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번스타인
16-17/ 센추리온 호의 선장은 H-1 해상 크로노미터를 가지고 그의 첫 항해에 동참했던 시계공 존 해리슨(John Harrison)에게 감사해야 한다. 1937년 늦은 봄, 수평선 위로 영국 해안선이 희미하게 보이자 센추리온 호의 항해사는 기존의 추측항법에 따라... 센추리 호의 프록터 선장은 해리슨의 판단에 따라 동쪽으로 선회했다... 꼭 30년 전, 함대 사령관 클로디즐리 쇼벨 경(Sir Clowdisley Shovell)은 동일한 항해 오류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그의 함대는 실리 제도 암초지대로 들어가 2천 명이 넘는 함대원들이 익사한 참사를 겪었기 때문이다. 7년 후인 1714년에 의회는 경도법을 통과시켜 경도위원회를 설립하고 오차범위 0.5도(약 30마일) 이내의 동서 위치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2만 파운드의 상금을 주기로 했다.
프록터는 해리슨에게 생명을 빚졌을 뿐만 아니라 증기 엔진의 발명과 대의 민주주의의 발전, 또는 워털루 전투에 버금가는 역사의 위대한 전환점의 한 순간을 목격했다. 정밀한 해상 크로노미터의 출현은 불확실하고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모험이었던 해상 무역이 부를 창출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거듭나게 해 주었다.
2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니치 국립 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해리슨의 해상 크로노미터는 놀랍게도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다...
18/ ... 스티븐 암브로스(Stephen Ambrose)의 책 <꺾이지 않는 용기>(Undaunted Courage)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라.
1801년 당시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인간이든, 제조된 물건이든, 한 부셀의 밀이든, 편지든, 정보든, 생각이든, 어떠한 종류의 명령이나 지시든, 말보다 빨리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837년 영국에서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과 윌리엄 쿡(William Fothergill Cooke)이 전신을 발명한 이후... 1815년 벨기에의 헨트에서 미국과 영국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미국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2주 동안이나 그 사실을 모른 채 뉴올리언스에서 영국군에 맞서 유혈이 낭자한 전투를 치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19-20/ ... 1820년경까지 세계의 일인당 경제성장은 거의 제로였다는 점이다. 로마 멸망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의 부는 사실상 줄어들었는데, 이는 수많은 결정적인 기술들이 갑자기 사라졌고 그로부터 13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재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전 시대 최대의 비극은 다량의 지식이 1천 년 동안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와 베이컨 이전의 발명가들에게는 오늘날 당연시되는 두 가지 결정적 이점이 없었다. 풍부한 정보와 과학이론이라는 확고한 기초가 그것이었다. 과학적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술진보는 순전히 시행착오를 거쳐 매우 드물게 일어났다. 더 나아가 발명가들과 제조업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기록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따라서 발명들이 종종 '소실'되었고, 고대의 기술적·경제적 상태는 진보되기가 무섭게 다시 퇴보해 버렸다.
... 경제성장과 인류의 진보를 이끈 네 가지 필수 요인 - 재산권, 과학적 합리주의, 자본시장, 수송 통신 - 의 역사를 기술하고 검토할 것이다.
21-22/ ... 근대의 부를 낳은 산실이 글래스고와 제노바 사이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사회적 가치·부·정치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부가 더욱더 증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반드시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발전이 민주주의를 낳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낼 것이다. 오히려 '과도한'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법치는 재산권 시스템을 튼튼하게 유지하기 위한 보루다. 그리고 재산권은 다시 번영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되며, 번영은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비옥한 토양이다...
... 미국의 경제적 생산성을 앞지르고 미국보다 우월한 힘을 얻는 데 모든 힘을 쏟는 국가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미국의 쇠퇴와 몰락은 일어날 수 없다...
22-23/ 유럽 역사를 통틀어 대다수 나라의 본위화폐의 단위는 약 3.5그램짜리 작은 금화 - 영국의 기니(1파운드보다 약간 더 나가는), 리브르, 플로린, 혹은 듀카트 같은 - 였고, 이것은 그 자체로 오늘날 가치로는 약 40달러에 해당한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영국 젠틀맨의 1년 생활비가 총 약 3백 파운드였다면, 농부와 노동자들은 대략 15 내지 20파운드로 버텼다... 고대 그리스의 드라크마는 노동자나 농부의 하루 임금과 대충 비슷했다.
36-37/ 이 네 가지 요인 - 재산권, 과학적 합리성, 효과적인 자본시장, 효율적인 수송과 통신 - 이 모두 정착되기 전까지는 어떤 나라도 번영을 누릴 수 없다. 이 네 가지 요인은 16세기에 처음으로 네덜란드에서 동시에 나타났고, 영어권에서는 1820년경에 비로소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42/ ... 또 다른 방식은 '도시화율'을 따져보는 것이다. 1500년에 유럽 최대의 도시는 나폴리로 15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유럽에서 인구 5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던 인구는 86만 5천 명으로 유럽 총인구의 약 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고, 인구 1만 이상의 도시에 살았던 인구는 고작 6퍼센트였다...
