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체스에서 비숍은 나이트보다 안쪽에 있다. 이것을 보며, 나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그 엄연한 질서에 감동받는다. 왜 비숍은 나이트보다 안쪽에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주교가 기사보다 서열이 더 앞서는 것 아니냐고?
그것은 오직 서양의 기독교 봉건제에서만의 사실일 뿐이다. 그리고 체스는 그보다 더 오래전에 인도에서 고안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원래 비숍은 코끼리부대를 상징하고, 나이트는 기마부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때 파괴력이 큰 코끼리부대가 가운데서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부대는 측면에서 적을 교란하는 임무가 부여된다. 그런데 코끼리부대와 기마부대, 그리고 전차부대(루크)가 역사적으로 서로 같은 시대를 점유하는 적은 없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 중 전차부대가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무기체계이었지만, 승마기술의 발달로 유연성이 떨어지는 4인승(또는 더 발달된 형태인 3인승과 2인승도) 전차부대는 1인승 기마부대로 대체되고, 어느 시기부터는 전장에서 사라지고야 만다.
또한 코끼리부대가 과거 인도에서는 국력의 차이를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코끼리수에 의해 가늠하기도 하였지만, 처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코끼리의 소심함을 이용한 격퇴술이 발달하게 되자, 그 활용가치가 떨어져 점차 전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우람한 체구는 압도적이어서 통상 왕과 사령관이 코끼리 위에 좌대를 깔고 전장을 지휘하는 것은 인도의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그런 까닭에 코끼리가 말보다 지위가 높은 안쪽에 포진되는 것이다. 이는 옛날 인도 체스의 출토 기물형상을 참고하여 충분히 고증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장기에서는 특이하게도 마와 상이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다. 상이 안쪽에 포진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배치이지만, 그렇다 해도 상과 마가 자리를 바꿀 수 있게 된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과 코끼리 부대에 대한 전술적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의외로 한국장기에서 상(코끼리)은 기동력이 빠르다. 그것은 코끼리 위에 궁수들이 배치되었던 인도의 전통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궁수부대는 기마부대보다도 적에 대한 타격능력이 원거리일 수 있기 때문에 기마부대를 안쪽에 배치하고, 지원사격부대인 코끼리부대를 바깥쪽에 배치하는 생각이 나올 수 있게 된다.
아무튼 코끼리를 실제 전투에서 활용해본 경험과 유산을 갖지 못한 우리는 급기야 덩치가 큰 코끼리를 다루기 쉬운 경량급 기마부대의 바깥쪽에 배치하고야 만다.
그러나 제일 바깥쪽부터 차, 마, 상 으로 포진하는 장기의 질서는 바로 전세계 모든 장기의 DNA인 것이다.
(2011.6.26. [쓰지 않는 배:티스토리])
Note:
코끼리 부대는 적진의 중앙을 돌파하여 적을 산개하게 만드는 전술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상은 당연히 포진의 중앙에 배치되어야 한다. 이 글을 쓸 때는 아직 이러한 사실을 몰랐었다. (2012.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