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이영훈 (2015), 한국 시장경제의 특질: 지경학적 조건과 사회·문화의 토대에서, 제도와 경제, 9(1), 2015년 2월.
1. 머리말
2. 몇 가지 정형화된 사실
2.1. 높은 수준의 개방경제
2.2. 국가경제의 중핵으로서 대규모 기업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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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기업집단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추세에 관해서는 상이한 해석이 대립하고 있다... 대규모 기업집단의 시장지배력이 비정상적으로 과도하다는 비판에도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상위 20대 기업의 매출집중도에서 한국은 미국, 일본, 대만보다는 높지만, 영국, 독일과는 비슷한 수준이고, 프랑스와 스웨덴보다는 낮다.
대외개방도가 높은 나라에서 대기업의 매출집중도는 일반적으로 높다. 대기업 매출의 상당 부분을 점하는 해외시장의 규모에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2011년 한국의 30대 기업집단이 점하는 비금융업에서의 매출집중도는 38.9%이다. 대기업 매출의 절반 이상이 해외시장에서 이루어짐을 감안하여 수출을 제외한 30대 기업집단의 국내 매출집중도를 계산하면 28.9%로 낮아진다.
2.3. 영세사업체의 과밀과 적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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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을 전후하여 제조업에서 대규모 기업이 줄고 영세 소기업이 증가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믿을만한 연구가 보이지 않는다... 대량의 노동자를 고용함에 따른 정치적 위험... 검증되지 않았다. 각종 규제의 강화가... 검증되지 않았다... 노동절약적인 IT산업으로... 설득력이 커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과의 억압적 수급관계 때문... 성립하기 힘들어 보인다. 정부의 과도한 자금 지원이... 유의하지 않다.
... 오늘날 한국경제는 국제적 비교에서 영세 제조업체가 과밀하다는 특징을 안고 있다... 서비스업에서 자영업자로 불리는 영세사업체의 종사자 비중을 1인당 GDP를 기준으로 비교할 때, 한국은 그리스, 터키, 멕시코, 이탈리아와 함께 자영업이 비대한 그룹을 이루고 있다.
2.4. 노동시장의 심한 불안정과 불균형
... 2009년 정규직의 근속연수는 평균 6.2년인데, 이는 OECD에서 가장 짧은 편이다. 비정규직이나 기간제의 근속연수는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나아가 전체 피용자 가운데 1년 미만 근속자의 비율은 36.2%나 되어 단연 최고다. 반면 10년 이상 장기근속자의 비중은 16.9%로 최저다.
... 영세사업체는 비정규직과 저임금의 온상이다... 2009년 종사자 300명 이상 대기업의 시간당 임금을 100으로 할 때, 30~99명은 51.2, 10~29명은 48.7, 5~9명은 46.0에 불과하다...
... 2006년 15~64세의 고용률은 64%로서 OECD 평균 66%보다 낮다. 특히 24세 이하 청년층의 고용률이 미국, 영국, 독일, 일본보다 14~30% 포인트나 낮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숙련과 기술을 기업 외부에서 충원하는 외부노동시장이다... 대부분의 기업은 근로자의 숙련 형성에 투자하지 않는다... 1인당 노동생산성은 국제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미국의 약 60%에 불과하다.
3. 지경학적 조건: 조립형 공업화
... 성공적 추격의 비밀은 기술수명이 짧은 신산업에서 뛰어들어 선발국과 상이한 혁신경로를 개척한 데 있었다.
... 지경학적 조건에 대한 주의를 소홀히 해서는 곤란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무역에서 나타난 새로운 동향은 선진국이 후진국으로부터 노동집약적 공산품을 수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시장은 1950년대까지 일본에 의해 거의 독점되었다. 그것이 1960년대 초반에 한국으로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 공업화의 기본 패턴은 '조립형'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이룩한 성공적 추격에도 불구하고 조립형 공업화의 특질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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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열거한, 한국 시장경제의 특질을 대변하는 몇 가지 정형화된 사실은 상당 부분 조립형 공업화의 논리로 해명될 수 있다. 노동시장이 외부노동시장인 것은 기업들이 고급의 부품과 기계를 손쉽게 이웃나라에서 수입하였던 지경학적 조건에 기인하고 있다... 1989년까지 종사자 500명 이상의 대기업을 필두로 하여 50명 이상의 기업이 증가한 것은 그때까지가 단순조립의 단계였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노동자를 대거 모집하자 1976년까지 종사자 50명 이하의 영세 소기업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1970년대까지는 노동집약적 조립이었기 때문에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수급관계는 정체하였다. 1970년대에 걸쳐 수급업체의 비율은 20% 전후에 머물렀다. 이후 동비율은 1990년까지 70.1%로 급속히 높아졌다. 대기업의 주력 업종이 우회도가 높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1989년까지 종사자 50명 이상의 중소기업 수가 증가한 주요 원인을 이같은 수급업체의 성장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단순 조립의 기간에 한국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동반성장을 구가하였다.
