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얼 퍼거슨
8-9/ ... '부당 이득'이라는 우리의 뿌리 깊은 편견에도 불구하고, 돈은 대부분 진보의 근원이었다. Jacob Bronowski의 표현을 빌리자면, 화폐의 부상은 인류의 부상에 필수적이었다... 신용과 부채의 발달은 고대 바빌론부터... 그 어떤 기술 혁신 못지않게 중요하였다. 은행과 채권 시장은 휘황찬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물적 기반이었다...
... 메디치 같은 이탈리아 은행가들이 동방의 산술 체계를 화폐에 적용해 재산을 모은 덕분이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이 합스부르크 제국보다 우세했던 이유도 세계 최대의 은광을 얻는 과정에서, 세계 최초의 근대적 주식 시장에서 금융 혜택을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11/ ... 지난 4000년간 지구에서 생각하는 인간이 부상해 왔다면, 이제는 금융업을 일삼는 인간이 부상 중이다.
12/ ... 어느 학파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 자본 시장의 효율성이 근본적으로 향상되면서, 위험 감당 능력이 가장 뛰어난 대상에게 위험 전가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18-19/ ... 첫째로 빈곤은 탐욕스러운 금융업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보다 훨씬 깊은 요인은 바로 금융 기관의 부족, 즉 은행의 부재이지 이들의 존재가 아니다. 차입자가 효율적인 신용망에 접근이 가능해야 이들도 고리대금업자의 마수에서 벗어나며, 저축자가 믿음직한 은행에 예금할 수 있어야 자금이 유한계급에서 근면한 이들에게 흘러간다...
두 번째 깨달음은 평등, 그리고 평등의 부재와 관련 있다... '정통함'에 대한 보상의 격차가 이렇게까지 벌어진 적은 없었다. 게다가 금융적 무지에 대한 불이익은 너무나 가혹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깨달은 사실은 금융 위기의 시기와 강도를 정확히 예측하는 일만큼 힘겨운 작업도 없다는 점이다.
제1장 탐욕의 꿈
21/ ...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입증한 것처럼, 화폐는 노동력을 상품화하며, 정당한 노동에서 생긴 잉여는 자본 축적을 향한 자본가 계급의 탐욕스러운 욕망을 위해 전유되고 '물화'된다...
22-23/ ... 누칵마쿠(Nukak-Maku)... 족은 시간이 멈춰 버린 부족으로...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개념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 인류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수렵 채집 부족들... Jivaro 부족은 남성의 60퍼센트가 폭력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수렵 채집인은 거래를 하지 않는다. 이들은 급습해 빼앗는다. 그리고 식량을 발견하는 대로 바로 소비할 뿐 저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화폐가 필요없다.
... 잉카 제국 역시 화폐가 없었다... 금은 '태양의 땀'이고 은은 '달의 눈물'이었다. 잉카 제국에서 노동은 가치의 척도였는데, 이는 훗날 공산주의 사회의 인식과 흡사했다. 게다가 공산주의 사회처럼 잉카 경제도 때로 중앙 계획과 부역 노동을 통해 유지됐다...
28/ ... 역사상 최초의 주화는 기원전 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고학자들은 이 주화를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 근처)에서 발견하였다. 바로 리디아 왕국의 주화로 금과 은의 합금인 일렉트럼(electrum)으로 만들어졌으며, 사자 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한쪽에는 아테네 여신의 머리를, 다른 쪽에는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가 올리브 가지에 앉은 모습을 새겨 넣은 아테네의 4드라크마 은화의 전신이기도 했다.
31/ ... 5000년 전에 태동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토물표(clay tokens)를 이용해 보리나 양모 등의 농산물과 은 같은 금속의 거래기록을 남겼다. 은가락지, 은 덩어리, 은판도 분명 곡물처럼 현금으로 기능했지만 점토판에는 미치지 못했다...
