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M. Murray (조영필 역)
<기업가의 발명>
제4장 중세 유럽의 기업가와 기업가정신
기업가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이 프랑스 외래어가 전장 사령관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중세 후기부터이다. 매우 점진적으로 그 단어의 의미가 비즈니스 전쟁터로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 단어는 “공공 음악 기관의 감독 또는 관리자”를 기술하는 데 사용되어졌다. 이후 19세기 후반 경제학자 리처드 일리(Richard T. Ely)가 정치경제학 입문에서 “우리는 생산적 요소를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프랑스어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우리는 그런 사람을 기업가라고 부른다.”라며 다소 거만하게 썼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계속해서 이 단어가 학교와 고등 교육 기관에서 연구되고 배양될 가치가 있게 되기 전에 케인즈와 슘페터를 포함한 후속 경제학자들이 이 단어를 쉽게 채택했는지 추적한다. 1
그러나 확실히 그 단어가 현대적이라면 그것이 설명하는 활동은 "생산적 힘"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감독은 문명만큼 오래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서기 500년부터 1500년까지의 밀레니엄으로 정의되는 유럽 중세 시대는 기업가정신의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행동과 특징의 독특하고 특징적인 자질들이 특정 사회 집단에 할당되는 것이 바로 그 1,000년의 끝에 있기 때문이다. 14세기까지 이들 "상인"은 게르만 언어로 상인의 기술에 숙련된 것으로 묘사되었으며 플랑드르어와 독일어에서는 Coopmanscepe 또는 Kaufmannschaft가 어원적으로 영어의 영업기술(salesmanship)과 관련되었지만 의미는 기업가정신에 훨씬 더 가깝다. 또한 그 자신 상인 도시 플로렌스의 산물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는 상인들에게 그들의 직업(고리대금)에 특정한 죄가 그림같이 아름답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처벌되는 지옥의 특별한 원을 제공한다. 2 다시 말해, 중세 말엽에 상인들은 도시 내에서 사회의 많은 "생산적 힘"을 지휘하게 되었고,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을 치유하고 세례 받은 모든 사람을 위해 개별적인 구원을 얻으려는 기독교의 사명에 여전히 매여 있는 사회의 시정 판단을 받아야 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서기 1-500년)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고대 세계의 종말을 야만과 기독교의 승리로 유명하게 돌렸다. 마치 이들 요소가 서기 500년경 로마 문명에게 이국적인 것처럼. 그러나 사실 로마화된 형태의 기독교는 이주하는 게르만 부족이 로마 문명의 혜택을 알고 그것을 원하게 된 매체였다. 좋든 나쁘든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친 지중해 문명의 정제된 정수는 유대교의 후예인 기독교로 표현되었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중해 기반 제국이 시작된 중앙 이탈리아 도시는 기억을 제외하고는 고대 로마 제국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거의 받지 않은 지역에서 그것의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형성할 새로운 문명의 컬트 중심지 역할을 했다. 정말로 목적 없이 의도치 않게 초기 중세 세계는 로마 지방 세계의 부패한 유적에서 형성되었다.
영주권(lordship)의 경제학
칼 마르크스(Karl Marx)와 다른 사람들은 기원 500년 이후에 발생한 기독교/독일 혼종을 "봉건 경제"라고 이름 붙였지만, 이 발명된 용어의 정확한 정의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최근의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종교/군사 엘리트가 무장력의 독점과 인간 사회와 그 목적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전을 통해 대체로 비굴한 농민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법적 및 사회적 제도를 봉건적 제도라고 명명하는 것은 여전히 유용하다. 그들의 신의 삼중적 본성에 영감을 받은 서유럽 사회는 세 부류의 사람들, 즉 기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그리고 가장 수가 많은 일하는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그 사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함으로써 개인과 집단의 구원을 얻는 것이었다. 11세기부터 "세계의 올바른 질서"라는 이 비전은 개혁 교황권의 프로그램이 되었으며, 그의 지도력 아래 내부 규율이 설교되고 보다 제한돈 수준으로 강제되었지만 기독교계의 경계는 무슬림, 슬라브, 그리스, 및 켈트가 소유한 땅으로 바깥쪽으로 밀려났다.
신학적으로 영감을 받았지만 서유럽은 주로 12세기에 스스로를 기사라고 불렀던 유럽의 전사 엘리트의 보완적이지만 다소 경쟁적인 이데올로기와 그들의 공통 문화인 기사도 때문에 신권 국가가 되지 못했다. 기동력이 뛰어난 적(바이킹, 마자르, 사라센)을 격퇴하기 위해 고안된 일련의 즉흥적인 군사 전술을 기반으로 구축된 기사 계급("싸우는 자")은 창, 검, 방패로 말을 타고 싸우는 기술을 독점하면서, 명령의 구조 아래 형성되어 행동하면서, 그리고 성 건설의 실행을 통해 그들의 의지를 집행하였다. 중세 기사들은 교황, 사제, 수도사의 힘과는 별개로 그들 자신의 힘에 대해 신의 승인을 주장했다. 그 표현은 서사시와 낭만주의 문학에서 마상시합과 십자군운동, 그리고 '고귀한 삶'의 이상에 걸맞은 과시적 소비문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Keen 2005).
기업가적 영주권(Lordship)
사명은 약간 다르지만 영적 영주와 현세 영주는 똑같이 노동으로 이 문명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한 노동자들이 지불할 의무가 있는 권리와 지대의 집합에 의존했다. 이 "농노"(라틴어 servi 또는 노예에서 유래)는 역사가들이 장원제도(manorialism)이라고 부르는 제도적 형태로 대부분 마을 공동체에 정착했다. 이 장원제도란 유럽 시골의 들판, 숲, 목초지에 가해지는 인공 생산력의 총합으로 가장 잘 이해되어진다. 완전한 소유권은 아니지만 토지를 소유한 대가로 유럽 농민들은 영주에게 토지에 대한 노동력을 지불해야 했으며 다양한 현물 및 금전적 지불금도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곡식을 영주의 맷돌에 갈아야 했고, 빵은 영주의 가마에서 구워야 했으며, 영주의 허락 없이 재배한 작물을 선택하거나 말뚝을 뽑고 다른 곳으로 이주할 자유가 없었다. 반면에 농민 가정은 노예와 달리 영주에 의해 해체되거나 팔릴 수 없었다. 농노는 토지에 남아 있을 권리가 있었고 토지에서 노동 생산물의 완전한 몰수에 반대하는 관습적 권리를 가졌다.
이 새로운 노동 시스템은 유럽의 영주들에게 혼합된 문화적 과거에 의해 형성된 식단과 물질적 생존(existence)을 제공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한편으로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곡물, 특히 밀로 연명했으며 보통 빵으로 굽거나 죽으로 요리했다. 부식(accompaniments)으로는 약간의 고기, 야채가 될 수 있으며 선호하는 음료는 와인이었다. 게르만 사람들은 오랫동안 목가적이었고 식탁에 육류 및 기타 동물성 물품을 기대했다. 따라서 곡물 경작과 동물 사육의 혼합 농업 시스템이 서유럽의 경작 가능한 중부 지역에 뿌리를 내렸고, 차례로 중부 및 동부 유럽, 아일랜드 및 스페인의 새로운 유럽 식민지, 심지어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의 반동결 지역까지 이식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중세 오백 년 동안 여러 세대의 영주와 농부들은 많은 실질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Hunt and Murray 1999, 250).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의 해체는 농업 기반 시설의 많은 부분에 대한 대대적인 방치가 선행하고 동반했다. 이탈리아와 다른 곳에서 소비되는 대부분의 곡물은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 노예-노동의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되었으며 공공 유통을 위해 도시 정부와의 계약으로 확보되었다. 대규모 농업에 의해 약화되고 인구가 감소하여, 이탈리아와 알프스 남쪽 시골의 대부분은 습지와 숲으로 되돌아갔다. 토양 유형이 지중해 경작 방법에 이질적이었고 기술과 노동에 대한 투자가 결코 실현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리아 북부의 거대한 지역은 전혀 경작되지 않았다. 농민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술에 투자하는 것은 진취적인(enterprising) 영주들이 생산한 대부분 익명의 혁명의 특징이었다.