이후 수급업체의 비율이 2010년의 43.3%로까지 낮아진 것은 그 기간에 조립형의 패턴이 단순조립이 첨단조립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이 요구하는 첨단의 부품, 기계, 장치는 여전히 수입에 의존하였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졌다... 수급업체의 수는 2006년의 65,740에서 2010년의 47,815로 감소하였다.
... 국제경쟁력을 결여한, 수출산업과 무관한, 대기업과는 더욱 소원해진, 영세사업체가 오로지 좁은 국내시장을 무대로 과밀하게 생겨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관점이 필요하다. 곧 사회와 문화의 역사적 특질이다.
4. 사회와 문화의 토대: 저신뢰, 물질주의, 관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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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사업체의 과밀과 적체라는 한국경제의 졍형화된 특질은 한국에서 동업의 기회나 사례가 빈약한 현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한국의 주식회사는 1인 지배의 구조가 대부분이다. 대조적으로 독일에서 주식회사는 소수 대기업에 한하는 예외적 형태인 가운데, 대부분의 회사 조직은 동업 관계로 영위되고 있다.
... 1950~1960년대의 한국사회는 공동체를 결여한, 인간들의 상호 관계는 주로 국가권력과의 관계로 규정되는, 고독한 개인들로 구성된 대중사회였다.
이 저신뢰의 사회에서 인간들이 자기와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추구한 가장 확실한 통로는 교육이었다... 그 다음의 위계는 재벌 대기업에의 취직이다...
고도성장기에 걸쳐 이 사회를 역사적으로 통합해 온 국가적 위신과 관료제적 위계는 약화되지 않았다...
... 일본에서와 같은 기업 간 신뢰와 협력의 전통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기업은 하도급 중소기업을 종속기업으로 간주하였으며, 중소기업의 기술과 품질을 신뢰하지 않았다. 중소기업 역시 대기업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대기업과의 장기간 고정거래가 그를 종속시킬 위험성을 처음부터 경계하였다...
... 정부규제는 관료들의 선호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에 역사적으로 배태한 요인에 의해 초래되고 강화되었다... 2014년 OECD가 발표한 상품시장규제지표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OECD 국가 가운데 4위이다. 한국보다 규제 수준이 높은 나라는 터키, 이스라엘, 멕시코의 세 나라이다. 한국 다음은 슬로베니아, 그리스, 폴란드의 순서이다. 비회원국으로서 규제가 가장 강한 나라는 중국, 브라질,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크게 보아 한국은 이들 10개 국가와 경제체제의 질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의 경제체제는 '국가관리 시장경제'이다.
5. 맺는말
한국경제는 고도의 개방체제이며, 소수 대규모 기업집단이 국가경제의 중핵을 점하고 있다. 그 대척점에 수출 및 대기업과 무관한 영세사업체가 과밀하게 적체해 있다. 노동시장은 고용의 질이 열악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분절성이 강하며, 숙련을 기업 외부에서 구하는 특질을 보이고 있다. 한국경제가 드러내는 이같은 정형화된 사실의 상당 부분은 고도성장기 이래 주요 소재, 부품, 기계를 대일본 수입에 의존해 왔다는 지경학적 조건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이같은 한국경제의 특질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사회·문화의 특질과 깊숙이 조응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사회는 관료제적 위계로 통합된, 저신뢰의 물질주의 사회였다. 사회·문화의 그러한 특질은 권위주의 정치에 의해 고도성장의 동력으로 동원되었지만, 이후 이른바 '민주화시대'를 맞아 한국경제의 선진화를 저지하는 '역사의 굴레'로 작용하고 있다.
... 한국의 경제학자를 포함한 지식인 사회는 그들의 경제체제를 형성해 온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나아가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외개방도가 100%를 넘는다고 해서 이 나라를 네덜란드, 벨기에와 같은 고도로 개방된 정신문화의 나라로 간주하면 큰 오해이다. 이 나라가 뿜어내는 민족주의의 독소는 국제적으로 특이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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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생산된, 경제체제와 사회·문화의 비교적 특질에 관한 몇 편의 우수한 논문들은 공통으로 한국이 멕시코, 터키, 그리스, 슬로바키아, 폴란드, 이탈리아, 헝가리 등과 동질의 국가군을 형성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주변부 국가들이다...
감상:
한국이 매우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지는 나라임은 여러 서베이에서 조사되었다. 결국 한국인이 자랑하고 기댈 유일한 가치관은 물질적 성공이며, 이는 가족 구성원 주변의 관료적 성공으로 뒷받침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2021.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