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건배의 유래에 대해 궁금하여 찾아보면, 여기저기 복사학파*들의 무수한 설명을 볼 수 있는데, 대체로 '나는 네 술잔에 독을 타지 않았다. 만약 탔다면 같이 죽자'로 정리할 수 있겠다.
독일에 가서 독일인들과 저녁에 술을 먹는데, 이 친구들의 주법은 찔끔찔끔 홀짝거리기이다. 그래서 건배를 하자고 제안했는데, 건배를 해서 술잔을 부딪혀도, 여전히 술잔을 비우지는 않는다.**
다만, 건배 시 '프로스트 prost!'라고 하면서 꽤나 격식 차려 대응한다. 그 말이 생소해서 물으니, 기원은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다만 건배를 할 때는 술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후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아마도 상대의 속마음을 알아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비즈니스 미팅에서 독일 카우프호프 백화점 매니저가 당사의 유럽 사업 지속 여부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나의 말의 진위를 알아보고자, 나를 특히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일이 지금도 섬뜩하다.
그런데 '잔을 눈높이'에서 난 그러한 의심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거안제미(擧案濟眉)의 고사가 생각났다. 아련히 스러져간 동양적 가부장제를 그리워하는 나의 안타까운 습성이리라.
'프로스트'의 의미는 쉬웠다. 구글에서 찾으면 바로 나온다. 'prost!'는 라틴어의 'prosit!'이며, 이때 'pro'는 'for'이고, 'sit'은 'may it be'를 뜻한다는 것이다. 즉 'may it be for (you)', 'may it benefit (you)'으로 우리말 '위하여'와 심정적, 맥락적으로 대응된다.
유럽에서 특히 서유럽에서 로마가 정복하지 못한 땅이 독일 땅인데, 바로 그 독일에서의 건배구호는 라틴어의 잔재라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가 아닐까?
댄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에서 보면, 건배는 '고수레 libation'와 연결되는 개념이다.
그리스에서는 연회 시 첫 번째 와인 항아리를 열어서는 제우스에게 고수레를 올리며, 두 번째 항아리부터는 영웅들에게 바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기원전 2400~2600 년경의 수메르의 조각상에도 우르의 사제가 고수레를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토스팅(건배)과 고수레가 원래는 악한 눈 evil eye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자기 행운을 자랑하는 행동은 신들로 하여금 당신을 해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책으로 눈을 밝히고 보니, 이제야 비로소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또는 눈썹까지 맥주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하던 독일인들의 진지한 프로스트 prost에 무언가 고대의 고수레 libation의 전통이 어렴풋이 남아있음을 직감한다.
이 경우 프로스트에 숨겨진 you는 당연히 연회의 당신이 아니라, 연회를 지켜보고 있는 신이다. 따라서 프로스트는 신에 대한 헌사이며, 그것은 악한 눈 evil eye에 대한 무마책일 것이다. 눈은 여기서 삼중의 코드(당신과 신과 악한 눈)로 내게 다가온다.
*복사학파: 정확한 사실 확인이나, 인용 표기 없이 자신의 생각인 양, 퍼나르는 사람들을 지칭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들 차를 몰고 집에 돌아가야 하니, 술을 많이 안 먹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의 출퇴근 거리는 근교에 거주하던 한국인 매니저들에 비해 훨씬 멀었다. 당시(2005년)에 나는 술을 조금 먹고서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대리를 하지 않을 때여서, 독일인들의 저만치 앞선 시민의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후 한국에 돌아와서는 술을 한 모금만 먹어도 무조건 대리를 하게 된 것은 혹시라도 안타까운 사고를 내지 않겠다는 결심이 체화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음주문화도 함께 개선이 이뤄진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