유럽 영주들의 기술 투자는 밭을 경작하는 데 필요한 주요 도구로 구성되었다. 유럽 북부에서는 도구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견인 동물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상당한 투자이었는데, 튼튼한 철제 쟁기, 두꺼운 진흙 토양을 뒤집을 흙밀이판, 2~4마리의 황소로 또는 드물게 말이 구성된 팀과 관련된 것이었다 (Langdon 1986). 그렇게 무겁고 바퀴가 달린 쟁기는 그들의 비용을 정당화하는 것 이상이었고, 11세기까지는 대부분의 북유럽 전역에서 밭의 표준 경작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중부 프랑스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넓은 평원은 유럽의 곡창지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영주가 제공했지만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두 번째 도구는 물레방아였다. 무거운 쟁기와 마찬가지로 물레방아도 로마인들에 의해 알려지고 사용되었다. 그러나 시골의 노동력 부족에 직면한 중세 영주들은 유럽 전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제분소 건설에 투자했으며 (1086년 영국에는 약 6,082개),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곡물을 제분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래서 그들의 노동력은 보다 생산적인 목적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가내 소비를 위해 곡물을 손으로 제분하는 것을 포함했던 여성의 일에 특히 그러했다. 12세기에 이르러 풍차는 물레방아와 결합하여 유연하고 효과적인 기술로 활용되었다 (Lucas 2006; Langdon 2004). 이러한 용도는 곡물을 제분하는 것 이상으로 목재를 톱질하는 방앗간, 금속을 두드리는 방앗간, 옷감의 축융(縮絨)(fulling of cloth)에 전념하는 방앗간 등을 포함한다.
기술과 토지 이용의 향상만으로는 천년이 바뀔 때까지 유럽에서 달성한 생산량의 급증을 가져올 수 없었다. 곡식 작물과 동물의 생산이 향상되면서 종종 숲으로 둘러싸인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정착된 섬(고립지) 보다 더 많은 땅이 필요했다. 9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중세 삼림 개척지 정복은 아마도 기업가적 영주권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영주들은 다양한 목표를 위해 농민의 노동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과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여기서 영주(수도원, 왕자, 주교 등)는 새로 획득한 농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특권과 힘을 제안했다. 이러한 인센티브는 정착한 농촌 공동체가 주변 황무지를 지속적으로 깎아내려 점점 더 많은 황무지를 쟁기질하게 만들었다.
농업을 혁신하게 기여한 영주-농민 협력의 두 번째 형태는 정복으로 새로 얻은 땅에 정착민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주민을 확보하기 위해 영주들은 종종 장래의 정착민 대표들과 합의서를 작성하여 이전 인구 밀집 지역보다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다. 농가당 소액의 세금을 내는 대가로 그러한 식민지 주민들은 개인의 자유에 해당하는 권리뿐만 아니라 그들이 경작한 땅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권한을 받았다. 한 가지 예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대주교(1152~92)인 비히만(Wichmann)으로, 그는 상대적으로 붐비는 플랑드르와 홀란드 시골 지역에서 온 정착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토지경계 설정자(locatores)를 보냈다. 매력은 상당했다. 영주의 땅에서 모든 강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와 상대적으로 적은 임대료로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다. 12세기 후반까지 게르만 화자들은 동유럽에서 에스토니아에서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정착했다. 모두가 농부도 아니었다. 유럽의 슬라브족 중앙부에서 발견된 광상을 개척하기 위해 개발된 금은 광산에서 일한 것은 게르만이었다(Bartlett 1994).
로마 문명의 종말과 중세 전성기부터 수세기 동안 유럽 농촌의 중심에서 일어난 역동적인 성장을 설명하는 것은 무엇인가? 틀림없이 영주권의 형태가 세속이든 교회이든 그 존재이유에 기업가적 성장을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도했든 아니든, 유럽이 후진성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가장 무명의 주교에서 가장 고립된 성의 보유자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영주들의 수요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수요는 로마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인 동시에 게르만 기사도의 뿌리에서 발전하여, 눈에 띄는 전시와 소비에 주어지는 정교하고 종종 값비싼 수준의 물질문화를 낳았다. 예를 들어, 식단 기대는 식용 지방으로 올리브 오일의 선택을 곁들인 빵과 포도주는 지중해식 기대치의 잔재였다. 그러한 식단을 알프스 북쪽 유럽의 토양과 기상 조건에 이식하는 것이 암흑기 농업의 중심 과제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영주를 위한 밀에서부터 농민을 위한 보리, 호밀, 스펠트밀(spelt, 가축사료)에 이르기까지 생산되는 빵 곡물의 계층 구조가 생겼다. 음료는 대부분 평민을 위한 곡물로 만든 에일이었고, 와인은 심지어 영주들 사이에서도 가장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졌다. 가축 사육은 항상 중세 시골에서 곡물 농업의 부속물이었는데, 돼지고기는 가장 좋아하는 고기였고 소와 양은 많이 뒤처진 2위였다 (Biddick 1989; Berman 1986).
그러나 식단의 요구 사항은 영주의 욕망의 출발점에 불과했다. 교회와 수도원에는 의복과 유물(relics), 건물과 책이 필요했다. 기사는 말과 갑옷, 검과 창이 필요했다. 그리고 성은 1100년 이후 석조 구조물로 대체된 나무 방어벽으로서의 시작 이후 재료와 디자인 면에서 스스로 더욱 정교해졌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은 정신적 육체적 치유를 찾아 순례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꼈고, 가장 큰 죄인들은 가장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다.
다음은 중세 밀레니엄의 전환 전에 눈에 띄는 기업의 몇 가지 예이다. 교회의 수요는 암흑시대 내내 장거리 거래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거래되는 현저히 다양한 품목의 일부는 향과 같은 일반적인 전례 상품, 실크 직물 및 약용으로 사용되는 기타 향신료 등으로 따라서 놀랍지 않다 (McCormick 2001, 291–93). 놀라운 것은 프랑크(Francia)의 교회 심장부에서 주요 컬렉션을 형성하게 된 지중해 기원의 유물의 빈도와 양이다. 예를 들어, 1000년까지 부르고뉴의 Sens에서 살아남은 컬렉션은 600개 이상의 품목에 이르렀다. 상당수는 지중해 성인들의 성지에서 유래했으며, 그중 많은 수가 멀리 떨어진 지중해 동부에서 왔다. 쉘르(Chelles, Ile de France)에 있는 두 번째 프랑크의 유물 컬렉션은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이탈리아(특히 로마) 및 성지와의 무역 접촉에 대한 더 많은 증거를 보여준다. 따라서 최근 연구는 기원 500년에서 750년까지 프랑크에서 장거리 통신 및 무역 연계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관대한 추정에도 불구하고 초기 프랑크인의 세계는 주변의 무슬림과 비잔틴 국가의 기준에 비하면 심히 저개발 상태였다. 그러나 기업가들은 8세기에서 10세기까지 지중해 전역에서 수요가 많았던 하나의 서구 상품인 노예를 공급하면서 그러한 문화와 경제의 틈에서 계속 일했다. 단편적인 기록은 노예사냥과 수송을 증명하는데, 앵글로색슨 노예를 포획하여 프랑스 남부, 이탈리아 북부, 로마의 시장으로 운반하였다. 중부 및 동부 유럽의 정복으로 이교도 슬라브족이 시장에 나왔을 때인 750년 이후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물량이 불어났고, 이 포로들의 근원에 대한 영구적인 표시로 sclavus라는 이름이 남았다. 8세기까지 베니스는 거대한 노예 항구가 되었으며 베네치아 상인들은 지중해 남부와 동부 시장에 노예를 판매하는 중개인 역할을 했다. 마이클 맥코믹(Michael McCormick)은 "지중해의 유럽 상업 경제는 아랍 세계와의 노예무역의 역동적인 중심지에서, 나폴리와 아말피(Amalfi), 베니스에서 정확하게 탄생했다" (2001, 736–39, 776; Schwarcz 2003, 279–82 참조).