48/ 1688년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잉글랜드에 안정적인 입헌군주제가 정착되고 네덜란드 왕이 영국의 국왕으로도 즉위했으며, 이를 계기로 네덜란드 금융제도의 정수가 영국에 도입되었다. 그와 더불어 네덜란드의 선진적인 자본시장도 북해 건너편에서 곧 꽃을 피웠다...
50-51/ 노골적인 노예제를 제외하면, 중세 봉건제만큼 재산권과 개인적 자유를 심하게 침해했던 체제도 없다...
봉건적 관계의 본질은 그것이 화폐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장원은 판매를 위한 잉여 생산물을 별로 만들어내지 못했고, 거의 모든 교환은 물물교환의 형태를 띠었다. 봉건영주는 자신의 세습재산을 화폐적 측면에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고, 농노가 주화를 사용하는 예는 아주 드물었다...
... 토지는 분할이나 거래 또는 개량이 쉽지 않아 사회적 부의 주된 저장소로서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더 나아가 봉건국가의 비화폐 사회에서는 저장할 수 없는 재화들의 경우 변질되기 전에 모두 소비해야 했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가 물적 재산을 축적함으로써 부를 과시한다면, 봉건 사회는 소비의 향연을 통해 부를 과시했다.
그러한 비화폐적 사회에서는 재산권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고, 오두막과 도구는 단지 농민의 신체가 연장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52/ 중세 농노들은 토지의 생산성을 증대시키려는 노력은커녕 자신에게 부과된 장원적 의무를 초과해 작물을 생산할 인센티브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영주가 농노 자신은 물론 그의 생산물까지 모두 소유하는 상황이라면 혁신은 둘째치고 힘들여 일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봉건적 구조는 국민국가 형성에 굉장한 방해가 되었다. 당시 정치는 지방적 차원에 엄격히 국한되었다. 역사학자 바바라 터크먼(Barbara Tuchman)의 말대로, "정치구조의 근저에 있던 결합의 끈은 국가에 소속된 시민이 아니라 영주에 소속된 봉신들이었다. 국가는 여전히 탄생의 산고 속에 있었다."
봉건제는 소유권을 보호하지도 법 아래서의 평등을 인정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소비행위도 억압했다...
53/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화폐경제의 확산으로 봉건제가 붕괴되었다. 그 시점에 농민은 최고 값을 부르는 자들에게 자신의 노동을 팔 수 있었고, 더 이상 주종관계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비로소 국가적 차원의 기본적인 법적·자본적 제도들이 발전할 수 있었다. 개인은 왕국의 주화로 자유를 살 수 있었고, 때로는 마을 전체가 그렇게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197년에 프랑스 북부의 도시 쿠실르샤토는 무일푼이었던 영주의 미망인으로부터 140 리브르에 자유 특허를 매입했다.
64/ 기원전 3000년에서 1900년까지 존속한 수메르에서는 보리 대부에 대한 통상적인 이자율이 33과 1/3퍼센트였다. 반면 은의 대부에 대한 이자는 20퍼센트였다. 두 대부 이자율 사이의 차이는 은보다는 곡물 대부가 위험이 더 컸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은의 경우는 소비되어 없어지거나 상할 염려가 없었고, '은 수확'이 부족할 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65/ ... 1-2세기 로마제국의 절정기에는 이자율이 4퍼센트로 낮은 수준이었다... 1세기와 2세기 팍스 로마나의 절정기 동안에도 위기 때의 이자율은 12퍼센트까지 상승했다.
... 영국의 이자율은 12세기에 40퍼센트가 족히 넘었고, 이탈리아의 경우 12세기말에 평균 약 20퍼센트 수준이었다... 네덜란드의 이자율은 1200년 초에 약 8퍼센트 수준까지 낮아졌다.
67/ ... 파문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유대인들은 자유롭게 대부업을 해나갔다. 1571년 제5차 라테라노공의회가 고리대 금지를 철폐한 이후 비로소 투자자들은 활발하고 적극적인 상업활동을 위한 융자를 받을 수 있었다.
68/ ... 베니스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해로를 이용할 경우 5주가 걸렸고 육로를 이용하는 경우는 더욱 느리고 비효율적이었다. 또한 육로로 베니스에서 런던까지 가는 데 4주가 걸렸다...
79-80/ 1500년경에 농업 기술의 일정한 개선은 재산권, 자본시장, 수송기술의 첫 번째 자극과 더불어 상당한 수의 노동자가 농장을 떠나 제조활동에 종사하도록 이끌었다. 북부와 남부 유럽 모두에서 '제조활동'은 단 한 가지 분야, 즉 섬유를 의미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숙련된 직공이 견사를 비롯한 기타 이국적인 직물로 사치성 섬유를 제조했다. 영국은 부르고뉴로 양모를 실어 보냈고, 여기서 고도로 숙련된 장인들이 실을 잣고 천을 짜 화려한 옷을 만들었다. 조선과 기계도 점차 발전했다...
85-86/ 재산권과 시민권 사이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피에르 조지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시민적 자유는 확고히 믿었지만 재산 축적에 대해서는 도둑질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비록 전통적 관점은 재산권이 시민권에서 연유한다고 역설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똑같이 타당하다...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는 시민적 자유가 재산권에서 근원 한다고 말했다...
반세기 전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시민권과 재산권은 같은 것으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재산권을 양도하는 자는 곧, 그의 주저 제목을 인용하자면, '예속으로 가는 길'에 놓일 것이다.