34-35/ ... 일반 미국인이 보유한 현금은 M2라고 부르는 통화 지표 중 단지 11퍼센트를 차지할 뿐이다. 결국 현재 쓰이는 대다수 돈이 보여주는 무형성이야말로 화폐의 실제 속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당시 정복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사실은 화폐란 믿음의 문제, 나아가 신념의 문제라는 점이었다. 지불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다. 그리고 통화 발행 주체, 수표나 양도증서를 인수하는 기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했다. 화폐는 금속이 아니다. 화폐는 신뢰를 새겨놓은 대상이다. 어디다 새겨놓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은이나 점토판, 종이, 액정, 그 어디든 상관없다. 몰디브의 조가비부터 태평양 얍 섬(Yap island)에서 사용했던 커다란 돌 원반까지 무엇이든 화폐로 기능할 수 있다...
화폐는 구체적으로 대부자와 차입자 사이의 중요한 관계를 드러낸다. 메소포타미아의 점토판을 다시 살펴보자. 각 점토판마다 빌린 물품을 갚으라는 거래 기록이 나온다. 당연히 빌려준 쪽에서 돌려받을 양과 지급 기일을 작성한 다음 (보통은 보관함에) 봉인한 상태로 간직하였다. 고대 바빌론의 대부 체계는 꽤 세련된 형태였다. 빚은 양도가 가능해서, 이름이 적힌 채권자가 아닌 '소지자에게 지급'하였다. 점토판 영수증이나 환어음은 왕궁이나 사원에서 곡물과 여타 상품을 보관하는 사람 앞으로 발행했다. 차입자는 이자를 지급해야 했는데, 그 비율은 보통 20퍼센트 정도였다... 채무자들은 주기적으로 빚을 탕감받기도 했지만(실제 함무라비 법은 3년마다 채무 면제를 명시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 채무자나 공공 채무자가 돈 상환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로니아에서 막강한 토지 소유자이자 대출업자로 급부상한 에기비(Egibi) 가문은, 상업적 이해에 따라 남쪽으로는 160킬로미터가 넘는 우루크Uruk까지, 동쪽으로는 페르시아까지 뻗어 나갔다. 이 시기에 제작된 수천 개의 점토판은 아직도 건재하여, 한두 번쯤 에기비에게 빚졌던 사람의 수를 보여준다. 이 가문이 다섯 세대에 걸쳐 번영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빚이 회수되었음을 암시한다.
36-37/ Fibonacci는 오늘날 알제리의 Bejaia에서 활동했던 피사 세관관리인의 아들이었다... 그가 1202년에 발간한 선구적인 책 <Liber Abaci>, 즉 '산술책'을 통해... 힌두-아라비아식 수 체계이다... 게다가 그는 십진법이 상업 부기와 환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자 계산에 어떻게 응용되는지도 소개하였다...
38/ ... 안토니오의 선박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한 척은 묵아프리카(Tripolis)로 다른 한 척은 인도로, 세 번째 배와 네 번째 배는 각각 멕시코와 영국으로 항해 중이었다.
39/ 셰익스피어 시대 때 유대인들은 100년 가까이 베니스에서 상업 신용을 제공해 왔다. 이들은 반코 로소라는 건물 앞에 탁자를 차려 놓고 긴 의자(벤치)에 앉아 영업을 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1179년 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파문당했다. 고리대금업이 죄악이 아니라는 주장마저 1311년~1312년 비엔나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비난받았다... 특히 1206년과 1216년에 각각 세워진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지탄받았다...
40/ 피렌체의 두오모 대성당에는 도메니코 디미켈리노(Domenico di Michelino)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 작품은 피렌체 태생의 위대한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가 자신의 저작 <신곡>을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단테는 대표작 <신곡>의 지옥편 17곡에서 고리대금업자를 위한 장소인 제7옥을 묘사했다.
