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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Oct 26. 2022

조지프 슘페터와 독일 역사학파

Michaelides & Milios (조영필 역)

Panayotis G. Michaelides and John G. Milios (2018), Joseph Schumpeter and the German Historical School.



               

요약


지금까지 슘페터의 독일역사학파와의 친화성은 슘페터의 연구에 대한 주요 설명에서 부적절하게 인정되거나 심지어 미개척되었다. 본 논문은 슘페터의 주요 명제가 GHS(독일역사학파)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슘페터의 GHS에 대한 친화성은 그의 글과 Schmoller, Max Weber 그리고 Sombart와의 관계를 조사함으로써 확립된다. 슘페터의 저작들이 GHS에 크게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슘페터와 GHS 사이에 몇 가지 분명한 차이가 관찰된다. 분명 미래와 GHS에 대한 더 확장된 연구가 큰 관심사가 될 것이다.     


     


1. 서론


의심할 여지 없이, Joseph Alois Schumpeter는 '역대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들 중 한 명'(Haberler, 1950, p. 1)이었다. 그는 경제학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20세기에 경제학의 발전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작품의 몇몇 중요한 측면들은 덜 널리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역사학파(GHS)와 슘페터의 친화성은 최근 수십 년 동안 몇 가지 중요한 공헌(예를 들어, Swedberg (1989), Streissler (1994), Shionoya (1997, 2005), Ebner (2000), Hodgson (2001, 2003), Becker and Knudsen (2002) and Kesting (2006))을 제외하고 부적절하게 인정받거나 심지어 미개척되었다. GHS의 연구에 슘페터의 비전의 중심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현란한 경제학자의 지적 원천으로서 GHS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비엔나의 질풍노도의 경제이론인 슘페터에 대한 GHS의 잠재적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 큰 관심을 끄는 한 가지 주요 이유가 있다. 슘페터가 '역대 가장 중요하고 지속적으로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들'(Hodgson, 2007A, p. 1)에 속하고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감안할 때, GHS가 그에게 미치는 잠재적 영향은 슘페터의 경제 저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이다. 분명히, 슘페터적 경제학에서 이러한 중요한 생각의 기원을 이해하고 슘페터의 연구를 형성한 영향을 재평가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경제 사상 학파들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고 진화적 접근에서 몇 가지 이슈를 명확히 하는 데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이 틀에서, 본 논문은 슘페터와 GHS의 주요 세 인물인 좀바르트, 막스 베버 및 슈몰러 사이의 개념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알려진 바와 같이, 슘페터의 저서는 경제 발전의 역학(경제발전의 이론, 1912 경기순환론, 1939), 자본주의의 실현가능성에 관한 경제, 사회학적, 정치적 관점의 통합(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1942)  경제사상의 역사(경제분석의 역사, 1954) 포함한 매우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논문은 슘페터의 방대한 작품  특정 부분을 좀바르트, 막스 베버, 슈몰러  GHS 몇몇 저명한 회원들의 글과 연계해 해석을 시도하고, 슘페터 자신의 시각(looking glass) 통해 그것들을 다룬다. 따라서 슘페터의 연구에 대한 특정한 중요한 아이디어는 GHS 대한 그의 관계의 '핵심 요소' 확인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GHS 그의 관계의 '핵심 요소' 경제 동학, 경제 정학  경제 사회학으로 주로 구성된 보편사회과학(Universalsozialwissenschaft) 대한 슘페터의(1926B, 365) 믿음이다. 그의 보편사회과학의 개념에서, 분리된 학문들 사이의 전통적인 분리 선은 사라졌다(Shionoya, 2005). 물론, 이것은 실체적인(substantive) 이론 체계를 형성했는데, 그렇지만, 그것은 방법론 체계와는 구별되고, 따라서 슘페터적 시스템의  절반을 구성했다: Shionoya (1997, p. 265) 따르면,   넓은 체계는 정신(the mind) 사회에 대한 ' 가지 구조적 접근법'이었다.      


우리의 시도는 이론적이고 방법론적 관점에서 좀바르트, 막스 베버 및 슈몰러의 저서에 초점을 맞추어 슘페터에 대한 GHS의 영향에 대한 개요를 제공하고자 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본 논문에서 슘페터와 GHS 사이의 연결은 (좀바르트와 베버에 관한 장에서와 같이) 때로는 주로 실체적이고 (슈몰러에 관한 장에서와 같이) 때로는 슈몰러 프로그램에 초점이 맞춰지면, 주로 성격상 방법론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슘페터가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견해를 좀바르트와 공유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본주의 기업을 이끄는   기술의 역할과 관련하여 강한 유사성을 발견할  있다.  논문은 한편으로는 ‘기업가 역할과 ‘순환 흐름,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자본주의의 정신 각각 강조하는 슘페터와 베버의 중심 비전을 비교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아이디어는 슈몰러의 역사 윤리적 접근에 대한 슘페터의 해석이다. 슘페터의 발전 개념은 이론적  역사적 관심사를 통합하는 슈몰러적 이론적 접근의 맥락에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세 명의 이론가들만이 이 위대한 오스트리아 사상가에게 영향을 준 역사학파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Schaeffle(1831–1903)과 같은  역사학파의 다른 중요한 경제학자들과 회원들은 슘페터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see Balabkins, 2003; Borchardt,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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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페터* 일부 저자들(예: Loring, 1991, p. 104)은 '[슘페터의] 기업가는 독일 역사학파의 경제학자인 Schaeffle를 비롯한 다른 사회과학자들의 기업가와는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슘페터의 혁신 이론에 대한 Schaeffle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는 없다. 슘페터의 사상을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Schaeffle의 연구는 주로 경제 영역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을 보여주었다 (Schumpeter, 1954, p. 788). 하지만, 슘페터(1954, p. 788)에 따르면, Schaeffle의 경제학에서의 주요 저작인 사회구성체의 구조와 삶(Bau und Leben des Soziale Korrpers)은 ’사회적 실체에서 신경과 소화기관을 발견하려는 저자의 시도에 의해‘ 부분적으로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사 중인 동시기의 독일 경제학자들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속에 처음 떠오르는 그의 '학술 지도자의 이름'의 목록에 Schaeffle을 넣지 않으면서 '경제 분석은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은 슘페터 그 자신이었는데(Schumpeter, 1954, p. 850), 아마도 Schaeffle의 업적과 Schaeffle의 혁신 이론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빚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슘페터가 Schaeffle에 대해 쓴 글(Schumpeter, 1954)과 상관없이, Balabkins (2003, p. 216)의 'Schaeffle은 슘페터의 혁신자에 대한 증가하는 문헌의 각주이다.‘에 우리는 동의한다. Hodgson(2003)을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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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제2장에서는 GHS에 대한 간략한 개요를 제공하고, 제3장에서는 좀바르트가 슘페터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고, 제4장에서는 맥스 베버의 연구가 슘페터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며, 제5장에서는 슈몰러의 프로그램과 슘페터의 연구 의제에 미치는 영향을 제시한다. 제6장에서는 결론짓는다.           



2. 독일 역사 학파: 간략한 개요

     

GHS는 19세기 후반에 독일에서 형성되었고 고전 정치경제학파와 마르크스 경제학파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나치 시기와 제2차 세계 대전의 참화 때까지 지속되었고 여러 단계의 발전을 거쳤다.     