일반적인 인문주의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사유 재산권의 신성한 개념을 최초로 만들어낸 사람은 존 로크(John Locke)다. 그런데 로크가 주요한 기여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초는 아니었다... 기본적인 시민권과 재산권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영국의 보통법에 내재되어 있었다. 더욱이 그것들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87/ ... 창세기에 아브라함은 이웃 히타이트의 에프론으로부터 얼마 전에 죽은 아내 사라를 묻을 땅을 산다... 아브라함은 돈을 내겠다고 고집한다. 그는 은을 달아 땅값을 지급하고 히타이트 마을의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매매를 공표한다... 그는 세 가지를 달성한다. 첫째로, 그는 영구불변한 자신의 재산권을 확립한다. 에프론은 그 땅의 양도를 철회할 수 없다. 둘째로, 다른 모든 이웃이 그 매매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아브라함 이외에 어느 누구도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돈을 지급함으로써 아브라함은 장래에 호의를 베풀어야 할 의무로부터 벗어난다...
88/ ...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2500년경의 토지 매매 기록을 담고 있는 정부 기록보관소를 발굴했다...
89/ ...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의 경우 기원전 2100년으로 당시의 토지법과 거래에 관한 것이 돌기둥(stelae)에 새겨져 있다. 이런 기록은 기원전 1750년의 유명한 함무라비법전에서 정점에 달했다...
89-90/ 유명한 '모세의 소송'은 이집트의 재산권 절차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기원전 1600년경에 파라오는 선장을 지냈던 모세의 조상에게 토지를 수여했다. 3세기쯤 후에... 모세는 지방정부 관청에 보관되어 있던 예전의 세금 기록을 제출함으로써 법정에서 이 위법행위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모세의 소송은 고대에 정부가 사적인 재산권을 보호했다는 놀라운 사례이며, 당시의 법률과 기록 시스템이 오랜 세기 동안 가족의 토지를 온전히 보존하기에 충분히 튼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90/ ...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즉위 초기에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부채와 세금 청구권을 취소시키는 미스하룸(misharum)을 선포하곤 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높은 이자율을 야기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91-93/ 1995년 고전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은 그의 저작 <다른 그리스인들>(The Other Greeks)에서 서구 민주주의의 기원이 페리클레스의 아테네보다 수세기 앞선 농업 사회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미케네) 문명이 기원전 1200년경에 이유 모르게 붕괴되었을 때... 몇몇 모험적인 농부들은 저지대에 있던 일급지 대토지를 굽어보는 한계적 구릉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미케네 이후 초기의 이 농부들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최초의 '중산계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커다란 역설은 이 한계농지-에스차티아(eschatia)-의 가용성 때문에 민주주의와 그에 수반한 재산권의 존중이 그런 종류의 토지가 가장 풍부한 곳, 즉 아티카의 구릉지에서 발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중에서도 마케도니아와 스파르타처럼 평탄하고 비옥한 저지대 토지의 혜택을 누린 곳에서는 민주주의와 재산권, 개인적 자유가 발전할 수 없었다...
... 초기 그리스 소농들 - 게오르고스(georgos) - 에게서 미국의 농장 문화와 비슷한 프로테스탄트적 노동윤리의 선구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의 소농들은 땅에서 허리가 휠 정도로 노동하는 것을 고귀하고 명예롭게 생각했다... 보이오티아인 농부였던 헤시오도스(Hesiodos)는 <노동과 나날>(Works and Days)에서 토지에 대한 헌신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표현했다. "신과 인간 모두 게으른 자에게는 화를 낸다."
94/ 기원전 1100년경부터 시작된 그 시기는 그리스 농민에게 원시 자본주의적 기회를 열어주었고, 그들은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기원전 700년 그리스에는 평균 10 에이커 크기의 농지를 소유한 소농민이 약 10만 명 있었다. 다분히 개인주의적이고 반전체주의적인 게오르고스는 자신들의 독립성을 명확히 표출했고, 이것은 오늘날 서구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 박혔으며 문명 자체의 경과를 변화시켰다...
... 일반적으로 그리스는 인근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노예를 확보했다... 평상시에 노예들은 보통 100-150드라크마 정도에 매매되었다...
95/ 이 세 가지 요소 - 재산권, 금권정치, 군사적 자족성 - 의 강력한 상호작용은 혁명적이었다. 게오르고스들은 농지, 입법기구, 밀집군이라는 기능적으로 유사한 세 가지 격자망으로 자기 환경을 구성했다....
96-97/ 아테네의 농장 크기는 평균적으로 약 10에이커에 불과했다. 왜 그렇게 균일하게 소규모였을까?... 기원전 592년경에 부유한 상인 가문의 후예였던 솔론은 수석 집정관인 아르콘에 선출되었다. 그는 저당채무 행사와 그에 따른 시민 간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많은 농민이 지고 있던 억압적인 부채를 대대적으로 무효화시켰다. 이는 이전에 메소포타미아와 이스라엘에서도 행해졌던 일이다.
... 그리스에 대규모 농장이 없었던 이유 중 일부는 솔론에게서 기원했을 것이다...