41-42/ 유대인은 1492년에 스페인에서 추방당했다. 1497년 칙령에 따라 강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던 포르투갈의 Converso와 더불어 유대인이 피난처로 찾은 곳은 오스만 제국이었다. 콘스탄티노플과 오스만 항구 등지에서 유대인은 베니스와 교역 관계를 맺었다. 유대인이 베니스에 출현한 시기는 15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메스트레(Mestre)에 살던 유대인은 캉브레 동맹 전쟁을 피해 온 사람들이었다... 1516년 베니스 정부는 훗날 getto nuovo(주물 공장이란 뜻)로 알려진 낡은 주물 공장 지대를 유대인 특별 거주지로 지정했다. 매일 밤, 그리고 기독교 축제일이면 유대인은 이곳에 감금되었다. 베니스에서 2주 이상 체류하는 유대인은 등에 노란 O자가 새겨진 옷을 입거나 노란 모자(나중에는 붉은색 모자)나 터번을 써야 했다. 거주자들은 5년마다 갱신하는 condotte라는 허가서를 발급받아 명시된 기간까지 지낼 수 있었다. 1541년 루마니아에서 일부 유대인이... ghetto vecchio에... 1590년이 되자 베니스에 사는 유대인은 2,500명 정도가 되었다. 게토 지역 건물들은 새로 온 수용자들을 위해 7층 높이까지 올라갔다.
16세기 내내 베니스 유대인의 입지는 제한적이고 불안정했다. 1537년 베니스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베니스의 상원 의원은 '터키인, 유대인, 그리고 여타 터키 식민지민'의 재산 몰수를 요구했다. 1570년에서 1573년 사이에 또 다른 전쟁이 터졌을 때도... 유대인은 다니엘 로드리가(Daniel Rodriga)라른 스페인 출신의 유대인 상인을 통해... 1589년에 그가 받아낸 허가서에 따라 베니스 시민으로 승격됐고, 레반트 무역 활동도 허락받았으며(상당한 특권이었다.), 공개적인 종교 활동까지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중대한 제약은 여전하였다...
...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초기 근대적인 금전 대부에서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즉, 신용 시장 초창기에 터무니없는 이자율을 부과했던 대부자의 힘, 금융적 갈등을 폭력적 수단 없이 해결한 법정의 중요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종적 소수였던 채권자가 인종적 다수였던 채무자의 적대심 때문에 겪어야 했던 취약한 입지를 보여 준다...
46/ ... 14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는 바르디(Bardi), 페루치(Peruzzi), 아치아이우올리(Acciaiuoli) 등 세 걔의 피렌체 가문이 금융을 장악했다. 그렇지만 세 가문 모두 1340년대에 주고객이었던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와 나폴리의 로버트 왕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일화가 고리대금업자가 겪었던 잠재적 취약성을 보여주었다면, 메디치 가문의 성세는 정반대로 고리대금업자가 지닌 잠재적 권력을 보여주었다.
48-50/ 1385년, 조반니는... 로마 지점 관리자가 된다. 로마에서 조반니는 외환 거래자로 명성을 쌓는다... 1397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조반니는... 로마 외에도 베니스에... 훗날 제네바, 피사, 런던, 아비뇽에도 은행 지점을 설립했다. 조반니는 피렌체 두 곳에 세운 양모 공장에서도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메디치 가에서 초반에 특히 중시한 사업은 중세 시대 때 금융 거래 수단으로 발전했던 환어음 업무였다... 채권자가 채무자 앞으로 환어음을 발행하여 양측 모두 이를 지급 수단으로 쓰거나, 브로커 역할을 하는 은행에서 할인을 받고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수표는 없었다. 지급 내역은 은행 장부에 적거나 구두로 처리했다. 이자도 없었다. 대신 예금자들은 투자금에 대한 위험 부담을 재량 예금(discrezione)으로 보상받았다.
복식부기가 이미 1340년대에 제노바에 전파됐지만, 메디치는 이를 체계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쪽에는 부채인 예비금과 예금이, 다른 한쪽에는 자산인 고객 대출과 상업 어음이 정돈돼있다. 메디치가 이 기법들을 고안해낸 주체는 아닐지라도, 피렌체에서 유례없는 규모로 확대 적용한 세력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메디치 성공의 핵심비결은 규모보다는 다각화에 있었다... 메디치 은행이 상당한 이윤을 끌어들인 배경에는 이러한 탈집중화된 경영이 있었다...
52/ ... 이들은 과거 어느 금융 기관보다도 은행 규모를 키우고 다각화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또한 대출뿐 아니라 통화 거래에도 뛰어들어 채무불이행에서 생기는 타격을 완화했다.