밀레니엄의 전환 전 2세기 동안 유럽 영주들이 이룩한 모든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은 중세 도시였다. 이것은 미증유의 규모와 지리적 범위의 창의적인 노력이었고, 20세기말까지 기업가정신의 실험실 역할을 할 새로운 형태의 도시 공동체를 생산했다. 이 도시 혁명은 대략 1050년에서 1220년 사이인 긴 12세기에 걸쳐 발생했으며, 이 기간 동안 도시 유럽은 자치시(town)와 도시의 절대적인 수와 오래된 공동체의 규모와 범위 모두에서 확장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유럽인 인구가 950~1200년 사이에 아마도 두 배가 되었지만 도시 지역에서의 인구는 네 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Nicholas 2003, 1–23).
도시 설립의 다양성과 수를 고려할 때 이 혁명에 대해 일반화하는 것은 어렵다. 남부 유럽에서는 실제로 중세에 새로운 도시가 거의 설립되지 않았지만 그 도시들의 둘러싼 지역과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 절반은 도시의 수와 중요성에서 남부를 능가했다. 따라서 제노아(제노바), 베니스(베네치아), 새롭게 떠오르는 내륙 도시 플로렌스(피렌체)에는 고대의 선례가 없었다. 다른 곳, 특히 스페인, 슬라브 및 켈트 유럽의 새로운 유럽 식민 지역에서 영주들은 종종 이전 정착지에 또는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새로운 영토를 세웠다. 스페인에서는 무슬림에 대한 방어적 거점으로 새로운 정착지가 세워졌다. 아일랜드에서 노르만인들은 시골에 정착하고 교화하는 방법으로 요새화된 도시 지역을 사용했다. 플랑드르에서 백작들은 일련의 자치시를 세웠지만 일부만이 중요해졌다. 그리고 엘베 강 동쪽의 독일에서는 13세기 발트해 무역의 부흥 이후 많은 수의 도시 플랜테이션(식민지)이 중요해졌다. 따라서 뮌헨과 뤼베크처럼 서로 멀고 이질적인 도시들은 그 기원을 왕후의(princely) 건국자들에게 빚지고 있다. 3
이 도시 물결의 세부 사항은 풍부하고 지저분했을 수 있지만 경제생활의 윤곽에 두 가지 영구적인 변화가 생겼다. 첫째, 도시의 지도는 강렬한 도시화의 두 극을 가진 채 1220년까지 어느 정도 고정되었는데, 하나는 유럽 남부에, 다른 하나는 유럽 북부에, 잉글랜드 남동부로부터 파리를 지나, 피카르디(Picardy)와 플랑드르의 평원을 가로질러 라인 강의 위대한 도시인 쾰른까지 뻗어 있다. 둘째, 이러한 공동체는 영주권의 중심지에서 상인 중심지로 진화했으며, 사치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중세 기업가의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유럽의 도시가 중요한 관료정치의 소재지가 되었기 때문에, 성읍 영주들은 상인의 재화를 구입하고 동시에 성읍에 자본을 가져왔으며, 그리고 종종 그들의 특권과 독점권 부여가 도시 성장에 결정적이었기 때문에, 영주들은 결코 이러한 발전하는 시장 중심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한 전환은 부르주아 또는 시민(burgher)이라고 불리는 도시 거주자가 종종 변화를 위해 동요하고 주교, 백작, 대 수도원장 또는 대성당장의 반대를 넘어 자율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격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장관의 폭력 사태는 있었지만 유럽 최초의 도시 혁명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Nicholas 2003, 92–97).
이러한 전환 시대에 영주의 신호적 서비스는 소비의 장으로서 그러므로 기업가의 관심을 끄는 장대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장거리 무역의 중심지가 된 대부분의 11세기 정착지에는 성읍 영주에게 돈을 빌려주고 교외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산업에 자본을 기여한 유대인 거주 공동체가 있었다. 12세기는 유대인들이 자본 형성과 도시 집중에 관여한 절정기였다. 그 후 왕후의 박해와 같은 변화와 더 정교한 금융 기법(교회의 고리대금 금지를 피하려는 목적)을 사용하는 기독교 대금업자의 새로운 물결이 이 초기 유대인의 기업가적 충격을 효과적으로 이어받았다.
유럽의 두 도시 극점은 피터 스퍼퍼드(Peter Spufford)가 "상거래의 본질에 단순한 양적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임계 질량"이라고 묘사한 결과를 낳은 시장과 네트워크 집합체를 제공하였다 (2002, 19, 388–89). 이러한 변화의 총체는 경제사에서 "상업 혁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북쪽과 남쪽에 있는 두 개의 별개의 도시 실험실에서의 기업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13세기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 두 도시 극점의 상호 작용의 결과로서 더 중요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유럽 비즈니스 및 경제 역사의 대부분의 혁신과 특징은 중부 유럽의 금광과 은광에서 나온 금괴로 가득 찬 이 양극 도시 네트워크에서 개발되었다고 공정하게 말할 수 있다.
슈퍼-컴퍼니 현상
중세 남부 사업가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3세기에 이윤의 가능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결합한 기업 형태인 슈퍼-컴퍼니였으며 따라서 우리의 목적에 적합한 사례 연구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조직들은 비정상적으로 규모가 크고 질적으로 달랐으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일반 거래, 상품 거래, 은행 및 제조와 같은 예외적인 범위의 활동에 동시에 참여했다. 그들은 모두 경쟁적이고 논쟁적인 도시 군도(群島, archipelago) 한가운데 있는 플로렌스의 비옥한 상업적 토양에 뿌리를 내렸다. 이 도시 인구에 의해 생성된 식량에 대한 수요는 이러한 회사를 설립한 기업가에게 도전적 과제를 주었는데, 그들은 이탈리아 남부의 앙주왕가의(Angevin) 통치자와 장기 곡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자본을 모았고, 그 기반에서 장거리 무역과 현지 제조로 모두 다각화하였다. 이 대기업들은 어떻게 조직되었을까? 상당한 규모의 대부분의 이탈리아 회사와 마찬가지로 그 회사들은 관리 파트너의 사망 또는 제거에도 해체되지 않는 준 영구적인 다중 파트너십이었다. "해체(dissolution)" 시에도 파트너십은 즉시 갱신되었다. 파트너십은 실제로 2년에서 12년까지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기간 동안 지속되었으며 종종 자본의 주요 제공자로서 밀접하게 관련된 핵심 개인이 있었다. 종종 ("한 빵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에서 파생된) 회사는 이들 가족 씨족의 이름(예: Bardi, Peruzzi)을 따왔지만, 가족 구성원으로만 구성된 적은 없었다. 예를 들어, 1300년에 페루찌(Peruzzi) 회사는 7명의 가족 구성원과 10명의 외부인이 60/40 비율로 결합하여 당시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85,000 플로린의 자본을 축적했다(Hunt and Murray 1999, 105). 파트너십은 1310년의 바르디(Bardi) 회사에서와 같이 더욱 다양화될 수 있었는데, 이 회사는 각각 양도 가능하고 생존 가능한 56주로 구성되었으며 회사 자본은 현대 채권과 매우 유사한 고정 이자율을 지닌 외부인의 예금으로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현대의 헤지 펀드와 마찬가지로 귀족이든 부유한 상인이든 "순자산 가치가 높은 개인"의 중세 선조들은 초과 현금을 이러한 회사 중 하나 이상에 투자했다 (Spufford 2002, 22–23).