이 학파는 한편으로는 독일의 경제적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Friedrich List’s (1856)의 사상에도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전자에서 추상적인 이론적 분석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후자에서 역사적 연구에 기초한 경제 연구의 방법을, 양자로부터 개인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고전적 견해에 대한 반대의 영향을 받았다.     


이 역사학파는 보통 '구', '신', '막내'로 구분된다. '구' 역사 학파에는 주로 Bruno Hildebrand (1812–78), Wilhelm Roscher(1817–94) 및 Karl Knies(1821–98)의 세 명의 작가가 있다. '신' 역사학파의 주요 인물은 Gustav von Schmoller(1838–1917)이고, 또 다른 중요한 저자는 Lujo Brentano(1844–1931)이다. 슈몰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때까지 경제 역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과학적 경제 이론이 이미 존재했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경제 분석 방법에 대한 '신' 역사학파의 견해는 오스트리아 경제 학파의 주요 대표자 중 한 명인 Carl Menger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식으로, 슈몰러와 멩거 사이의 논쟁은 사실상 지난 세기의 새벽까지 지속된 유명한 방법의 전투(방법논쟁Methodenstreit)를 연다.* Arthur Spiethoff(1873–1957), Werner Sombart(1863–1941) 및 Max Weber (1864–1920)는 '막내' 역사 학파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다. 그들의 선배들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반적으로 슈몰러가 공식화한 몇몇 원칙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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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dgson(2001)에 따르면, GHS는 적어도 초기 몇 년 동안 보다 일반적인 원칙을 희생시키면서 수집된 경험적 사실에 너무 많은 중점을 두는 실수를 범한 반면, Carl Menger는 경험적 사실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법논쟁은 '한 분야로서의 경제학의 합법적인 경계에 관한 것이기도 했다' (Hodgson, 2007A, p. 3)고 주장한 Hodgson(2001, p. 79n)을 참조하시오. Rieter(1994)도 참조하시오. 양 진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비평은 Bukharin(1919)을 참조하시오.

** Spiethoff, Sombart 및 Weber는 Schmoller에 의해 공식화된 몇몇 원리에만 충실했다. 사실 좀바르트와 특히 베버는 소위 Werturteilsstreit라고 불리는 '방법에 대한 두 번째 전투'를 시작했다. 즉, 경제학자들이나 다른 사회과학자들이 규범적 또는 가치 판단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이는 슈몰러와 GHS의 윤리적 접근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사회정책협회에서는 1909년부터 계속해서 큰 논란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미해결 상태였다 (추가 Schumpeter, 1954, p. 804–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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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S는 영국의 경쟁 하에서 고통을 겪었던 덜 발전된 독일의 요구를 표현하면서 고전파의 '사해동포주의'와는 반대로 독일의 국가적인 특색을 지지해야만 했다. 그 결과, 분석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과 '국가적으로 구체적인'의 명확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결과적으로, 사회생활의 역사적 진화는 분리할 수 없는 전체로 생각되는 반면, 추상적인 분석 방법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서, GHS는 다른 사회-경제적 현상이 부분적으로는 상호 서로 다른 이론들을 필요로 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였다 (Hodgson, 2001).     

역사학파의 주요 특징은 (i) 역사적 분석 방법에 대한 강조, (ii)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은 역사적 논문과 통계적 조사에서 도출된 ‘경험적 법칙’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도출된 경제법칙의 거부, (iii) 경제학과 다른 모든 사회과학 사이의 합병의 필요성 등이었다 (Economakis and Milios, 2001).   

  

GHS는 사회 구조의 형성에 '진화적' 접근 방식을 적용했다. GHS의 경제학자들은 경제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중요성에 집중했다. 따라서 그들은 제도를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춰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를 수행했다. 이런 식으로, GHS는 경제 현상 뒤의 모든 힘을 연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슘페터와 좀바르트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불안정>(1928 [1971])을 출판했을 때, 그는 본 대학의 교수였다. 불과 1년 전에, 자본주의가 침체기에 접어들었다고 믿었던 또 다른 저명한 경제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는 그의 Der Moderne Capitalismus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높은 자본주의'의 시대를 다루었고 후기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이론을 제시했다.    

 

좀바르트와 슘페터의 유사점은 학문적인 의미에서만 많은 것이 아니다. 조지프 슘페터와 마찬가지로 베르너 좀바르트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경제를 공부했고 유럽의 여러 대학을 방문했다. 1888년, 그는 Gustav von Schmoller의 지도 아래 슘페터가 비엔나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18년 전에 베를린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슘페터와 마찬가지로 변호사로서 경력을 시작했고, Breslau 대학의 하위 교수직을 가지고 학계로 옮겨갔다. 좀바르트는 당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특정 해석에 정통해 Friedrich Engels가 <자본론>을 이해한 유일한 독일인 교수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것은 그의 성인 생활의 대부분 동안 보수 정치를 마르크시즘에 대한 찬사와 결합했던 슘페터와 유사하다 (Rieß, 19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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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경제학자 좀바르트와 슘페터는 칼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해 공통의 비판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두 사람 모두 한편으로는 사회 개혁에 공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귀족적이었다 (Chaloupek, 1995, p. 128). 자본축적과 기술적 진보의 역할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의제는 좀바르트와 슘페터 모두에게 중요한 도전이었다. 이것은 두 위대한 이론가들 사이의 경쟁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슘페터와 좀바르트의 관계는 적대감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데, 특히 좀바르트의 입장에서 그렇다. 예를 들어, 슘페터가 1931-32년에 베를린 대학에서 공석의 교수직 중 하나를 차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사람은 좀바르트였다 (Stolper, 1994). 또한 좀바르트는 아마도 막스 베버의 성공에 대해 걱정했을 것이고 자본주의 발전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역할에 대한 베버의 강조에 대한 대안을 항상 찾고 있었다. 사실, 좀바르트의 책 Die Juden und Das Wirtschaftsleben (1911)은 개신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막스 베버의 연구에 대한 부록으로 여겨질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좀바르트가 경제 발전에 대한 그의 분석의 핵심에 유대인들을 넣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주석에 대해 익명의 심사자(referee)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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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좀바르트의 대작인 Der Moderne Kapitalismus가 등장했다. 1904년 Edgar Jaffe´, Werner Sombart 및 Max Weber는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의 편집자가 되었다.* 1917년, 좀바르트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940년 당시 슘페터가 하버드 대학에서 가르쳤던 시기까지 가르쳤다. 좀바르트는 평생에 걸쳐 방법논쟁(Methodenstreit)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고 이론적 탐구와 경험적 탐구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Hodgson, 2001). 1930년 이후에, 거칠게 얘기해서, 좀바르트는 정치적 우파(예: Harris, 1942, p. 807 참조)로 이동했다고 하며, 나치즘과 반유대주의와 그의 관계는 오늘날에도 심하게 논의되고 있다 (see Brocke, 1987, 1996; Reheis,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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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Emil Lederer는 편집장이 되었고, 조지프 슘페터와 Alfred Weber(Max Weber의 동생)는 부편집장이 되었다. 슘페터가 좀바르트와 막스 베버(1922년 이미 사망)와 함께 이 저널을 편집한 적이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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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에서 슘페터와 좀바르트 사이의 연결은 본질적으로 주로 실체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슘페터의 경제사상은 생산의 '자동화'에 의해 창출되는,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에 관한 특정 개념을 좀바르트에게 빚지고 있는데, 이는 좀바르트 자신이 현대 기업의 Versachlichung(물화) 또는 Vergeistung(영적 물화) 개념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대기업의 Vergeistung(영적 물화)에 대한 좀바르트의 개념은 슘페터적 '자동화'의 영향과 일치한다. 분석적으로, 서로 다른 기업들 간의 관계의 진화에 관해서, 좀바르트는 두 가지 추세를 보았다. (Chaloupek, 1995, p. 135n). (i) 상품과 서비스의 생산에서 전문화의 증가와 (ii) 증가하는 규모의 기업에서의 생산 집중의 증가가 그것이다. 좀바르트는 Entseelung(무생물화)과 Vergeistung(영적 물화)의 과정을 보았는데, 그는 이것을 자본주의의 결과로 간주했다: '합리화는 개별 동물 영혼이 추상적 개념으로 대체되는 물화와 맞물린다.' 자본주의의 진화는 단지 특별한 경우일 뿐인데, 그것은 '개인적 관계에 의해 서로 결속된 활기찬 개인들의 공동체에서 인간의 형태로 기능자들에 의해 실행되는 교묘하게 설계된 상호의존적인 업무 수행의 체계'로 변화되었다 (Sombart, 1927, p. 895, also cited in Chaloupek, 1995, p. 135). 자본주의 기업은 (i) 행정, (ii) 회계 및 (iii) '도구적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생산(Sombart, 1927, p. 901n)의 세 가지 시스템으로 구성되었다.     