53-54/ ... 1609년에 세운 암스테르담 외환은행(Wisselbank)은 네덜란드 연합주에서 유통됐던 다양한 통화가 상인들에게 실무적인 문제를 초래하자 그 해법으로 세운 은행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서로 다른 조폐국이 14군데나 있었고, 유통 중이던 외국 통화액도 상당하였다. 암스테르담 외환은행은 상인들이 표준화된 통화로 예금 구좌를 개설하도록 함으로써, 수표와 자동이체시스템 등 오늘날 당연시 여기는 제도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러한 장치들 덕분에 상업 거래는 점차 실물적인 주화 없이도 가능해졌다. 상인끼리 거래할 경우 은행 계좌의 차변과 대변 기입을 통해 간단히 결제 문제를 해결했다. 암스테르담 은행이 예금에 대한 지급준비금으로 귀금속과 주화를 100퍼센트 가까이 유지했다는 점 외에는 이 시스템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1760년 예금이 1900만 플로린에 가까웠을 때, 지급 준비금으로 비축한 귀금속은 1600만 플로린을 넘어섰다...
... 50년후 스톡홀름에 스웨덴 중앙은행인 리크스방크(Riksbank)... 상업결제 못지 않게 대출활동을 활발히 할 목적으로 세운 은행이었다. 이 은행은 금속준비금을 초과해 대출활동을 하여 훗날 부분지급준비금(fractional reserve banking)으로 알려진 금융관행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예금(여기에 이자를 지불한다)과 지급준비금(여기에는 이자가 붙지 않는다)은 은행의 부채가 되고, 대출(이자가 생긴다)은 은행의 자산이 된다.
...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의 창설... 주로 영국 정부의 전쟁비용조달을 위해(정부 빚의 일정 부분을 은행 몫으로 전환하는 방식) 창설된 이 은행은 대신 특혜를 누렸다. 1709년 이후 잉글랜드 은행은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하는 유일한 은행이 되었다. 게다가 1742년부터는 이자를 물지 않는 약속어음 형태의 은행권 발행을 부분적으로 독점할 수 있었는데, 이 덕분에 은행계좌 없이도 거래가 원활히 이루어졌다.
55-56/ a) 현금 없이 은행끼리 혹은 은행 내부에서 거래가 발생했고(1609년, 암스테르담 외환은행), b) 부분지급준비금 제도가 정착했으며(1659년, 스톡홀름 스웨덴 중앙은행 리크스방크), c) 중앙은행이 은행권 발행을 독점하면서(1742년, 잉글랜드 은행, 이자를 물지 않는 약속 어음 형태의 은행권 발행) 돈의 속성에도 매우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 이제 돈은 예금과 준비금이라는 은행 부채의 총합으로 나타났다... 귀금속은 통화 중 일부만 차지했다. 반면 대다수 돈을 구성하는 것은 예금 계좌로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돈이거나 법정 화폐(legal tender)로 통용되는 은행권 및 주화였다. 금융 개혁은 활력이 떨어지던 포토시의 은을 이용해 현대식 화폐 시스템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점차 다양한 기관이 채무자와 채권자를 '중개'하도록 유도했다. 이 기관의 역할은 이제 정보 수집과 위험 관리가 되었다...
한편 북유럽의 금융 중심지에서 이탈리아식 은행 기법이 꽃피던 와중에, 뜻밖에도 이 선진 은행 제도를 흡수하지 못한 나라가 있었다. 다름 아닌 스페인이었다. 귀금속이 풍부했던 탓인지 막강했던 스페인 제국은 정교한 은행제도를 발달시키지 못했고, 대신 미래의 은을 담보로 안트베르펜 상인들에게 단기자금을 빌렸다. 돈은 사실 신용일 뿐 금속이 아니라는 개념을 스페인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 스페인 왕족은 1557년부터 1696년 사이에 자그마치 14배나 뛰어버린 채무를 상환하지 못했다... 이제 근대 세계에서 권력은 지불불능자에게서 벗어나 은행가에게로 이동하였다.
