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고춧가루 냄새와 비릿한 액젓냄새에 코가 간질거린다. 오늘 담그는 김치는 누구네 집으로 가는 김치일까?
“에엣취!”
“효진아, 이리 와서 이거 뚜껑 좀 열어봐라.”
김치 재료가 한가득 쌓여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늘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수북이 쌓인 매끈한 총각무, 빨간 고무 대야 안 가득 찬 양념 재료들.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고 앉아 김치 양념을 버무리는 엄마의 주위로 갖은 재료들과 가지각색의 플라스틱 통들이 어지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엄마, 뭐 하는 거야. 김치 장사하기로 했어?”
“김치 장사는 무슨, 바빠 죽겠는데. 선우 담임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 갖다 주려고 그러지.”
“나도 여태까지 담임 선생님들한테 엄마가 김치 담가줬어?”
“아니. 저 옆에 저거 노란 통 있지? 그거 뚜껑 열어서 여기 좀 부어 봐 봐.”
터덜터덜 엄마 옆으로 가, 노란색 통에 들어있는 다진 마늘을 양념이 가득한 대야에 부었다. 또다시 코가 간질거렸다. 벌떡 일어나 한걸음 물러나서 엄마를 봤다. 양 팔로 김치 양념을 휘휘 젓는 엄마의 굽은 허리를.
괜히 냉장고를 열고 마시지도 않을 물을 꺼내면서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엄마, 우리 선생님한텐 안 주면서 왜 선우네 선생님한텐 김치 갖다 줘?”
“네가 반에서 반 평균 깎아먹는 애도 아닌데 뭐 하러 갖다 줘. 나는 내 애가 반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반에 평균을 깎아 먹는 거 아니면 신경 안 쓴다. 선우는 맨날 돌아다니고 선생님이 애들 가르치는데 방해가 되니까 미안해서 갖다 주는 거지.”
“그럼 저번에 서울에 있는 엄마 빵집 친구가 준 생크림 빵도 선우네 선생님 준거야?”
“응, 전에 한번 1학년 휴게실에 갖다 놨었는데 맛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이번에 가서 선우 선생님 거랑 1학년 주임 선생님, 교감 선생님, 교장 선생님 거 사갔었지.”
선우는 올해 나랑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5학년 2반, 선우는 1학년 3반. 우리 교실은 선우랑 완전 반대편이다. ‘ㄱ’ 자 학교에서 나는 밑으로 끝, 선우는 왼쪽으로 끝이다. 하지만 선우는 왼쪽 끝에 없을 때가 더 많다. 선우는 수업을 안 듣는다. 아니, 못 듣는다.
“엄마, 내일도 학교 올 거야?”
“아니, 내일은 어머니회 회장 아줌마랑 교육청 가야 돼.”
“왜?”
“너네 아직 도시락 들고 다니잖아. 급식실 지어달라고 해야지.”
“교육청에 가서 지어 달라면 지어 주는 거야?”
“가서 이것저것 이야기 해봐야지. 너네 학교 졸업생들 중에 도와줄 만한 사람들한테 연락도 해보고. 회장 아줌마가 인맥이 넓잖아.”
한 달 뒤, 우리 학교는 동네 초등학교 중 유일하게 급식실이 있는 학교가 되었다. 몇 달 뒤엔 학교를 청소해 주시는 분들이 생겼다. 그리고 각 반마다 정수기가 놓였다. 또 몇 달 뒤엔 운동장에 있는 구령대를 새로 지었다. 다음 해엔 칠판이 화이트보드가 되었다. 신기했다. 엄마랑 회장 아줌마가 어딘가에 갔다 오면 학교가 변했다.
지금 돌아보면 뉴스에서 나오는 아줌마들처럼 선생님들에게 촌지를 안 줬을 뿐이지, 이 당시 엄마는 촌지 주는 엄마들보다 더 극성인 엄마였다. 그 아줌마들이랑 다른 건 딱 두 가지뿐이었다. 돈이 아니라는 점. 아이의 성적을 위한 게 아니라는 점.
배추김치, 알타리 김치, 백김치, 물김치, 각종 김치를 담가서 선우의 선생님 댁으로 가져다 드렸다. 엄마의 친구분이 하는 유명한 제과점의 빵도 가져다 드렸다. 학교 선생님들의 전체 회식자리도 어머니회를 통해 지원했다.
선우의 학년 선생님 휴게실의 간식도 모두 담당했다. 교장실의 냉장고는 당연했다. 아침엔 초록 모자를 쓰고 학교 앞 횡단보도를 지키며 안내를 했다. 틈틈이 교육청에 찾아가 학교의 시설을 바꿨다. 학교에서 하는 모든 행사에 ‘선우 엄마’로 참석했다.
흰 봉투에 돈을 넣어 선생님께 주는 게 얼마나 편한 일인가. 촌지? 그건 치맛바람도 아니다.
엄마가 한 행동들은 분명 옳지 않다. 한 아이를 편애하도록 선생님께 요구하는 행동이니까. 하지만 이해한다. 엄마는 저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거다.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내 아들을 위해서. 내 아들이 선생님께 미움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 아들이 아이들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 아들이 세상에 있을 곳을 만들기 위해서.
선우는 초등학교 1학년때도 말을 못 했다. 집에서가 아니면 의사표현도 잘 못했다. 수업을 못 들으니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복도를, 휴게실을, 교장실을 휘젓고 다녔다. 그런 아이가 어떻게 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까. 아무리 큰 도시에 있는 학교가 아니었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엄마, 도대체 선우를 어떻게 일반 학교에 보낼 생각을 했었어? 무슨 자신감이야?’
‘장애인 학교 가봤지. 너 어릴 때 데리고 갔었는데 기억 안 나?’
‘안나. 나는 너무 충격이었던 일들은 다 잊었나 봐. 그런 건 기억이 안 나.’
‘가보니까, 선우보다 훨씬 증상이 심한 애들이 너무 많았어. 그런데 어떻게 보내. 선우가 거기 가면 그 애들 따라 하게 되고 결국 더 심해질 게 뻔히 보이는데.’
‘엄마 치맛바람 어마어마했던 거 알지?’
‘당연히 알지. 그래도 뭐 어쩌겠어. 그거라도 해야지. 엄마인데.’
선우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일반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부모님 덕분이었다. 치맛바람을 거세게 휘둘렀던 엄마 덕분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선우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이런 엄마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장애를 가진 아이를 바라보는 차디찬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엄마가 아니면 누가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