결과적으로, 좀바르트에게 있어,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전형적인 원동력이었던 기업가의 성격과 기능에 의해 표현된 리더십(see Prisching, 1996)은 관료 기구에 의해 대체되었다. 이런 식으로 (Chaloupek, 1995) 관료화는 경제 변동의 감소로 이어지는 방법의 증가하는 완성도와 함께 맞물려 진행되었다 (Sombart, 1927, p.680n). 이윤을 위한 생산은 인구를 위한 생산으로 바뀌었다(Sombart, 1927, p. 1015). 국가가 철도를 운영하는 사례가 예로 제시되었다. 이런 식으로 공동체는 통제 영역을 확장하고 자유 기업은 반-공기업으로 대체된다 (Sombart, 1925, p. 26).     


좀바르트 (1927, p. 1012n)는 민족주의 국가와 전-자본주의, 자본주의 및 메타 자본주의 요소가 공존했던 혼합 경제와의 통합을 기대했다 (Chaloupek, 1995, p. 140). 그는 또한 어떤 종류의 중앙 계획을 예상했다 (Sombart, 1927, p. 1012n).*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그의 주장은 주로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Sombart, 1908, p. 79ff)과 그들의 약속을 이행할 수 없는 그들의 무능에 관한 것이었다 (Sombart, 1924, p. 255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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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인류와 문화의 미래 밀도를 위해 경제가 자본주의 틀에 따라 형성되든 또는 사회주의 틀에 따라 형성되든 거의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동일할 것이라는 점이다. 두 경우 모두 경제 전반은 Vergeistung(영적 물화)에 기초할 것이다 (Sombart, 1927, p. 1016, also cited in Chaloupek, 1995, p.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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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바르트(1932)는 소비에트형 경제가 큰 산업 단위에서의 생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러한 중앙 계획된 사회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시장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Sombart, 1924, p. 6) 사회주의에 대한 정의는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원리의 정신'에 기초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 원리의 정신이 관련 기준을 형성한다 (Chaloupek, 1995, p. 140).   

  

비슷한 맥락에서 슘페터는 '진보 그 자체는 정태적 경제의 관리뿐만 아니라 기계화될 수도 있고, 이러한 진보의 기계화는 기업가 정신과 자본주의 사회에 거의 경제적 진보의 중단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Schumpeter, 1942, p. 131). 그는 전통적으로 개인에 의해 실행되었던 경제 과정의 기능들이 기업가적인 관료주의에 의해 인수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기대했다 (Chaloupek, 1995, p. 134; Michaelides and Milios, 2005):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과거보다 훨씬 쉬워졌는데, 혁신 자체가 일상으로 전락하였다. 기술적 진보는 점점 더 필요한 것을 찾아내고 예측 가능한 방법으로 그것을 작동시키는 훈련된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의 사업이 되고 있다... 따라서, 경제적 진보는 이인화되고(depersonalized) 자동화되는 경향이 있다. (Schumpeter, 1942, p. 132n)     


훨씬 더 강력하게, 그는 주장했다. '경제적 과정은 그 자체와 인간의 영혼을 사회화하는 경향이 있다' (Schumpeter, 1942, p. 219). 일반적으로 말해서, 슘페터는 '자본주의적 과정의 산물이긴 하지만 현대 기업은 ...마음을 사회화한다'고 주장했다 (Schumpeter, 1942, p. 156). . 그는 '경제생활의 관료화'가 대규모 기업에 의해 그리고 그 내부에서 자극을 받아 (Schumpeter, 1942, p. 206) '사회주의 사회에서만 재현될 수 있는‘ 관리적 책임의 새로운 방식을 확립함으로써 '관료화 기구'로의 이행을 허용했다고 주장했다 (Schumpeter, 1942, pp. 206–7).    

 

기술의 개념에 대해서도 두 사회이론가의 견해가 일치했다. 좀바르트와 슘페터 둘다에게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제 생활의 합리화의 과정이었다. 사실, 좀바르트는 혁신이 경제 시스템의 근본적인 추진력이라는 슘페터의 견해를 공유했다. 그는 썼다. 자본주의는 '혁신에 대한 열광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기반을 둔 새로운 기업의 설립에 의한 경쟁자들의 제거를 통하여 또는, 주로 새롭고 더 수익성이 높은 과정을 도입함을 통하여, 자본주의는 그것의 가장 속깊은 욕망, 초과이윤을 얻으려는 욕망을 억누른다.' (Sombart, 1927, p. 87, also cited in Chaloupek, 1995, p. 136).   

  

1909년 발표된 좀바르트의 의제에 기반하여, 슘페터는 더 확장하여 새로운 상품의 도입뿐만 아니라 공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기술적 진보의 보다 완전한 그림을 제공하였다. 그는 실질 경제 성장과 발전은 5가지 사례를 포괄하는 개념인 '혁신'에 기반한 생산성 향상에 주로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이러한 변화를 특징짓기 위해 '기술적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Scherer, 1992, p. 1417), 이는 경제 발전의 대부분을 설명하였다. 그는 이 과정과 인구와 자본의 점진적인 증가로 인한 성장을 분명히 구분했다 (Schumpeter, 1942, p. 65). 결론적으로, 슘페터와 좀바르트라는 두 위대한 이론가들 사이에는 자본주의가 생산의 기계화로 초래된 대기업의 관료화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다.    