57/ 17세기 이후 성장한 은행업은 18세기 후반 영국의 경제 성장에 촉매로 작용하였다... 금융 혁명이 산업 혁명보다 앞섰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두 과정이 서로 의존하면서도 자체적으로 강화됐다고 보는 게 정확한 논리일 것이다...
... 유럽과 북미에 다양한 형태의 은행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가장 오래된 것은 어음 할인 은행들로, 이들은 상인들끼리 발행한 환어음을 할인해 국내외 무역에서 자금이 융통되도록 지원했다...
58-59/ ... 잉글랜드 은행은 점차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1826년에 은행권 발행독점을 재승인 받은 대신 공적 기능을 수행했고... 은행간 거래에서도 중추적 역할을 담당해 갔다...
이후 40년 동안 은행 준비금과 유통 은행권 사이의 관계 설정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마지막 위기에서... 극적인 예금 인출 사태를 겪은 이후...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은...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처방했다.
그렇지만...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이 조폐국 장관이던 시절에 세운 신성불가침한 이론, 즉 파운드 스털링은 금 1온스 당 3파운드 17실링 10.5다임의 비율에 따라 맞바꿔야 한다는 이론에 맞서지 못했다...
62/ 1924년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금본위제를 '야만적 유산'이라 칭하며 거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은행이 귀금속을 기반으로 화폐를 창출하는 일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65/ ... 미국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사업가들은 대부분 초반에 실패를 거듭했다. 케첩 왕 존 헨리 하인즈(John Henry Heinz), 서커스의 대부 피니어스 바넘(Phineas Barnum), 자동차 업계의 거물 헨리 포드(Henry Ford)가 바로 그들이다...
제2장 채권의 득세
69/ 채권의 탄생은 은행의 신용 창출에 이어 돈의 신분을 상승시킨 두 번째 혁명이었다. 정부와 대기업은 은행 이외에도 광범위한 사람들과 기관들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채권을 발행한다...
70/ 약 800년 전,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싹튼 근대적 채권 시장은 이후 굉장한 규모로 성장하였다...
73/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분명 전쟁은 채권의 아버지였다...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시장에서 국가 부채로 재원을 조달하던 방법은 다른 금융사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이었다.
피렌체, 피사, 시에나가 속했던 중세 도시 국가 투스카니(Tuscany)는 14세기와 15세기 내내 자기들끼리 때로는 다른 이탈리아 지역과 전쟁을 치렀다. 이는 사람뿐 아니라 돈을 투입해 치른 전쟁이었다...
77/ 채권 시장 부흥에 기여한 세력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만이 아니었다. 북유럽에서도 도시의 정치조직들이 교회와 충돌하지 않으면서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고심했다... 고리금지법이 대부이자를 금지했어도, 센서스(sensus)라고 불린 중세식 계약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 계약은 해마다 꾸준히 대부 이자를 지급했다. 13세기에는 북프랑스의 두에와 칼레, 그리고 플랑드르 지방의 겐트에서도 이러한 연금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연금 제도는 두 가지 형태였다. 후손에게 대물림이 가능한 상속형 연금과 사망과 동시에 지급이 중단되는 종신형 연금이었다. 그리고 원금을 지급하고 사들이면 연금 회수도 가능했다. 16세기 중반무렵 연금판매는 홀란트 지방의 세입 중 7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증가했다.
78/ 프랑스나 스페인 왕실도 같은 방식으로 돈을 모으려 했는데, 그러려면 둘 다 도시(town)의 손을 빌려야 했다. 프랑스의 경우 시청이 군주를 대신해 기금을 모았다. 유로스(juros)라는 스페인 국채도, 세금징수권이 있던 채권인수은행인 제노바의 성 조르조 은행(Casa di Sna Giorgio)과 근대 주식시장의 효시인 안트베르펜의 뵈르스(Beurs, 증권거래소)를 통해 거래되었다... 절대군주는 채무 이행에 충실하지 않았다...
... 네덜란드는... 복권식 채권(확률은 낮고 수익은 높은 채권)도 매매되었다... 네덜란드 채권 수익률은 점차 떨어져서 1747년에는 2.5퍼센트에 머물렀다...