상대적으로 저렴한 자본의 이러한 양은 가능성의 세계를 열었다. 각 회사는 그 자원을 다르게 배치했지만 유럽 상업의 주요 도시에 설립된 모든 지사 또는 지원 대표는 종종 회사명의 일부를 형성한 가문의 지도적 구성원이 거의 대부분인 카포(capo) 또는 회장이 이끄는 관리 이사회의 권한 아래 주주로 구성되었다. 국내와 해외 직책 모두에서 이 사람들의 존재는 빈번한 파트너십 해체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지속적인 조직이라는 확신을 고객에게 제공했다. 이러한 영속성은 독특한 또는 문장의 디자인의 회사 로고를 사용하여 강화되었다(Spufford 2002, 44, 46).
어떤 거대한 기업이 공식적인 책임 구분이나 권한 라인을 작성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페루찌 회사의 남겨진 기록에서 플로렌스와 해외에서의 회사 운영의 다양한 부분에 대한 많은 참조는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것들은 페루찌가 운영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분권화를 허용하는 조직 형태를 가졌지만 플로렌스의 강력한 회장실에 중요한 의사 결정 영역을 유보했다고 제안한다. 플로렌스의 운영은 여러 자회사가 회장에게 직접 보고하는 등 상당히 중앙 집중화되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소위 tavola(문자 그대로 "테이블")는 주로 플로렌스에서 관리되는 은행 업무를 처리했고, mercanzia는 플로렌스 외부의 무역 및 물류를 처리했다. drapperia는 소규모 직물 계약 제조 작업을 관리했다. "특별 계정"은 (종교적) 자선단체 기사단(the Order of the Hospitalers) 및 특정 교회 고위 인사와 같은 중요한 외국 고객을 감시하는 것으로 플로렌스에서 직접 하였다. limosina는 단순히 회사의 자선 단체가 연결되는 계정이었다. 회사 자본의 약 2%는 "신의 일"을 위해 할당되었으며 limosina는 그로부터 이익을 할당받았다(Hunt 1994, 76–100).
1330년대에 페루찌가 고용한 133명부터 1310년에서 1345년까지 바르디에서 일했던 346명에 이르기까지 이 대기업의 직원 수는 수백 명에 이른다. 그들의 이름이 회사에 있는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의 수가 매우 적다는 것은 족벌주의가 선택과 승진의 지배적 기준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러나 직원들 사이에서 경쟁 회사의 가족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 간 동맹이 규칙이었는데, 이는 상인 엘리트는 후원과 상호 의무의 잘 갖춰진 길을 따라 그의 가장 똑똑한 아들을 보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젊은이들은 종종 해외에 파견되어 특정 회사의 비밀과 관행에 대해 교육을 받았고, 자신의 가족과 사업을 시작하기에 충분한 부를 가진 성숙하고 유능한 상인이 되어 플로렌스로 돌아왔다.
무역 도구
슈퍼-컴퍼니는 사회와 거리로 인한 무역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비즈니스 관행 툴킷(tool-kit을 계승하고 개발했다. 중세 기업가들을 괴롭히는 가장 만연한 문제 중 하나는 통화 공급의 경직성이었고 가장 창의적인 혁신 중 일부는 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3세기에 유통되는 화폐는 압도적으로 주조된 주화의 형태였다. 가치가 낮은 일부 주화는 기본 금속에서 주조되어 일일 구매를 위한 소액의 잔돈으로 신탁 가치가 더 높을 수 있다. 무역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화폐는 내재 가치가 있는 주화로 주로 은으로 만들어졌으며 13세기 중반부터는 금으로도 만들어졌다. 따라서 통화 공급은 귀금속과 관련된 물리적 현상, 즉 광산의 생산, 마모 및 비축으로 인한 손실, 예술품으로의 전환, 동양과의 무역 불균형을 메우기 위한 지속적인 유출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유럽 경제는 채광 생산량이 높게 유지되는 한 엄청난 양의 정금(正金, specie)을 빼돌릴 여유가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금괴 거래의 효과는 일반 거래를 자극하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줄임으로써 완전히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채광 생산량이 감소하고 유출이 계속되자 유럽은 14세기와 15세기에 반복된 "금괴 기근"의 디플레이션 효과를 경험했다(Spufford 1988, 339–62).
기업가들은 이윤을 실현할 수 있다면 수출 상품이나 주조 재료로 귀금속을 이곳저곳으로 옮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주화를 돈으로 옮기는 것은 거래에 가치를 더하지 않는 사업 비용이었다. 통행료, 보안 및 운송의 비용이 상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히 모든 주화의 금괴 함량을 측정해야 하는 경우 도시 시장에 주화를 가진 메신저를 보내는 것은 상당한 성가심이었을 것이다. 주화의 불편함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는 유럽 전역의 시장에서 편재(遍在)하는(ubiquitous) 인물이자 중세 은행의 창시자인 환전상이었다. 이 환전상들은 주화의 무게와 순도를 평가하는 기술을 통해 주화가 지배하는 경제에 질서를 가져오는 유용한 서비스를 수행했다. 그들은 또한 금괴의 주요 공급자로서 정부에 서비스를 그리고 조폐국에 사용된 주화를 공급했다. 금괴 가격과 외국 주화의 환율에 대한 우월한 지식은 동료 상인들에 비해 상업적 이점을 제공했지만 공정한 거래에 대한 의무도 부과되었다. 일부 환전상은 충분한 자격이 있는 고객과 충분한 정금을 예치금으로 확보하여 표준 계좌 금액기준으로 안전보관을 위해 그러한 예금을 기록했다. 그러한 "장부" 화폐는 상인들에 의해 실물 대신에 거래되기 시작했다(Murray 2005, 119–77).
이런 식으로 상인 환전상은 점차적으로 상인 은행가가 되어 (적어도 14세기 이전에는) 수표를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 계좌로 대금과 신용을 이체함으로써 지불을 실행했다. 이것은 소위 지로(giro) 시스템(이탈리아어 회전하다의 girare에서 기원)인데, 현대 유럽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 시스템은 은행가와 그의 상인 고객이 서로를 알고 은행가의 테이블에서 구두로 그들의 지침을 제공하여 기입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작동했다. 사업의 개인적인 특성과 은행이 안전보관을 위해 예금도 가져갔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당좌 대월을 통한 신용 확장으로 이어졌다. 소수의 선도적 상업 도시에서만이기는 하지만 부분 준비금 원칙에 따른 이러한 대출은 사실상 추가적인 화폐 공급을 창출했다(de Roover 1948).
상업 혁명의 가장 중요한 금융 혁신은 서유럽 내에서 거래하는 국제 기업가에게 큰 가치의 세 가지 속성을 결합한 환어음이었다. 그것은 정금의 운송 비용을 회피했고, 그것은 국제 신용 및 통화 교환을 위한 실용적인 메커니즘을 제공했으며, 교회의 고리대금업 금지를 잘 처리했다. 환어음은 이탈리아 항구 도시 제노아에서 처음 사용된 공증된 교환 수단에서 진화한 후 13세기말에 최종 형태를 찾았다(Murray 2005, 65; Spufford 2002, 34–35). 완전히 발전된 환어음은 한 당사자가 한 날짜에 한 장소에서 한 통화로 금액을 받고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통화로 갚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거래에는 발행 도시의 차용인과 대금업자, 상환 도시의 차용인의 특파원(지불인)과 대금업자의 대리인(수취인)의 네 당사자가 참여했다. "어음기간(usance)"이라고 하는 날짜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베니스와 브뤼헤 간 60일, 베니스와 런던 간 90일과 같이 두 위치 간에 상품을 이동하는 데 일반적으로 허용되는 시간을 반영했다. 물론 환어음(bills)은 훨씬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었고 우리는 1260년대부터 토스카나의 도시들과 상파뉴의 정기시(定期市, fairs) 간에 유지된 전문 택배 서비스에 대해 알고 있다(Spufford 1988, 25). 발행처, 발행일, 환매일 외에도 환어음에는 거래에서 발행인에게 합리적인 이윤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환율이 명시되어 있다. 대금업자의 대리인은 외환을 사용하여 상품을 구매하거나 반대 방향으로 새 환어음을 작성하여 대금업자의 통화로 그것을 변환하도록 지시받을 수 있다. 그리고 환어음은 상인이 상인을 위해 개발했지만 그 이점은 상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정부의 거대한 기관에서도 향유되었다(Murray 2005, 66 및 n. 9; Spufford 2002, 37).
