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쇼기를 주제로 한 애니매이션이다. 영어제목으로는 The flowers of hard blood 인데, 작품의 분위기를 시적으로 그리고 하드보일드 하게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과 같이 보려고 했는데, 일요일 저녁 맛배기로 제1화를 혼자 보고 난 다음 생각이 바뀌었다. 재미있기는 한데, 섬찟하다고나 할까. 아이들과 같이 볼 수는 없는 애니이다.
일요일 저녁부터 화요일 저녁까지 3일내내 밤을 새워 보다 보니, 주간에는 비몽사몽이다. 그래도 마약같이 끊기 힘든 작품이었다. 무서움과 함께 맑은 영혼, 그리고 승부의 세계 이런 것이 어울려서 끝없이 다음편에 목마르게 한다. 쇼기를 아직 잘 모르는 내게 이 작품이 어떤 기여를 했을까?
첫째, 잡은 말을 자기 말로 장기판에 투입하는 쇼기의 규칙이 쇼기의 모든 수읽기에서 기본으로, 또 매우 중요하게 작용된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다. 이렇게 재활용하는 방식은 다른 나라 장기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쇼기만의 특징인데, 내게는 정말 생소한 방식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바둑에서의 '돌 밑의 수' 같은 것이다. 이는 돌을 따낸 다음에 수를 내는 수를 의미하는데, 후절수(돌이 죽어서 따내진 다음에 끊는 수)도 이런 수에 포함되는지는 모르겠다. 얼핏 생각나는 것은 돌을 먹여 죽인 다음에 치중하는 수 등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는 바둑에서도 고난도 테크닉인데, 쇼기에서 이런 류의 수가 기본이라고 한다면, 쇼기의 수읽기는 그 처음부터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러한 방식은 쇼기라는 게임에 그 한계가 없는 깊이의 세계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좌표를 읽는 방식이 아라비아숫자와 한자를 섞어서 표현한다는 점. 즉, 예를 들면, 2六 이런 식으로 (가로,세로) 기물의 위치를 읽는다. 그에 반해, 체스에서는 E4 이런 식으로 알파벳과 아라비아숫자로 읽는다. 물론 가로 먼저, 다음 세로인 점은 같다. 음악을 공부하려면, 악보를 알아야 하듯이, 쇼기를 알려면, 역시 쇼기의 기보방식을 알아야 되는데, 영화를 보면서 조금 익숙해졌다.
세째, 쇼기식의 용어를 몇가지 알게 된 점. 예를 들어 同步 라고 하면, 步兵으로 타격되는 말을 따먹는 것을 의미한다. 즉 同이라는 글자가, 체스에서의 X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나는 오늘새벽에 이 애니를 마저 볼 때까지도 몰랐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다른 곳으로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굳이 쇼기를 잘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이 애니를 보지 않았다면, 과연 동보니, 동비니, 하는 용어에 관심을 가졌을까, 아마,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애니는 애초에 내가 목표했던 무언가 쇼기를 좀 알고 싶다라는 상태로 나를 인도해준 좋은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同 같은 좌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좌표에 두게 되면, 거기에 있던 기물을 잡을 수 밖에 없으니까, 나는 그것을 체스의 X로 느끼게 되었었다.)
이렇게 무언가 쇼기의 분위기를 알게 된 것은 좋았지만, 이 애니를 보는 동안, 마음이 썩 편한 것은 아니었다. 드라마에 빠져들면서도 심장이 죄여드는 듯한 영화, 그리고 잠을 청하면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영화, 그런 애니였다. 사실, 이런 것이 일본 애니들의 특성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해본다.
PS: 영어제목인 The flowers of hard blood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제목이다. 우선 flowers를 여성들로 본다면, 냉혈 또는 철혈(hard blood)의 여류기사들(flowers)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간난고초 속에서 연꽃처럼 피어나는 시온의 강한 혈통을 뜻하는 것일까? (이때 flowers가 복수인 것이 좀 걸린다) 물론 이런 고민없이 그냥 범죄현장 (血花) 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도 문제는 없겠지만, 제목의 깊은 뜻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 이런 것을 다 포괄하여, 혈화의 기억이, 시온의 철혈이 되어, 꽃으로 만개하였다는 뜻일 수도 있을까요?)
(2009.11.26. [쓰지 않는 배:티스토리])
시온의 왕이란 제목의 의미는 시온이라는 주인공이 어릴 적 겪은 어떤 사건에서 살아 남았을 때 쇼기의 왕장을 꼭 쥐고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과연 시온에게 그 왕이란 무엇이었을까? 그 범죄 현장에서 시온은 범인이 문제를 낸 '귀신 죽이기' 라는 수법에서 어린 시온은 자신의 왕장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쇼기판에서 왕장을 쥐어 들고는 버틴다 ( 쇼기판 안에서는 살릴 수 없으니까 ) 라는 설정이다.
그 시온이 나중에 성장하여 그 수법을 가르쳐 준 범인과의 대국에서 결국은 승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시온의 왕'의 스토리 전개이다. 이 애니를 보면서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여장남자인 사이토 아유미를 카미조노 9단이 남자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유일한 제자로 받아들일 때, '너는 계속 돈을 위해서만 쇼기를 두어라' 라고 다짐케하고, 사이토 아유미는 계속해서 이 말에 구속을 받는데, 카미조노 9단이 왜? 이런 말을 했었는지가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에도 이해가 안되는 점 (P.S.: '하치완 다이바'를 보고 난 다음에 약간 이해가 되었다. 사이토 아유미는 원래 진검사 출신이었다. 즉 돈을 위해 쇼기를 두던 친구이다. 그리고 쉽게 프로가 되어 돈을 벌기 위해 여자기사가 되려고 카미조노의 문하에 들어오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카미조노 입장에서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한도 내에서만 여장남자를 묵인하고 문하로 받아준 것이다. 만약 진정한 쇼기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문하로 받아준 종전의 계약은 폐기되고 새로운 계약이 요구될 것이다.)
두번째는
범인이 주인공인 야스오카 시온을 계속해서 위협하면서, '쇼기 토너먼트 대국에서 승리를 하려면 죽음을 각오하라' 고 한다든지, 다른 대국자가 '왕의 주술'을 걸게 유도한다든지 하는데,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는 진범이 왜 그렇게 겁박해야 했을까 하는지 가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점
세번째는
하니 메이진(名人)의 동생인 사토루가 왜, 주인공을 싫어하면서 위협하는지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 점
네번째는
진범의 범행동기가 정말 이해가 안되는 점, 아마도 작가가 진범을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고 애매했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 4 명의 후보가 있었는데, 이들 중 누구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왔다갔다 한 것 같다는 점
다섯번째로는
공각기동대에서도 보이는 '웃는 남자'의 캐릭터가 있는데, 정말 찝찝한 바람잽이입니다. 이 자가 나중에 사건에 별 영향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 이것도 좀 영화가 끝난 상태에서 정리가 안된 찝찝함이네요....
21화 정도 되면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되는데, 그때 부터는 이렇게 이해가 안되는 점 들이 서운하게 남아버리네요...그리고 22화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제목인 '시온의 왕'은 시온이 주인공인 야스오카 시온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시온이란 말 자체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상당히 중의(重意)적인 뜻을 담고 있는 셈인데, 왜 이렇게 종교적인 냄새를 풍기는지 그 의도는 알 수가 없다.
(2009.11.27. [쓰지 않는 배: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