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향신료를 이용한 것은 BC 3000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메르의 기록에 향신료와 허브에 관한 내용이 있다. 고대 이집트는 미라의 방부 처리에 여러 가지 향신료를 사용했다. BC 1224년 사망한 파라오 람세스 2세 미라의 코에서 후추 열매가 여러 개 발견되었다. 영생과 부활을 기원한 것이다. 후추는 인도가 원산지라는 점에서 당시에도 인도와 이집트 간에 교역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주목받은 열대식물인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를 이르러 ‘4대 향신료’라고 한다. 후추와 계피는 지금도 흔하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우리에게 다소 낯설다. 정향은 향신료 중 유일하게 꽃봉오리에서 얻는데 꽃봉오리의 생김새가 한자 ‘丁(정)’자를 연상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치약이 없던 시절에 주로 구취 제거, 치통 완화, 감기약 등으로 쓰였다. 육두구는 20m까지 자라는 육두구나무 열매의 씨앗이다. 영어로 ‘nutmeg’는 ‘사향냄새가 나는 호두’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위장을 보호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과가 있어 중국에서는 BC 2000년께부터 쓰였다.
4대 향신료는 원산지와 주된 수요처 간 거리가 멀었기에 비쌀 수밖에 없었다. 흔히 후추, 계피를 금값에 비유했지만 정향과 육두구는 그보다 10배 더 비쌌다. 향신료 무역은 고대부터 인도양의 이슬람 상인이 주도했다. 동방의 향신료가 인도양, 홍해를 지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모이면 지금의 레바논, 시리아 일대인 레반트의 상인들이 유럽 각지로 공급했다. 중국은 4000년 전부터 향신료를 다양한 용도로 이용했다. 이렇듯 인도, 동남아를 중심으로 향신료를 각지로 공급하던 유라시아 대륙의 육로와 항로를 통틀어 ‘스파이스 로드’라고 부른다.
(한경, 2020.12.14.)
나바트 왕국(Nabatean Kingdom)은 BC 4세기에서 AD 106년 사이에 요르단지역에서 번성했던 강력한 정치적 실체였으며, 오늘날 폐허가 된 페트라가 수도가 그 수도다. BC 312년까지 부유한 공동체가 페트라 인근에서 번성했다는 사실이 그리스 원정대에 의해 증명되고 있지만, 그리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나바트 왕국을 BC 168년 최초의 왕으로부터 아레타스 4세 왕이 죽고 나서 로마제국에 복속되었을 때인 AD 106년까지 인정한다.
나바트인(Nabataeans)들은 아라비아반도 남동쪽으로부터 온 아랍부족으로 기원전 6세기에 요르단 동부에 있는 사막에서 최초로 출현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페트라에 정착했으며 그들의 영토를 호란(Horan)과 레반트로 계속 확대했으며 보스라(Bosra)를 수도로 삼았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us)는 “나바트는 BC 312년 최초로 출현하였고 오라톨(Oratol)을 숭배한다.”고 했다.
나바트인들은 북부 아라비아와 남부 레반트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이다. 오늘날 페트라로 불리는 라끄무(Raqmu)의 수도로 추정되는 지역에 그들의 정착은 유프라테스에서 홍해에 이르는 아라비아와 시리아 사이의 국경과 대비하여 나바텐(Nabatene)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농업이 극히 제한적이었던 오아시스에 집중되었던 통상로를 강력하게 통제하지 못했던 나바트인들은 사막으로 둘러싸였기에 안정하게 표시되는 경계선을 갖지 못했다. 기원전 4세기에 출현하여 독립적 영토를 유지했던 나바트인들은 기원후 106년 로마 황제 트라잔(Trajan)에 의해 정복되어 로마제국에 합병되었다.
나바티아(Nabatea)로 명명된 나바트 왕국은 ‘전통적인 고대시기(classical antiquity)’ 동안 아랍 나바트인들의 정치적 실체였다.
나바트인들이 군사 정복에 저항하긴 했지만, 주변 국가들의 헬레니즘 문화는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헬레니즘의 영향은 - 특히 나바트 제국이 BC 150년경 북쪽의 시리아로 확장되었을 때 - 나바트 예술과 건축에 반영되었다.
나바트인들은 - 풍요로운 향료무역을 발전시키기 위한 카라반 루트를 따라 정착촌을 세운 - 아레타스 4세(BC 9∼AD 40) 왕의 집권기간 동안 계속 번성하였다. 나바트인들은 로마의 세력을 깨닫고 계속해서 AD 70년 유대인의 봉기를 제압하기 위해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바트 왕국이 직접적인 로마의 통치로 치닫는 단지 시간상의 문제였다. 나바트 왕국의 마지막 왕, 랍벨 2세는 그의 재위기간동안 로마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AD 106년 그가 죽자, 로마는 나바트 왕국을 복속하고 국명을 페트라 아라비아(Arabia Petrea)로 개명하였다. 페트라 도시는 전통적인 로마건축 형식으로 새롭게 디자인되었고, 상대적 번영기가 팍스 로마(Pax Romana) 아래에서 계속되었다.
나바트인들은 로마의 근동 무역로에 합병이후 잠시 동안 이익을 보았고, 페트라는 전성기 동안 20,000∼30,000명의 사람들이 거주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시리아의 팔미라(Palmyra)에 대한 교역로의 이동과 아라비아반도 주변의 해상루트의 확장에 따라 상업에서 이익이 감소하였다.
[지도] 나바트 왕국과 고대 무역로
출처: Shaher Rababeh, 2005, Factors Determining the Choice of the Construction Techniques in Petra, Jordan.
4세기경에 나바트인들은 그들의 수도 페트라를 떠났다. 나바트의 도시들은 로마의 통치하에서 감소하였고 363년 지진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도시를 떠났다. 이 지역은 그 도시들에 교회를 설립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에 의해 통치되었고, 광범위한 파괴의 결과를 초래한 551년 또 다른 지진이 발생했을 때까지 상업은 재활성화 되었다. 그 후 7세기 아랍이 침범할 때까지 나바트 왕국은 잊혀진 상태로 남았다.
고대 향료길(Spice Road)에서 ‘페트라 아라비아’
향료길(Incense Route)이라는 용어는 BC 6∼7세기와 AD 2세기에 남아라비아와 가자(Gaza) 항구에서 종사했던 방향이 서로 다른 상인들의 교역로를 말한다. 이 루트들에 따른 교역은 나바트인들이 이 길을 따라 가장 중요한 도시들을 통제하였을 때인 BC 3세기 대부분 유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향료길은 단일한 길이나 아라비아와 가자사이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두 지역사이를 오고간 상인들의 일반적인 방향을 말한다. 플리니 더 엘더(Pliny the Elder; AD 23∼79)에 따르면, 향료길은 1,931km에 해당하며 매일 밤 정상적으로 도심을 경유하며 편도를 여행하는데 65일이 걸린다고 했다.
기원전 3세기까지 나바트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던 이 도시들은 상인들이 피할 수 없이 가야만하는 필수불가결한 교역로가 되었다. 이 정류장들은 단순히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업의 중요한 측면이었다.
기원전 1000년 아랍인, 페니키아인과 인도인들은 향료, 금, 보석, 희귀동물들의 가죽, 흑단(黑檀), 진주와 같은 사치품을 교역하는 해상 및 육상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해상무역은 홍해와 인도양에서 이루어졌다. 홍해에서 해상교역로는 ‘밥 엘 만데브(Bab-el-Mandeb)’로부터 ‘베레니크(Berenike)’로 이어지며 거기서부터는 육로로 나일(Nile) 강으로 향하며 다시 보트로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한다. 육상교역은 낙타를 이용하여 서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이루어졌다. 인도인들은 카타마란(Catamaran)이라는 보트를 이용하여 인도양에서 서풍(西風)의 도움으로 항해하며 동아프리카와 주로 계피와 계수나무의 향료무역에 종사했다.
기원전 1000년 후반기 남서아라비아의 아랍부족들은 남아라비아로부터 지중해로 가는 향료에 대한 육상무역을 통제하였다. 아랍부족들은 (오늘날 예멘지역인) 마인(M'ain), 까타반(Qataban), 하드라마우트(Hadhramaut), 사바(Saba), 힘야르(Himyarite) 부족이었다. 북쪽에서는 나바트족(Nabatean)이 페트라에서 가자(Gaza)까지 네게브(Negev) 사막을 가로질러 교역로를 장악하였다.
이러한 무역은 아랍인들을 매우 부유하게 만들었다. 남아라비아 지역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행운의 아라비아(Arabia Felix)’라는 의미로 ‘유대몬 아라비아(Eudaemon Arabia)로 불렸으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생전에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곳이다.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은 함께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2세기말 그리스인들은 인도인들이 어떻게 아덴으로부터 몬순 바람을 이용하여 인도의 서쪽 해안으로 직접 항해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그 후에 해상무역을 장악하였다. 기원후 1세기 유대몬에서 중개인을 피하는 새로운 진전을 이루었고, 아라비아 바다를 용기 있게 횡단하여 직접 인도의 해안으로 갈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원전 1세기 행운의 아라비아에서 (오늘날 아덴항과 동일시되는) 유대몬의 아랍도시는 홍해무역에 있어서 교역품을 바꿔 싣는 환적항이었다. 유대몬은 1세기경 에르트리아의 필사본 문서(periplus)에 묘사돼있다. 필사본 문서에 나타난 유대몬 아라비아는 다음과 같다;
“인도의 배들이 이집트로 가지 못하고 이집트의 배들이 더 이상 항해하지 못하고 이 지역까지 왔을 때 유대몬 아라비아는 한때 본격적인 도시였다.”
나바트 왕국은 이웃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로잡는 커다란 부(富)를 축적하는 지역의 대다수 통상로를 통제하고 있었다. 나바트 왕국은 다마스쿠스가 짧은 기간(BC 85∼71) 통제했던 지역인 헤자즈(Hejaz)까지 홍해 연안을 따라 세력을 펼쳤다. 따라서 나바트는 ‘페트라 아라비아(Arabia Petraea)’로 명명된 AD 106년 로마제국에 의해 복속될 때까지인 BC 4세기부터 독립적인 왕국으로 남아있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나바트인들은 그들의 상업 활동으로 이미 유명하였다. 네게브와 시나이에서 교역로의 주인이었던 나바트인들은 역청과 같은 그들의 생산품을 미이라 처리와 보트 코킹을 위해 이집트에서 사용했던 역청과 같은 생산품을 사해(Dead Sea)로부터 알렉산드리아와 (페트로 수도를 위한 주된 시장인) 가자에 수출하였으며, 행운의 아라비아(예멘), 아라비아만 그리고 인도양으로부터 육로와 해로로 수입된 유향, 몰약, 봉숭아와 향료와 같은 사치품을 거래하였다. 이러한 생산물들은 지중해지역에서 인기가 있었으며 최대한 서쪽까지 나바트 상인들이 활동했다는 증거가 있다.
나바트인들은 당시 강력한 무역의 중심지였던 이웃의 사바를 통하여 까타반(오늘날 예멘)으로부터 타격을 받은 향료길과 지중해의 가자지역을 통하여 무역업자들로서 첫째로 그들의 부를 축적한 네게브 사막으로부터의 아랍 유목민들이다. 이들 교역로에서의 끊임없는 여행은 그 지역을 친밀하게 이해했으며, 물을 찾고 보존하는 그들의 기술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재화를 그들에게 재빨리 효과적으로 물자를 운송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바트인들은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한 교역로를 따라서 대상무역(Caravan Trade)과 아일라(아카바)와 루케 코메를 포함하는 몇몇 항구들을 통하여 홍해에서 무역을 통제하였다. 이 교역로들은 특유의 장인정신을 지닌 물건, 도색한 도자기와 램프, 은전과 동전, 프톨레미 스타일을 따른 독특한 건축학적인 모티프, 나바트로 알려진 도시들 등에 따른 경로로 분포되었었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했을 것이며 가자 항구의 최종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각 정류장에서 그들의 상품을 교역했을 것이다. 일부 도시들이 상인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함에 따라 보다 우호적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지역으로 교역지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까지 나바트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던 도시들은 그들이 피할 수 없었던 교역로를 따라 교역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나바트의 요새들이 상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도로를 따라 건설되었지만, 무역업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함께 그들의 보호는 가격이 부과되었다. 나바트인들이 기원전 3세기에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들은 향료길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점점 더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류장들은 단순히 휴식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으며 비즈니스의 중요한 측면을 갖고 있었다.