아테네 민주주의 탄생의 결정적인 계기는 솔론이 평민 아테네 인들의 회의체를 중심으로 사법제도를 조직한 것이었다. 이 사법제도는 당시 통치에 관계된 입법기구에 참여할 수 없었던 토지 없는 비시민들도 포함했다. 비록 솔론이 민주주의를 최초로 창안해 낸 것은 아니지만, 그는 존속 비밀을 밝혀냈다. 그것은 국가권력과 독립된 사법제도였다. 그러한 사법기구가 평민들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지켜주었다고 할 수 있다...
98/ 한 나라의 장기적 성공은 경제적 기회를 시민의 다수 또는 적어도 상당한 소수에게 여하히 확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농업 사회에서 이것은 단 한 가지, 즉 토지 소유를 의미했다. 불행하게도 고대 사회에서는 토지의 양이 무한정하지 않았다. 토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대규모 토지 축적의 경향은 궁극적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에는 치명적이었고, 이것은 로마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농업이 지배적인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꺾이기 쉬운 꽃이다. 일단 재산 보유가 과도하게 집중되면, 불가피하게 정치적·경제적 안정이 사라진다.
99-100/ 기원전 500년경 국가 건설부터 기원전 60년 제1차 삼두정치가 출현하기 전까지 로마는 1년마다 민회에서 선출된 두 명의 콘술(consul: 집정관)이 통치하던 공화국이었다. 위계상 프라이토르(praetor: 법무관)는 콘술 다음이었다. 최고 사법당국은 기원전 367년에 최초로 임명된 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Praetor Urbanus)였다.
표면적으로 프라이토르는 법을 제정하지 못했다. 당시의 로마법은 12표법이었다. 이 법은 기원전 450년경에 제정되어, 민회에서 통과된 상대적으로 사소한 규칙들에 의해 보완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프라이토르는 명예법*으로 알려진 사법 규칙들로 새로운 소인(訴因)을 만들어내거나 옛 소인을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법률을 해석하고 창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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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토르 같은 정무관은 명예를 갖는 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고시에 의한 법률을 명예법(jus honorarium)이라고 하고, 그들의 손을 거치지 않고 제정된 관습법을 시민법이라고 불렀다. -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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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프라이토르는 사제들이었지만, 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종교와 무관한 법률 전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체계를 통해 복잡한 재산 규칙체계가 확립되었는데, 이것들 중 상당 부분은 오늘날 독자들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계몽적이다...
... 일반인들의 수명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당시 40세 이상의 사람 중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경우는 10퍼센트밖에 안 되었다고 추산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이상해 보일 만한 점은 의사, 교사, 사업가 같은 매우 존경받는 전문가들도 노예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101-102/ 로마인은 자본시장에 관한 법률도 상당히 발전시켰다. 로마법은 대부자를 세심하게 구별했다. 일반적으로 이자가 생기는 은행예금은 소비대차(mutuum)로 불렸다... 다른 한편 대부할 수 없는 예금은...(depositum: 임차)...
... 로마에서는 모든 보증이 인적인 것이었다... 채권자들은 오직 한 사람의 보증인에게만 소송을 걸 수 있었고... 채무불이행은 가혹하게 다루어졌다... 그리스의 관행보다는 개선된 것이었다... 그리스에서는... 노예로 전락시키는 처벌을 내렸다.
... 1500년 후 영국인들은 채무자 투옥을 폐지하고 유한책임회사를 만들어냄으로써 자본시장을 크게 개선시키고 세계적인 경제성장의 불을 당겼다.
103/ ... 기원전 200년에 노예와 전리품이 이탈리아로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대외정복이 공화국의 경제적 추동력이 되었다. 이 유동성 러시가 소농들의 토지 박탈을 부추겼고, 이러한 토지들이 모여 거대한 플랜테이션이 생겨났다.
로마는 군대 징집을 연장함으로써 빈농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부자들은 봉기, 무장하여 주인들에게 대항하지 않는 한 군역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노예들과 함께 일을 함으로써 그 문제를 피해 갔다. 기원전 133년 콘길리움 플레비스라는 공화국의 평민회는 개혁을 시도했다. 평민회의 두 지도자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락쿠스 형제는 국가 토지를 빈민들에게 분배할 것을 제안했다...
104/ ... 공화국 말기에는 여덟 명의 프라이토르가 두 개밖에 없는 콘술 직을 놓고 경쟁했다...
... 모든 사회에서 노예와 징병제도는 재산권의 확산을 좀먹는다...
105-106/ 정복으로 살아가는 나라는 칼끝에서 사는 셈이다. 서기 3세기에 로마로 들어오던 전리품 흐름이 끊기자 퇴화된 농업 및 상업 부문에서 나오는 세금으로는 그 차이를 메울 수 없었다. 결국 서기 5세기에 서로마제국은 멸망했다.
1600년에 개인적 권리와 재산권의 강력한 결합이 잉글랜드에서 완전히 꽃을 피웠다...
사실 1787년 제헌 논쟁에서... 반연방주의자들에 대한 양보로써 권리장전 - 제1차 수정헌법 10개 조 - 이 헌법에 부가되었다. 수정헌법 제5조는 특히 적법절차, 즉 부당한 징발로부터의 보호를 보장했다. 나중에 수정헌법 제14조에서 추가적인 적법절차 보장이 덧붙여졌다.