79/ 1688년... 명예혁명... 1717년 금본위제를 택한 이후, 더 이상 주조화폐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1749년 헨리 펠럼(Henry Pelham)이 통합기금(Consolidated Fund)을 만들면서 정점에 달했다...
89/ ... "... 그가 돈을 번 것은 나폴레옹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트르니히(Metternich)에게 로스차일드 가문은 진정한 금융계의 나폴레옹이었다...
107/ 인플레이션은 밀턴 프리드만의 말대로 화폐적 현상이다. 그렇지만 초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정치적 현상으로, 한 나라의 정치 경제가 근본적으로 오작동하지 않는 한 발생하지 않는다...
111/ 국명 자체가 '은의 나라'라는 뜻의 아르헨티나는 한때 번영국가의 본보기였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위치한 리우데라플라타(Rio de la Plata) 강도 '은의 강'이라는 의미이다...
제3장 거품 만들기
131/ ... 1600년 무렵 네덜란드 주요 항구 여섯 곳에는 갓 설립한 동인도 회사들이 운영 중이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기존의 동인도 회사를 단일한 개체로 통합하고자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였다. 1602년에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이 기업은 희망봉 동쪽과 마젤란 해협 서쪽에서 네덜란드 무역을 모조리 독점하였다... 물론 통합된 동인도 회사도 특허 기간이 21년으로 이전 회사들처럼 한시적이었다. 또 특허법 7항에 보면 대차대조표를 처음 작성하는 10년말에 투자자에게 자금 회수 권한이 주어졌다... 총 모금액은 645만 길더였는데, 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당대 최대 기업으로 부상하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이들보다 2년 앞서 설립된 경쟁 업체인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단지 219명에게서 6만 8373파운드(약 82만 길더)의 자본금을 모았다...
133-134/ ... 161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원래 계획과 달리 주식 현금화가 안 된다고 발표했다. 다시 말해 현금을 돌려받길 원하는 주주들은 보유 주식을 다른 투자자들에게 파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리하여 주식회사와 주식 시장은 몇 년을 사이에 두고 탄생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주식은 회전율이 높았다. 1607년 무렵 동인도 회사 주식 중 3분의 1이 원 소유주 손을 떠났다. 게다가 다소 드물지만 회사의 장부가 공개되자 곧 활기넘치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주식 선물 시장이 형성되면서, 이곳에서 선물 매매가 가능해졌다... 1608년 시청에서 멀지 않은 로킨(Rokin)에, 지붕을 얹은 뵈르스를 세우게 되었다...
135/ 이 시기에 암스테르담 은행이 설립(1609년)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주식시장은 효율적인 통화제도가 있어야 수월하게 굴러가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 은행가들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주식을 채권 담보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주식 시장과 신용 공급의 유대관계가 서서히 맺어졌다. 그다음 단계는 주식을 신용 구매할 수 있도록 은행이 대출해 주는 일이었다. 주식회사와 증권거래소와 은행, 이 세 곳을 축으로 하여 새로운 경제형태가 등장했다.
142-148/ ... 로는, 어린 루이 15세의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717년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모든 세금을 방크 제너랄 은행권으로 내도록 조치했다. 초반 일부 지역에서 반발이 일었지만 정부는 강행하였다.
로는 프랑스에 네덜란드식 공공 은행을 세워 경제적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로는 홀란트 공화국의 금융을 연구했지만, 절대 왕정을 갖춘 프랑스야말로 자신이 구상한 체계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로의 구상에 따르면, 군주가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역 회사에 위임하면 그 영토에서는 이 신뢰를 바탕으로 무역과 관련한 모든 요인이 순차적으로 이어지면서 하나로 통합된다...
... 그가 보기에 프랑스의 해외 속국은 거의 미개발 상태였다. 따라서 로는 루이지애나 지역을 개발해 프랑스 무역을 꽃피우고자 했다...
... 통찰력 있는 생시몽 공작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러나 공화국이나, 영국 같은 군주제 국가에서만 도움이 될 뿐이다... 반면 프랑스처럼 기반이 취약하고 변동이 극심한 절대주의 국가는 이러한 제도를 시행할 만큼 안정적이지 못하다...