나바트의 요새들이 상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도로를 따라 건설되었지만, 무역업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과 함께 그들의 보호는 가격이 부과되었다. 나바트인들이 기원전 3세기에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했지만 그들은 향료길의 엄격한 통제를 통해 점점 더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해상무역로 개척되고 라바트 왕국이 무역의 요충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점은 위와 같은 이유에 따른 것 일 것이다.
(출처: hopia.net, 홍성민, 나바트 왕국과 고대의 향료길)
일부 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께에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바빌로니아와 인도가 바다를 통해 직접 교류한 흔적이 있다고 밝힌다. 무려 5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따라 내려가 오늘날의 소말리아 지역인 푼트에 이르는 항로가 개척된 것도 기원전 2500~30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인들은 육로보다 이 항로가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곳곳에 무역기지와 보급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이집트의 배들은 나일강의 동쪽 지류를 따라 비터호를 경유, 홍해로 빠져나온 뒤 푼트까지 가서 금, 상아, 흑단, 가구용 목재, 향, 계피, 가죽 따위를 싣고 다시 나일강의 항구로 돌아왔다. 그 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이집트에 건설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이집트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상인들이 홍해의 항구로부터 아라비아 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한다.
로마제국의 등장은 이런 고대 인도 항로의 비약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특히 기원전 1세기 중엽 로마 항해사 히팔루스가 아라비아해의 계절풍을 이용해 안정적이고 주기적으로 인도를 항해하는 방식을 개발해 동서 항로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상인들은 7월 이집트를 출발해 계절풍을 타고 9월 말 인도의 항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시 11월 말 인도에서 귀로에 올라 2월이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기 160년 무렵까지는 이 동방 항로가 중국까지 이어진다. 당시 비단은 아직 주로 육로의 실크로드를 통해 로마로 들어갔지만 향수, 향료, 후추, 보석, 약, 진주, 상아, 면화, 무명, 가죽, 티크목재 등 인도산 물품들은 바닷길을 통해 이집트나 이라크 지역으로 간 뒤 다시 로마로 운송됐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는 시도도 이어졌다. 이미 서기 1세기 무렵 중국의 내륙으로부터 바다의 실크로드를 거쳐 이집트와 중동 지역으로 나아가는 항로가 활성화됐다. 첫 번째 길은 중국의 낙양으로부터 사천성 성도로 나아간 뒤 양자강을 타고 운남으로 가서 다시 버마의 이라와디강을 거쳐 인도까지 진출하는 길이다. 인도나 실론에서 다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홍해로 진입해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두 번째 길은 중국의 광동 지역에서 베트남의 하노이를 거쳐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경유해 말라카해협을 돌파한 뒤 인도로 가는 길이다. 인도에서는 다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페르시아만으로 진입해 페르시아 지역으로 가거나 유프라테스강을 타고 올라가 바그다드까지 간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나오는 “대진국왕(大秦國王·로마황제) 안돈(安敦·안토니우스)이 바친 상아”라는 것이 바로 이런 항로를 거쳐 중국까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 중국의 대로마 수출품이던 비단을 비롯해 가죽, 계피, 대황 등이 이 길을 통해 이동했다. 로마로부터는 유리, 모직물, 아마포, 진주, 홍해산 산호, 발트해의 호박, 상아, 꼬뿔소 뿔, 대모, 석면, 향유, 약품 등이 중국에 밀려들어왔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일찍부터 도자기와 향신료의 교역로이기도 하다. 운송 과정에서 파손될 위험이 높고 중량도 무거운 도자기를 나르는 데 배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인도와 동남아 일대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를 아랍과 유럽 지역으로 대대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배와 항구가 발달하게 된다. 육상교통의 위험과 복잡성 때문에 열대와 아열대산 향신료는 거의 전적으로 바닷길에 의존해야 했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도자기의 길’이자 ‘향신료의 길’이었던 것이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또한 ‘종교의 길’ ‘문명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해 불교의 많은 고승과 순례자들이 오가면서 인류 정신문명의 지평을 넓혔다. 5세기 초 중국 동진의 승려 법현은 육상의 실크로드로 인도에 들어갔다가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돌아와 <불국기>를 남겼다. 서기 671년에는 당나라의 승려 의정이 뱃길로 인도에 들어간 뒤 25년 만에 역시 뱃길로 돌아와 <남해기귀내전>(南海寄歸內傳)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등 여행기 2권을 남겼다. 이슬람교도 이 바닷길을 이용해 전파됐다. 처음 중국까지 진출한 아랍 상인들은 경유지인 동남아시아 일대에 포교를 하기 시작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시대인 13세기 말 오늘날 인도네시아 지역인 수마트라 북부가 이미 이슬람화됐다. 1세기 뒤 말레이반도 서안의 말라카왕국도 이슬람화됐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말에 이르는 100여년 동안 말레이반도의 파타니왕국과 케다왕국, 보르네오 북부의 브루나이왕국, 필리핀 남부의 수르왕국과 민다나오왕국, 자바 서부의 반텐왕국,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왕국 등이 잇따라 이슬람화한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여행한 우리 민족 인물들의 첫 기록은 7세기 말~8세기 초 배를 이용해 천축(인도)을 방문한 당나라의 승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이다. 이 책에는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현진’(玄進), ‘현태’(玄太), ‘현각’(玄恪), ‘혜륜’(慧輪), ‘현유’(玄遊), ‘혜업’(慧業) 등 신라와 고구려의 구법승 8명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당시 불법의 진리를 찾아 목숨을 걸고 천축으로 가 수도하던 승려들이다. 이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들은 중국의 광동에서 배편으로 교주(베트남의 하노이)를 거쳐 수마트라에 갔고, 다시 수마트라 동남방인 팔렘방에서 배편으로 그 서방인 파로사국에 이르러 불행히도 병사했다.” 이와 달리 고구려의 현유는 스승인 승철 선사를 따라 동남아시아 항로를 이용해 천축의 불교 성지를 두루 순례하고 실론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그 직후 신라의 승려 혜초가 바다의 실크로드로 천축에 들어가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육로로 파미르를 넘어 당나라로 돌아온다. 그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이다.
그 뒤 생활고 등으로 신라를 떠나온 사람들이 중국 양자강 유역의 국제항 양주 등지에 밀집해서 살면서 ‘신라방’이 형성된다. 양주의 경우 당나라 당시 바다의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역으로서 외국 상인이 빈번하게 오가는 대항구인데다, 계절풍을 타면 우리나라의 흑산열도까지 사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신라인의 진출이 활발한 곳이었다. 한편 장보고의 청해무역선단의 활동 등으로 신라의 청해진, 울산 등도 바다의 실크로드에 본격적으로 편입돼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국제도시로 변모한다.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주장은 이런 배경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무렵 아랍과 페르시아 학자 17명이 쓴 20여권의 책에 신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국제적인 항구도시의 전통은 왕족까지 나서 해양활동을 장려한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나, 쇄국주의 기조를 유지한 조선조부터 그 맥이 끊긴다.
(출처: 한겨레21, 오귀환, 2004.11.30.)
동아시아 해상교역 네트워크의 형성은 BC 3세기 한(漢, BC206~AD220)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서(漢書)』에 따르면, 동남아에서 남인도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국가들이 한무제(漢武帝, BC156~87) 이래 중국에 조공(朝貢)을 받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과 동남아의 해상교역이 더욱 활발해진 시기는 후한(後漢)이 쇠락하고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AD220~280)에 들어서 이다. 특히 남쪽에 위치해 있던 오나라는 내륙교역이 차단되어 있는 지리적 조건에 따라 동남아를 통한 해상교역을 중요시 했으며, 이는 동남아가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거점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동남아에서 동서무역의 거점으로 부남(扶南, 푸난)이 흥기하였으며, 부남은 상당한 수준의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양서(梁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한 수(隋, 581~618)나라를 이은 당(唐, 618~907)나라는 동남아 각지에 있는 국가들과 조공관계를 확대해 나갔다. 특히 7세기 후반 동남아에서는 스리비자야가 수마트라 남부 팔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흥기하였으며,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펼쳐 15개의 속국을 거느린 해상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스리비자야는 동서교류의 요충지인 말라카해협과 순다해협을 장악하고 중국과 인도 간의 교통로를 드나드는 선박을 통제했다. 스리비자야에 관한 기록은 당승(唐僧) 의정(義淨)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당시 해상교역을 담당하는 시박사(市舶使)가 설치되어 운영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특히 대 동남아교류는 광주(廣州, 광저우)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8세기를 전후하여 동아시아 해상교역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8세기 중반 중동지역에서 흥기한 압바스 왕조는 해상무역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이는 페르시아인과 아라비아인들이 동서교역을 담당하는 중개상으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8~9세기는 당나라에서 동서를 잇는 육로교류가 줄어들고, 동남아를 관통하는 해상교역의 중요성이 확대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으로는 당태종 이래 서북지역에 대한 정복사업으로 육상실크로드가 활성화 되었지만, 무측천(武則天, 624~705) 이래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의 영향력이 점차 감퇴하게 되었고, 특히 751년에는 안서절도사 고선지가 탈라스전투에서 압바스 왕조에게 대패하였으며 국내적으로는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763)으로 인해 더 이상 중앙아시아를 돌볼 겨를이 없게 되었다. 또한 7세기 이래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티벳(Tibet)족의 토번(吐藩)이 돈황(敦煌, 뚠황) 일대를 정복함으로써 육상실크로드로 진입하는 길목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양자강 델타유역을 중심으로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해상실크로드가 동서교역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당대 이래 진전되기 시작한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로 인해 동남아의 해상에 중국범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송·원 시대에는 대 동남아 무역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당말에서 송(宋, 960-1279)대에 이르는 시기는 빠른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로서 원예작물의 재배와 화폐경제가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전국적인 상업망과 상업도시가 생겨났다. 이 시기 동남아와의 교류관계는 남송의 주거비(周去非, 저우취훼이)가 쓴 『영외대답(嶺外大答)』에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 중 동부자바의 꺼다리(Kediri, 마타람의 일정기간)와 스리비자야가 가장 번성하는 국가로 묘사되어 있다. 송대의 조여괄(趙如适, 짜오루꾸아)이 지은 『제번지(諸番志)』에도 꺼다리와 스리비자야를 포함하여 중국에 조공을 바친 국가들이 명기되어 있다. 이 시기에 이미 필리핀 지역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교역에 포함되기 시작함으로써 동남아 전체가 중국의 조공무역체제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중국과 동남아 관계의 지리적 확대뿐만 아니라 교류물품의 수량과 품목에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 『제번지(諸番志)』 그리고 『운록만초(雲麓漫鈔)』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중국과 동남아의 거래품목은 300여 종이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남아에서는 주로 토속의 귀중품이나 향료가 주를 이루었으며, 중국에서는 자기(瓷器)가 가장 대표적인 교환 품목이었다. 송나라의 동전도 동남아에서 두루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송나라의 동전이 동남아 각지에서 통용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국제화패의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송나라를 이은 원(元, 1271~1368)나라는 동남아를 중심으로 한 동서 해상무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으며, 이러한 정책은 송·원대에 중국선박들이 인도에서 동남아를 경유하여 중국에 이르는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 시기 중국의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중국인이 동남아 각지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출처 : iseas.bufs.ac.kr, 김동엽, 16세기 이전 동아시아 해상교역 네트워크, 2010.10.20.)
향의 역사는 인류의 불의 역사와 함께 한다. 고대인들은 불을 지피기 위해 마른 나뭇가지, 수지, 풀 등을 이용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타오르면서 매혹적인 향기를 발산하였다.
이런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향취는 고대인들에게 신적인 감각을 불러 일으켰고, 그들은 향료를 뜻하는 단어를 창안했다. 향료를 의미하는 영어 perfume은 라틴어 Per Fumum(through smoke)에서 유래했다. Per는 ‘통하여’, Fumum은 ‘연기’라는 뜻이다.
이처럼 향료는 향기나는 수지, 나무, 풀 등을 태우는 것에서 역사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신과 인간과의 교감을 위한 종교적 매개체였다. 이렇게 향료는 종교적인 의식의 하나로 향을 피우는 훈증(fumigation)에서 시작되었다.
예로부터 인류는 병이나 상처에 고통받을 때는 동·식물에서 약효가 있는 성분을 찾았다. 그 중에서 향기가 좋은 성분을 내포하고 있는 것들은 동·식물성 향료로 이용되었다.
고대 이집트는 의·약학, 향수, 미용술을 포함한 과학의 발상지였다. 또한 이들은 향료제조에 풍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고, 장례의식에 향유를 사용하여 훈향·방부하였다.