 

슘페터는 좀바르트의 책을 경제학의 주요 업적으로 인정했다 (Schumpeter, 1927, p. 199). 슘페터는 심지어 자신이 '좀바르트와 Edgeworth의 결합'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시인하기도 했다 (Schumpeter, 1927, p. 214). 슘페터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채우려고 시도한 것은 이 간격이었고, 이는 '좀바르트에 의해 크게 영감을 받은' 것이다 (Chaloupek, 1995, p.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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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발전의 이론>의 제2판에서, 슘페터는 좀바르트의 설명을 "오늘날 야망이 투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목표"라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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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dgson (2006A, p. 110)에 따르면, Schumpeter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좀바르트였고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를 원래 만든 사람조차 좀바르트였다 (1913, p. 207).* Appel의 견해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의 슘페터의 관점은 거의 '전적으로' 좀바르트의 저술에서 취한 것이라고 훨씬 더 강력하게 주장한다 (Appel, 1992, p.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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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적 파괴'로서의 슘페터의 <경제 발전의 이론>의 기원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은 Prendergast(2006)를 참조하시오.

** ‘좀바르트에 대한 언급 없이...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독일 문헌에서 수십 년 전에 이미 쓰여지고 말하여졌던 것을 단지 제시했으며, 좀바르트의 기본 경제이론으로부터 너무나 거리를 두었던 슘페터가 자본주의의 발달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와 견해를 거의 완전하게 이어받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Appel, 1992, p. 260n). p.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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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의 분석을 몇 가지 현저한 유사점들로 한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두 위대한 이론가들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들을 언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일상생활의 개선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보'를 구성하는지 여부에 관해 그의 일생 동안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좀바르트와는 반대로, 슘페터는 상당한 정도로 자본주의 발전이 가져온 '진보'의 신봉자이었다 (Chaloupek, 1995, p. 140).     


이 상황과 관련하여 좀바르트와 슘페터 사이의 불일치가 있다. 좀바르트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가 팽창력을 잃고 침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반대로,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그것의 본래의 팽창력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운 경제 성장의 시기를 만들어 내면서 경제 구조를 내부에서부터 혁명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중단없이 낡은 것을 파괴하고, 중단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Schumpeter, 1942, pp. 82–3)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창조적 파괴'의 과정은 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사실이다 (Schumpeter, 1942, pp. 82–3). 그러므로,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성공의 결과로 자본주의의 종말에 대한 그의 이론을 제시했는데, 자본주의 성공의 결과는 자본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비경제적 요인을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요인들은 자본주의의 경제적 성과를 악화시킨다(Shionoya, 2005, p. 53).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좀바르트의 주장처럼 그것의 실패와 침체가 아니라 사실상 그것의 성공으로 운명지어졌다 (Chaloupek, 1995).  이러한 맥락에서, '창조적 파괴'의 과정과 관련된 경제 확장은 비경제적 요인이 결국 그것의 성과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삶의 개선(즉, '진보')을 이끌었다. 초기에 슘페터와 가까웠던 좀바르트는 나중에 경제적 '진보'를 거부하게 되었다.     

 

또한 슘페터는 좀바르트의 저작들에서 이론적 엄격함의 결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슘페터는 '순수' 이론을 경제 현상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위한 가장 중요한 분석 도구로 고려했다고 알려져 있다. 슘페터는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듯 보였는데 (see Shionoya, 1990, p. 202), 이는 사회에 대한 원자론적 관점을 전체론적인 관점보다 우선시한다. 한편, 좀바르트는 사회생활의 현실과 그것의 발달에 의해 형성된 정신의 개념에 초점을 맞췄다 (Chaloupek, 1995, p. 141).     


결론적으로, 우리는 사용 가능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고 각각의 의제에 있어서 심오한 유사점 - 그리고, 약간의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 좀바르트가 슘페터의 20년 선배였다는 사실과 그의 모든 중요한 저작을 슘페터에 앞서 발표했다는 사실은 좀바르트가 위대한 오스트리아의 이론가 슘페터에 영향을 미쳤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사실을 인정할 만큼 진실했던 사람은 바로 슘페터 자신이다 (Schumpeter, 1927, p.214).



4. 슘페터와 베버     


이 장의 목적은 그들의 중심 비전과 관련하여 슘페터의 견해를 GHS의 또 다른 저명한 회원인 막스 베버의 견해와 비교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논문에서 슘페터와 막스 베버 사이의 연관성은 본질적으로 주로 실체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막스 베버(1864–1920)는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나중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과 사회학 교수가 되기 전에 많은 학술적인 작품들을 출판했다. 그의 저작들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서고(Archiv fu¨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Weber, 1904, 1905)에서 두 개의 논문으로 출판되었다. 그 당시 슘페터는 비엔나에서 학생이었고 오스트리아와 독일 진영은 방법논쟁(Methodenstreit) 때문에 긴장했다. 연대기적으로, 그것은 슘페터의 생애에서 그가 자신만의 이론 체계를 형성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Faltello and Jovanovic, 1996; Habler, 1950; Smithies, 1951).   

 

베버는 마르크스의 견해를 공격했는데 (MacDonald, 1965, p. 375), 마르크스에 따르면 새로운 기법으로 무장하고 합리성에 의해 움직이는 자본가가 오래된 전통적인 방법을 휩쓸고 특정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된 인과관계로부터 파생된 그 자신의 Geist(정신)를 사회에 부과했다  (Weber, 1904, p. 27–9). 베버에게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현실적인 그림이 아니었다 (MacDonald, 1965, p. 375). 그는 19세기 중반까지 현대 산업은 생활이 매우 편안하다고 여겨졌던 투자자를 대체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다음과 같은 일상적 순환(routine)을 상상할 수 있다.


농부들은 그들의 천을 가지고... 도시로 왔다. 그 도시에 그 투자자의, 어느 정도 떨어진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고객들은 중간상들이었다. 그들 또한 그에게 왔다... 전통적인 품질을 찾아, 그의 창고에서 구입하거나 또는... 주문을 넣었는데, 그것은 차례로 농부들에게 넘어갔다... 비즈니스 시간의 양은 적당했다; 훌륭한 삶을 살 수 있고, 좋은 때에 조금은 저축할 만큼. 전반적으로, 경쟁사들 간의 관계는 비교적 좋았고, 비즈니스의 기반에 대한 많은 수준의 동의가 있었다. 종종 마실 것이 많이 가지고,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매일의 긴 주막 방문으로, 삶은 편안하고 여유롭게 되었다 (Weber, 1930, 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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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역할에 관한 막스 베버의 분석 역시 칼 마르크스와 그의 사회경제적 토대에 대한 강조에 또한 반대 방향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단지 그 이론의 기계적 버전에 대해서만 비판한 것이다. 즉 그러한 기계적 버전은 자본의 다양한 형태 및/또는 비경제적, 엄격한 의미에서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요소의 영향을 무시하였고 자본주의를 (고도의) 산업과 동일시했다. 다양한 형태의 자본에 관해 레닌이 1893~1900년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이 특징적이다. '구매자(투자자)를 위해 일하는 것이 단지 어떤 남용, 어떤 우연, 어떤 "교환 과정의 자본화"의 결과일 뿐 생산의 결과가 아니라는 의견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반대가 사실이었다. 산업 형태의 과학적 분류에서 그 산업형태들의 연속적인 발전에서 구매자를 위한 노동은 상당한 정도로 자본주의적 제조에 속한다. 구매자를 위한 노동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의 역행하는 형태이며,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역행성은 다수의 중개자(착취 체제)에 의해 이용당하고 분열되고, 최저 임금에 만족하고 가장 비위생적인 조건과 극도로 긴 시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에 대한 대중의 통제를 극도로 어렵게 만드는 조건에서 일하지 않을 수 없다'(Lenin 1893–1900, Vol. II, pp. 434–5, 강조 추가). Rubin(1929)은 또한 특정 사회적(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상황에서 '제조공장은 상당한 규모의 국내 체제를 축출하거나 대체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Rubin, 1929 [1989], p.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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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는 자본, 기업가적 활동 및 생산의 합리적인 통제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적 조직 형태를 보았다 (MacDonald, 1965). 그러나 그는 또한 자본주의가 전통적인 요소를 재현했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인 삶의 방식, 전통적인 이윤율, 전통적인 일의 양, 노동과의 관계를 규제하는 전통적인 방식, 그리고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고객 집단과 새로운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방식'(Weber, 1930, p. 67).    

