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
<이번 생은 처음이라>
tvN, 2017.10.09 ~ 2017.11.28, 연출: 박준화 / 극본: 윤난중
계약으로 맺어진 억지 연애, 억지 결혼, 그리고 그러다가 시작되는 진짜 사랑.
사랑을 논하는 많은 드라마, 영화에서 흔히 쓰인 수법이다.
어쩌다 만나게 된 진짜 사랑. 거짓말에서 시작한 진실된 사랑.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르다.
로맨스 드라마에서 사랑은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겠지만,
이 드라마는 사랑보다 더 깊게, 본격적으로 결혼에 대해 논한다.
사랑의 종착역이라는 결혼, 그게 과연 정말 가장 행복한 사랑의 엔딩일지에 대해.
이 드라마에서 중심이 되는 건 남성보다는 여성 캐릭터다. 물론, 세 커플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지만 주인공 지호를 중심으로 한 세 친구의 결혼에 대한 고민을 그들이 처음 만난 고등학생 시절부터의 이야기를 부연 설명으로 하여 설득력 있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세희의 과거 이야기가 나름 세세하게 묘사되는 것에 비해 상구와 원석의 과거나 가치관은 크게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면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 부모보다도 더 많은 것을 공유하는 친구지만 결혼에 대한 가치관에 있어 세 여자는 매우 달랐다. 그리고 이 다른 세 여자의 이야기는 극의 중심이 된다.
어쩌면, 호랑은 남녀가 갈라져 한남이니 꼴페미니 하는 요즘 시대, 가장 욕을 먹을 캐릭터일지 모른다. 어린 나이의 여자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엄마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호랑은 순수한 지향으로 현모양처를 꿈꿔왔다. 하지만 '서울대 나온 자수성가형 성공남'과 결혼하는 것이 목표라는 고등학생 호랑의 모습은, 남자의 능력에 기대어 잘 살아보겠다는 일명 '취집'을 하겠다는 철없고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하다. 내가 해내는 것이라고는 없으면서, 그저 안정적인 삶만 꾀하는, 남편의 돈으로 쇼핑하고 애는 어린이집 보내두고는 카페에서 다른 엄마들과 희희덕 대는 그런 모습 말이다.
하지만, 호랑이 어렸을 때 엄마가 되고 싶었던 것과, 지금 결혼을 하고 싶은 이유는 다르다. 그 때는 정말 그런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자에게 결혼은, 더군다나 서른이 된 여자에게 결혼은 미션이기 때문이다.
너, 알지. 나 어렸을 때 까만 옷은 쳐다도 안 봤던 거.
근데 이제 옷장 열면, 나도 모르게 안 튀는 색 옷만 집게 된다?
어느 옷에나 입어도 잘 어울리고, 어딜 가도 튈 일이 없잖아. 그래서 좋아.
지호 난, 그냥 남들처럼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 싶어.
남편도 있고, 애도 있는 그런 아줌마.
친구들 모임 가서 같이 시부모 얘기도 하고, 애 키우는 얘기도 하고.
그런 까만 코트만 입고 싶어 이제.
남들이랑 섞여 있어도 튀지 않고 똑같은 사람.
남들 하는 거 똑같이 하면서 같이 얘기하고, 같이 웃는 거.
그게 내 꿈이야.
결혼은 나한테 "너도 남들만큼 괜찮다. 여자로서 가치가 있다" 라고 얘기해주는 까만 코트야.
아직 사업이 안정되지도 않은 원석이지만, 결혼만 하면 당장 일을 때려칠 기대를 가지고 있는 호랑의 모습은 철 없고, 결혼에 대한 환상만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한 남자친구와 7년이나 사귀고, 함께 동거까지 한 서른의 호랑에게 어쩌면 다른 선택지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늦으면 늦을 수록 특히 여자에게 좋지 않은 일이고, 일하느라-능력을 위해서 결혼을 미룬 여자에 대한 평가에는 인정이나 존경이 아닌 히스테릭 할 것이다라는 편견이나 그 나이 먹도록 시집도 안 가고 뭐했느냐는 조롱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호랑은 서울대를 나온 친구들과, 그 친구들의 소개로 만난, 역시 서울대를 나온 남자친구 원석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데 어려운 나날들을 보냈다. "잘난 척좀 하지마!"라며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이 짠하고 아픈 것은, 그녀의 꿈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아니라 평범한 삶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호랑에게 결혼은 '서울대를 나온 것'만큼의 의미를 가졌을지 모른다.
가련한 비극의 여주인공이다. 친구들 중 가장 잘 나가고 있는, 그리고 외모도 몸매도 출충한 수지였지만 다리가 불편한 엄마를 두고 수지는 훨훨 날아갈 수 없었다. 여자에게 시집은 '가는' 것이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갈 수는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수지는 '결혼을 바라보지 않는 연애'를 택했다. 20대의 수지에게 이런 연애는 어려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상대도 아직 결혼을 생각할 단계는 아니었을 테니, 적절한 시기에 잘 끊어주기만 하면 그녀는 무사했을 것이다. 굳이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질질 짤 필요 없이.