로마인들은 호화로운 목욕문화와 더불어 사치스럽게 향료를 이용했다. 네로 황제는 향료를 바른 새가 집안을 날아다니게 했다. 그리고, 그는 장미 분수를 설치했으며, 호화로운 장미 목욕을 즐겼다.
고대 이집트와 비슷한 시기에 인도와 중국에서도 향료를 사용했다. 인도의 대표적인 향료로 백단향인 샌달우드(sandal wood)가 있다. 중국은 사향을 향료와 의약품 목적으로 이용했다.
동물성 향료 사향을 탄 물에 목욕을 하고, 사향먹을 최고의 선물로 생각했다. 또한 중국은 레몬, 오렌지, 만다린 등과 같은 감귤류의 원산지로서 이것들은 10세기경 아랍 상인들에 의해 지중해 지방에 소개되었다.
중세시대에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동방세계에서 유럽으로 다양한 향료와 향연고들이 수입되면서 향의 문화가 꽃피었다. 이 당시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동방과 향료 무역의 중심지이였다.
연금술이 발달하면서 13세기 중세 과학자들은 포도주의 증류과정으로부터 알코올 추출에 성공했다. 알코올은 거의 모든 방향물질을 용해시킬 수 있으며, 향 성분을 유지시켜주는 용매였다.
이로서 향료는 향수의 단계로 발전하였으며, 1370년 최초의 알코올 향수인 ‘헝가리 워터(Hungary water)’ 가 탄생했다. ‘영혼의 물’, ‘여왕의 물’이라는 애칭을 지닌 이 향수는 헝가리 엘리자베스 여왕이 애용했다.
여왕은 이것을 ‘영원한 아름다움의 비결’로 생각했다. 헝가리 워터를 입욕제, 화장수 등으로도 이용한 여왕은 당시 7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청혼을 받아 결혼한 일화는 유명하다.
최초의 이 향수는 로즈마리에 마조람, 페니로얄(박하류)을 혼합한 간단한 것이였으며, 이후에 레몬, 라벤더, 오리스 등을 첨가했다. 마조람은 살균력을 함유한 향신료로도 가치가 있다.
(출처 : 제주일보, 변종철, 2018.8.22.)
스리랑카는 고대 인도인이 부르던 랑카(Lanka)에서 비롯됐다. 이번에 다녀온 스리랑카는 세계 해양 실크로드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세계의 배꼽’이었다. 굳이 중화(中華)사상을 들지 않더라도 누구나 자신을 중심에 두는 생각은 진부하기조차 할 수 있다. 이스터처럼 격절된 태평양의 도서조차도 그랬으니 말이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적어도 해양 실크로드에서만큼은 유럽과 아랍, 중국을 오가는 항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항로의 허브’ 또는 ‘인도양의 진주’라고도 불렸던 스리랑카가 명실상부한 ‘세계의 배꼽’이었다는 것은 여러 현장과 문헌을 뒤진 결과 도출된 결론이었다.
최초의 고대도시 아누라다푸라에서 발견된 7~8세기의 만다라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만다라는 스리랑카 남서부의 네덜란드가 만든 식민항구 골의 해양박물관에서 만났다. 거대한 둥근 돌판에 지도가 각인돼 있다. 스리랑카를 세계의 중심으로 설정한 일종의 만다라 형상의 고지도다. 일찍이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할 정도의 고대적 해양관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다.
스리랑카의 전통 선박 아웃리거(outrigger)와 삼각돛배 다우(dhow)도 동서문명 교류의 생생한 물증으로 남아 있다. 현외(舷外) 장치가 달린 아웃리거는 주로 남동부에서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나 미크로네시아에서도 아웃리거는 일반적인 선박 형태다. 선박 구조로 볼 때 동남아와 태평양과 상관관계가 있다. 반면 중부해안 서쪽의 콜롬보 항구에서 만난 배들은 다우였다. 인도양에서 보편적인 형태다. 아라비아의 강력한 자장권역임이 확인된다. 이처럼 스리랑카는 동서를 모두 흡수한 융·복합 해양 문명의 중간지대로 파악되었다.
유럽 지도에 스리랑카만큼 일찍 등장한 아시아의 섬도 없을 것이다. 유럽-스리랑카 해양 실크로드의 비밀을 알려면 오스트리아 빈 국립도서관에 가서 포이팅거(Peutinger)라 불리는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 보면 된다. 12세기, 혹은 13세기 초반에 제작된 도로지도다. 그러나 고지도 전문가들은 1세기께 제작된 것을 4세기께에 다시 만들고 중세에 복사한 것으로 파악한다. 아일랜드와 영국으로부터 스리랑카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적어도 2000여 년 전부터 유럽인이 스리랑카에 이르는 노정을 파악했다는 결정적 증거물이자 해양 실크로드의 고대적 실체다.
스리랑카의 지리적 중요성은 이미 프톨레마이오스(83~168년께)의 지도에 등장할 정도다. 그는 스리랑카를 너무 크게 생각해 인도의 3분의 1, 인도양의 25분의 1쯤 크기로 생각했다. 지도 원본은 알렉산드리아도서관 대화재로 소실됐다. 1478년 로마와 볼로냐에서 다시 제작된 지도는 스리랑카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항구, 산과 강, 수도인 아누라다푸라, 심지어 코끼리 서식지까지 나온다. 흥미로운 사실은 스리랑카 동남부에 ‘cetacean promont(고래 포인트)’라 적혀 있다는 점. 오늘날에도 이 해역은 고래의 길목이다.
실제로 스리랑카에서는 그리스·로마·페르시아·중국 등의 다양한 동전이 발견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정(東征)으로 이미 인도 북서부 펀자브까지 그리스인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이 스리랑카를 드나들었음은 발굴된 당대의 동전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스인은 남인도 말라바르 해안이나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의 타밀 해협에서 향료를 구하고 있었다.
홍해, 페르시아만 무역 상인이 동아시아로, 중국 상인이 서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스리랑카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아랍의 가장 오랜 항구 아덴과 남인도 말라바르 해안 사이의 교역은 스리랑카의 부상에서 그 동력을 얻었다. 그런 와중에 스리랑카 북서쪽 만타이같이 거류민단이 형성되고 국제무역 거점으로 부각된 고대항구도 생겨났다. 광저우(廣州)·푸저우(福州) 등 중국 남부에 줄기차게 당도하던 아랍 상인 다수도 스리랑카를 중간 거점 삼아 거쳐 들어왔을 것이다.
스리랑카 해양교섭의 핵심은 역시 인도대륙이 아닐까. 콜롬보 국립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코뿔소·사자·호랑이·하마 등의 뼈 화석은 이들 동물이 적어도 1000여 년 전에는 다수 생존했음을 시사한다. 인도대륙으로부터 가까운 바다를 통해 스리랑카로 건너왔을 것이다. 오늘날 스리랑카 국기와 궁궐, 사찰 할 것 없이 사자 상징이 등장함은 고대에는 흔했다는 예증.
스리랑카의 초기를 장식하던 4개 종족 중에서 나가(Naga)는 특히 강이나 바다 같은 물과 연관된다. 나가는 ‘선박 여행’이란 뜻에서 유래했다. 보석 무역과도 연관 있다. 석가모니는 갠지스 강가에서 출발해 세 번에 걸쳐 스리랑카를 방문한 것으로 기록된다. 불교 전파사에서 놀랍고 대단한 사건이다. 오늘날 곳곳의 불적(佛跡)에서 바다를 건너온 산스크리트어 금석문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스리랑카의 고대 비밀을 가장 정확히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사료는 마하밤사(6세기께)다. 사료에 의하면 벵골 왕자 비자약이 들어와서 싱할리 왕조를 세웠다. 기원전 247년에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 3대 왕인 아소카가 아들 마힌다를 보내어 불교를 전파한다.
일찍이 부처가 세 번씩이나 직접 스리랑카를 방문해 설법했다는 것은 그만큼 스리랑카를 훗날 ‘불국토의 섬’이 될 것을 예견했다는 뜻일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처 열반 이후에 바다를 건너 부처님 진신 치아를 모셔와 불치사(佛齒寺)를 조성한 점이다. 불치는 왕국의 옥새와도 같아 전란을 겪으면서도 끝없이 새로운 왕도와 함께 이동·전승되어 왔다. ‘바다를 건넌 치아’는 해양을 통한 스리랑카 문명교류의 중요 맥락을 잘 설명해준다.
북서부 만나르섬은 작은 암초와 섬들로 인도와 이어진다. 일명 ‘아담의 다리’라 불린다. 인도와 스리랑카가 손쉽게 이어지는 해협의 현장이다. 섬에서는 아프리카산 수령 700여 년의 바오바브 나무도 볼 수 있다. 아랍 무역 상인이 심었다는 전설의 나무. 일찍이 아랍 무슬림이 정착했다는 증거다. 오늘날 콜롬보 시내의 상당수 장사꾼이 아랍인 후예인 무슬림인 것도 오랜 국제무역의 역사를 말해준다.
해양교섭에서 몬순은 결정적인 동력이다. 스리랑카는 북동과 남서 몬순에 따라 동서 항구를 자연스럽게 번갈아 이용해 문명교류의 출구로 활용할 수 있었다. 북서풍으로 부는 겨울몬순, 남서풍으로 부는 여름몬순으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무역선을 움직였다. 콜롬보대의 고고학자 반다라나야케는 ‘몬순 아시아(Monsoon Asia)’란 표현을 썼다. 적도몬순과 우리가 속한 동아시아몬순을 모두 포함해 몬순이 해양 문명교류에 지대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주장이다. 쿠알라룸푸르 이슬람예술박물관의 도록은 이슬람 해상교류 전파를 아예 ‘몬순이 보내온 메시지’로 압축했다.
스리랑카 ‘문화 삼각지’는 내륙 산지에 의지하고 있으나 강을 통해 바다로 연결되어 있었다. 스리랑카의 역사박물관이나 해양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중국 도자기들은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물량 공세의 무역이 있었다는 생생한 증거. 페르시아의 블루-그린 도자기,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도 발견되고 있다. 동방교회, 페르시아교회의 대표격인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지금도 이라크·시리아·이란 등에 살고 있다.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을 따라 스리랑카로 전래해 왔을 것이다.
고대 중국과의 교섭에서 중요 자료는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다. 399년 중국을 떠난 법현은 402년 인도에 당도하며, 두루 인도를 돌아다니다가 귀국길에 스리랑카에 2년여 머문다. 당시 수도 아누라다푸라에 머물렀는데 도시의 도로가 정연하고 5만~6만 명의 승려가 주석했다고 기록한다. 엄청났던 불력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조선인은 이 머나먼 스리랑카를 알고 있었을까.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년)에서 스리랑카를 석란산(錫蘭山)으로 표기했다. “석란산은 큰 바다 속에 있다. 임금은 불교를 숭상하여 코끼리와 소를 소중히 여긴다…나라는 부유하고 땅은 넓으며 인구가 조밀하기로는 조와(자바)에 버금간다. 구슬을 캐는 늪이 있어서 여러 나라 상인들이 앞을 다투어 와서 사간다”고 했다. ‘보석의 섬’으로 국제무역 거래에서 스리랑카의 보석이 널리 거래되던 정황을 이해하고 있었다. 멀긴 해도 조선인에게도 그리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는 증거다. 스리랑카 상인도 베트남 호이안이나 남중국 광저우에 자주 출현하고 있었고, 그러한 국제 정보는 조선에도 이미 당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중앙선데이, 주강현, 2016.5.29.)
성경에 골은 솔로몬왕이 상아와 원숭이, 공작을 얻은 곳으로 묘사돼 있다. 아시아의 가장 오랜 무역기지 중의 으뜸이었다. 아랍인들은 칼랍(Kalab)이라 불렀다. 페르시아와 중국 사이의 중간 거점으로 주목받았다.
골의 해양사적 중요성을 잘 말해주는 기록으로 모로코의 대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꼽을 수 있다. 바투타는 북인도 델리를 거쳐 인도 서쪽 해안을 타고 내려와 오늘날의 몰디브로 갔다. 몰디브에서 디나와르(오늘날의 스리랑카 콜롬보)를 거쳐 골에도 들렀다. 당시 디나와르는 상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해변의 큰 도시였다. 힌두교 대사원에는 1000여 명의 브라만과 500여 명의 인도 여인들이 춤을 추며 봉헌하고 있었다. 북부 인도에서 내려온 인도인이 당시 항구도시를 점령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바투타가 골을 찾았을 때는 1344년. 당시 스리랑카 남쪽의 해상 통치자는 잘라스티였는데, 그 아래 500여 명의 에티오피아인을 거느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동부 아프리카인이 인도양을 건너와 스리랑카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종족의 교류와 거주에서 이른바 현대사회의 비자 체제와 국민국가 시스템보다 고대·중세의 개방성이 훨씬 돋보인다. 바투타는 골에서 북상하여 스리랑카해협을 거쳐 벵골만으로 올라갔다가 오늘날의 수마트라 반다아체를 거쳐 중국으로 향했다.