 

이 구절에서 우리는 순환 흐름을 특징짓는 일상(routine)과 혁신 사이의 충돌에 대한 슘페터의 아이디어의 대부분의 기본 요소를 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일정한 비율로 자신을 재생산하는 경제적 과정을 시각화   있다; 인구수 나이 분포에서 변하지 않는, 주어진 인구... 가구의 취향(필요) 주어지고 변하지 않는다. 생산과 상업의 사용 방법은 기업의 이익의 관점에서, 그리고 기존의 지평과 가능성과 관련하여 최적이며, 따라서 일부 여건이 변경되거나 일부 우연한 사건이  세상에 침입하지 않는  어느 쪽도 변경하지 않는다.    

 

이 정태적인 사회에서는 평범한 일상적인 일만이 직공이나 관리자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사실, 이 밖에 관리상의 기능은 없다. 우리가 기업가들과 연관시키는 특별한 유형의 활동을 요구하는 것은 없다... 이러한 과정은 매년 소비자 상품과 생산자 상품의 종류, 품질, 수량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기업은 동일한 종류와 수량의 생산적인 재화와 용역을 고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들 모든 재화는 매년 같은 가격에 가져와 팔릴 것이다. (Schumpeter, 1939, pp. 40–1)     


슘페터는 변화의 어떤 요소도 부재하고 정지성이 경제 현실의 규칙인 정지된 자본주의 세계를 묘사했다. 저자는 행동의 기계적인 반복은 인간의 축적된 경험에 기초한다고 말했다(Schumpeter, 1934, p. 84–5). 이 정지된 상황은 완전 경쟁, 돈이 지불 수단으로 작용하고 순저축(또는 신용)이 존재하지 않는 균형 상황에 대한 완전한 조정으로 특징지어졌다. 경제 계층에서의 어떠한 변화도 붕괴되지 않았다(?). 기업가들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수입은 이미 생산된 소비재에 지급되었다. 모든 공급은 단가를 충당하는 가격 수준에서 자체 수요에 의해 상쇄되었다. 경제 현상을 악화시키지 않고는 돈이 없을 수도 있다. 분명히, 경제 계층은 압력에 의해서만 변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그림을 선보인 후, 베버는 계속해서 일상적인 평온함에 침입한 '새로운' 사업가를 소개했다:      

이제 이 여가는 어느 순간 갑자기 파괴되었고, 종종 통일 공장으로의 전환, 기계 직조 등의 조직 형태의 본질적인 변화 없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 . . 가출한 집안의 어떤 청년이 시골로 나가 자기 일을 할 베 짜는 사람을 신중히 선택하고 그들의 일에 대한 감독의 엄격함을 크게 높여 그들을 농민에서 노동자로 만들었다. 한편 그는 마케팅 방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 . 동시에 그는 낮은 가격과 큰 회전율의 원칙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합리화 과정의 결과는 어디에서나 항상 반복되었다. 즉, 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사업을 그만둬야 했다. 치열한 경쟁의 압력으로 목가적인 국가가 무너지고, 상당한 재산을 얻었고, 이자를 빌려주지 않고 항상 사업에 재투자했다. .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 . . 새로운 정신, 현대 자본주의 정신 . . . 현장에 그의 진입은 일반적으로 평화롭지 않았다. 불신, 때로는 증오, 무엇보다도 도덕적 분노의 홍수가 정기적으로 첫 번째 혁신가에 반대했다. (Weber, 1930, p. 68)     


자본주의의 이러한 측면은 슘페터의 분석 중심, 즉 순환 흐름의 교란이 되었다.(Schumpeter, 1942, pp. 82–3).     


베버와 마찬가지로 슘페터는 모든 사회경제적 현상이 끝났다고 믿었고 사회가 새로운 것을 흡수하도록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MacDonald, 1965).. 이러한 맥락에서, 혁신적 기업가들은 더 높은 이윤을 내기 시작했고 '유혹적 이윤의 충동'에 따라 새로운 사업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전복을 통해 자본주의는 역동적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경제 변화의 형태나 방법이며 결코 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정적일 수 없다.' 경제 구조를 내부로부터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끊임없이 낡은 것을 파괴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창조적 파괴"의 이 과정은 자본주의에 대한 필수적인 사실이다(Schumpeter, 1942, pp. 82-3).     


그러나 슘페터는 '새로운' 요소의 도입은 궁극적으로 경제 환경을 침체로 몰고 가는 '파괴적인' 사고방식을 동반한다고 말함으로써  변화하는 기업가적 사고방식의 아이디어, ‘최근, 자본주의의 독점적 단계 대한 Hilferding 분석과 가깝게 관련되는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켰다 (Michaelides and Milios, 2005). 페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주의 과정은 결국 자본가 계급이 살아가는 기능의 중요성을 감소시킨다. 그것은 보호 계층을 닳게 하고, 그 자신의 방어를 무너뜨리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는 많은 다른 제도들의 도덕적 권위를 파괴한 후, 결국에 그 자신에 역행하는 비판적 사고방식을 만들어낸다. 부르주아는 합리주의적인 태도가 왕과 교황의 신분에 그치지 않고 사유 재산과 전체 부르주아 가치의 체계를 공격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Schumpeter, 1942, p. 143)     


이런 식으로, 자본가 생애-주기는 분위기가 변했기 때문에 끝이 났다. 그러므로, 지도자의 특성은 관료화된 시스템을 선호하기 위해 훼손되고 있었다. 한편, 혁신은 일상화되었고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 계급은 끊임없이 자존감을 잃었다.   

   

분명히, 자본주의 동적 변화에 대한 숨페터의 시각은 베버의 이론적 스키마와 몇 가지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의지, 에너지, 그리고 그 낡은 기업을 넘어 그의 성공의 길을 닦은 아이디어로 무장하여 순환의 흐름에 뛰어든 역동적인 사업가는 베버와 슘페터 모두 가장 좋아하는 주제였다.   