우리는 수정헌법 제5조와 14조의 관련 조항들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또 서구의 번영이 유래한 기원 자체도 추적할 수 있다. 그것은 두 번째 천년의 초기, 즉 존 왕이 그의 신하들은 물론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와도 화해할 수 없게 되었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 시스템은 신성한 갈취 사슬이었다...
107/ ... 1214년 말... 로버트 피츠워터(Robert Fitzwater)의 지도 하에 그들은 런던을 점령하고 러니메드에서 왕에게 협상에 응하도록 강요했다. 1215년 6월 15일 두 당사자가 63개 조의 긴 헌장에 서명함으로써 이 사건은 막을 내렸다...
108/ 17세기의 유명한 법률가 에드워드 코크는 보통법이 성문법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곤 했다... 시민법 제도는 훨씬 더 중앙집권적이고, 입법행위가 우위를 차지한다.... 시민법을 채택한 국가에서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자들은 단지 입법가만 손에 넣으면 되지만 보통법을 채택한 국가에서는... 제도에 영향을 미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109/ ... 제12장이다... 대의(代議) 없는 과세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법 위에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111/ 프린스턴 대학의 정치학자 마이클 도일(Michael Doyle)은 대의민주주의, 사법권, 재산권(시장경제)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규정되는 '자유민주주의'의 역사를 추적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좀 더 훌륭한 정의를 내렸다. '자유'란 개인적 권리, 특히 재산권이 국가에 의해 보호된다는 것을 뜻한다. '민주주의'란 일국의 지도자가 다당제 선거에서 비밀투표에 의해 모든 선거민으로부터 선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패러다임에 따르면, 19세기 영국은 자유주의적이기는 했지만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이란이슬람공화국은 민주적이기는 하지만 자유주의적이지는 않다. Francis Fukuyama,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New York: Avon Books, 1992), pp.42-44를 보라.
113-114/ 1215년과 1225년 헌장 모두 왕의 탐욕으로부터 재산의 보호를 명확히 했다... 이것은 미국 수정헌법 제5조의 공공수용 조항의 기초가 되었다.
13세기의 법률가로서 영국 최초의 법 해설서 <잉글랜드의 법령과 보통법>(The Statute and Common Law of England)을 편찬한 헨리 브랙턴(Henry Bracton)은 마그나카르타의 혁명적인 의미를 최초로 인식했다. 왕이 처음으로 보통법의 지배를 명시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 "왕은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지만 신과 법률에는 복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를 왕으로 만드는 것은 법률이기 때문이다." 자유농민에게는 물론 왕에게도 적용되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법이 판사와 의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법률이 입법자에게도 적용된다면... 왜냐하면 똑같은 일이 그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일컬어 '입법 과정에 적용된 황금률'이라 한다.
120/ 코크는 마치 오늘날의 법률가처럼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125-126/ 로크는 개인적 자유와 재산권에 대한 논의를 '자연법'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보통법의 놀라운 경제적 잠재력을 어느 누구 못지않게 명확히 인식했다. 인간 사회는 아무리 작고 원시적일지라도 수용할 만한 관습, 행위, 그리고 결국은 재산을 통치하는 규칙을 자연스럽게 발전시킨다. 그러한 고대의 율법이 영국 보통법의 근원적인 원천이자 힘이다... 페루의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Hernando de Soto)는 <자본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Capital)라는 탁월한 책에서... 성공적인 법률구조는 사회의 문화와 역사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1730년경부터 기술혁신이 유례없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상당 부분은 특허법의 탄생 덕택이다. 경제학자 더글러스 노스는 발명은 사적인 편익뿐만 아니라 공적인 편익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즉, 발명은 발명가에게뿐 아니라 사회에도 이익이 된다. 만약 법률이 발명가에게 충분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는 발명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발명가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줌으로써 스스로도 보상을 받게 된다...
127/ ... 플로렌스는 1421년에 최초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에게 문서화된 특허권을 부여했다... 베네치아 상원이... 첫 번째 특허법을 통과시킨 1474년에...
129/ 법원은 '새로운 발명 프로젝트'에 대한 독점권을 지지했다. 그것은 "국내 상품 가격을 높이고 무역을 방해하거나 기타 불편한 일을 초래함으로써 국가에 해악을 끼치지도 법률에 위배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130/ 특허 보호를 위한 두 가지 요건 - 참신성과 제한된 유효기간 - 은 오늘날... 특허법의 철학적 기초를 이룬다... 1852년에 비로소 영국의 특허제도에서 왕의 개입이 종말을 고했다.
132/ ... 1790년 4월 10일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첫 번째 특허법에 서명했다.
134/ 1968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인류생태학자 가렛 하딩(Garrett Hardin)이 과학전문주간지 <사이언스>(Science)에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137/ 반면에 산업 사회와 탈산업 사회에서의 농업 집중은 불안정성을 야기하지 않는다... 탈산업 사회에서는 시민들을 이해관계자에 편입시키기 위해 더 이상 토지를 공급할 필요가 없다. 무한정한 비실물재산과 자본의 소유가 그 목적을 훌륭히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148/ 1500년경에 많은 총명한 관찰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대해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도 그들 중 한 명으로...
150/ 반증 가능성의 수용은 현대 서구 사회를 (다른 세계와) 구별 짓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태도다...