정화함대가 골을 방문한 역사적 사건도 벌어졌다. 금석문에 의하면 정화는 불치사에 보관돼 있는 부처님 진신 치아를 얻겠다는 생각으로 2차 원정 때 들른 것으로 나타난다. 1411년의 일이다. 여기까지는 이슬람교도와 중국인의 방문 기록이다.
1505년 포르투갈 알메이다가 이끄는 선단이 골에 당도하여 ‘검은 성’이란 이름의 자르트(Zwart) 성을 만들었다. 오늘날 네덜란드 창고거리 남쪽의 비교적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봤다. 암반으로 된 절벽 위에 검은 성을 쌓고 방어막을 설치했다. 식민 저항자들을 감금했을 감옥도 성채 정상에 서 있다. 성은 지저분하게 방치되어 있으나 그 원형은 그런대로 보존됐다. 대포를 걸쳤던 성벽에서 굽어보니 험악한 요새와 인도양의 푸른 바다 빛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저 바다를 거쳐서 수많은 제국의 선단이 몰려왔을 것이다. 움푹 들어간 만은 무역기지로 안성맞춤이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요트 선착장과 선원학교로 이용될 뿐이나, 옛날에는 모래사장이 안전하게 배를 받아들이는 천혜의 항구였다.
수퍼마켓에서 산 계피를 씹어보았다. 껍질이 연하다. 우리가 한약방에서 자주 보던 베트남 산의 두터운 수피가 아니다. 색깔도 고운 것이 양질의 계피다. 스리랑카는 세계 계피 생산량의 80~90%를 차지한다. 인도양은 계피 생산에 적당한 기후대다. 세이셸 군도, 마다가스카르에서도 계피 플랜테이션을 하고 있다. 기원전 4000년 전에 이미 이집트에서 계피를 방부제로 썼다. 인도양을 건너온 수입품이었을 것이다. 『동의보감』에 계피의 뜨거운 효능이 속을 따스하게 하여 혈맥을 잘 통하게 한다고 쓰인 것을 보면, 계피는 수입 향료로서 조선 사회에서도 귀하게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피는 보통 12년 정도 자라면 수확한다. 5월과 8월 사이다. 4월까지 서쪽 해안은 거친 파도로 인해 수확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1706년, 네덜란드는 강을 이용한 내부 운하 시스템을 구축한다.
영국의 지배가 골에서 콜롬보로, 거점 도시만을 옮긴 것이 아니다. 계피 못지않게 홍차가 주요 수출품으로 등장했다. 중국에서 사들이는 차 때문에 많은 은을 쓰고 있던 영국 입장에서는 ‘실론티’를 개발함으로써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그런데 품격 높은 실론티가 완성되기까지, 차맛을 내기 위해 평생을 걸쳐 그리고 대를 이은 영국인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출처 : 중앙선데이, 주강현, 2016.6.19.)
암본섬 북부의 히투라마 선착장에서는 세렘섬으로 가는 배가 수시로 뜬다. 암본과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섬인 세렘 역시 정향의 본산이다. 역사적으로는 몰루카 북부의 거대한 섬 할마헤라에 속한 테르나테, 티도레도 정향으로 유럽 사회에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 무엇보다 암본 남쪽의 반다 제도는 육두구의 본향이다. 자그마한 바위섬으로 이어지는 그곳이야말로 유럽 열강 자본가들의 가슴을 들끓게 만들었다.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육두구의 본향 육두구 같은 향료는 한반도에도 어김없이 상륙해 『동의보감』에 뚜렷하게 그 족적을 남겼다. 적도의 바다에서 펼쳐진 향료의 바닷길이 한반도까지 이어진 결과다. 오늘날 홍콩이 ‘향항(香港)’인 것은 영국이 오만 가지 향료를 홍콩으로 집결시켜 유럽에 판매한 데서 비롯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최고관리자 얀 피터스존 쿤은 “전쟁 없이는 무역 없고, 무역 없이는 전쟁도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끊임없는 식민전쟁을 계획하고 실천했다. 다른 나라가 ‘블루오션’인 향료무역에 손대는 것을 참지 못했고, 오로지 ‘독점’을 위해 움직였다. 문명의 그늘이 짙게 적도의 바다에 드리웠고, 오늘날까지 실재하는 인도네시아의 포트 로테르담(Fort Rotterdam)이나 포트 암스테르담(Fort Amsterdam) 성채에 상징적으로 각인돼 있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항구도시 이름이 들어간 포트 암스테르담은 암본섬 북부에, 포트 로테르담은 술라웨시섬 마카사르에 있다.
(출처 : 중앙선데이, 주강현, 2016.5.8.)
유럽에서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전쟁(1096~1291)의 결과, 유럽인들은 아랍의 이슬람권과 교류가 많아지면서 아시아의 향료를 알게 된다.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전쟁의 종결은 향료에 대한 갈망을 더욱 강하게 부추겼다. 아시아의 향료는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 상인의 손을 거쳐 유럽으로 흘러 들어왔다. 동방상인이 향료무역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리고 있음을 유럽인은 배 아파했다. 포르투갈은 향료무역로의 비밀을 알고자 했으며, 마침내 1510년 인도 서부의 고아를 점령하며 아시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다.
리스본을 출발할 때는 모든 것을 인도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도 상인들이 무역권을 쥐고 있는 처지에 향료무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인도 너머까지 진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그 목표가 된 곳이 믈라카였다. 아랍의 배후인 아시아로 진출해 향료를 확보한다면 일확천금이 보장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교도’들로부터 향료무역권을 빼앗는 것은 종교적 승리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후발주자 네덜란드는 포르투갈 배에 ‘위장취업’까지 해가면서 ‘스파이스 루트’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절치부심했다. 최후의 승리는 후발주자인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OC,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에 돌아갔다. 네덜란드는 향료무역의 현지 거점으로 암본섬을 주목했다. 섬의 크기가 적당해 집중적 식민경영이 가능하고, 오목한 만이 형성돼 있어 선박의 안전한 정박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1512년까지 암본은 인근 테르나테섬의 지배를 받았다. 암본의 술탄은 북쪽 히투라마를 향료무역 기지로 삼았다. 포르투갈은 테르나테 대신 암본을 지배하게 되며, 무슬림이 점거해 무슬림왕국이 있는 북쪽보다 남쪽의 취약한, 오늘날의 암본 시내에 식민거점을 마련한다. 1599년 네덜란드는 암본을 빅토리아성으로 개명하고 이후 동인도회사의 무역거점으로 삼는다. 북쪽이 이슬람, 남쪽이 기독교 권역으로 정확하게 반분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1630년대는 네덜란드에 매우 독특한 출발을 약속한 시대였다. 자바섬 바타비아(오늘의 자카르타)에 무역 본부 겸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향료군도 암본에도 기지를 세웠다. 1641년에는 향료 집산처인 포르투갈령 믈라카가 동인도회사에 넘어갔다. 네덜란드인에게 향료는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유력한 수단이었기에 이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철저하게 제거해야 했다. 인도네시아 토착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암본 건너편의 마카사르 고와왕국과 부기스왕국의 저항이 특히 격렬했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인도로 알려진 ‘네더르란트 오우스트 인디’를 건설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에 따라 말루쿠제도의 크고 작은 왕국의 저항도 가열찼다. 술라웨시 남부의 고와왕국과 테르나테왕국, 용맹성이 널리 알려진 암본섬 북부의 히투왕국의 무슬림이 연합해 네덜란드에 저항하기도 했다.
암본섬 건너편 마카사르의 원주민 요새는 동인도회사에 인도돼 로테르담으로 명명됐다. 본디 고와왕국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네덜란드 본토 유수의 항구인 로테르담이 술라웨시 마카사르에 만들어진 것이다. 암본섬 북쪽 중앙에 히투라마 촌락이 있고, 거기서 5㎞ 정도 떨어진 힐라 촌락에 암스테르담 요새가 우뚝 서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자카르타인 바타비아 역시 로마에 저항했던 옛 네덜란드의 자랑스러운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1623년 초 네덜란드인 지방총독 헤르만 반 스포일트는 영국 상인들이 일본인 용병의 도움으로 자신을 죽이고 이들을 지원할 영국 함선이 도착하면 네덜란드 수비대를 무장해제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혐의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들은 고문을 받고 자신의 유죄를 인정했으며 암보이나 법정에서도 혐의가 인정되어 1623년 2월 사형에 처해졌다.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수세기 동안 동남아시아를 포기한 채 인도 경영에만 매달리게 된다.
일찍이 인도네시아를 거쳐간 이븐 바투타는 <이븐 바투타 여행기>에서 정향을 이렇게 말했다.
“정향나무는 대체로 굉장히 큰 나무로 무슬림지역보다 이교도지역에 더 많다. 너무 흔하다 보니 주인이 따로 없다. 정향나무의 줄기는 모로코까지 수출된다. 모로코 사람들이 정향꽃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정향나무에서 떨어진 꽃인데, 귤꽃과 비슷하다. 정향 열매를 우리나라에서는 향호두라고 하며, 꽃은 비싸다고 한다. 이상 모든 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이교도지역이라는 뜻은 아직 무슬림이 전파되지 않은 변방 오지의 섬에서 정향이 자라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르코 폴로도 <동방견문록>에서 이곳의 향료를 언급했다.
“후추·육두구·감송·방동사니·쿠베브·정향 등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각종 진귀한 향료가 있다. 매우 많은 선박과 상인이 이 섬에 와서 물건을 사고 많은 수입을 올린다. 이 섬에는 얼마나 재화가 많은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것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암본섬 북쪽에서 많이 마주친 육두구는 유럽에서 한때 금값으로 쳤던 향료다. 페스트가 유행해 많은 이가 죽어가던 시절에는 약효가 있다고 하여 천정부지로 가격이 올랐다. 육두구는 열매와 열매를 감싼 껍질인 매스(Mace)를 모두 포함해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이 산출되는 장소는 인도네시아 동쪽과 필리핀 사이에 있는 말루쿠제도의 몇몇 섬으로, 이곳이 향료의 산지였기 때문에 말루쿠제도를 ‘향료제도’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향료의 섬’ 중에서도 손꼽는 향료의 섬은 막상 암본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의 반다제도다. 반다는 3개의 섬으로 구성되는데, 가운데 섬 반다네이라가 중심이다. 반다는 워낙 오지의 변방 섬인지라 여기서 생산된 향료가 암본에 집결돼 세계 무역망으로 연결됐기에 암본이 더 중요할 뿐이다. 암본 공항에서는 반다네이라까지 작은 비행기가 연결돼 쉽게 당도할 수 있으나, 뱃길로는 아득하게 먼 섬이다.
중세유럽에서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됐던 육두구가 독점적으로 반다제도에서 생산됐다. 아랍·중국·자바·부기스의 상인들이 향료를 가지고 가고 대신 식량과 의복 등을 섬에 주었다. 이들 향료가 유럽으로 어찌어찌 흘러 들어가 비싼 가격에 팔렸을 것이다. 유럽인들은 육두구가 독점적으로 산출되던 반다제도의 정체를 알기 위해 수세기 동안 노력했다. 결국 외국 상인들을 통해 물어물어 섬의 존재를 알게 된다. 유럽에서 반다제도까지는 정말 머나먼 곳이다. 오늘날을 기준으로 삼아도 반다제도는 웬만해서는 근접하기 힘든 변방의 섬이다.
(출처 : 월간중앙, 주강현, 2017.4.17.)
중국의 기록에는 이른 시기부터 후추 이야기가 나온다. 정사에 나오는 가장 이른 후추 이야기는 후추가 인도의 산물이라는 <후한서> 기록이다. 아마도 한나라 때 처음 후추를 접한 모양이지만 쉽게 구하기 어려웠음은 분명하다. 이후 역사는 오래도록 후추에 관해 침묵한다.
후추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송사>이다. 송나라 태종 대인 995년에 점성(짬파), 즉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에 있던 나라에서 후추 200근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이후로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후추를 조공했다는 기록이 드물지 않게 나온다. 명나라 홍무제 때인 1382년과 1387년에는 각각 조와국과 섬라에서 7만5천근과 1만근을, 1390년에는 강향(降香)과 후추를 17만근이나 보냈다. 조와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자바이고, 섬라는 태국(타이)이다. 손이 커도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중국의 권위에 눌려 막대한 물량 공세로 선린관계를 맺으려는 의도였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중국 역사이니 ‘조공’이라고 썼지만 사실상 무역이다. 가는 것만큼 오는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동남아에서는 후추만이 아니라 다양한 향신료와 향목, 공작새와 깃털, 코뿔소 뿔과 바다거북 등딱지를 가져갔고, 그 대가로 중국 황실은 막대한 양의 비단과 서책, 한약, 도자기를 내주었다.