  

다음의 내용에서, 우리는  이론가의 연구에서  가지  유사한 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MacDonald, 1965). 첫째,  이론 모두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용한 '명제-반명제' 이론적 구성에 바탕을  것으로 보인다. 베버에게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의해 추종되는 자본주의 사업 유형은 가톨릭 윤리에 의해 지배되는 '전통주의' 사업에 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슘페터는 그의 이론을 '3쌍의 상응하는 대립으로 특징지어진다' 여겼다. , 순환 흐름과 발전하는 경제, '정학과 동학', 기업가  단순한 관리자가 그것들이다 (Carlin, 1956; Michaelides and Milios, 2005).


둘째, ‘혁신가는 남다른 의지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고, 자본이 없는 사람이다. 숙고하는 개인들은 이것에 무엇을 기여했는가? 오직 의지와 실천만이 있을 뿐이다’ (Schumpeter, 1939, p. 132). 베버 혁신가의 '비상 강한 성격' '비전의 명확성과 행동 능력'(Weber, 1930, p. 69) '의사 결정 역량' '강력하게 평가할 비전'(Schumpeter, 1955, p. 121) 대한 페터의 강조와 일치했다.     


마지막으로,  이론가 모두 기업가적 행동과 자본 축적의 원동력으로서 쾌락주의를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MacDonald, 1965, p. 380). 19세기에, 특히 '한계 혁명' 이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기업가를 끝없는 탐욕에 의해 동기부여된 것으로 보았다 (e.g.Veblen,1898,p.389). 그러나 베버는 '그 대신에 인간이 사업을 위해 존재하는 정반대의 경우'(Weber, 1930, p. 70), 사명감의 영향에서 비롯된 태도의 경우를 보았다. 슘페터에게도 역시 '[기업가의] 행동과 그의 동기는 어떤 다른 의미에서도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도 그의 성격적 동기는 쾌락주의 종류가 아니다... 전형적인 기업가들은 그들의 힘이 소진되고  이상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느낄 때에만 그리고  때문에 경기장을 은퇴한다.' (Schumpeter, 1939, p. 92).   

  

또한, '사적인 왕국을 세우려는 꿈과 의지', '정복의 의지', '창조의 기쁨' 등이 있었는데, 이는 '쾌락주의자가 아닌 성격의 또 다른 심리학'을 가리키고 있다. (Schumpeter, 1939, p. 93) 이 주제는 종교적 동기가 고갈된 후에, 다른 동기가 나타났다고 기록한 베버의 분석과 일치한다. (Weber, 1930, p. 71). 베버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의 최고 발전의 분야에서, 미국에서 부의 추구는 순전히 평범한 열정과 연관되는 경향이 있다.' (Weber, 1930, p. 182). 슘페터의 '꿈과... 사적인 왕국을 건설하려는 의지‘를 언급하는 한 주제이다. (Schumpeter, 1939, p. 93)       


베버가 기업가를 '혁신가'라고 언급했고(Weber, 1904)  기술된 혁신이 발명의 특별한 요소의 부재조차 슘페터의 정의에 적합하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베버는 '비상의 강한 성격' '높게 발달된 윤리적 자질' 중점을 두었다.     


요약하자면, 베버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와 경제 발전으로의 전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적인 경제적 동기가 필요했고,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이 목표를 달성했다. 비슷하게, 슘페터는 수행된 다른 경제 행위들의 심리적, 윤리적 동학을 강조했다. 자본가들은 일상적으로 행동했고, 반면에 혁신가들은 자본주의 발전을 설명하는 상황인 그 일상을 스스로 바꾸려고 주도했다.  


물론, 베버와 슘페터 사이의 몇 가지 분명한 차이점들이 관찰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베버는 혁신가에게서 개신교의 '이념형'을 본 반면, 슘페터는 창조적인 기업가를 보았다.  

   

두 위대한 이론가의 연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변화의 동학과 관련이 있다. 분석적으로, 한편으로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이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금욕주의를 소개했고 그들의 추종자들은 집중력과 합리주의로 자본가의 경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베버의 변화의 모델은 '계속적'이었다 (MacDonald, 1965). 반면에 슘페터에게는 혁신가들이 다소 자발적으로 출현하여 기술적 변화와 경제적 발전의 물결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 그림은 '불연속적'이었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방법에 완전히 적응한 경제를 지칭하는 혁신은 '전통주의'의 새로운 시대가 그러나 더 높은 산출물의 수준으로 도래함에 따라 그 경제를 더 높은 수준에서 다시 채택하도록 강요했다 (MacDonald, 1965). 이것은 자본주의가 불연속적인 단계로 나아가는 동적인 특성을 슘페터의 접근법에 부여했다 (Usher, 1951)           



5. 페터와 슈몰러


현대 경제 분석은 경제에 대한 역사적, 윤리적, 제도적 접근을 모색하고 다학제적 접근법으로의 통합에 관심을 기울였던 GHS의 '비범한 인물'(Shionoya, 2005, introduction) Gustav von Schmoller의 연구들을 무시해 왔다 (Ebner, 2000, pp. 356-7). 세계 2차 대전 이후 많은 경제학자들은 슈몰러를 '죽은 개'로 여겼고 (Kempski, 1964, p. 200), '슈몰러는 영원히 비난 받고 거세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Recktenwald, 1965, p. 342).     


그러나 슘페터 슈몰러 이론적 연구 프로그램을 Schmoller programm (Schumpeter, 1954, ch. 4)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따라서 그것은 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처럼 보인다.  당시 경제학에서 역사적, 윤리적, 제도적 가르침에 의미와 방향을  사람은 슈몰러이다.  결과적으로, 슘페터 슈몰러 연결은 본질적으로 주로 방법론적이었다.  방법론적 틀에서, 슈몰러 프로그램은 경제 현상이  넓은 사회적 틀에서 분석되고 해석되어질 것을 요청했다. 슈몰러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자신의 연구 의제는 역사적 자료에 기초했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학은 순수한 경제 법칙의 형성이 항상 가능하지 않은 복잡한 사회 현상을 다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한 슘페터 자신의 견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실제로 GHS의 핵심을 표현했다.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 시대의 경제적 변화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이성적인 (개념적으로 명확화된) 역사이지, 위기나 순환이나 파동이 아니라 모든 측면의 경제 과정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론은 단지 몇 가지 도구와 도식을 제공하고 통계는 자료의 일부일 뿐인 모든 측면과 방향의 과정이다. 상세한 역사적 지식만이 개인의 인과관계와 메커니즘에 대한 대부분의 질문에 확실히 답할 수 있고 그것 없이 시계열 연구는 결론적이지 못하고 이론적 분석이 공허하게 남아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Schumpeter, 1939, Vol. 1, p. 220).     


한편, '무혈 이론적 도식과 통계적 윤곽선을 실제 사실로 채우는 것'(Schumpeter, 1939, Vol. 1, p. 222)이라는 그의 목표는 또한 GHS의 목표였다: '[역사적 연구]는 추상화의 결과를 한 일관성 있는 전체의 부분으로 간주하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고립된 추상화에 대한 적절한 보완을... 주었다. 따라서, 빛바랜 추상화와 죽은 도식은 혈액과 생명을 회복했다.' (Schmoller, 1911, pp. 464–5, also cited in Shionoya, 2005, p. 54).     


