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장기나 바둑의 기원과 관련하여 자주 인용되는 문헌 중에 논어 17장(양화) 22절의 다음 구절이 있다.
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종일 배불리 먹고 마음 쓸 데가 없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박혁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 그런 것이라도 하는 게 그래도 나을 것이다' 註: 박혁은 장기 · 바둑 따위 (차주환역, 동양의 지혜)
기원전 6~5세기에 생존했던 공자님의 말씀인 논어에 장기와 바둑이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는 보통 그 시대에도 장기가 있었으려니 여긴다. 그리고 또 당연히 장기의 중국 기원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박혁(博奕)에서의 博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장기가 아니고, 소위 육박(六博, 陸博)이라는 것으로 발전하는 우리의 윷놀이 비슷한 경주게임(racing game)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문헌에서의 박혁(博奕)이 결코 장기의 기원을 보증하는 기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김달수의 [바둑의 기원과 관련된 박혁의 의미에 대한 문헌연구 및 고찰, 2006]에 따르면, 논어에 나오는 박혁(博奕)은 博(六博)과 奕(바둑)의 두가지 게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와 바둑은 물론 아니고), 博(六博)에 가까운 博奕이라는 또다른 단일 게임이라고 추정한다. 博은 기본적으로는 箸(젓가락)를 던져 博局(놀이판)에 배치된 말을 움직이면서 상대의 말을 잡는 경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博"은 누가 빨리 도착지점에 돌아오느냐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지만, "博奕"(博의 변형된 게임)은 정해진 수의 말 즉, 6개의 말을 누가 먼저 다 잡느냐에 의해 승부가 결정된다고 추정하고 있다. (오목과 월남오목과의 관계같은 느낌이다.) 여기서 정리해보면, 博은 경주게임, 博奕은 경주게임+포획게임(동일한 기능의 말을 모두 잡기), 장기는 포획게임(왕을 잡는 게임), 바둑은 영토게임+포획게임 이라고 볼 때, 博奕은 포획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 편으로는 장기와 다른 한편으로는 바둑과의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진(先秦)시대의 "博奕"은 경주게임((racing game)에서는 "博"에게, 포획게임에서는 "奕(바둑)"에 비해 열세였고, 또한 실제로 관전을 하기 전에는 博과 博奕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고전문헌의 기록자는 博과 博奕을 모두 무의식적으로 博으로 기록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선진(先秦)시대를 지나, 진한(秦漢)시대에 이르면, "博"은 초기의 단순한 경주게임에서, 점수제 즉, 중앙에 있는 "水"에 있는 물고기를 낚거나 뒤집으면 점수를 얻는 게임으로 진화하였다. 이후 수당시대에 이르면 게임으로서의 博과 博奕은 소멸되고, 博奕은 주로 주사위를 사용하는 게임의 총칭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송대이후에는 반상게임만이 아니고, 게임 전체에 대한 총칭의 개념으로 사용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博奕을 博(경주게임)과 奕(바둑)으로 보든, 博奕이라는 단일 게임으로 보든 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장기로 해석될 여지는 없게 된다. 실제로 고고학 자료로 보나, 문헌적 자료로 보나 중국에서는 AD 8세기 이전에는 장기에 관한 명확한 전거가 없는 형편이지만 博(경주게임)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자료가 현재 확보되고 있고, 선진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까지 博이 상당히 유행했음을 또한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통상 우리나라 역사에서 장기 관련 기술로 거론되는 삼국사기 개로왕(~AD 475)조의 장기 관련 기사 또한 원문을 직접 확인해 보았다. 역시 여기에도 博奕이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博奕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개로왕이 장기와 바둑을 좋아했다고 번역하고 또한 삼국시대에 이미, 장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합리적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時百濟王近蓋婁好博奕 道琳詣王門告曰 臣少而學碁 頗入妙 願有聞於左石 王召入對碁 果國手也 (삼국사기 개로왕조)
(2010.1.3. [쓰지 않는 배: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