후추 외에도 정향(丁香), 강황, 육두구(肉荳蔲, nutmeg), 계피 등 동남아의 산물이 교역되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신안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는 작은 병에 담긴 정향이 발견되었다. 신안의 난파선은 1323년 중국 닝보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이었다. 전세계에서 단 한곳, 말루쿠제도에서만 나는 향료였던 정향이 원나라 배에서 나왔다는 것은 원대 중국에서 이미 중계무역을 할 만큼 많은 물량의 정향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동남아의 정향을 상품으로 팔았던 것은 중국만이 아니었다. 신라 역시 일본에 정향을 팔았다. 752년 일본에 건너간 신라 왕족 김태렴(金泰廉)의 사절단에게 일본인들이 주문한 물품 목록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에도 정향이 들어 있다. 동아시아, 중국과 한국의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산 정향을 오랫동안 일본에 팔았던 것이다. 못처럼 생겼다고 해서 정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식물은 지금은 중국 남부 하이난에서도 재배가 되지만 원래 말루쿠제도에서 자생하는 나무의 꽃봉오리를 말린 것이다.
마젤란도 스페인 국왕의 후원을 받아 향료제도로 항해하다 필리핀 막탄섬의 한 부족과 전투 중 사망했다. 그의 선단 중 두척이 1521년 향료제도에 도착해 향료를 가득 싣고 돌아갔고, 스페인은 1526년 제도의 다른 섬 티도레에 요새를 지었다. 오로지 향료무역을 독점하기 위해서였다. 존 밀턴(1608~74)은 <실낙원>(1667)에서 날아오르는 사탄의 모습을 트르나테와 티도레의 섬에서 향료를 싣고 무역풍을 타서 항해하는 배처럼 보인다고 비유한 바 있다.
정향을 둘러싼 향료 독점의 욕망이 동남아의 식민지화를 촉진했지만 향료가 다는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동남아의 산물이 설탕이다.
설탕도 그 시작은 인도였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인도의 설탕을 수입해 먹기 시작했는데 인도에서 사탕수수를 보고 꽃도, 벌도 없이 꿀이 만들어진다며 신기해했다고 한다. 대대적인 사탕수수의 재배와 설탕 제당은 동남아에서 성공했다. 고추와 고무나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동남아시아로 전해진 것이지만 설탕은 동남아에서 신대륙으로 전파된 것이다. 실제로 사탕수수는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필리핀, 그리고 중국 남부에서 자란다. 하지만 중국에 설탕이 유입된 것은 후추처럼 동남아의 조공에 의한 것이었고, 남제(南齊, 479∼502) 때 이미 푸난(캄보디아)의 특산물이 사탕수수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후대 기록에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자바, 캄보디아 특산이 사탕수수이며, 이들 나라에서 설탕을 만들어 중국에 보냈던 것이 확인된다. 974년 슈리비자야에서 백설탕을, 비슷한 시기 자바에서 설탕을 보낸 일이 그것이다. 대략 10세기까지 중국에는 제당기술이 없었다. 당 태종은 두번이나 인도로 사신을 보내 설탕 졸이는 방법을 알아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양주(揚州)에다 여러 종류의 사탕수수를 올리라 명을 내려 그 즙을 짜서 한약 달이듯이 졸였는데 서역을 통해 인도에서 들어온 것과 달리 맛이 없었다고 <신당서>(新唐書)는 전한다. 사탕수수 재배법은 배울 수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정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송 이전까지 설탕 공급은 동남아 담당이었다. 이 시기 미얀마에 있었던 퓨 왕국에서 당에 악기와 악공을 보내 음악을 바쳤는데, 그중 하나가 ‘감자왕’(甘蔗王)이다. 감자는 달콤한 사탕수수라는 뜻이고, 이 음악은 부처의 법이 달콤한 사탕수수처럼 백성을 가르치니 모두가 그 맛을 즐긴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불교가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고, 그 핵심은 대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2세기부터 남방 해로를 통해 불교가 전파되었다. 중국 남부로 전해진 불교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하노이에서 중국으로 들어갔다. 오나라 손권이 귀의했던 승려 강승회(康僧會)도 하노이에서 출가하고 오나라로 들어갔고, 적지 않은 승려들이 하노이를 거쳐 중국으로 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불교는 단순히 부처의 말씀, 즉 경전과 사상만을 전하지 않았다. 불교와 함께 기존에 동아시아에는 없었거나, 있어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다양한 물건들이 새롭게 소개되었다. 설탕도 그중 하나였다. 현재 발굴되는 유물로 보면 고대 동남아에는 불교보다 힌두교가 성행한 흔적이 많다. 태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남부 곳곳에서 힌두교의 비슈누와 하리하라가 발굴되고 사원이나 건물 유적에는 시바 링가가 남아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4세기의 중국 구법승 법현(法顯)도 <불국기>(佛國記)에서 현지에 외도(外徒), 즉 이교도가 많다고 썼다. 하지만 해상교역 초기, 동남아에서 중국으로 사절단을 보낼 때는 승려가 동행하거나 불교 물품을 가져간 경우가 많았다. 중국인들이 불교를 선호하고 승려들을 존중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중국으로 간 동남아 여러 나라의 사절단들은 상아로 만든 탑이나 불상, 때로는 사리를 진주, 각종 구슬, 코뿔소 뿔, 설탕, 향과 함께 가져갔다. 자신들이 실제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상관없다. 물론 배로 갔기 때문에 중국 남부의 항구에 들어가 짐을 부리게 허가해달라고 중앙정부에 올린 표문에도 황제의 은덕을 부처의 광명에 비유해 칭송하며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복한다’는 인사치레를 빼먹지 않았다.
(출처 : 한겨레, 강희정, 2020.11.14.)
향 공양은 부처님에게 드리는 최대 공양 중 하나다. 따라서 아무 향이나 쓸 수 없으며, 유향·침향 등 외국에서 들여온 최고급 향을 봉헌했다. 신라의 신앙결사체인 만불향도(萬佛香徒)가 고려까지 전해졌으며, 조선의 향도·황두·상두 전통까지 이어졌다. 고급 향은 주로 아라비아, 인도, 베트남 등 남방에서 전래되어 왔다. 그들 외국 향 중에서 으뜸은 단연 유향(乳香)이었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유향이 발견됐다. 불교 의식에 쓰였을 유향 세 봉이 비단에 쌓인 채 발견되었는데, 유향(儒香)으로 기록된 것이 특이하다. 먼 아라비아에서 신라까지 전해온 귀한 향이다. 이로써 아라비아와 신라의 무역로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유향 자체가 비싼데다가 먼 거리를 이동해왔으므로 상당히 귀한 향이었기에 석가탑에 봉안한 것이다.
아라비아에서 수천 년 동안 다루어진 진귀한 향인 유향과 몰약은 서양에 비단과 후추가 전파되기 전까지 가장 대표적인 사치품이었다. 기원전 1500년경 아랍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향을 낙타에 실어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지중해 연안으로 운반했다. 이미 기원전 3500년 무렵 이집트와 바빌론의 귀족은 향의 가치에 눈을 떴다. 기원전 1000년 중반부터 헤로도토스, 플리니우스, 프톨레마이오스, 스트라보, 같은 많은 학자들이 향을 언급했다.
아라비아의 향 교역품은 유향나무에서 채취한 유향과 몰약나무에서 채취한 몰약이었다. 이 두 식물종은 아랍 남부와 소말리아 북부의 고지대에 잘 자랐다. 유향과 몰약은 종교적, 세속적으로 모두 주목받았다. 고대에는 거리와 광장, 건물에서 악취가 많았으며, 향은 이를 제어하는 효과가 있었다. 향은 의약품과 방부제, 미용, 성적 용도로 쓰였다. 아라비아반도에서 유럽과 이집트, 근동으로 수출된 유향으로 인해 향 교역로가 형성됐다. 유향 교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아랍 남서부의 왕국은 기원전 1000년 중엽부터 6세기까지 지중해 연안으로의 향료 교역을 주도하여 부와 권력을 누렸다.
인도에 수출된 유향은 불교의 동전(東傳)과 함께 2~3세기에는 중국으로 전래됐다. 8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확산과 더불어 해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로 전해졌다. 당나라에서 유향은 궤양과 장의 병증에 처방되기도 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따르면, 도교에서는 유향을 불로장생의 약으로 간주했다. 이들 유향이 신라에도 전해져서 석가탑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븐 바투타는 “오만에 유향나무가 있는데 잎사귀가 보드랍다. 잎사귀를 찢으면 우유 같은 액이 방울방울 솟아나다가 곧 아교처럼 굳어버린다. 이 수교(樹膠)가 바로 유향이다”라고 했다. 송의 <제번지>에서는 아랍의 유향이 배에 실려 동남아시아로 가면 오늘의 수마트라인 해상왕국 삼불제(三佛齊, 스리비자야) 사람이 중개무역을 하는데, 이 왕국이 향의 중간 집산지라고 했다. 그가 기록하기를, ‘유향은 훈륙향(薰陸香)이라고도 한다. 대식(大食, 아라비아)의 미르바트(麻拔), 아시시르(施曷), 도파르(奴發)의 깊은 골짜기에서 난다’고 하였다.
유향이 아랍에서 온다는 사실은 중국도 잘 알고 있었다. 송나라 신종 연간(1078~1085)에 조서를 내려 “유향은 무용하므로 진공하는 것을 불허한다”라고 했다. 무역 손실을 크게 입을 정도로 유향이 너무 많이 수입됐던 것이다. 그러나 돈이 되기 때문에 유향의 범람을 막기가 어려웠다. <송사(宋史)>에서는, “유향은 사신이 올 때마다 번번이 떼로 짊어지고 와서는 사사로이 상인과 거래하며 잇속을 챙겼다. 팔지 못한 것은 외부(外府)에 주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어 오는 자가 더욱 많았다”고 하였다.
명(明)의 마환은 <영애승람>에서 토산품으로 유향(乳香)이 있는데, 수지(樹脂)로 만든 향이라고 했다. 그 나무는 느릅나무처럼 생겼으나 잎이 뾰족하고 긴데, 이 지역 사람들은 매번 나무를 베어 향을 취해 판매한다. 중국의 보선이 이곳에 와서 황제의 조서를 읽고 상을 내리자 국왕이 우두머리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두루 알리게 하니 모두 유향과 혈갈(血竭), 알로에(蘆), 몰약(沒藥), 안식향(安息香), 소합유(蘇合油), 목별자(木鱉子) 따위를 가져와서 모시 실이나 자기 등과 맞바꾸었다고 기록했다.
대식국(大食國)은 고려와 조선도 익히 알고 있던 나라다. 드넓은 바다를 무대로 ‘대식’이라는 천하의 국제무역 상인이 인도양을 휘젓고 인도와 중국, 심지어 고려까지 넘나들었다. 9세기 대식국의 지리학자 이븐 코르다드베흐는 일찍이 ‘실라(신라)’를 지도에 명기했다. 그만큼 아랍은 세계정세에 밝고 구석구석까지 누비는 투철한 상인의 나라이자 항해의 나라였다.
단일 무슬림 사회는 코스모폴리탄적 세계를 탄생시켰으며, 고급 사치품뿐 아니라 일반 소비재가 거래되는 거대 시장을 형성했다. 팍스이슬라미카(Pax Islamica) 아래 상업은 번성했으며 중요 해상과 육로 교통이 발전했다. 이슬람 제국은 로마 제국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했는데, 특히 상업적 요소가 중요했다. 이슬람은 인도양을 지나 인도와 중국에 이르는 무역 노선을 경영했다. 육상실크로드와 해상실크로드 두 노선이 국제적으로 운영됐다.
이슬람의 동진과 더불어 동쪽으로 중국과 교류하게 되면서 해양실크로드가 활기를 띠었다. 활력을 얻은 아랍인은 다방면에서 문화적 부흥을 경험했다. 당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 예술, 수학, 천문학이 꽃핀 곳은 로마나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파리가 아닌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코르도바 등이었다. 무역로를 따라서 유향이 조선에도 들어왔다. 조선 후기 유희(柳僖)는 <물명고(物名考)>에서, 유향은 대식국에서 나오는데 나무는 소나무와 비슷하고, 도끼로 찍어서 나무의 진액이 엉기기를 기다렸다가 얻는 것이라 하였다. 유향을 다양하게 분류할 정도로 다양한 종류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수입과정에서부터 엄정하게 가격이 매겨져서 들어왔을 것이다. 심지어 페르시아의 몰약도 들어왔다.