이탈리아 상인의 두 번째 중요한 기업가적 돌파는 회계였다. 광범위한 상인과 관료는 오랫동안 단일 항목 회계를 사용했다. 이러한 형태의 부기는 신용과 부채를 쉽게 추적할 수 있기 때문에 의사 결정을 위한 합리적인 기반을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하는 이점이 있다. 단점은 이윤을 자동으로 회계 처리하지 못하고 자본과 수익을 별도로 측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를 쉽게 은폐할 수 있어 빈번한 감사 및 기타 사기 방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슈퍼-컴퍼니의 거래 및 회계의 복잡성은 현금 영수증의 이중 입력으로 이끌었는데, 이는 먼저 채무자의 계정을 탕감한 다음 출납원의 계정에 청구하여 상호 참조 설정을 허용한다. 1300년까지 새로운 시스템은 이탈리아 기업들 사이에 널리 퍼졌고 대차대조표 데이터와 자본 및 수익의 별도 회계를 제공하는 정교한 수준의 발전에 빠르게 도달했으며, 발생액(accruals) 및 감가상각과 같은 유용한 개념을 도입했다.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는 또한 이 위대한 기업 시대의 주목할 만한 발전이었다. 1300년 이전에 상인들은 종종 상품을 여러 선박으로 분리했으며 해상 재산은 한 사람이 치명적인 손실을 입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여러 소유자에게 분할되는 경우가 많았다. 보험 대부라는 형태의 위험 확산의 원시적 형태는 13세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에는 두 당사자가 관련되어 있는데, 선주는 상품을 선적하는 상인에게 자신의 선박에 맡겨진 상품의 전체 또는 일부와 동일한 금액을 선불로 지불했다. 화물이 안전하게 도착하면 상인은 운송 비용과 위험을 충당하기 위해 추가 비용과 함께 대출/선급금을 상환했다. 물품 운송이 손실되면 상인은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선금을 보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해상 보험은 제노아에서 14세기 초반에 시작되었으며, 이때 보험료는 손실을 보장하기 위해 명시적으로 부과되고 공증 문서에 기록되었다. 14세기말에 보험업자들은 피사, 베니스 및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 위험을 평가하고 위험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를 기반으로 보험료를 책정하면서 일했다. 15세기말까지 해상 보험은 네덜란드의 항구를 포함한 모든 주요 유럽 항구에서 이용 가능했다(Spufford 2002, 33).
그러나 플로렌스의 슈퍼-컴퍼니들의 운명은 모든 위험이 보험에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비즈니스 환경의 변화는 가장 정교한 비즈니스 구조조차 무너뜨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회사들의 기반은 항상 날씨와 관련된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남부 이탈리아와의 매우 수익성 있는 곡물 무역이었고 이로 인해 가격 설정 및 공급에 대한 정부 간섭이 증가했다. 1329년의 기근조차도 곡물 유통업자에게 혜택이 되기는커녕 너무나 심각하고 널리 퍼졌기 때문에 그 거대 기업들은 고전적인 가격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판매자 시장에서 공급을 위해 다투면서 정치적으로 허용되는 가격으로 곡물을 공급해야 했다. 1330년대에는 도시 정부가 곡물 구입자 역할로서 진입하여 따라서 그 회사들이 여러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는 것을 차단했고, 그리고 1347년의 대 역병이 도래하기 전에도 이탈리아 전역에서 인구가 감소했다. 30개월의 기간 내 바르디(Bardi)와 페루찌(Peruzzi)의 파산은 유럽에 충격을 주었고 일부 동시대 사람들은 영국 왕의 미지급 부채를 원인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진짜 범인은 그러한 거인 기업을 불필요하게 만든 경제 상황의 변화였다. 그들의 많은 기법과 혁신이 표준 비즈니스 관행으로 계속되었다는 사실은 단기적인 실패가 장기적으로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유럽 북부
북부는 남부와 다르고 뚜렷한 방식으로 발전했지만 북부는 대부분 이탈리아인인 남부의 기업가와 기업가적 기술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북유럽 비즈니스의 정교함을 과소평가하거나 단순히 파생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다. 실제로 여러 면에서 남과 북의 거대한 만남의 장인 상파뉴 정기시에서 시작된 기업가적 혁신은 결국 14세기에 브뤼헤에서 포착되고 도시화되었으며 차례로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으로 전달되고 확장되었다.
북부 도시 공동체와 남부 도시 공동체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특히 양모 직물 제조와 같은 산업이 북부 도시로 초기에 이동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플랑드르에서 11세기에 발판으로 작동되는 수평 직기가 발명되면서 규모의 경제와 품질의 엄청난 향상이 가능해졌다. 13세기에 수평 직기가 광직기로 교체되면서 품질이 더욱 향상되었다. 직조는 주로 남성의 직업이 되었고, 도시를 중심으로 규제 통제를 받았다. 주변 시골에서 온 이민자들은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했지만 양모 세척 및 방적과 같은 일부 옷감 공예는 여전히 시골 직업으로 남아있었다. 생산 확대는 주로 양모와 염료와 같은 원자재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12세기에 플랑드르의 성읍들과 영국의 목초지가 통합되어 플랑드르 직공, 축융공(fullers), 염색공이 영국산 양털로 만든 대량의 양모를 완성된 옷감으로 만들었다. 플랑드르 천에 대한 수요는 멀리 떨어진 경제 지역에서 왔으며 천을 향신료(염료 포함)로 교환할 수 있는 주기적인 시장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상파뉴 정기시가 탄생했다(Nicholas 1992; Munro 2003).
6개의 상파뉴 정기시는 북부 기업가들이 일하면서 당면한 제약과 기회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유럽 도시화의 쌍둥이 극인 저지대 국가와 이탈리아 사이에 거의 등거리에 있는 상파뉴 지방은 그 지방으로의 여행의 안전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에 공정한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무역을 개시하고 유지하기를 열망하는 일련의 백작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1175년경 플랑드르 상인들은 보통 중간 등급의 천을 남쪽으로 가져와 이탈리아 상인에게 판매했는데, 그들은 유럽의 모직물을 지중해 전역의 중요한 수출 상품으로 만들었다. 다음 세기 동안 6개 정기시의 리듬과 상인들의 지속적인 참여는 시험적이기는 하지만, 상인 은행업의 시작을 형성한 신용 및 지불의 금융 시스템을 만들었다. 자본이 풍부한 이탈리아인들은 장래의 정기시에서 상환할 신용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상환할 돈도 선불했다. 이탈리아인 외에도 상파뉴 중심 경제의 거대한 수혜자는 많은 북부 프랑스/플랑드르 도시들 특히 아라스(Arras), 릴(Lille), 캉브레(Cambrai), 투르네(Tournai) 및 발랑시엔(Valenciennes) 등의 직물 기업가였으며 아라스는 이 지역의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다 (Spufford 2002, 144–47).
