한 현대에 달이 뜨는 날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라는 신화적 이미지가 현대에도 어딘가에서 잊혔을 뿐 살아 숨쉬고 있을지 모를 라짜로라는 신화적 존재로 되살아난다.
넘기며 보던 한 인터넷 방송 짤에서 천마(天魔) 김풍 작가는 낭만을 무언가를 낭비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낭만이란 다른 누군가에게 무언가 주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순진해야 가능한 여유의 상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넘기다 보게 된 SNS 게시물 짤의 게시자는 중고서점에서 시집을 샀는데 그 이유가 시집 앞에 있는 편지 글귀의 정서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3학년을 올라가는 선배를 위해 그보다 어린, 나이 모를 후배가 앞날을 불안히 여길 선배를 위해 시를 읽으며 불안을 이기고 당당히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집을 선물로 준다는 편지글을 보며 게시자는 같은 10대임에도 지금의 10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서에 마음을 뺏겨 시집을 샀다며,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서에 한탄스럽다는 의미로 글을 남겼다. 그 게시자가 한탄스럽다는 자신의 감정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소중한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여유 있게 전달했을지는 모르겠다. 과거와 비교하며 낭만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고, 낭만이 없음을 한탄하는 모습은 '낭만 없는', '각박한'과 같은 수식어로 부족한, 더이상 신화 자체가 인세에서 살아 숨쉴 수 없음을 의미하는 비극이다.
즉, 신화적 존재인 라짜로의 죽음은 현대 문명의 비극이다. 당연하다는 듯 언제나 자신을 내어주는 신화적 존재가 이제는 희미한 현대의 인세는 어딘가에서 살아 있던 그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두렵다는 듯 죽인다. 신화적 존재가, 강도짓이라는 개념 자체도 모르는 바로 그 신화적 존재가, 강도짓을 한다는 인식도 없이 그저 장난감 총을 겨눈 것에 자신들이 겁을 먹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나? 혹은 시간이든, 감정이든 자신들의 무언가를 낭비시킨 그 순수하기 그지 없는 감정과 인식에 분노가 치밀었나? 어떤 이유인지는 모른다. 다만, 신화적 존재에게서 경이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그 존재를 불필요한 무엇으로 밖에 보지 못한 채 그 불필요한 무엇에게까지 죽음이라는 말살의 폭력을 휘두르는 현대인은 부끄러운 존재이다. 라짜로의 죽음과 함께 이제는 사람의 발길이 끊긴 오지에서조차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 어색한, 그럼에도 도시 어딘가에서 몽환적인 울음소리를 보내던 늑대 역시 인간의 발에 짓밟히고 짓이겨진다. 신화가 살아 숨쉬지 못하는 현대에서 그저 한없이 행복한 라짜로는 현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에 비극이며 그 자체로 부끄러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