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스모크>를 보고
칠흑 같은 정적 끝에 놓인 고통스러운 박제
1900년대 경성의 습기가 가득한 무대, 유머러스한 김경수 배우의 안내 뒤에 찾아오는 칠흑 같은 어둠은 관객을 숨 막히는 암울한 과거의 현실 속으로 안내한다. 누더기 같은 삶을 바닥에 내던진 채 등장하는 ‘초’는 천재가 되고 싶었으나 박제가 되었다고 비탄하며 피 섞인 기침을 토해낸다. 자신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 앞에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은 초반부터 극이 담고 있는 무게를 일축한다. 일그러진 형태의 유리창들은 불안정한 이상의 내면을 형상화하며, 백미라 할 수 있는 거울 연출은 두 자아의 경계를 가르는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 작은 책상 위로 쏟아지는 빛은 초와 해를 분리시키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대립은 예술적 고뇌와 현실적 타협 사이의 처절한 사투를 보여준다.
분열된 자아의 충돌과 융합
이 극은 불친절하고 난해하다. 이상의 시구처럼 상징의 파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그 난해함의 조각들은 결국 시대적 현실 속에서 자유를 갈망한 시인의 자아를 찾아나가는 숭고한 여정으로 귀결된다. 초반에는 각기 다른 인물로 보였던 초, 해, 홍은 복선을 통해 이상의 분열된 자아임이 드러난다. 생을 끝내려는 해의 총구를 초가 그대로 따라 하는 장면이나, 거울이 만든 가상 공간 속에서 벌이는 난투극은 그들이 애초에 하나였음을 증명한다.
김경수 배우가 연기한 '초'는 현실의 억압에 지쳐버린, 광기로 변질된 천재성을 지닌 자아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피폐한 예술가 그 자체였던 그의 창법과 딕션은 불안정한 심리를 극적으로 투영한다. 시를 써도 읽어줄 이 없는 현실 속에서 그는 주변인들을 죽음이라는 '바다'로 끌고 가려 한다. 반면, 최지혜 배우의 '홍'은 이상의 시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버팀목'이다. 무기력한 어둠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그녀의 단단한 성량은 침잠해 있던 시(詩)에 대한 갈망을 깨운다. 해가 초에게 잠식되어 비극을 향해 걸어가자, 파괴적인 자아들조차 보듬고, 나를 껴안고 계속해서 살아가라며 고통에 찌든 두 남성을 안아주며 우리가 꿈꿨던 넓은 이상향이라는 바다로 나아가자고 눈물로 외친다.
자신을 받아들이며, 다시 한 번 날아오르는 예술가
극은 수미상관의 구조를 통해 다시 취조실로 돌아온다. 도입부에서 초가 입었던 죄수복을 결말부에서 해가 입고 있다는 점은 시인으로서의 숙명을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석방된 해의 뒤편으로 초와 홍이 함께하는 장면은 분열된 파편들이 비로소 하나의 '날개'로 통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세 명의 인물이자 한 명의 시인인 이상이 노래하는 언어들은 유리창 위에 찬란하게 새겨진다.
"나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저 예술가", "날자꾸나 날아보자."
이상향에 도달하여 자유를 얻은 이는 기쁨을 누린 뒤, 커튼콜에서 해가 내뱉는 담배 연기는 유리창에 '스모크'라는 글자를 남기며 흩어진다. 그 연기는 과거를 떠나보내는 해방의 신호이자, 치열하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 예술가의 고독하고도 깊은 숨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