이를 마치 입증이라도 하듯, 재무 장관의 명령으로 주화 가치가 40퍼센트 하락하였다...
... 1718년... 이듬해 4월 22일 은행권은 기존 은이 겪었던 주기적 '감가'가 없을 것이라는 법령이 선포됐다. 프랑스가 주화에서 지폐로 이행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 9월 미시시피사는 왕실에 12억 리브르를 빌려 주어 왕실의 빚 전액을 갚아주었다. 한 달 후 로는 직접세 '징수' 책임을 맡았다.
로는 자신이 만든 체제에 자부심을 느꼈다... 오늘로 치자면 로가 시도한 정책은 통화 재팽창 정책이었다. 1716년 불경기였던 프랑스 경제는 로가 은행권으로 통화 공급을 늘리면서, 당시에 매우 절실했던 경기 자극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그는 모두에게 부담이었던 부실투성이 공공 부채를 (합리적이게도) 민간 세금 징수기관이자 독점 무역업체였던 대형회사의 주식으로 전환하려 했다...
그러나 로는 어디서 멈춰서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세운 은행을 통해 통화를 팽창시켜 자산 가격 거품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는데... 이는 마치 미국 상위 기업 500개 업체와 미 재무부, 그리고 연방준비제도를 한 사람이 동시에 혼자 운영하는 격이었다...
... 이러한 교역을 수행하고자 미시시피 강변에 화려한 신도시를 세웠다. 도시명은 아부에 약한 섭정자의 이름을 딴 뉴올리언스였다...
... 1720년 5월 비공식 선물시장 거래가가 1만 2500리브르에 달했다...
그러나 일부 낌새를 눈치챈 사람들이 있었다. 1719년 볼테르(Voltaire)는 제농빌(M. de Genonville)에게... 아일랜드 출신 은행가이자 경제학자로, 로의 체제가 무너질 것을 확신한 리처드 캉티용(Richard Cantillon)은 주식을 모두 팔아 치운 뒤 1719년 8월 초에 파리를 떠났다. 영국에 있던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도 부정적으로 관망했다...
제4장 위험의 도래
186-187/ 스코틀랜드 사람은 비관적이라고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보험기금은... 1744년에 탄생했으며, 이를 사실상 최초로 고안해 낸 사람은 바로 스코틀랜드 교회의 목사 두 명이었다.
사실 보험 회사는 그 이전에도 존재했다. 모험대차에 기원을 둔 보험은 상업의 한 갈래로 시작됐다. 최초의 보험계약을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찾기도 하는데, 당시 상업 문서에 세쿠리타스(securitas) 지급에 대한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계약은 (고대 바빌론처럼) 상인에게 내어준 조건부 대부여서, 현대적 의미 같은 보험증서가 아니라 사고 발생시 취소되는 형태였다... 진정한 보험계약은 1350년대에 이르러 출현하였다. 당시 보험료는 보험금액의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였다가 15세기 무렵에 10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전형적인 보험계약은 중세 이탈리아 상인 프란체스코 다티니(Francesco Datini, 1335-1410)의 기록물에 나온다... 이러한 계약은 수 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표준화되었고, 이후 상인법에도 포함되었다. 그렇지만 이 보험업자들은 전문 종사자가 아닌 자기 부담으로 무역업을 병행하는 상인들이었다.
188-190/ ... 1660년경 지적 혁신이 눈에 띄게 일어나면서, 그 이론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결정적 이론은 다음의 여섯 가지였다.
1. 확률. ... 블래즈 파스칼(Blaise Pascal)...
2. 평균 수명. ... 존 그랜트(John Graunt)...
3. 확실성. ... 야코프 베르누이(Jacob Bernoulli)... 근대적 확률 공식은 통계적 유의성에 대한 기본 개념과 신뢰성으로 구체화되었다.
4. 정규 분포. ... 아브라함 드무아브르(Abraham de Moivre)...
5. 효용. ... 다니엘 베르누이(Daniel Bernoulli)...
