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들른 동네 마트의 채소 코너에 등장한 미나리, 두릅 따위의 채소를 보며 벌써 봄이 오긴 왔구나 생각한다.
“이게 얼마나 귀하고 몸에 좋은건데, 서울에서는 한 웅큼에 얼마나 비싸게 파는 줄 아니? 초장 찍어서 먹어봐. 쌉쌀하지만 맛있어.” 들려오는 엄마의 잔소리. 자식에게 생소한 음식을 줄 때 많이 쓰는 필살기지만, 정작 어린 자식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멘트이지 않은가. 초등학교 4학년,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처음으로 두릅을 먹어봤다. 두릅 한 두개 먹는다고 몸에 좋아봤자 얼마나 좋아진다고. 브로콜리보다는 부드럽지만 까슬 까슬한 가시가 있는, 쓴맛이 느껴지는 초록색 채소. 맛과 식감 모두 낯설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호기심과 식욕이 왕성해 뭐든 잘 먹을 것 같다면 착각이다. 혀 끝에 달콤하고 기름진 것들만 기억하게 된 내 입맛에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맛이었다. “안먹어. 맛없어!” 그렇게 두릅이라는 채소와 엄마에게 모진 말을 뱉었다.
스무살, 부모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어설픈 독립이 시작됐다. 라면, 볶음밥, 스팸구이 등 요리라고는 볼 수 없는 음식들을 하나 둘 씩 늘려가며 생존을 위한 끼니를 스스로 챙기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친구들과의 약속, 술자리에서 끼니를 해결했으니 정작 제대로 된 음식을 차려본 적이 몇 번이나 될런지. 그러다 방학이 되면, 부모님의 울타리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일어나라는 엄마의 잔소리마저도 좋은, 느즈막한 아침에 눈을떠 각기 각색의 나물과 신선한 재료로 차려진 밥상을 마주한다. 게으르고 건강한 20대의 방학. 그러다 봄이 올 즈음 꼭 한 번 씩 두릅을 마주친다. “여전히 그 맛일까?” 궁금해진다.
데친 두릅 중 가장 작고 부드러운 것을 골라 초장에 찍어 맛을본다. 뭐, 여전히 반가운 식감은 아니지만 유년시절 먹던 그 맛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나쁘지 않네. 그땐 왜 그렇게 싫었을까? 10여 년의 이유없는 미움이 한 순간에 사라졌던 순간이었다. 채소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낀 건 처음이다. 그 이후로도 두릅을 스스로 찾아 먹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종 식탁에 올라올 때면 엄마의 잔소리, 어릴 때의 나를 추억했다.
서른살, 요리 초보라는 딱지를 떼고 자취 경력 10년이라는 시간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훈장이 된다. 나의 몸과 정신에 안녕한 요리를 찾고, 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요리를 기꺼이 할 수 있는 그런 나이. 퇴근길 들른 동네 마트의 채소 코너에 등장한 미나리, 두릅 따위의 채소를 보며 벌써 봄이 오긴 왔구나 생각한다. 남편은 두릅을 좋아할까? 순간, 내 나이즈음 두릅을 보며 같은 생각을 떠올렸을, 초등학생 딸을 가진 한 여자가 떠오른다. 아, 사랑이었구나. 밥상에 올라온 두릅을 베어물어 사랑을 삼키고, 조금씩 어른으로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