156/ · 종족의 우상. 베이컨은 종족을 인류 자체로 정의했다...
· 동굴의 우상. 개별 인간들이 물질세계를 인지하는 상이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 시장의 우상. 이것은 "사람들이 서로 교제하면서 만들어내는" 생각이다...
· 극장의 우상. 이 가장 흥미로운 우상은 '수용된 체계'의 결과로서, '비실제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을 따라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세계를 재현하는 수많은 무대연극에 다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체계가 그의 주된 목표물이었겠지만, 베이컨은 종교를 우회적으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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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種族)의 우상: 인간의 입장에서만 자연이나 세상을 보게 됨으로써 오는 오류와 편견이다. 즉, 인간이 가진 생물학적 특징이나 사회적 정서 및 편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거나 해석하는 태도로서, 자연을 의인화 하여 본다거나 혹은 인간 자신이 목적적 행위를 한다는 이유로 자연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목적적 견해로 보려는 것 등이 그것이다.
동굴(洞窟)의 우상: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세상을 판단하려는 개인적인 오류와 편견이다. 즉 개인 각자의 특수한 성벽(性癖), 교육(敎育), 교양(敎養), 습관(習慣), 환경(環境), 호불호(好不好), 격정(激情) 등으로 인해 공정한 견해와 판단을 그르치는 것을 말한다.
시장(市場)의 우상: 직접적인 관찰이나 경험이 없이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서 그럴 것이라고 착각하는 오류와 편견이다. 사람이 서로 교역하며 관련을 짓고 있는 시장에서 사물들에게 적합치 못한 단어나 이름을 붙여 사용함으로써 생기는 우상을 말한다. 특히 잘못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물의 이해를 방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언어와 실재를 혼동하는 데서 오는 오류이며, 언어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실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극장(劇場)의 우상: 자신의 소신은 전혀 없이, 권위나 전통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맹신 하는데에서 생기게 되는 오류와 편견이다. 이는 마치 배우가 극장의 무대 위에서 연출하는 연극 속의 주인공과 같이 흉내내는 것에 불과함을 말하는 것이다. (출처: 조선블로그, 베이컨의 4가지 우상론 - 이상봉의 그림자, 20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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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갈릴레오가 파도바 대학에 재직하던 1605년, 교회로부터 오랫동안 독립적이었던 베니스와 교황 파울루스 5세 사이네 종교분쟁이 일어났다...
교황의 조치가 허세라고 판단한 공화국은 그에 도전했다... 공화국의 대담함은 로마의 무능함을 전 세계에 폭로할 수 있었다...
171/ ... 1632년 1월에 출판된 <대화>는 즉각 열광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1633년 2월 로마에 도착했고... 고문도구들을 보게 되었다...
교회는 상처투성인 채 승리를 거뒀다. 갈릴레오는 비록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 일찍이 베니스가 교회의 신학적 무능을 폭로했듯이, 갈릴레오의 재판은 교회 교리의 핵심에 이론적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180-181/ 핼리는 여유시간에 독일 브레슬로 시의 사망자 통계를 수집하여 최초의 보험계리표를 작성했다... 왕립천문학자로서 그는 경도위원회의 직권위원이 되었다... 존 해리슨에게... 용기와 충고, 지원을 해주었다.
... 그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를 좀 더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1761년과 1769년(그가 죽은 지 20년 되는 해) 사이 금성의 경로 관찰을 위해 태평양에 탐험대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이 항해를 이끌었고, 이 과정에서...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와 하와이 제도를 포함하여... 방문했다...
195/ 1400년경 이전에 시장은 '적정' 가격을 정하지 못했다. 대신에 자의적인 도덕적 시스템이 지배했다. 유럽의 역사가 나탄 로젠버그(Nathan Rosenberg)와 버드젤(L.E. Birdzell)은 이렇게 말했다. "그 시스템의 이데올로기는 '정의로운 가격', '정의로운 임금'이라는 구절 속에 요약되어 있다..."
197/ ... 함무라비 법전은 이자율 상한을 은의 대부에 대해서는 20퍼센트로, 일차적인 교환수단이었던 곡물의 대부에 대해서는 33퍼센트로 정하면서 자본시장 거래에 간섭했다... 곡물은 작황이 나빠지면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곡물의 대부는 은을 대부하는 경우보다 대부자에게 위험이 훨씬 더 컸다. 이 추가 위험 때문에 더 높은 이자율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199-200/ 위험을 관리하는... 방법인 보험은 '모험대차'*라는 형태로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고안해 냈다. 이것은 교역항해를 위한 자금 조달에 활용되었다. 만약 배가 침몰하면 그 대부는 청산되었다. 그것은 대부와 함께 제공된 보험증서라고도 할 수 있다... 평화시의 이자율은 22.5퍼센트, 전시에는 30퍼센트였다... 그러나 근대 이전 세계에서 정보는 매우 비쌌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매우 높은 이자율의 부채를 통한 자금 조달 환경을 조성했고 경제성장을 저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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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세에 이탈리아 해항도시에서 흔히 이루어지던 관습적인 상거래. 해상대차라고도 한다. 해상무역을 할 때 선주 또는 하주가 선박 또는 적하를 저당하여 대금업자들로부터 자금을 차입하고, 항해 중에 해난에 의하여 실패한 경우에는 그 자금을 반환할 의무가 면제되며, 항해가 무사히 끝난 경우에는 원금에 고율의 이자를 첨부하여 반환하는 제도이다.-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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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 로마의 상대적인 사회적 안정성 덕에 1세기초 이자율은 대략 4퍼센트대로 낮았다... 2세기 들어... 로마정부는 토지에 대한 과세에 재정을 지원했고, 세금을 샅샅이 거두기 위해 세금 징수 일을 민간인 업자들에게 청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의 사업가들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기록상 최초의 합자회사를 만들어 그들의 주식을 카스토르 신전에서 거래했다.
