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것들 사이의 우울

경의선 숲길. 쿠츠. 카츠카레.

by Gozetto

본의 아니게 한 학교를 10년 정도 다니다 보면 주변 맛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된다. 왠만한 곳은 다 가봤으며 새로 생긴 곳도 이미 거의 다 가봤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참 이 학교... 먹을 곳이 주변에 없구나.' 싶다. 쌀국수 3곳, 짬뽕 1곳, 중국집 2곳, 케밥 1곳, 돈카츠 1곳, 쭈꾸미 볶음 1곳, 덮밥(동) 2곳... 꼽아보기 시작하면 그렇게 적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먹을 만한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10년을 지내다 보니 이제 학교 주변 맛집은 집밥처럼 느껴지기라도 한가 보다. 식도락을 위해서 신촌, 이대, 홍대, 연남, 상수, 합정 등 어디로든 걸어가곤 하지만 가끔은 학교 근처에 뭔가 새로운 곳이 생기길 바라곤 한다.

그러면서도 막상 더 생기는 일은 또 없었으면 싶다.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할 때쯤 경의선 숲길이 완공되었다. 그러고 나니 주변 골목과 거리의 풍경이 심상치 않다. 산책로가 하나 생긴 것으로 새롭게 높이 지어올리는 건물 공사가 많아졌다. 아예 골목 째로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모습도 보인다. 공사에 이어 또 다른 공사의 연속이다. 그리고 공사의 연속에서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것은 학교와 학생들의 시간을 담고 있는 식당들이다. 산책로가 생긴 것 때문에 주변 건물들의 가치도 바뀌면서 세입자로 있는 식당 사장님들의 등골만 휜다. 기존에 있던 맛집들이 견디지 못해 나간 자리를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차지할까 두렵다. 프랜차이즈 식당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 앞의 식당이 없어진다는 건 곧 학교의 시간과 학생의 추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학교 앞 돈카츠 카레 식당인 <고이짱 돈카츠>가 문을 닫았을 때는 정말 충격이었다. 학교 입학 후 친한 동아리 형이 데리고 가준 식당이었다. 돈카츠도 일본식 카레도 처음이 아니었는데 왜 그리 맛있게 느꼈졌는지. 아마 그 당시 형이 해준 이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워낙에 맛있는 곳이지만 장사 욕심은 딱히 없었다는 사장님. 그래서 어느 순간 문을 닫으려고 하셨는데 학생들이 완강히 반대하며 계속 장사해달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어느 학교 앞이든 꼭 한 곳은 이런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이긴 하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 이런 이야기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이 식당이 그만큼 오랫동안 학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암시일게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문을 닫으신 건 아니다. 대흥에서 공덕 쪽으로 경의선 숲길을 걷다보면 횡단보도를 하나 건넌 다음 보이는 작은 골목 오른쪽에 <쿠츠>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다. 전신인 <고이짱 돈카츠>의 메뉴도 거의 그대로 있다. 겉모습만 조금 더 일본 어느 골목에서 새롭게 장사를 시작한 식당 같이 보일 뿐이다. 학교 앞 오래되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아직 있다는 것에 더 안심이 된다. 여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이짱 돈카츠>에서 맡던 카레 향기가 코를 자극해 과거로 시간여행을 시킨다. '아, 그 때 저기 학생 2명이 앉아서 깨를 갈고 있었지. 창가에는 학생 한 명이 음악 들으면서 카레 먹고 있었고.' 자리에 앉아 깨를 갈면서 새로운 외관에 과거의 풍경을 덧붙여본다.

맛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재료를 모두 갈아 카레와 함께 푹 끓여낸 일본식 카레는 여전히 살짝 칼칼하다. 진하면서 칼칼한 카레에 밥을 곁들이면 포근한 밥이 칼칼한 카레를 달달한 탄수화물의 맛으로 부드럽게 달랜다. 밥 위에 얹혀진 카츠를 가능하면 카레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카츠는 카츠대로 즐기면서도 원할 때 카레와 즐길 수 있다. 이전보다 조금 더 기름기가 많아진 듯한 카츠는 칼칼하고 진한 카레에 고소한 맛을 더해준다. 카레는 카츠의 살코기에 박혀 들어 더 부드럽게 씹히게 한다. 깨를 듬뿍 갈은 돈카츠 소스에도 찍었다가 카레에도 찍었다가. 카츠만 먹었다가 카레밥과 함께 먹었다가. 원하는 소스에 원하는 조합으로 먹다가 카츠를 2개 정도 남기고 카레와 밥을 리필한다. '그러고 보니 그 때도 리필은 꼭 한 번씩 했지.'


지금의 저녁을 먹는 순간에 계속해서 과거의 순간이 찾아든다. 겉모습은 변했어도 아직 그대로인 것이 있다. 그저 카츠카레 하나 먹는데 뭘 그리 많이 생각하느냐고 할 수도 있는데 어쩔 수 없다. 1년에 2번 정도는 방문해 먹던 식당이 다른 모습으로 다른 곳에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헤어졌던 연인을 다른 모습으로 만난 것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겉으로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여전한 모습에서 웃음과 슬픔 사이 그 어딘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쿠츠>의 풍경은 <고이짱 돈카츠>의 풍경과 다르지만 맛은 여전하다. 그 맛에는 학교 학생들의 추억과 감정이 담겨 있다. 리필한 카레와 밥에 남은 카츠 두 덩이를 먹으며 문득 우울해졌다. 여전히 똑같은 이 맛에 추억과 감정을 담은 이들은 이제 몇이나 있을 것인지. 앞으로는 얼마나 더 추억과 감정을 담을 수 있을 것인지.

배부르게 돌아가면서도 쓸쓸하다. 계속 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조금은 천천히 변하려는 것들은 빠르게 변하라고 등 떠밀리거나 변하지 않을 거면 비키라고 밀린다. 천천히 변하는 공간에서 "그 시절", "당시", "그 때"라고 말하며 같은 시공간을 나누게 되는 일도 점차 사라진다. 무언가 시공간에 남길 새도 없이 변하기만 하는 시대에 말과 감각은 사진과 영상으로 대체된다. 기억은 하나의 사실로만 남을 때 의미를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말과 감각으로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며 함께 그 시절에 취하기에는 말과 감각을 자극하는 정체된 시공간이 사라져간다. 지금까지 흐른 10년이 이정도라면 앞으로 흐를 10년 동안엔 어떻게 변할까? 여전한 맛을 느껴 행복으로 가득차도 이내 그 여전함도 빠르게 사라질까 걱정하며 우울하게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