6. 추론. ...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
201/ ... 실제로 국가 차원의 강제적인 건강보험과 노령연금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곳은 독일이었으며, 영국은 20년 이상이 지나서야 독일의 선례를 따랐다... 1880년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는...
202/ 그렇지만 복지국가가 착상된 곳이 정치였다면, 성숙한 곳은 전쟁터였다...
5. 절대 안전 자산
6. 제국에서 차이메리카(Chimerica)로
후기: 화폐의 강등
337-/ 현재 금융세계는 지난 4000년간 이어온 경제 진화의 산물이다. 화폐 즉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의 관계가 구체화된 대상은 은행과 어음 교환소를 탄생시켜 차입과 대출 행위를 전례없는 규모로 한 곳에 모아놓았다. 13세기부터는 정부채권이 이자지급을 증권화했으며, 한편으로 채권시장이 등장해 규율에 따라 거래되는 공개시장의 혜택을 누리게 했다. 17세기부터는 기업주식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고 팔았다. 18세기에는 보험기금에 이어 연기금이 등장하여, 규모의 경제와 평균의 법칙을 바탕으로 예측가능한 위험에 대비한 금융적 보호수단을 제공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선물과 옵션이라는 더욱 세분화되고 세련된 형태의 금융증서들이 등장했다. 바로 파생상품의 출현이었다. 20세기부터는 정치적 이유가 작용하여, 각 가계들이 차입을 높여 부동산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도록 부추겼다.
이 모든 제도혁신(은행, 채권시장, 주식시장, 보험, 재산 소유 민주주의)이 뭉친 경제영역은 이전보다 장기적으로 더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대개 금융중개를 거치면서 봉건주의나 중앙계획경제방식보다 자원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히 서구식 금융모델이 전세계로 퍼졌는데 이 과정이 처음에는 제국주의, 이후에는 세계화라는 탈을 쓰고 등장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부터 오늘날 중국에 이르기까지 인류진보의 배후에 놓인 추동력 중 하나는 간단히 말해 화폐의 부상이었다. 금융의 혁신과 중개 및 통합이라는 이 복잡한 과정은, 인류가 고된 자급 농업과 맬서스의 덫에서 탈출하게 해준 과학적 발전 및 원리의 확산 못지않게 매우 중요하였다... 프레더릭 미시킨(Frederic Mishkin)은 "금융제도는 경제의 두뇌이다... 이는 경제활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자본할당 조정장치로, 기업이나 가계가 자본을 가장 생산적으로 활용하도록 한다. 만약 자본이 엉뚱한 곳에 쓰이거나 전혀 유동적이지 못할 경우, 경제는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어 결국 경제성장도 침체된다."라고 말했다.
341-342/ ... 인간이 다음과 같은 인지함정에 쉽게 빠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 유용성 편향. 우리는 실제 필요한 자료보다는 쉽게 떠오르는 정보를 토대로 결정을 내린다.
2. 사후 확신 편향. 우리는 일이 터지기 전보다 터진 후에 그 사건의 발생확률을 높게 보는 경향이 있다.
3. 귀납의 문제. 우리는 불충분한 정보를 토대로 일반법칙을 세우려 한다.
4. 결합의 오류. 우리는 발생확률 90퍼센트인 7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확률은 높게 보지만, 발생 확률 10퍼센트인 7가지 사건 중 적어도 한 가지가 발생할 확률은 낮게 본다.
5. 확증 편향. 처음 세운 가설을 논파하는 증거보다는 확증해주는 증거를 찾으려 든다.
6. 전염 효과. 우리는 판단을 내릴 때 무관할지라도 쉽게 접하는 정보에 영향받는다.
7. 정서적 주먹구구. 가치판단에 선입관이 작용하여 비용과 편익을 올바로 평가하지 못한다.
8. 범주 혼동. 우리는 서로 차원이 다른데도, 손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희생해야 할지 균형있는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있다.
9. 과신. 자신의 추정치에 대해 신뢰구간을 좁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다.(즉, '최상의' 시나리오에 '가장 높은 확률'을 부여한다.)
10. 방관자적 무관심. 우리는 무리 속에 있을 때 개인의 책임을 저버리는 경향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