<물명고>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마마향, 천택향, 휸륙향과 같다. 명유(明乳, 유향의 일종)는 둥글고 크며 투명하니, 적유(유향), 간향(유향 가운데 최상등품)과 같다. 병향(甁香)은 병에 거둔 것이다. 작삭(斫削, 유향의 일종)은 잘게 부수기 어려운 것이다. 유탑(乳, 유향의 일종)은 모래와 돌이 섞인 것이다. 흑탑(黑)은 빛깔이 검다. 수습탑(水濕, 유향의 일종)은 물에 담그면 빛깔이 손상되는 것이다. 전말(纏末, 유향의 일종)은 널리 퍼뜨려서 먼지처럼 된 것이다.” 이들 향이 절에서도 쓰였음은 당연하다.
(출처 : 불교신문, 주강현, 2022.5.24.)
‘향 중의 왕’이 있으니 침향(枕香)이다. 침향은 오랜 고목의 상처에서 수지가 굳어서 만들어진다. 고대에 침향은 그 뛰어난 향과 다양한 치료 성분으로 인해 귀중히 여겨졌다. 향수와 약제를 만드는 데 쓰였다. 몸의 악기를 제거하고 기 운행을 순조롭게 하여 질병을 치료한다. 시신에 바르는 방부제로 쓰기도 한다. 침향은 내질환계의 모든 통증 완화, 영혼을 정화시키기, 한방의학 등의 중요 약재로 팔렸다. 중세 중국에서 모든 의식과 사적 영역에서 침향이 큰 역할을 맡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나무에서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다가 불을 붙이면 그윽하고 오묘한 향을 피우는 데 다른 향에 비할 수가 없다. 향 내음 자체도 약재 효과가 있다. 큰 조각은 베개로도 사용됐다. 고려 의종 5년(1151) 기록에 침향목으로 관음보살상을 제작하였다고 했다. 현전하는 불감(佛龕)에도 침향목이 발견된다. 엄청나게 비싼 목재로 불상을 조성했다는 뜻이다. 이들 침향목은 배를 이용하여 한반도에 당도하였을 것이다. 침향은 무게 당 금으로 값이 치러졌다. 침향 화물 하나만 손에 넣으면 그 상인은 평생을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침향은 베트남, 미얀마, 태국, 중국 해남도 등 남방에서 산출된다. 그런데 단연 최고의 침향은 베트남 산이다. 베트남의 월족이 아닌 참파왕국에서 주로 침향을 생산하여 수출했다. 고대왕국 참파는 역사적으로 베트남 중북부에서 남부에 걸쳐있는데, 월족의 압력에 의해 서서히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다가 19세기에 남부에서 멸망하게 된다.
참파의 중요한 경제 활동은 농업이 아니었다. 참파 주민은 본디 바닷사람으로 뛰어난 항해술을 가졌으며, 황소나 물소가 끄는 우마차를 이용해 육상 수송로도 개척했다. 다양한 이동 수단을 통해 산간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건설했다. 내적 무역망과 해외에서 들어온 상인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창출했다. 국제 무역은 참파의 푸라(邑) 연안에서 이루어졌다. 각기 다른 시기에 세 항구가 다른 항구보다 더욱 발전했는데, 이 항구의 베트남식 명칭은 끄어다이찌엠(호이안), 티나이(꾸이년), 그리고 남쪽의 판랑이었다.
참파의 수출 무역품은 금과 은, 보석, 실크, 향신료(정향, 계피, 카다멈), 동물(코끼리, 코뿔소, 호랑이, 희귀새), 동물성 식품(밀랍, 호랑이 가죽, 상아, 코뿔소 코, 공작새 깃털, 거북이 등껍질), 귀중한 나무(흑단, 침향, 백단, 장뇌), 심지어 노예를 망라했다.
참파에서 산출되는 수출품목 중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던 무역품이 침향이었다. 당 시대에 중국인은 최고 품질의 것을 특별히 침향이라 불렀다. ‘침’이라는 말은 물보다 비중이 무겁기 때문에 붙여졌다. 나무를 잘라서 몇 년이고 쌓아두면 나무가 썩어서 마디만 남으며, 이를 물에 담그기 때문에 침향이라 했다. 수지가 25% 넘으면 물속에서 가라앉는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물에 뜨는 향은 전향(煎香)이라 구별하여 불렀으며, 의료적 효능이 없는 싸구려라고 했다. 반은 뜨고 반은 가라앉는 향은 잔향(棧香), 물에 뜨는 향은 황숙향(黃熟香)이라 불렀다. <송사>에서도 전침향(箋沈香)을 언급했다. 전침향은 고급향이 아닌데 <송사>에서 특산품으로 언급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침향보다 값싼 전침향이 다량으로 수입됐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본다. 그만큼 당대에도 비싼 향이었기에 일찍부터 가짜 향이 범람했다.
침향은 서양에도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8세기에 오만의 이슬람 상인이 당에 가서 침향을 샀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슬람권 사람들이 말하는 ‘중국’은 침향의 산지는 아니지만, 침향 시장은 있었다. 9세기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는 <제도로 및 제왕국지>에서 가라향(伽羅香)을 언급했다. 가라는 산스크리트어로 ‘검다’는 뜻이다. 중국인이 검은 침향목을 즐긴 데서 비롯됐다.
가라향은 침향 가운데 최상의 것으로 쳤다. ‘점성(참파)에서 나오는 가라향이 최상의 것’이라고 했다. 아랍 상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침향의 양이 아니라 질이었다. 수준 높은 참파의 침향을 상인들이 얻고자 했고, 이들 참파의 숲에서 나는 침향은 왕조를 번영시키는 기반이었다. 마르코 폴로도 챰파에서 침향이 다량으로 나온다고 했다.
명나라의 마환은 <영애승람>에서, “산에서는 오목(烏木)과 가람향(伽藍香), 관음죽, 강진향이 생산된다”고 했다. 가람향은 침향의 별칭으로 가라향과 같은 뜻이다. 산에서 생산된다는 대목에 주목한다. 전문적 침향 채집가는 엄격한 관례에 따라 이 귀중한 나무를 찾았다. 이 관례 중에는 산지인 감독 하에 참족과 산지인(라갈라이족)이 협력한다는 점, 출발 전과 복귀 후에 제물을 바치는 의식, 탐색 중 침묵을 지키는 규칙, 그리고 전문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 등이 포함된다. 한국으로 치면, 심마니의 산삼 채취 관행에서 나타나는 금기와 의례가 적용됐다. 침향은 참파 경제에 중추 역할을 했으며, 침향의 지위는 참파 사람의 종교적 믿음을 반영한다.
참파 사람은 산간부 원주민에게 의뢰하여 병해를 입은 침향을 조달했다. 참파산 침향은 아퀼라리아속 크라스나종으로 오늘날도 베트남 중부에서 발견된다. 이 나무는 보통 상태에서도 향이 나며 베트남어로 끼남이다. 가장 높이 평가되는 종은 나무가 감염, 손상되거나 오래됐을 때, 또는 상처로 인해 응집 작용이 일어날 때 생성되는 수지 물질을 함유한다. 수지는 가파른 너덜지대나 특정 토양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주로 생성된다. 침향나무가 상처를 입었을 때 각종 감염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분비하는 일종의 수액이 나오며 이것이 굳어지면서 침향이 된다. 수액이 굳어져 침향이 되기까지 수십 년에서 길게는 1000년이 걸리기도 한다. 침향나무 한 그루에서 채취할 수 있는 양이 매우 적기 때문에 귀한 약재다.
19세기까지도 참파 사람은 가라(Gahlao)라는 침향을 산간에서 구해다가 팔았다. 빈투언에 있는 무슬림 참파사람은 오랑글라이(Orang glai, 숲의 사람)라고 부른 산간지방 원주민과 손을 잡고 부지런히 침향을 모았다. 19세기까지 침향은 참파나 안남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의식의 중요 물품이었다. 오늘날에도 옛 참파의 땅 호이안에 가면 거리에서 침향 가게를 만난다. 1000년 넘은 전통이 그들 현대식 침향상점에 남아 있는 셈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침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격이 비싸다.
(출처 : 불교신문, 주강현, 2022.5.31.)
불교의 바닷길에서 한반도의 정점은 가야다. 문제는 자료가 제한적이고 일찍이 잊힌 바닷길이 됐다는 데 있다. 가야의 글로벌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허황옥의 표착이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48년 아유타왕국의 공주 허황옥이 원해 항해로 인도와 연결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허황옥 출신지인 아유타의 위치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풀리지 않는 숙제는 허황옥이 가락국에 당도하는 긴 여정이다.
1세기 중엽의 항해 기술상 인도에서 곧바로 가야까지 직항은 쉽지 않다. <한서지리지> 남방 노선을 보건대, 남중국해를 거쳐서 한반도 남해안으로 표착하는 것은 험난한 바닷길과 먼 여정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항해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항해가 가능했을 지를 증명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그러나 불비한 근거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에 도달한 가야의 바닷길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야불교의 원형을 찾고 가야사를 바로잡으려는 경남지역 불교계의 노력이 주목되는 이유다.
바닷길 불교에서는 백제도 중요하다. 3세기 후반의 대 중국교섭은 <진서(晉書)>에서 확인된다. 4세기 백제와 동진 관계가 각별했고, 교역도 있었다. 한성백제의 풍납토성에서 발굴된 동진 계통의 초두(斗), 석촌동 고분의 동진 청자와 배 젓는 노는 백제와 동진 사이의 교류를 반영한다.
남중국해 및 머나먼 동남아까지 연결된 해양실크로드와의 연관성은 6세기 전반기 성명왕(성왕) 기록에 백제와 푸난(扶南), 일본의 관계에서 엿보인다. 해상왕국 푸난의 물자와 인간을 백제가 어떻게 확보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6세기 중엽에 백제와 푸난은 교섭했고, 그 결과 일본열도에도 푸난에 대한 정보가 들어갔음이 <일본서기>에 등장한다.
백제로 건너온 물품과 노예가 백제와 푸난의 직접 교섭으로 인한 것인지, 양(梁)을 비롯한 남조(南朝)를 매개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양서>에 따르면 백제가 수차례 사신을 파견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푸난에서 중국을 거쳐서 백제까지 물품과 노예가 건너온 것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526∼536년 무렵 양에 파견된 13개국 외국 사절을 그리고 해설한 ‘양직공도’에 백제사신도가 있다. 분할된 남조 정권은 주변 제국과의 친교를 통하여 헤게모니를 쥐려고 했으며, 페르시아로부터 백제와 왜에 이르기까지 외교교섭을 진행했다. ‘양직공도’가 6세기 초반의 사실을 담고 있다면 백제는 섬진강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한 나라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백제의 항해술에 관해서는 구체적 자료가 없다. 그러나 3세기 후반 고이왕은 서진에 여덟 차례 사절을 파견했다. 근초고왕 때부터는 남조와 빈번하게 통상했고, 황해 남부를 거쳐 남해를 돌아 왜와 교류했다. 남해안 영산강 유역 역시 대외 해양교역의 중요 거점이었을 것이다. 백제와 왜는 서로 필요해서 가까워지려고 노력한 흔적이 다수 보인다. 백제가 원거리 항해를 통해 남조 및 왜와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항해술이 뛰어났음을 말해준다. 불교가 이를 통하여 전래되었음은 당연지사다.
불교가 바다를 건너와 당도했다는 남래설의 증거는 도처의 사찰 연기설화에 보인다.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와 유점사 월씨금상문(月氏金像文)에 53불(佛)이 내박했다는 기록이 좋은 예다. 부처가 이적한 후에 문수보살이 사람 3억명을 모아놓고 교화했는데, 그들이 부처님을 성심으로 사모하므로 각자 불상을 지어서 공양케 했다. 상(像)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진 것 53존을 골라서 주조 사실을 적은 글과 함께 큰 철종(鐵鐘)에 넣어 인연 있는 나라에 닿으라고 기원하면서 바다에 띄웠다. 철종이 신룡의 호위를 받으며 월지국에 이르자, 국왕은 전당을 지어 53불상과 글을 봉안했다. 인연 있는 국토에 닿으라는 서원과 함께 바다에 다시 띄었다. 이 철종이 무수한 나라와 바다를 거쳐서 마침내 신라 땅 금강산 동쪽 안창현(安昌縣, 현재의 간성)에 표착했다. 신라 남해왕 원년(기원후 4년)의 일이었으니, 전한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다.