이러한 산업 생산, 금융 및 환전의 유통은 북부 기업가들에게 영구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상인 길드에서 함께 뭉치는 경향이 있었다. Henri Pirenne은 이것이 정기시에서 정기시로 대상(隊商, caravan)으로 함께 여행한 결과라고 추측했다. 12세기까지 상인 집단의식은 영국에서 독일에 이르는 도시에서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기능으로 옮겨졌다. 오랜 습관으로 인해 그때 북부 상인들은 남부 상인들보다 수명이 짧고 더 역동적인 사업 관계를 형성했다. 이들 중 더 소수는 확대 가족을 기반으로, 길드에 의해 형성된 보다 유동적인 관계를 선호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관 관계를 따라 투자 자본, 심지어 도시 금융까지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15세기가 되어서야 북부 상인들이 이탈리아의 주식회사를 모방하기 시작했고, 그때에도 북부 상인은 종종 단독으로 또는 소수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종종 단일 사업 벤처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경향은 브뤼헤의 거리와 시장에서 완전히 표현되었다.
일련의 변화와 동요를 통해 브뤼헤는 1300년 이후 새로운 교류의 중심지로 부상했으며, 처음으로 도시는 파리와 런던과 같은 대도시를 포함하여 북부 전체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브뤼헤의 새로운 지위는 영국 양모의 전통적인 출입항으로서 유리한 지리적 위치와 동부, 서부 및 남부 육로 무역로가 교차하는 위치에 크게 기인한다. 이 도시는 선박에 대한 운송 선호도의 변화로 엄청난 혜택을 얻었고 브뤼헤는 지중해 무역 함대의 목적지가 되었는데, 1280년대에 처음으로 그곳에 정박하였다. 영국 양모 및 플랑드르 천 무역에서의 전통적인 역할 때문에 브뤼헤는 이탈리아 선박에 수익성 있는 회항 화물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독일 및 기타의 한자 동맹(Hanse) 구성원을 일컫는 "동부인"은 이탈리아인이 운반하는 상품에 의해 유인되었고, 그리고 그들 자신의 상품들, 모피, 밀랍, 꿀, 호박, 그리고 나중에는 곡물, 맥주 및 금속을 팔기 위해 유인되었다. 브뤼헤로 여행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저지대 국가들과 프랑스 북부의 부유한 배후지에서 생성된 수요를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브뤼헤는 플랑드르, 브라반트(Brabant), 에노(Hainault)의 통치자들과 서부 독일의 공국(公國)들이 소비하는 사치품의 자연스러운 유통 지점이 되었다. 중요한 환적 지점으로서 이 도시는 다양한 도시에서 온 수많은 영국인, 독일인, 이탈리아인뿐만 아니라, 카탈로니아인, 북부 스페인인, 포르투갈인을 포함한 외국 상인들의 식민지를 끌어들였다(Murray 2005, 95–97).
무역 패턴의 이러한 변화와 동시에 일어난 것은 영국 양모를 대륙으로 수출하는 중개자로서 이탈리아인에 의한 플랑드르인의 대체였다. 영국 왕이 일련의 금수조치, 보복적 몰수, 수출세, 해적 행위를 시행함으로써 경쟁국인 프랑스에 보복했기 때문에 전쟁이 이러한 대체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프랑스의 일부이지만, 영국에 경제적으로 연결된 플랑드르를 십자포화에 놓이게 했다. 이탈리아인들은 또한 많은 양의 현금을 가져와 장래의 양모의 연간 산출량을 구입하고 영국 전쟁 자금을 조달했다 (다른 이탈리아 회사는 프랑스 왕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단계별로 플랑드르 인들은 상품의 운송 및 직거래에서 벗어나 대신에 중개인, 파트너 및 기업가의 정주적이고 안정적인 역할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노력을 방향 전환해야 했다.
브뤼헤 정부는 도시의 비즈니스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이러한 방향 전환을 추진했다. 도시에 제대로 된 시청이 생기기 전부터 두 개의 주요 상업용 건물, 여러 개의 자치도시 규모의 건물 및 플랑드르 예술가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유명하게 만든 거대한 인력으로 움직이는 급수관(crane)이 있었다. 브뤼헤는 또한 중세 도시의 저주인 화재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도시 중심부의 초가지붕을 금지한 저지대 최초의 도시였다. 비즈니스를 지원하는 많은 인상적인 작업이 도시의 영광을 더해 주었지만 가장 중요한 매력은 외국 상인에게 숙박, 은행, 중개 및 비즈니스 접촉을 제공하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이었다(Hunt and Murray 1999, 160– 64).
브뤼헤의 성공에 필수적인 것은 도시의 여관주인과 환전상이 제공하는 장부 이체 및 보완 지불 서비스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복잡하고 광범위한 장부 이체 시스템을 통해 브뤼헤에 계좌가 있는 상인들은 도시의 벽 너머로 멀리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지불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브뤼헤 환전소는 지로 이체 시스템을 지역 거래뿐만 아니라 해외 무역으로 확장했다. 하나의 가까운 사례는 브뤼헤에 거주하는 상인이 앤트워프를 방문하는 무역 정기시 기간 동안 브뤼헤 계정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환전상이 중요했던 만큼, 그들은 대부분 외국 상인 고객에게 시의원 앞에서의 법적 대리부터 금융 및 기타 비즈니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관 주인의 여러 측면에서의 하급 파트너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브뤼헤 여관 주인은 고객이 맡긴 자본을 투자하고 파트너십을 조직하고 자신의 계정으로 기회를 추구하는 금융가였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상파뉴의 정기시 성읍돌과 아라스 같은 금융 중심지로 나누어졌던 지불 및 금융 시스템이 한 도시에 합쳐지게 되었다(Murray 2005, 216–58).
이것은 교차로가 브뤼헤에 있는 한 중앙집중식 경제 시스템이었다. 그곳에는 모든 중요한 장거리 상인이 실제로 현재하지 않더라도 현재해야 했다. 따라서 컴퓨터 네트워크의 노드와 같이 브뤼헤는 토스카나에서 독일 한자 동맹의의 가장 외딴 성읍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지리적 및 금융 시스템을 통합하여 이러한 상인들이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15세기를 지속하면서 상인들이 모여 사업을 하기 위해 따로 마련된 공공 광장인 브뤼헤 증권거래소(Bourse of Bruges)의 필수적인 배경이었다. 여관 관리 및 중개업과의 연관성은 Bourse라는 이름으로 명시적인데, 이 이름은 그 공공 광장에 서 있던 유명한 여관의 가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거래소의 상인들(merchants of the Bourse)"은 환율의 기초가 되는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모였고, 그리하여 환어음이 작성되었다. 거의 1세기 동안 이것은 유럽의 선도적인 자금 시장이었다(Murray 2005, 178–215).
사회적 제약: 고리대금업, 기사도, 길드
비즈니스와 개인의 가치가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회의 권위는 일상적인 비즈니스 활동에 심오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종교적 태도가 널리 퍼져 있다는 증거는 가장 일상적인 상업 문서에 나타난다. 회사의 장부는 보통 사업의 성공과 직원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플랑드르의 은행가들은 “신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로 장부를 시작했다. 기독교 경전과 교회 (또는 규범) 법은 단순히 장식적인 것 이상이었다. 그것들은 기업가적 생활의 구조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했다. 13세기에 공식화된 중세의 "공정한 가격" 개념은 마태복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예언자이니라” 의 그리스도의 명령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메시지는 특히 한 사람의 이득이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오는 제로섬 게임으로 삶을 보았던 서유럽의 농경 및 소도시 문화와 관련이 있다. 교회 신학자들과 법률가들은 모든 종류의 경제 거래를 면밀히 조사하고 그것들의 도덕성과 합법성에 대해 선언했다. 상업 혁명 동안 그러한 선언의 수와 다양성은 상업의 성장과 발맞추어 증가했다.
