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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리인 Nov 30. 2022

프로젝트가 물 건너갔다

전략적 판단?


 “야 니 많이 컸네! A지점을 맡고”


 지점장 회의에서 츤데레 스타일의 K지점장님이 특유의 미소와 함께 한마디 날렸다. 신입사원 시절 과장님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회사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소형 지점장으로 발령받은 지 채 2년이 안 되어, 큰 지점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승승 가도를 달렸다. A지점에 가서도 중위권인 지점을 끌어올려 1위로 마감했다. 화양연화 같은 시절이었다.


 이듬해 5월 갑작스러운 인사부장의 전화를 받았다.




#1  즐겁기만 했다.


 “P지점장! 이번에 일본 대형 금융회사와의 제휴 프로젝트가 있어. 좋은 기회가 될 거야” 한다. 뜻밖의 이야기라 당혹스러웠지만, 일본어 테스트 등 선발 과정을 거쳐 결국 주재원 대상자로 선정되어 팀원으로 합류했다.


 윗선에서 추진이 결정된 프로젝트라 그런지 진행이 일사천리였다. 상품개발은 우리가 하고 운영은 양국이 공동으로, 영업은 일본에서 하기로 했다.


 몇 년 선배였던 프로젝트 팀장은 전형적인 관리형이어서, 사실상 내가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의 업무 파트너는 또래인 부장이었는데 다행히 대화도 통하고 스마트했기에 일할 맛이 났다.  

 

 잘 나가는 지점장이었고 그 해에도 비약적인 성과가 기대되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일을 좋아하는 성향이고 꿈꿔왔던 일이었기에 제대로 해 보고 싶었다.


 고객만족, 정산, 신시장/서비스 개발, 영업, 교육 등 그동안의 다양한 업무 경험이 프로젝트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


 상품 개발, 기획, 운영 프로세스, 영업, 전산 개발, 법률 검토 등 A부터 Z까지 힘은 들었지만, 우리 상품을 일본에서 판매한다는 보람과 자부심으로 힘든 줄 모르고 준비했다.


 각기 양국을 오가며 업무를 꼼꼼히 챙겼다. 우리보다 몇 배나 양이 많고 복잡한 상품 계약서 등을 보고 역시 차이를 느꼈다. 의사결정이 느리지만 실무자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는 것은 인상적이었다.


 또한 일단 정해지면 스피드가 붙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보다 빨랐지만, 일본에서도 막 태동기였던 인터넷 은행 사장과의 회의도 기억에 남는다.



 마침내 양국 CEO가 업무 제휴 조인식을 하게 되었고,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현지의 포털 사이트에서도 상품이 출시되면 바로 가입하겠다는 기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업무 프로세스별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차근차근 살피다 보니 업무 이해도도 더 깊어지게 되었다. 현지 영업 제휴처 확인 과정에서, 불법으로 고객 정보 유출을 계획하던 업체를 찾아내 문제 소지를 없앤 것도 큰 수확이었다.


 양국 실무자들이 업무에 박차를 가하던 어느 날, 평상시 팀장 하고만 독대하던 담당 B임원이 들어오라 한다.



#2  이게 될 거 같아?


 “현지 분위기는 확인해 봤어? 상품 출시가 중요한 게 아니야, 영업이 안 되면 아무 소용없는 거야” 한다.


 "인터넷 은행 등 영업처도 순조롭게 개발 중이고, 일본 사이트의 고객 게시 글 등에서도 상품 관련 반응이 좋습니다.” 하고 말해도 시큰둥해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별도로 조사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하고 자리를 물러났다.


 답답한 마음에 고민하던 중,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학창 시절 양국의 공동 관심사에 대해 세미나 등 교류를 하던 일본과의 연합 동아리 생각이 났다.


 재일 한국인 후배의 도움으로 부랴부랴 주요 영업 타깃인 젊은 층을 대상으로  시부야, 신주쿠, 롯폰기 등에서 현지조사를 하기로 했다.


 2주 후 500명 가까운 조사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대부분 상품 가입에 긍정적이었다. 결과를 정리해 발걸음도 가볍게 임원실을 두드렸다.


 보고서를 묵묵히 보던 임원이 조사 대상자 구성, 조사 방식, 비용 등을 묻더니, 놓고 나가라 한다. ‘이제 더 이상 뭐라 안 하겠구나’ 하면서 자리를 물러났다.


 1주일 정도 지났을까?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팀장이 임원실을 나오더니, 사업을 중단하기로 CEO에게 임원이 보고를 했다고 하는 것이다.


 탑다운으로 추진이 결정된 일로 제휴 조인식도 하고, 현지 분위기나 조사 내용도 긍정적인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보고가 끝났다는 소리를 듣고 기운이 빠졌는지 따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겼다. 담당 임원의 촉이 발동했는지, 회사 상황에 따른 전략적 판단인지, CEO지시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한숨만 나왔다. 그나저나 수습이 문제였다. 결국 실무자인 나의 몫이었다.


 중단이 아니라 회사 경영악화 등의 이유로 잠정 보류 형태를 취했지만 궁색하기만 했다. 같이 고생했던 일본의 K부장에게는 도무지 면이 서지 않았다. 몇 번의 공문과 전화로 어찌어찌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이런 처리 방식에 울화가 치밀었다.


 가장 큰 문제는 상품 출시만을 기다렸던 현지의 잠재 고객이었다.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신의를 저버렸다는 등, 역시 안 좋은 글들이 많았다. 약속을 일방적으로 깬 꼴이니 할 말이 없었다. 그 현실이 서글프기만 했다.


 당시에 그냥 지점장을 계속했다면, 일본과의 프로젝트가 준비된 채로 잘 되어서 주재원 생활을 했더라면 또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 판단의 배경이 궁금하다. 평소 스타일대로 B임원에게 따져 물었어야 하는데, 서슬 퍼런 위세에 제풀에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만난다면 왜 그랬는지 꼭 묻고 싶다.


 비 오는 흐린 날 오후, 일본의 K부장이 더욱 생각난다. 때로는 서로 인상을 쓰고 치열하게 언쟁을 하며 입장과 상황을 이야기하고, 일을 마치면 편하게 양국의 음식을 함께 하던 전우(?)였다.


 “그때는 너무 미안했어요.” 하고 막걸리 한 잔 따라주고, 서로 예전처럼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날이 오길 고대해 본다.




이미지 출처 : 제목 - SBS 스토브리그, ANA  #1, #2 - 픽사베이


#네트워크 #임원 #의사결정 #일본 #좌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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