마라난타(摩羅難陀)는 384년(침류왕 원년)에 남조 동진을 거쳐 백제로 건너왔다. 법현이 천축에서 돌아오던 413년에서 30여 년 이전인 384년의 일이었다. 이는 해양실크로드 문명사 관점에서, 불교가 바닷길로 극동까지 전래된 중요 사건이다. 마라난타가 들어오자 왕은 예를 갖추어 교외까지 나아가 그를 맞아 궁궐 안에 머무르게 했다. 왕이 무턱대고 인도의 승려를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다. 동진 바닷길을 통하여 불교에 관한 기본 정보를 얻고 있었고, 이미 그 전에 불교가 여러 맥락으로 당도한 준비된 상황에서 마라난타가 백제에 등장한 것으로 비정된다.
4세기에 불교가 삼국에 전래된 이래 불법(佛法)을 구하려는 구법승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개인 순례를 뛰어넘어 국가적 배려와 지원이 있었다. 중국 및 천축에 이르는 일은 그 자체 ‘국제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남북조시대에 삼국은 거의 고르게 14명의 구법승을 중국에 보냈다. 수·당대에는 180여 명의 구도승이 유학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7세기 42명, 8세기 38명, 9세기 96명이 중국으로 들어섰다. 구도열은 중국에 머물지 않고 천축까지 이어져서 15명이 확인된다. 인도 혹은 중도에서 객사한 이가 10명, 중국으로 돌아온 이가 3명,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는 불과 2명이다.
한반도 출신 구법승 14명 가운데 신라 출신으로 명시된 이는 12명, 백제와 고구려가 각 1명이다. 14명 가운데 9명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수록된 7세기 구법인들이다. 이들 숫자는 공인 수치만을 뜻할 뿐, 전체가 확인된 것은 아닐 것이다. 바람처럼 떠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구법승도 많았기 때문이다. 가령 혜초 같은 인물은 <왕오천축국전>이 발굴되기 전까지는 어느 문헌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중국으로의 구법승이 활발하던 당나라 시대의 의상 같은 인물은 재론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당과 신라 사이에서 구법승은 너무도 많았으니, 원효가 당나라행을 그만둔 사례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흔했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불교 바닷길은 미궁이다. 별 관심들이 없다. 할 말은 많고 가야할 길은 멀지만, 짧은 지면에 더 이상 쓰기 어려워 여기서 멈추고자 한다.
(출처 : 불교신문, 주강현, 2022.12.27.)
“대칸의 사자가 칸발릭(북경)을 출발하면 어느 길을 택하든지 40km마다 ‘쟘’이라고 부르는 역을 만난다. ‘쟘’은 역사(驛舍)라는 뜻이다. …어떤 역사에는 말 400마리가 사절용으로 언제나 준비돼 있다. …길도 제대로 없고 민가도 여관도 없는 외딴 시골을 지나는 경우에도 어디서나 역사가 세워져 있다. 단지 그 간격이 좀 길어져서 하루의 이동거리가 40~50km 아닌 56~72km가량일 뿐이다. …정말 이 제도만큼 대규모의 것은 일찍이 볼 수 없었다. …이런 역참들에는 사절을 위해 모두 30만 마리 이상의 말이 상비돼 있다.”
‘릴레이 연결형’에서 ‘풀코스 완주형’으로
13세기 말엽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는 25년에 걸친 길고 긴 동방여행을 마치고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했다. 아시아 동쪽 끝에서 동유럽까지, 역사상 가장 큰 땅을 지배한 몽고인들은 오늘날 21세기 사람들조차 경탄시킬 만한 놀라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고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밝히고 있다. 이 시스템은 단지 사람을 이동시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3대 구대륙에서 당시 생산되고 유통되던 다양한 물질적·정신적 자원을 활발하게 이동시키고 교류시켰다. 몽고제국은 철도망과 체신망을 결합한 것과 비슷한 이 놀라운 역체(驛遞) 시스템으로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문명교류를 성공시켰다. 역체 시스템은 바로 몽고제국의 대동맥이었다.
몽고제국 이전 시기에 인류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을 연결해왔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몇 가지 점에서 제약을 받고 있었다. 첫째, 중국의 장안에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나 시리아 지역에 이르는 방식이 ‘풀코스 완주형’이 아니라 ‘릴레이 연결형’이었다. 한 특정 대상이 실크로드의 처음부터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한 팀은 일정 구간만을 가고, 다시 다른 팀이 다음 구간을 떠맡아 이동하는 식이었다. 둘째, 동서양 사이에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등장해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실크로드가 연결되거나 끊기는 등 불안정하게 운용됐다. 아랍과 페르시아가 사실상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잡고 간섭하거나 방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몽고제국의 판도 아래 획기적인 동서양 교류가 가능하게 된다. 몽고제국의 길은 실크로드의 한계를 이렇게 극복한다.
(1) 동서양 교통로의 비약적 확장: 과거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또는 로마까지 연결됐다. 이제 몽고 시대에 이르러 그 영역은 동쪽으로는 북경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남쪽의 국제 항구도시 항주에까지 연장되고, 서쪽으로는 로마를 넘어 중부 유럽까지 넓어진다. 인류의 지평이 사실상 그만큼 확장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 안전의 증대: 더 중요한 것은 동서양 교류가 훨씬 안전하게 됐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도로망 전체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단일한 제국이 없었다. 그 때문에 구간구간마다 과도한 관세를 붙이는 제국이나 영지가 많은가 하면, 도적의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하지 못했다. 이슬람권의 과도한 간섭과 방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몽고제국 아래 동서양은 안전한 교류를 할 수 있게 됐다.
(3) 풀코스 완주형의 작동: 이제 동서양을 완주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게 등장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아랍 문명권의 대표적 여행가 이븐 바투타를 비롯해 교황의 특사였던 카르피니 신부, 프랑스 국왕의 종교사절이었던 기욤 드 뤼브록 등의 동양여행이 가능해진 것도 모두 이 시기 들어서다.
(4) 동서양 상시 교통 시스템: 몽고의 역체 시스템은 동서양의 상시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비록 정기편은 아니었지만, 역참마다 갖춰진 상비시설과 안정적인 운영인원 그리고 말 등에 힘입어 상시적인 이동이 가능하게 된 셈이다.
(5) 바닷길의 병행 발전: 몽고제국 아래 동서양을 잇는 바닷길도 함께 발전한다. 육로의 발전에 따라 지리상의 지식이 팽창한 결과다. 몽고제국은 송나라 때 이룩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해양운영 경험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결과 중국권에선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이라는 관념을 제시한 것도 이 몽고제국 시기다. 무엇보다 유라시아 전역에 퍼진 4대 칸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기 위해서도 바닷길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요구됐다.
(6) 동서양 단일시장의 맹아 탄생: 이런 변화의 최종적인 귀결은 사실상 동서양 단일시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몽고제국은 한인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수구화되곤 했던 종래의 중국 왕조와 달리 인적·물적 교류에 대단히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기에 대외교역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7) 단일화폐의 통용 시작: 제국의 팽창과 교통의 발달은 단일화폐의 필요성을 높이게 된다. 그 결과 교초(지원통행보초)라는 지폐와 차가타이 화폐가 제국에서 널리 통용되기에 이른다. 그 이전 남송 시대인 1170년 지폐가 처음 등장하기는 했어도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광범위한 규모로 통용된 것은 몽고제국 때부터다. 유럽보다 400년이나 앞서 지폐를 통용시킨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동서양 교통로의 획기적 발전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하다.
몽고제국의 뛰어난 역체 시스템은 초기 몽고 지배자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장 인덕이 많았다고 평가받는 오고타이 칸에서 비롯됐다. 오코타이라면 야율초재의 진언을 받아들여 중국 개봉의 학살을 피한 칸이기도 하다. <원조비사>는 오고타이 칸의 말이라며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그동안 사신이 왕래할 때에 백성들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그 결과 왕래하는 사신도 여행이 늦어지고 백성도 고통스럽기 일쑤였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결단하기로 한다. 여러 고장의 천호(千戶·행정-군사적 단위 집단)에서 참호(站戶·역참일을 보는 집)와 마부를 공출해 역참일을 보게 한다. 사신들은 아주 중요한 때를 빼고는 이 역참을 이용해서 오가도록 한다.”
‘급체포’라는 익스프레스 서비스
이런 역참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졌다. 일반적인 종류의 역참으로는 육로를 이용하는 육참과 선박을 이용하는 수참이 있었다. 육참의 교통수단으로는 가장 널리 이용된 것이 말이지만, 낙타나 소·당나귀·양 등도 이용했다. 개를 이용하기도 했다. 몽고제국 전역에서 이런 역참이 얼마나 많이 운용됐는지는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 서쪽 끝인 금숙성 주천에서 대도인 북경까지 모두 99개 있었으며, 중국 경내에만 140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역참과 별도로 익스프레스 서비스도 운용되고 있었다. 급체포(急遞鋪·몽고말로 찌데뾰)라는 것으로서 조정과 지방행정기관 사이에 긴급문서를 운송하는 특수역참이었다. 일종의 행정행낭 제도라 할 수 있는데, 송나라 때의 비슷한 제도인 급각체(急脚遞)를 본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급체포는 10리나 15리, 20리마다 설치하고, 급체포 10개마다 우체국장이라 할 수 있는 우장(郵長) 1명과 포졸(鋪卒) 5명을 배치했다. 급체포를 이용할 경우 하루 밤낮에 400리를 주파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익스프레스 서비스를 이용하면 일반 역참의 경우 6일 이상 걸리는 거리를 3, 4일 만에 주파했다. 나아가 마르코 폴로를 뒤이어 원나라에 왔던 이탈리아 프란체스코파 선교사 오도리코 다 포르데노네는 저서 <동방기행>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급체포를 통해 황제는 30일 여정 거리에서 일어난 사태를 하룻만에 보고받았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지방에서의 반란 발생 등 긴급사태 때에는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릴레이처럼 운용됐다. 첫 포졸이 역참에서 가장 힘세고 괄괄하고, 안장이 붙어 있는 말 가운데 한 마리를 골라타고 전속력으로 달린다. 다음 역사에선 이 포졸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방울이 울리는 소리를 멀리서부터 듣고 역시 최상의 컨디션에 있는 포졸과 말을 준비했다가 이어받아 달린다. 밤에는 횃불을 든 길잡이까지 앞세워 달려 하룻밤 또는 하룻낮에 240km에서 320km를 단숨에 달린다.
이 역체제도의 안전하고 합리적인 이용을 위해 ‘패’라고 하는 패스포트가 등장했다. 일종의 신분증이자 역참 이용 허가증이라고 할 수 있는 패는 크게 △ 금자원형패부 △ 은자패부 △ 해청부 △ 원패의 4가지가 있었다. 해청부는 금패·은패·철패의 3가지로 다시 나뉘었고, 원패는 금자와 은자로 구분됐다.
(출처: 한겨레21, 오귀환, 2004.11.24.)
향신료의 역사
향의 역사
“그리스도와 향신료를 위해(christos e espiciarias!)" 이 말은 1498년 5월 인도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의 선원들이 향신료로 막대한 부를 챙길 생각에 기쁨에 겨워 지른 환호성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하기 전, 수세기 동안 향료 무역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후추는 매우 귀해서 말린 후추 열매 1파운드(약 453그램)이면 중세 영주의 토지에 귀속되어 있는 농노1명의 신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후추는 오늘날 전 세계 저녁 식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 되었지만 중세에서는 후추를 비롯한 계피, 정향, 육두구, 생강같은 향신료는 소수만이 마음껏 소비할 수 있었다. 향신료에 대한 수요는 점차 늘어났고 이 거대한 수요로 말미암아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인도가 원산지인 열대성 관목인 피페르 니그룸(Piper nigrum)에서 나오는 후추는 지금도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향신료이다. 오늘날 후추의 주 생산지는 인도, 브라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적도 지역이다. 후추나무의 줄기는 튼튼하고 다른 물체를 타고 6미터 이상 자란다. 2~5년이면 붉은 구형의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적정 조건에서는 40년간 열매를 맺는다. 후추나무 한 그루는 매년 10킬로그램의 향신료를 생산한다.