유럽의 기업가적 풍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제는 고리대금의 취급이었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 뿌리를 둔 중세 고리대금 교리는 단지 과도한 이자뿐만 아니라 모든 이자를 대죄로 간주했다. 교회 평의회는 4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이 금지령을 상기시켰고 샤를마뉴 황제조차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고리대금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리고 13세기 고리대금 교리에 대한 긴 재진술에서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간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의존했다. 고리대금업자에 대한 교회 및 민사 처벌은 12세기 후반부터 14세기까지 발포되었으며, 고리대금업자는 봉헌된 땅에 묻히거나 성사를 받을 수 없으며 심지어 유효한 유언장을 작성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박탈당했다 (Armstrong 2003).
사람들에게 교회의 맹렬한 고리대금 금지 입장을 취한 것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라는 두 명의 최고 탁발 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는 그 자신이 토스카나 천 상인의 아들이었고, 그의 돈과 상업에 대한 공포는 유럽 도시 계층의 영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프란치스코 설교자들 세대에게 특별한 우위를 제공했다. 도미니크 수도회는 탁월한 중세 설교자였으며 돈과 그 사용에 관한 교회 교리에 지적인 엄격함을 부여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the Great)는 둘 다 도둑질로 간주한 고리대금의 본질적인 특성에 대해 날카롭게 썼다. 그리고 모든 유럽인들은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공포를 설명하기 위해 공표된 무시무시한 사례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이것들은 고리대금업자가 살인자, 신성 모독자, 소돔인들과 함께 지옥에서 특히 낮은 틈새를 차지하는 단테의 <신곡(Commedia)>에서 문학적 표현을 달성했다.
중세 기업가에게 있어 고리대금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주요 문제는 소비를 위한 대출과 생산 목적을 위한 대출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이자를 받는 모든 대출은 죄악이라고 본 것이다. 12세기부터 신용의 필요가 사업 금융을 부풀어 올리면서 합법 대부와 불법 대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편으로 소비 신용 제공자는 소외되었다. 유대인 및 기독교의 전당포 상인과 일상의 대금업자는 그들의 직업에 대한 법적 및 사회적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환전상 등 “합법적인” 상인들도 고리대금의 오점을 면하지 못했다. 많은 상인들이 이자이윤을 어음에 은폐하고서도 수익의 상환을 유언장으로 작성했다. 그러나 고리대금에 대한 절대적 금지는 시에나의 피터 존 올리비(Peter John Olivi)와 베르나르디노(Bernardino)와 같은 몇몇 이론가들의 글에 의해 잠식되었다. 그들은 특정 유형의 비소비 대부는 대부자의 수익의 손실 -돈의 시간가치의 초기 개념- 때문에 합법적인 것으로 주장했다. (Little 1978; Hunt and Murray 1999, 70–74).
기사도 정신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된 고정관념 중 하나는 상업을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손상시키고 품위를 떨어트리는 것으로 혐오하는 한가한 귀족이다. "장사"하는 것은 비천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18세기 이전의 일부 유럽 국가, 특히 프랑스에서는 귀족이라는 칭호가 농업, 정부 (왕실) 서비스 및 전쟁을 제외한 모든 사업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고귀한 삶", 즉 엘리트 지위의 물질적, 사회적 안락함이 중세와 초기 근대에 걸쳐 항상 소수의 사회적으로 이동이 가능한 개인의 목표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신은 기업가적 노력에 강력한 상쇄력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세 경제 성장의 역사에서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장애물은 실제보다 더 분명했다.
기사도 형성기의 이야기가 좋은 예이다. 윌리엄 마샬(William Marshal 약 1146–1219)의 삶을 기리는 서사시에서 영웅은 종자와 함께 프랑스 북서부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눈이 맞아 달아나는 승려와 젊은 귀족 여성을 만났다. 윌리엄이 심문했을 때 그들의 계획은 지역 대부업자에게 투자할 금액의 수익금으로 젊은 여성의 가족이 찾지 못할 이름 없는 도시에서 함께 사는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윌리엄은 그 젊은 여성의 가족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행동을 승인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통과시키기 전에 그는 그들이 먹고살려고 했던 돈을 압수하여 고리대금업의 죄와 스캔들로부터 그들을 "구해냈다." 이것은 절도에 대한 명백한 변명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돈의 오용에 대한 기사도의 모범이 보여주는 혐오감을 드러낸다. 이자로 사는 것은 귀족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의 돈 사용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현지 여관에 있는 측근에게 돌아오자, 그는 종자에게 돈을 세어 (그는 직접 만지지 않으려고 함) 그것을 종자들에게 나눠주고 공교로운 한 바탕의 음주와 식사 비용도 지불하게 했다. 즉,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개인 간의 유대를 강화하고 지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4
그러나 기사들은 돈을 축적하거나 무역에 투자하는 데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돈과 복잡한 관계를 가졌다. 다시 말하지만, 윌리엄 마샬은 기업가로서의 기사의 좋은 예를 제공한다. 하급 귀족 가문의 어린 아들로서 윌리엄은 가문의 토지와 소유물에 대한 법적 지분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과 딸들에게 때때로 일어나는 것처럼 그의 유언장에 그를 위해 어떤 특별한 제공도 하지 않았다. 더 부유하고 더 강력한 친척의 집에서 무기 훈련을 마친 후, 윌리엄은 토너먼트라고 불리는 전투, 스포츠 및 상업의 혼합에서 싸우는 기술을 연마하고 완성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마샬의 경력은 토너먼트가 왕들 사이에서 존중을 받았을 때 그리고 성직자 기관으로부터 최소한 마지못해 승인을 얻었을 때 시작되었다. 성직자 기관은 처음에는 (토너먼트의) 모든 참가자를 파문하고 토너먼트에서 사망 한 사람에 대한 매장 의식을 거부했었다. 마상 시합은 또한 대영주들의 후원과 적을 포획하고 몸값 배상금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 때문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스포츠가 되었다. 실제로 일부 성직자들은 토너먼트와 무역 정기시에 대해 같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미경험자에게는 매우 유사하게 보였을 것이다(Crouch 2002, 192–99).
윌리엄 마샬은 토너먼트 선수로 16년 동안 경력을 쌓은 동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축재가이었으며, 상대를 좌우로 제압하고 패배한 상대의 자유와 장비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승리를 은화로 바꿨다. 이러한 추구는 매우 수익성이 높았고, 마샬은 그의 주방 사무원이 회계사로 일하는 진정한 전투 회사에서 다른 기사와 힘을 합쳤다. 2년 간의 치열한 싸움 중에, 시즌 동안 2주의 짧은 간격으로 프랑스와 플랑드르 전역에서 토너먼트를 벌이면서, 이 기사 기업가들은 무려 500명의 기사를 포로로 잡았다. 그렇게 해서 마샬이 얻은 부는 오락, 장비, 주변 사람들을 위한 호화로운 선물, 그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모든 투자에 사용되었다. 궁극적으로 한때 땅이 없는 이 기사는 존 왕의 사후 몇 년 동안 영국의 섭정이자 최고 장군이 되었다. 이것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기사에게 참으로 풍성한 보상이었다(Crouch 2002, 194).
중세 길드
길드는 전통적으로 기업가정신에 대한 장애물 목록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했으며, 현대 역사가들이 더 이상 이 평가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길드 방해주의의 신화는 여전히 대중적인 역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것은 길드 법령의 문자적 해석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및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에 지나치게 의존한 오래된 역사서술의 불행한 결과이다. 지난 반세기의 연구는 전통적인 그림에 상당한 뉘앙스를 추가했으며 공예 길드가 현상 유지의 보험자일 뿐만 아니라 혁신과 경제적 변화를 위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정 길드의 산업 및 시장 조건뿐만 아니라 그 길드가 운영되는 지리적 위치 및 정치적 맥락에 따라 많은 것이 달랐다(Black 1984; Stabel 2004).