202/ 견본시는 청산 시스템을 발전시킴으로써 금·은 주화의 희소성이라는 중세 상업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했다... 관리는 상쇄되는 교환 내역을 상계처리했다...
... 견본시의 청산 시스템은 신용의 한 형태를 창출하여 교역을 자극했다...
203/ ... 국가 대부는 베니스 자본시장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13세기에 공화국은 가장 부유한 시민들에게 대부를 요구함으로써 다량의 자금을 조성하고 있었다. 프레스티티(Prestiti)라고 불리던 이 대부는 만기가 없었고 영구적인 이자를 낳았다. 프레스티티가 발행된 다음에는 그 소지자들은 그것을 국내와 해외 자본시장에서 (대개는 원래 베니스 재무부에 지급된 것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팔 수 있었다. 이 매매에 관한 3세기 분량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204-205/ ... 그 뒤 플로렌스, 밀라노,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도 베니스의 전례를 따랐다...
1500년경 이후 환어음이 유럽 상업의 혈맥이 되었다. 환어음이란 간단히 말해 채무자가 보통 다른 나라에 있는 채권자에게 제공하는 약속어음 증서였다. 비록 그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는 환어음이 이미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은과 보리를 통화로 사용한 바빌로니아의 상인들은 아시리아로 사업차 떠나기 전에 아시리아 통화로 표시된 환어음을 취득했다.
그리스인도 환어음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지만, 환어음 사용을 완전히 개화시킨 것은 르네상스 이전 이탈리아의 은행이었다... 1500년경에 앤트워프의 상인들은 놀라운 생각을 해냈다. 이 어음을 양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얼마나 적은 액수를 경화로 받을지는 세 가지 기준에 달려 있다. 플로렌스 실크 상인의 신용, 어음의 만기일, 거래 장소가 그것이다. 어음의 만기일이 짧을수록, 채무자의 신용도가 높을수록, 변제 장소가 은행과 가까울수록 그 어음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206/ [환어음의 흐름]
... 어음이 최대 7개월에 걸친, 상이한 두 가지 통화로 거래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17세기 동안 암스테르담과 런던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통로가 개설되었다...
207-210/ ... 1517년에 제5차 라테라노공의회는 이자부 대부에 대한 대부분의 금지 조항을 폐지했다...
네덜란드 금융만의 특징은 모든 사람을 참여시켰다는 것이다... 오블리가티엔(Obligatien: 단기채권)은 '무기명채권'으로서, 이것을 소지한 자들은 언제든지 은행이나 거래소에서 현금으로 매각할 수 있었다. 로스렌텐(Losrenten)은 종신연금으로서, 베니스의 프레스티티와 유사했다. 무기명채권과는 달리 이 채권의 소지자들은 공적인 원장에 자기 이름을 등록하고 정기 이자를 받았다. 이 증권은 제2차 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었고, 그 소지자가 죽으면 상속되었다. 마지막으로 레이프렌텐(Lijfrenten)이 있는데, 이것은 소지자가 죽으면 지급이 중단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로스렌텐과 비슷했다.
... 1655년 정부는 4퍼센트의 이자율로 차입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로마제국의 절정기 이래 유럽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던 낮은 금리였다. 네덜란드 금융의 마지막 커다란 진전이 1671년에 일어났다... 요한 드 위트(Johan de Witt)가 금융에 파스칼의 새로운 확률이론을 적용했다...
... 그 당시의 첨단 기술들 - 배수 및 매립 프로젝트, 운하 건설, 갱도 굴착, 조선 - 도 대개는 값싼 자본 덕택에 가능했다...
네덜란드인들은 화폐를 효율적으로 거래했고, 그 덕택에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1613년 17세기 판 '월스트리트저널'이라 할 수 있는 <프라이스 쿠란트>(Price Courant)는 일주일에 두 번씩 환율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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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과 암스테르담에서 부두 부근에 있던 커피집이 비공식적 증권거래소 역할을 했다... 데이비드 리스의 <The Coffee Trader>(New York: Random House, 200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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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해상보험, 퇴직연금, 연부금, 선물, 옵션, 초국적 증권상장, 뮤추얼 펀드 등을 포함한 많은 금융혁신이 17세기와 18세기 네덜란드에서 기원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진보는 근대적인 투자은행의 탄생이었다...