하지만 20대 후반이 되며 수지는 연습을 해야 했을 것이다. 상대에게 빠지지 않는 연습을. '사귀면 결혼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리는 30대의 연애는 수지에게 너무도 어려웠을 것이다. 마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발은 한 발 뒤로 놓아야 했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서른의 수지는 연애보다 섹스를, 세상 쿨한 파트너가 되기를 택했다. "구차한 년보다, 미친 년이 낫지."라고 말하며.
뭐하자는 거야? 마대표가 얘기한 연애가 이런 거니?
보이고 싶지 않은 남의 사생활에 불쑬불쑥 들어오는 거?
그래서 사람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거.
옆에? 어떻게? 결혼이라도 하면 우리 엄마 같이 모시고 살 수 있어?
그래, 마대표님 부모님한테 뭐라고 할 건데.
아빠는 누군지도 모르고, 몸 불편한 엄마 모시고 살아야 하는 그런 여자랑 결혼할 거에요.
그렇게 날 소개할 거야?
마대표님네 집처럼 삼대가 집짓고 함께 모여 사는 그런 평범한 세상 나는 몰라.
우리 엄마, 아프면 의지할 곳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고, 죽어도 묻어줄 사람이 나밖에 없어.
그게 내가 살아야 하는 세상이야, 마대표.
그러니까 나한테 헛바람 넣지 마. 니가 그렇게 따뜻하게 굴면, 내가 다른 세상 욕심내게 되잖아.
그래서 수지는 더욱 순수했다. 사랑에 한 발 물러서 있었기 때문에, 상구가 성큼성큼 다가올 때마다 수지는 무방비했다. 인형 하나에도 설레고 나이 많은 상구가 귀여워보일 만큼.
하지만 그녀에게 선택지는 없었고, 결혼은 현실이었다. 우리 둘 만의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모든 것이 얽히는, 현실.
지호도 언젠가 로망은 있었다. 사랑에 대한 로망, 결혼에 대한 로망. 하지만 지호에게는 한 번의 기회도 허락되지 않았고, 그렇게 서른이 되었다. 서른이 되고나서 지호는 알았다. 이제 더 이상 로망은 없다는 걸. 그리고 단순한 마음으로, 평소에 그녀의 친구들이 그를 도라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계약결혼을 선택했다. 그것도 비혼주의자의 아내가 되는 선택을.
사회학자 개리베커에 의하면,
결혼해서 사는 이득이 혼자 사는 것보다 커야 사람들이 결혼을 한다고 한다.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이익과 이익이 만나서 할 수 있는 일. 다만 우리 이익에는 애정이 없을 뿐,
그러니 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작부터 '사랑의 결실'이라는 공식을 전혀 이행하지 않고 이행된 결혼이기 때문에 이 커플은 독특했다. 사랑하면 으레 다 주고, 다 보여주고, 다 공유해야 한다는 법칙이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계약서상 각자의 의무와 권리만이 있을 뿐, 그 외는 궁금해할 이유도, 권리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독특한 시작 덕분에, 사랑이 정말 시작된 이후에도 둘은 서로의 사생활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배려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19호실이 있다.
아무리 가까워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방.
그리고 남들에게는 도라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행복한 삶을 만들어 나갔다. 결혼했다면 다 해야 하는 줄 알았던 것들 중 그들은 하고 싶은 것만 했다. 그리고 그들 서로에게 충실했다.
이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호랑-원석, 수지-상구, 지호-세희 모두 결혼을 하거나 하기로 했고, 서로와 함께 하기를 결심했다. 하지만 도리어 이 점에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들의 고민은 지극히 현실적이었지만, 결말은 순간의 행복한 한 때를 그려냈다. 시댁살이로 신혼생활을 시작하기로 한 호랑도, 사업의 성공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상구와 결혼할 것을 결심한 수지도, 진짜 부부가 된 지호도 결국 현실적으로 사랑을 이뤄냈지만, 그들의 앞날이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건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호랑은 시댁 살이로, 수지는 시부모님과의 갈등으로, 지호는 육아를 통해 흔들리는 부부의 결혼철학으로 위기를 맞을 것이다.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되겠지. 하지만 결혼은 종착역이 아니라면서도, 주인공들의 행복한 모습으로 극을 마무리하는 것은 시청자가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시청자 자신도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결혼에는 정답이 없더라도, 행복은 정답이니까.
등장인물 간의 합이 굉장히 좋았고, 배우들의 감정선을 섬세히 풀어내는 전개도 참 좋았다.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어 아쉬운 점이 있지만, (나는 보지 않은 드라마라, 내 의견을 밝히지는 않겠다.) 그래도 달달한 로맨스 드라마가 생각나는 계절에, 한번 쯤 보면 좋을 드라마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