그러나, 경제 생활의 역사적인 발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얻는 것은 극도로 어려우며, 결과적으로, 적어도 한정된 시간 내에 법의 제정은 결코 달성될 수 없다. Hodgson(2001, p. 115)에 따르면, 우리는 슈몰러가 올바른 방법론적 관점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는 [제도적, 문화적] 요인이 어떻게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지 자세히 보여주지 않았다. 인과적 설명에 대한 그의 모든 관심에도 불구하고, 슈몰러는 어떻게 설명 이론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핵심 개념이 옳을 수 있는지에 대한 적절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슈몰러 프로그램은 윤리학과 경제학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경제 발전 단계 이론을 제공하려는 시도로 특징지어졌다 (Schmoller, 1901, Vol. 1, pp. 53–7).  슈몰러는 가족에서의 사회시스템, 지역사회에서의, 그리고 기업에서의 사회 시스템을 구별했다. 물론, 각 시스템은 다른 조직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경제에서 자율적인 개인의 행동을 극대화하는 신고전주파 이기주의 모델과는 반대로, 슈몰러적 경제학 및 역사경제학은 개인이 그들의 배경에 근거하여 공통의 이익과 가치를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조직을 강조했다.      


슈몰러에 따르면, 이 틀에서, 경제 제도와 조직은 기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고 윤리적인 것이었으며, 이는 그들이 행동한 사회적 맥락이 윤리적, 도덕적 가치로만 작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경제 생활의 도덕적 시스템조차도 관습, 법, 도덕의 역사적 발전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경제적 행동과 경제 제도는 일반적으로는 심리적인 힘으로부터, 감정과 본능으로부터, 윤리적 생각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경제적 행동은 도덕, 관습, 법의 틀에 장악되어야 한다' (Schmoller, 1911, p. 448, also cited in Shionoya, 2005, p. 23).     


슈몰러와 마찬가지로 슘페터도 심리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제적 행동과 발전에 대한 다요소 접근을 촉구했다 (Ebner, 2000, p. 367).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광범위한 '심리적' 접근은 리더십에 기초했다 (Schmoller, 1901, p. 413–15). 슈몰러는 주도적인 성격의 중요한 역할을 슘페터가 했던 것과 같이 변화의 원천으로서 식별했다 (Schmoller, 1901, pp. 413–15). 이런 맥락에서, 슘페터의 기업가적 혁신은 특별한 종류의 리더십을 구성했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혁신의 전달자이고 이는 일상적으로 행동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국가) 경제의 경제 발전에 관해서, 슘페터(1904, p. 465n)는 그것의 순환적 특성을 '도덕적 힘'(Ebner, 2000, p. 360)에 의해 야기된 현대 사회의 불안정성의 특성 (Schmoller, 1904, p. 673n)으로 묘사했다. 슘페터 역시 불연속 발전 과정의 프레임워크에서 나타난 복잡한 조건을 강조했다 (Schumpeter, 1926A, p. 88n). 슘페터는 슈몰러의 분석과 비교하여 보다 '내생적인' 유형의 진화적인 힘을 제시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경제적, 사회적 계층의 진화적 변화에 대한 슘페터의 비전은 변화에 대한 반응뿐만 아니라 변화의 원인도 시스템에 내생적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경제 변화에 대한 내생적 설명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기업가의 기능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슘페터(1926A, p. 88n)는 국가들의 균일한 발전의 가정에 반대했다. 그의 접근법은 사회적 조건이 역사적 시기에 역사적 개인들로부터 나타났다는 것을 강조했다 (Ebner, 2000, p. 368). 이 주장은 슘페터의 <경제발전의 이론>)의 초판에 요약된 바와 같이 슘페터의 경제 진화에 대한 개념이 사회문화 발전의 기본 원리에 의존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Schumpeter, 1912, ch. 7). 제7장에서 슘페터적 경제학의 주요 개념, 즉 기업가정신의 개념이 문화적 변화의 맥락에서 논의되었다 (Ebner, 2000, p. 369). 이 분석은 슈몰러의 발전에 대한 많은 비전과 유사했으며 슘페터 사상의 개념적 핵심을 구성하는 동시에 GHS와 그의 긴밀한 관계를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이 제도적 논증이다. 이 점에서 슈몰러는 비교 연구가 상당한 양의 경험적 규칙성을 풀 수 있고 사회 경제적 발전과 개인의 경제적 행동에 대한 역사적 법칙의 공식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지지해 왔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Ebner, 2000, p.358).     


경제 분석에 대한 제도적 접근의 비전은 슘페터의 저술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슘페터는 '경제사회학'의 개념을 소개했을 때 슈몰러 프로그램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Ebner, 2000, p. 363).     

슘페터(1914, pp. 176–80)는 GHS에 대한 여섯 가지 기본 관점을 간략히 제시했다: ‘(1) 사회 생활의 통합에 대한 믿음, (2) 발전에 대한 관심, (3) 사회에 대한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관점, (4) 다수의 인간 동기에 대한 인지, (5) 사건의 일반적 성격보다는 구체적이고 개별 관계에 대한 관심, (6) 역사적 상대성'(Shionoya, 2005, p. 19). 슘페터는 역사주의의 공통 실천인 (2)와 (5)를 강조하는 대신, (1)과 (2)의 조합을 강조했다. 물론, 그는 (3)과 (4)는 중도적 형태로 동의했고 (5)와 (6)은 어떤 일반적 견해에 대한 가능성을 거부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Shionoya, 2001).     


슘페터에 따르면, 경제사회학은 그 목적의 특성상 세부적이고 자료-수집의 학문분과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학문분과이기도 한 특별한 분야‘이었다 (Schumpeter, 1926B, pp. 369–70), 즉 첫째로 '경제학자들이 어떤 가정을 만들어 내는 경제적 행동의 사실을 다루고', 둘째로는 연구되어야 할 사회의 경제적 조직을 특징짓는 제도를 다룬다’(Schumpeter, 1954, p. 544). 그는 그것의 목표를 '정신적으로 ('이론적으로') 보편사를 실천한 통합된 사회학 또는 사회과학'으로 규정했다 (Schumpeter, 1926B, p. 382).    

 

마지막으로, 슈몰러와 슘페터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관찰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슈몰러의 접근법의 핵심은 변화의 과정을 지적하는 윤리적 부문으로 구성되었고 시장 동학과 사회 정의를 조화시키는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Ebner, 2000, p. 359). 이러한 견해는 윤리적 영역에서 이윤 동기에 대한 슘페터의 주제에 의해 거부되었다.    

 

또한, 관습과 습관과 같은 제도적 측면은 슈몰러의 의제에 변화의 원천으로서 지도하는 인물의 탄생을 설명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정치 지도자의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가적인 지도자들도 가리켰다 (Ebner, 2000, p. 359). 다시 말해서, 슈몰러는 슘페터가 그랬던 것처럼 변화의 원천으로서 주도적인 인물의 중요한 역할을 파악했다. 그러나 슘페터에게 이러한 비즈니스 세계의 주요 인물은 불연속적으로 등장하여 기술적 변화와 발전의 물결을 일으켰고 전형적인 일상적인 관습과 습관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것은 슘페터의 접근 방식이 슈몰러의 견해와 비교했을 때 매우 '동적'이고 '무작위'인 성격을 갖게 했다.