213-214/ 1688년의 명예혁명으로... 빌렘/윌리엄은 혼자서 잉글랜드에 오지 않았다... 바링스와 호프 가를 포함한 네덜란드 금융 엘리트들이 그를 따라 북해를 건너왔다... 포르투갈계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런던에 정착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아버지인 에이브러햄 리카도는 포르투갈계 유대인 이민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215/ ... 1714년에 재무장관 헨리 펠햄(Henry Pelham)은... 많은 국채들을... 통합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콘솔 공채(consols)로서 이것은 베니스의 프레스티티 및 네덜란드의 로스렌텐처럼 만기가 없었고 영구히 이자를 지급하는 채권이었다. 이 채권은 지금도 런던에서 거래된다.
216/ ... 1862년에 링컨의 재무장관 샐먼 체이스(Salmon P. Chase)가 5억 달러어치의 전쟁채권... 그는 금융가 제이 쿡(Jay Cooke)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240/ ... 기원전 1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헤로(Hero)는 두 개의 증기 동력 장치 그림을 그렸다...
고대의 두 번째 증기 엔진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신전의 문을 여닫는 데 사용된 루브 골드버그(Rube Goldberg) 장치였다...
242/ 1654년 독일의 과학자 오토 폰 게리케(Otto von Guericke)는 기발한 실험을 통해 공기의 잠재적 힘을 보여주었다...
243/ 호이겐스의 조수였던 드니 파팽(Denis Papin)은 증기를 통해 좀 더 효과적으로 진공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이론을 세웠다.
248/ 철강 기술과 증기 기술 사이의 상호작용은 '시너지' 개념이 훌륭하게 적용된 사례였다...
270-271/ 1825년에서 1875년까지 반세기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철저히 변화했다...
326/ ...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대중화시킨 사람은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Arnold Toynbee)였다*... 전통적으로 산업혁명이란 1760년에서 1830년간의 시기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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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역사학자인 아널드 J. 토인비(1889-1975)의 백부인 경제사학자 아널드 토인비(1852-1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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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 ... 1547년에 구알키라는 잉카의 목동이 볼리비아에서 포토시 은광을 발견했다...
406/ ... 애초에 재산이 얼마나 공평하게 분배되었는가는 재산권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얼마의 비용으로 지킬 수 있는가보다 훨씬 덜 중요하다. 코즈는 이 이론의 전제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 소유권과 책임은 명확히 정의되어야 한다.
· 재산과 책임은 자유의지로 사고팔 수 있어야 한다.
· 협상, 판매, 권리행사와 관련된 비용은 낮아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재산은 결국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고, 책임은 문제 해결에 가장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에 의해 해소될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정부는 재산권을 정의하고 강제하는 것 이상의 규제적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 모든 재산 거래는 사적인 개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407/ 이것이 바로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사회적 정의' 보다는 법치가 더 관건이다.
409/ ... 재산과 민주주의를 증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영국식 토지개혁'을 통해서다. 즉, 안전한 재산권과 자유롭고 공개된 토지시장을 통해 소농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것이다. '인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재산의 수용과 강제 매각은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가난에 속박된 주민을 구해내는 데 필요한 제도 자체를 좀먹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436/ ... 프랑코의 경제장관 중 한 명인 라우레아노 로페즈 로도(Laureano Lopez Rodo)... 연평균 소득이 2천 달러를 상회할 때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유명한 대답을 했다. 1975년... 스페인의 평균소득은 2,446달러였다.
439-441/ 종교, 문화, 자기표현, 전통적 가치들의 상호작용
461/ 소득 vs 행복, 1973년 미국
472/ ... 사냥동물들의 범위가 너무 방대해 집행비용이 터무니없이 높았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일부 재산권은 유지하기에 너무나 큰 비용이 든다...
519/ ...1970년대에 로마클럽(The Club of Rome)의 인도를 받은 한 세대 전체가 고정된 자원 때문에 성장의 엄격한 한계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스스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인간 종의 적응성과 창조적 재능을 무시했다... 150년 전에 심각한 사상가들은 우리 도시들이 곧 어둠 속에 내던져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국 세계적으로 경유(鯨油)는 고갈되고 있었다.
527/ 애덤 스미스가 번영의 필수 조건으로서 '평화, 가벼운 세금, 적절한 사법행정'을 최초로 확인한 이후... 근대에 기술진보가 성장의 궁극적인 원천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532/ ... 그러나 현대 서구 대부분이 향유하고 코크, 로크, 스미스가 옹호했던 재산권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그것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들을 나누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다.
534/ 요한계시록의 네 명의 기사: 전쟁, 기근, 질병, 죽음 - 역주
535/ ...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독일과 일본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서구화된 제도적 정수와 지식 기반은 손상되지 않았고, 그들의 경제는 신속히 회복되었다...
...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13세기 동안 그랬듯이 우리는 시멘트에 관한 지식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
536/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전쟁과 평화에 관한 맥도널드 이론"이라고 불렀다. 아주 최근까지 맥도널드 프랜차이즈가 있는 어떤 두 나라도 서로 전쟁을 치른 적이 없다...
Note:
이 책이 초판 출판되었을 때(2005년) 사서 읽었는데, 이번에는 금융제도를 중심으로 읽었다. 예전에는 과학적 합리주의의 확립이 더 나의 관심을 끌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산권과 법치주의의 확립은 후쿠야마의 <정치질서의 기원>에서 최근 감명받은 바가 있는데, 보완적이며, 훌륭한 내용이다. <부의 기원>과도 맥락이 닿는 책이다.(2023.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