제거해야 할 첫 번째 신화는 길드가 법적 독점과 뚫을 수 없는 사회 구조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되는 획일적인 제도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듯이 중세 도시의 인구 통계는 인구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극도로 높은 사망률로 인해 모든 제도의 확고한 안정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유아 사망, 전염병, 범죄, 군사 행동으로 인한 높은 사망률은 중세 길드가 시장 경제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민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신입자에 대한 개방성은 저지대 국가와 이탈리아 북부의 천 산업과 같이 장거리 무역에 관련된 제품을 생산하는 길드에서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15세기 브뤼헤에서는 여러 길드의 매스터(masters) 중 4분의 3 이상이 외국인이거나 소속되지 않은 현지인이었다. 매스터의 직을 매스터의 아들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는 길드는 지역 판매 식료품점의 진열대의 통제에 의존하는 덜 역동적이고 음식 중심의 거래에 집중되었다 (Stabel 2004, 194).
공예 길드는 또한 경쟁과 시장 상황의 변화에 직면하여 산업을 재편하는 데 있어 상인 기업가와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노동력의 조직자이자 제품 품질의 보증인으로서 길드 매스터는 종종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여 생산 방향을 바꾸었다. 이러한 유연성과 협력 능력은 중세 도시의 권력 구조에 의해 도움을 받았는데, 중세 도시들은 도시 당국의 집행 시 길드와 상인 그룹의 지도자들을 함께 모았다. 따라서 중세 플랑드르에서는 일부 직물 유형을 포기하고 정교한 내용 및 품질 기준을 시행하면서 고품질 직물 생산으로의 전문화를 통해 거대한 천 도시에서 생산량의 심오한 방향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심오한 변화는 시장 데이터와 장거리 운송 네트워크 보안의 변화에 대응하여 상인-무역자 및 천 공예 길드 지도자들과의 장기적인 협상의 결과였다. 복잡하며, 길드가 조율한 생산 공정의 산물인 고가의 직물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유럽이 부과하는 더 높은 거래 비용을 더 잘 견딜 수 있었다. 이 길드 조직 기업의 한 변형은 북부 이탈리아의 섬유 산업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북유럽 직물의 품질을 모방하면서 비용을 줄임으로써 북유럽 직물의 우월성에 도전할 수 있었다(Hunt and Murray 1999, 166–70).
결론
중세 밀레니엄(500-1500)에 걸친 기업가의 역사는 여러 면에서 교훈적이다. 첫 번째는 중세 사회가 종종 눈에 보이는 개별 기업가 없이 기업가적(즉, 경제 성장 달성에 효과적)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이다. 이것은 종종 도전적인, 사회적 및 정치적 규범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경제적 기회를 포착하고 활용하는 승리한 개인이라는 현대적 개념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시대를 넘어 성장을 이끈 것은 개인의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교회가 정의한 기독교 사회의 사명에서 비롯된 다양한 공동 목표에 대한 헌신이었다. 그 틀 내에서 교황청과 수도원 같은 교회 기관은 확장하는 유럽을 포괄하도록 경제적 범위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1200년까지 베네딕토 수도원과 시토(Cistercian) 수도원은 아일랜드에서 실레지아(Silesia)로,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노르웨이까지 농업생산을 조직화했고, 이 지역과 그 사이 지역에서의 수입은 유럽 최초의 장거리 금융 네트워크를 통해 로마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갔다. 더욱이 중세 귀족들은 그리스도교국을 보호하기 위해 신이 주신 소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유럽의 지리적 경계를 확장하고 말, 무기, 갑옷, 그리고 그것들을 숙달하는 데 필요한 여가를 필요로 하는 삶의 방식을 발명했다. 귀족적 수요와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에 대한 투자의 강력한 조합은 9세기와 10세기에 시작되어 14세기의 침체기에도 계속되는 농업 성장의 물결을 부채질했다.
기업가가 없는 초기 중세 기업가정신은 농업 기계, 즉 물과 풍차, 동물의 힘을 얻는 기술(쟁기 및 마구), 생산적인 토지 이용 기술에 대한 중요한 투자를 담당했다. 수도원은 토양 비옥도 유지에 매우 중요한 가축뿐만 아니라 씨앗과 작물을 정제하고 개량하는, 종종 간과되었던, 관리 및 기록 보관 기술을 개척했다. 승려들이 1200년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가치 있는 포도원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 가장 큰 양 떼를 돌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혁신으로 얻은 수입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 종교 문화에 대한 투자 및 수도원 유럽의 전례와 식탁에 금, 비단 그리고 향신료를 가져오는 무역 네트워크를 지원했다. 철저히 장기적인 제도인 수도원은 중세의 세기에 걸쳐 유럽 시골을 정착시키고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안정성과 투자의 중요한 혼합물을 제공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기업가적 제도인 중세 도시는 경제적으로 특화된 공동체가 성과 수도원 주변에 모일 수 있도록 하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성직 영주와 세속 영주 둘 모두의 행동에 힘입어 시작되었다. 그리고 고객이 되는 것 이상으로 영주는 초기 성읍에서 무역을 제한하지 않는 다양한 자유와 면제를 부여했으며 영주는 외부인과 그들의 돈을 끌어들이는 데 사용되는 시장과 법원의 보증인 역할을 했다. 상대적인 자유와 재산 및 교환에 대한 법적 보장을 배경으로 생산과 분배 무역의 결합은 도시 공동체가 유럽으로 회귀하는 공통분모였다. 게다가 과거 로마나 그리스의 도시와 달리 중세 성읍과 도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도시들을 경제 혁신의 선도적인 실험실이 되게 한 기업가적 본질을 중심에 두었다. 그 도시들은 또한 중세 후기에 유럽 역사상 최초의 명확한 개별 기업가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치가 중세 기업가의 지평을 정의하고 제한하는 상인-장인 공동체를 고무했다.
유럽의 선도하는 상업 도시에서 온 개인들은 기업가적 노력을 통해 막대한 부자가 될 수 있었지만 부는 결코 그들의 야망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플로렌스의 메디치 가문과 같은 부유한 상인 왕조는 돈을 이탈리아에서 현지와 지역 정치를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그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모든 것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예술에도 혜택을 주었다. 부유한 영국 상인 윌리엄 데 라 폴(William de la Pole)은 강력한 정부 관료이자 왕실 금융가가 되었지만, 그는 그다음 세대에 하층 귀족에 합류한 가문의 유일한 기업가였다. 사례는 다양할 수 있으며, 모두 영구적인 사업이나 경제적 이점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과 사회적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고안된 전략을 보여준다. 이미 14세기와 15세기에 부유한 도시 가족이 궁핍한 귀족 씨족과 결혼하는 패턴이 널리 퍼졌다. 따라서 중세의 사회적 진보는 성공한 기업가가 아니라 귀족 정치에 의해 한정되었다. 이것은 유럽 전역에서 사실이었으며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중세 기업가에 대한 연구는 시간과 맥락에 관계없이 행동하는 어떤 종류의 영원한 기업가에 대한 보편적인 주장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많은 (대부분은 아닐지라도) 시대와 장소에서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가정한 경제적 진보라는 이름의 창조적 파괴는 존재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독립적인 기업가의 상대적 부재 또는 중요하지 않음이 경제 성장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제사가는 다른 시대와 문화의 고유한 성향을 인식하고 민감해야 하며, 이는 전면적인 일반화나 지나치게 추상적인 모델에 대한 건전한 회의론을 조장해야 한다.
Note: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무한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 논문은 경제적 패권이 남유럽에서 북유럽으로 넘어가는 Missing Link를 이야기한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질리지 않을 주옥같은 연구성과이다. (2023.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