결론적으로 슘페터는 슈몰러 프로그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재구성적인 논평을 도입했다. 그러나 슈몰러의 의제에 대한 수정은 '막내 역사학파'의 회원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Schumpeter, 1954, p. 815). Spiethoff, 좀바르트 및 막스 베버에 대한 우호적인 논평은 슘페터(1908, p. 617)에 의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는 GHS가 경제학에 상당한 기여를 제공했다고 믿었다 (Ebner, 2000, pp. 364–5). 사실, 그는 슈몰러의 접근법에서 '보편 사회 과학의 전망'을 발견했다 (Schumpeter, 1926B, p. 365).     


이 점에서, 비록 그러한 논문이 현재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한 논문에서 슘페터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GHS의 모든 이론가들에 대한 검토를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의 앞부분에서 우리가 제시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선별적인 검토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분석은 좀바르트, 막스 베버, 슈몰러가 슘페터의 연구 의제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GHS의 핵심을 구성했던 가장 저명한 경제학자들에 속하고(Schumpeter, 1954; Shionoya, 2005)  그들의 저술은 슘페터의 저작과 현저한 유사점을 (차이점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6. 결론     


GHS의 연구에서 슘페터 비전의 중심 요소가 존재함을 감안할 때, GHS에 조지프 슘페터의 지적 원천으로서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논문은 슘페터가 슈몰러, 막스 베저, 좀바르트로 대표되는 GHS의 개념적 틀에 따라 그의 주요 주제의 일부를 공식화했다고 주장한다 (Ebner, 2000, p. 369). 슘페터와 GHS의 몇 가지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사점은 부인할 수 없으며 특정 개념의 일치는 인상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슘페터는 그의 '이론적 유물론'에서 좀바르트를 따랐고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두 이론가들 사이에 일반적인 합의가 있었다 (Chaloupek, 1995). 또한 자본주의 기업의 진화를 추동하는 힘과 기술의 역할에 관한 강력한 유사성이 발견되었다. 다음으로, 이 논문은 '기업가', '순환 흐름', '프로테스탄트 윤리', '자본주의의 정신'의 역할을 각각 강조하는 슘페터와 베버의 중심 비전을 비교했다. 마지막으로, 슘페터의 발전 개념은 이론적 및 역사적 관심사를 통합하는 슈몰러적 이론적 접근의 맥락에서 검토되었다.     


이 점에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GHS에 대한 슘페터의 태도는 눈에 띄게 바뀐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1920년 이전의 저작에서 슘페터는 주로 왈라스의 맥락에서, 특히 그의 매우 중요한 Das Wesen und der Hauptinhalt der theorytischen Nationalo¨konomie (1908)에서 그렇게 연구했다. 이 책에서, 슘페터는 주로 이론경제학과 그 방법론적 기초에 관심을 가졌다. 이 책은 주로 GHS 회원들에게(Schumpeter, 1908, pp. XXI, 554) 제출되었고, 그들에게 이론적 접근법의 유용성을 납득시키고자 하였다.     


슘페터는 평생에 걸쳐(Schumpeter, 1908, 1914, 1954), 그 유명한 방법논쟁을 비판했다. 그는 '양쪽이 대부분 옳다'(Schumpeter, 1908, p. 6)고 주장했고 심지어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두 가지 방법 모두 경제학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슘페터는 그의 Wesen und Hauptinhalt에서 GHS 구성원들에게 이론적 분석의 유용성에 대해 확신시키려고 노력했다 (Schumpeter, 1908, p. 561n). 그러나, 같은 책에서 슘페터는 또한 새로운 이론을 경험적 증거로 테스트하는 것을 지지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론의 강도는 의심스러웠다. 이런 의미에서 GHS(특히 Schmoller, Max Weber, Sombart)가 슘페터의 후기 저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주장을 공식화하는 더 적절한 방법은 왈라스를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슘페터가 왈라스의 열렬한 찬양자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경제분석사에서 그는 썼다: '순수이론에 관한 한 왈라스는 모든 경제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왈라스의 연구가 '이론 물리학의 업적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안했다 (Schumpeter, 1954, p. 827).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이 본질적으로 왈라스적인 반면, 그의 후기 작품들은 덜 왈라스적인 것처럼 보인다 (see Schumpeter 1954, p. 12). 이러한 변화의 주요 징후는 혁신 과정에서 시장 경쟁의 역할에 대한 슘페터의 수정된 평가인 것으로 여겨졌다 (see Nelson, 1977, pp. 134–5). 더욱이, 슘페터의 초기 견해 변화는 또한 철학적 지향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Klein, 1977, p. 133). 그러나, 슘페터가 그의 초기 의제들 중 일부를 수정했다는 사실과 그가 모순적이었는지(da Gracxa Moura, 2002), 아닌지(Shionoya, 1997) 여부에 상관없이, 왈라스의 열렬한 찬양자로서, 슘페터(1941, p. 239)는 왈라스의 분석 체계를 실질적으로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실, 그의 <경제 분석의 역사>에서 그는 그 체계를 높이 평가하기까지 했다 (Schumpeter, 1954, p. 827).


이 점에서 Backhouse가 제기하는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더 늦게 나온 아이디어의 잊혀진 선구자가 발견될 때 주된 관심사는 종종 그 아이디어들 자체만큼이나 왜 그것들이 무시되었는지에 있다.'(Backhouse, 1985, p. 5).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영향들이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반면, 왜 슘페터의 아이디어 형성에 대한 GHS의 기여는 체계적으로 무시되어졌는가?     


우리가 보기에, 그것은 세계 2차 대전 후에 대부분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경제학자들이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설명의 일부는 경제학의 '수학화'에 있다. 그 결과,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독일의 전통은 사실상 슘페터에 의해 대표되었는데, 이 사실은 그를 예외적으로 독특하게 보이게 했다. 슘페터는 독일 경제학의 중요한 공헌을 강조하지 않음으로써 이 과정에서 역할을 했다 (Reinert, 2002). 다시 말해서, 앵글로색슨 세계에서 슘페터의 독창성은 아마도 그가 구축한 접근법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었다. Appel(1992, p. 260n)의 강조된 주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앵글로색슨 세계의) 슘페터교도들은 슘페터의 저작을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독일 논쟁의 재연구라고 묘사하는 접근법에 놀랄 것이다. 슘페터는 토론 그 자체도 그 주인공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Toye(2006, p. 830):에 따르면, '젊은 경제학자가 교육과 견습 과정을 거치면서 겪는 다양한 종류의 빚이 있다. 일부는 멘토링, 우정, 그리고 학문적인 후원을 통해 축적된 개인적인 것이고, 일부는 영감과 지적 지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동화를 통해 축적된 지성적인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슘페터는 슈몰러, 막스 베버, 좀바르트에게 지적 빚을 졌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슈몰러, 막스 베버, 좀바르트가 슘페터의 의제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슘페터와 GHS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서로 다른 학파간의 대화를 촉진하고 현재의 경제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영향력 있는 이론가들은 조지프 슘페터에게 영향을 준 저명한 경제학자들만이 아니었다. 문헌에서 인정된 바와 같이,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이론가는 칼 마르크스와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같은 다른 저명한 경제학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슘페터의 역사를 향한 이동 뒤에 있는 잠재적인 마르크스적 영향들은 향후 연구를 위한 좋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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