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관계를 시작하며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조금 더 큰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가 나보다 단단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주고,
무엇보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해줄 사람이라는 기대.
나는 그 안에서
나의 불안을 해결해줄 사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나를 많이 사랑해주길 바랐고,
더 많이 이해해주고,
더 많이 수용해주길 원했다.
그가 나를 안심시켜주고,
망설이지 않고 선택해주길 바랐다.
문제는
그 기대가 너무 조용히, 너무 자연스럽게
‘사랑의 조건’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가 망설이는 것을 알아차리면
내 안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붕괴가 시작된다.
괜찮은 척하고 싶지만
이미 내면에서는
버려질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쉽게 다른 얼굴로 바뀐다.
그에게서 내가 기대한 모습을 볼 수 없을 때
‘그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나는 그 관계에서 조용히 회피를 선택했다.
돌이켜보면
그 사람의 부족함이 우리의 관계를 끝낸것이 아니다.
내가 마음대로 그에게 맡겨버린 역할이
끝내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의 불안을 대신 책임질 사람이 아니었고,
나를 끝까지 안심시켜줄 존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에게 그 역할을 기대했고,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관계를 종료함으로써
나 자신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두려웠던 건
누군가가 나를 먼저 내려놓는 것.
그래서 나는
버려지기 전에 먼저 버려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나는 이 장의 끝에서
이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나를 대신해 흔들리지 말아줄 누군가를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