후추의 약 4분의 3은 검은 후추로 팔린다. 검은후추는 덜익은 후추를 균발효시켜 얻는다. 흰후추는 다 익은 열매의 껍질과 과육을 제거하고 건조시켜 얻는 것으로 후추의 4분의1이 흰 후추에 해당한다. 열매가 익기 시작하자마자 수확해서 소금물에 절인 푸른후추(green pepper)는 유통량이 매우 적다. 특산품 상점같은 곳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색다른 색의 후추는 인공적으로 물들인 것이거나 원래부터 색상이 그런 종류이다.
후추를 유럽에 소개한 것은 아랍 상인들로 생각되는데, 이들은 다마스쿠스를 지나 홍해를 건너는 고대 향료길을 이용한 것 같다. 기원전 5세기가 되자 그리스에 후추가 알려졌다. 당시 그리스에서 후추는 요리용이 아니고 의료용, 그것도 대개 해독제로 쓰였다. 그러나 로마인은 그리스 인과는 달리 후추나 기타 향신료를 양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1세기, 아시아 및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서 지중해로 수입되는 물품의 반 이상은 향신료였고 대부분은 인도에서 들여온 후추였다.
중세시대, 대부분의 유럽인은 아시아와 교역할 때 바그다드를 지나 흑해의 남부 해안을 경유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경로를 이용했다. 향신료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항구도시 베네치아로 운반되었다. 중세가 끝날 때까지 400년 동안 거의 모든 무역은 베네치아에서 이루어졌다.
6세기부터 베네치아는 인근 개펄에서 생산한 소금을 시장에 내놓아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베네치아는 어느 나라와 교역을 하든 베네치아의 독립을 보장받는다는 현명한 정치적 결단을 내린 덕분에 수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11세기 후반에 시작해 근200년 간 진행된 십자군 원정 덕분에 세계 향료 시장에서 제왕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서유럽에서 온 십자군에게 수송선, 전함, 무기, 자금을직접 공급해서 바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따뜻한 중동 지역에서 추운 북쪽의 고국으로 돌아가는 십자군들은 원정 중에 즐겼던 이국적인 향신료를 가져가고 싶어 했다. 아마 처음에는 후추는 진귀한 품목이었을 것이다. 썩은 냄새를 감추는 효과와 맛없는 건조음식에 고유의 풍미를 더해 주는 효과, 짠 음식의 소금 맛을 완화 시켜주는 그 효과 때문에 후추는 순식간에 필수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방대한 새 시장을 얻었고 전 유럽의 무역업자들은 향신료, 특히 후추를 사기위해 베네치아로 몰려들었다.
후추에는 도대체 무슨 성분이 들어있을까? 검은후추와 흰후추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활성 성분은 피페린(Piperine)이다. 피페린의 화학식은 C17H19O3N이고 구조식은 다음과 같다. 피페린을 섭취할 때 우리가 느끼는 매운맛은 사실 맛이 아니라, 피페린이 일으키는 화학작용에 대한 우리 통각 신경의 반응이다.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 과정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통각 신경이 피페린에 반응하는 이유는 피페린분자의 모양이 통각 신경 말단에 있는 단백질 모양이 잘 들어맞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피페린분자가 신경 말단의 단백질 분자와 결합하면 신경 말단의 단백질은 모양이 변형되면서 어떤 신호를 내보낸다. 이 신호는 신경을 따라 뇌에 전달되고 우리 뇌는 “아 매워.”같은 말을 지시하게 한다.
1492년 10월, 인도에 다다르는 서쪽 항로 개척에 나선 콜럼버스가 육지에 닿았을 때 그는 인도 어딘가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인도에 도착하면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웅장한 도시나 왕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을 서인도제도라 부르고 그곳 사람들을 인디언이라 불렀다. 콜럼버스는 두 번째 항해 때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에서 매운 맛이 나는 새로운 향신료, 고추를 발견했다. 고추는 자신이 일고 있는 후추와는 전혀 다른 향신료였지만 콜럼버스는 개의치 않았다.
후추는 종이 하나뿐이지만 고추는 캅시쿰 속 밑에 다양한 종이 있다. 고추의 원산지는 열대 아메리카다. 인류는 9000년전부터 고추를 사용해 왔다. 고추는 같은 종에는 벨페퍼(Bell paper), 스위트 페퍼(Sweet paper), 피멘토(Pimento), 바나나 페퍼(banana papper), 파프리카(Paprika), 카옌 페퍼(cayenne pepper)등이 있다. 타바스코 페퍼(Tabasco pepper)는 캅시쿰 프루테스켄스(Capsicum frutescens, 목질의 다년생)의 변종이다.
고추는 색깔, 크기, 모양이 다양하지만 고추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매운맛은 캡사이신 때문이다. 캡사이신의 화학식은 C18H27O3N이며 구조식은 피페린과 유사하다.
캡사이신과 피페린 모두 산소와 이중결합을 이루고 있는 탄소와 옆에 질소가 있고, 탄소로 이루어진 방향성 고리 하나를 갖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맵다’는 감각이 분자의 형태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캡사이신과 피페린 모두 매운맛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분자 형태론이 들어맞는 세 번째 ‘매운’분자는 생강의 뿌리줄기에서 볼 수 있는 진제론(zingerone, C11H14O)이다. 진제론 분자는 피페린이나 캡사이신보다 작지만 방향성 고리를 갖고 있다 진제론도 캡사이신처럼 HO와 H3C-O를 갖고 있다. 하지만 질소 원자는 없다.
우리는 왜 고통을 주는 매운 물질을 먹으려고 하는 걸까? 아마 우리 몸에 좋은 몇 가지 화학적인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캡사이신, 진제론, 피페린은 침의 분비를 증가시켜 소화를 돕는다(침은 음식물이 내장을 잘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포유류의 경우 미각 세포가 주로 혀에 있지만, 매운맛의 분자들이 보내는 화학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통각 신경은 우리 몸 곳곳에 있다. 고추를 썰다가 무심코 눈을 비빈 적 있는가? 고추를 수확하는 농부들은 캡사이신이 들어있는 고추기름이 몸에 닿지 않도록 고무장갑과 보안경을 쓴다.
후추의 매운맛은 음식에 뿌린 후추의 양에 비례하는 것 같다, 반면 고추의 매운맛은 그렇지 않다. 고추는 색깔, 크기, 원산지에 따라 ‘매운 정도’가 달라진다. 그렇다고 해서 색깔, 크기, 원산지에 따른 비례나 역비례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작은 고추가 맵지만 가장 큰 고추가 가장 덜 매운 것도 아니다. 동아프리카에서 재배되는 고추가 세계에서 가장 맵다고들 하지만 지리적 요인에 따라 매운맛이 정해진다고 할 수도 없다. 매운맛은 대개 고추를 건조시켰을 때 강해진다.
우리는 종종 혀가 얼얼할 정도로 매운 음식을 먹은뒤 만족감이나 흡족감을 느끼는데, 이 느낌은 엔도르핀 때문인 듯하다. 엔도르핀은 우리 몸이 통증에 대해 반응할 때 뇌에서 자연스럽게 분비되는 화합물인데 아편과 비슷한 물질이다. 엔도르핀 분비현상이라면 사람들이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중독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고추가 매울수록 고통이 커져 엔도르핀이 많이 분비되고 궁극적으로 쾌감도 더 커진다.
파프리카는 굴라시(파프리카로 맵게 한 쇠고기와 야채로 만든 스튜)같은 헝가리 음식에 잘 정착된 반면, 고추는 유럽음식에 잘 융화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매운맛을 내는 분자로 후추의 피페린이 정착된 탓이다.
1600년, 동인도 향료 무역에서 영국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동인도 회사의 원래 이름인 동인도 제도 무역 런던 상인 조합이었다. 인도에 가서 후추를 싣고 돌아오는 항해에 자금을 대는 일은 위험 부담이 컸기 때문에 상인들은 자신들이 입게 될지도 모를 손실 규모를 줄이기 위해 항해에 대한 몫을 요구했다. 이런 관행은 주식을 사는 것으로 발전되어 현대 자본주의의 시초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지금은 별 볼 일 없게 되어버린 피페린 세계 주식 시장과 같은 복잡한 세계 경제 구조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하는 것은 확대 해석일 수도 있겠다.
후추 외에 소중한 향신료는 또 있었다. 바로 육두구(nutmeg)와 정향이다. 육두구와 정향은 후추보다 더 귀했다. 육두구와 정향은 향료 제도, 즉 몰루카 제도(오늘날 인도네시아 말라쿠 주)에서 유래했다. 육두구 나무, 미리스티카 프라그란스는 몰루카 제도에 속한 반다 제도에서만 자랐다. 반다 제도는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약 2500킬로미터 떨어진 반다 해 위에 외롭게 떠있는 7개의 섬이다. 반다 제도의 섬들은 작다. 가장 큰 섬의 길이가 10킬로미터가 되지 않고 가장 작은 섬의 길이는 겨우 2~3킬로미터이다. 반다 제도의 섬들과 비슷한 크기의 섬이 몰루카 제도 북쪽에도 있는데 테르나테 섬과 티도레 섬이다. 이 두 섬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향나무, 유제니아 아로마티카가 자라는 곳이었다.
수세기 동안 몰루카 제도 주민들은 육두구와 정향을 재배해서 이곳을 방문하는 아랍, 말레이, 중국 상인들에게 팔았고 육두구는 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육두구와 정향이 유통될 수 있는 무역항로는 잘 확립되어 있었다. 육두구와 정향은 어떤 경로를 거치든 서유럽 소비자에게 전달되는데 12단계의 유통경로를 거쳐야 했다. 각 유통단계를 거칠 때마다 향신료의 가격은 2배로 뛰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포르투갈의 인도 총독 아퐁소 디 알부르케르케는 실론 섬과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를 점령하고 동인도 향료 무역을 장악했다. 1512년, 알부케르케는 몰루카 제도에 도착해 이곳 사람들과 직접 교역하면서 육두구와 정향 무역을 독점했고 곧 베네치아 상인들을 능가했다.
스페인도 향료 무역에 눈독을 들였따. 1518년, 포르투갈 항해사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자신의 탐험 계획이 조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스페인 왕실을 찾아가, 서쪽으로 가면 향료 제도에 도착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항해 기간도 단축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설득했다. 스페인은 마젤란의 탐험 계획을 지원할 이유가 충분했다. 동인도로 가는 서쪽 항로가 개척되면 스페인 선박들은 포르투갈 항구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지고 아프리카 및 인도를 경유하는 동쪽 항로를 이용할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포고한 교령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케이프베르데제도 서쪽에서 5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가상의 경선이 있다. 교황의 교령에 의해 포르투갈은 이 경선의 동쪽 영토를 하사받았고 스페인은 서쪽영토를 하사받았다. 이런 모순된 교령이 나올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교황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간과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스페인이 서쪽으로 가서 향료 제도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 스페인은 향료제도에 대한 합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마젤란은 스페인 황실에 자신이 아메리카 대륙을 통과할 견문을 갖추고 있음을 확신시켰고 자신도 그렇게 확신했다. 1519년 9월, 마젤란은 스페인을 떠나 남서쪽으로 내려가 대서양을 건너 지금의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해안을 따라 내려갔다. 라플라타 강 어귀를 만나자 마젤란은 드디어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플라타 강 어귀를 따라 200여 킬로미터를 나아갔을 때 나타난 것은 지금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마젤란의 의심과 실망은 이루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마젤란은 실망할 때마다 다음 곶만 돌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가 나올 것이라 확신하며 계속 남으로 내려갔다. 5척의 작은 배와 265명의 선원으로 시작된 항해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낮은 더 짧아지고 강풍은 더 끊임없이 불어닥쳤다. 갑작스러운 조수로 인한 위험한 해안, 거대한 파도, 끊임없는 우박과 진눈깨비, 얼어붙은 삭구에서 미끄러져 배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명의 위협 때문에 항해의 비극은 더해만 가고 있었다. 항해도중 선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폭동을 진압한 마젤란은 남위50도에 이르러서도 태평양으로 가는 해협이 보이지 않자 남국 겨울의 나머지를 그 곳에서 보냈다. 다시 항해를 계속한 마젤란은 드디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젤란 해협을 발견해 내고 무사히 통과했다.
1520년10월, 마젤란 선단의 배4척이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다. 보급품이 떨어지자 마젤란 휘하의 장교들은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향과 육두구의 유혹 때문에 동인도 제도의 향료무역을 포르투갈과 나눠 가질 경우 돌아올 부와 영광 때문에 마젤란은 항해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마젤란은 3척의 배를 이끌고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다.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광대한 너비의 태평양을 건너는 일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1521년3월 6일 탐험대가 마리아나 제도의 괌에 상륙하면서 선원들은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에서 잠시 벗어났다.
10일뒤 마젤란은 필리핀 제도의 조그마한 섬, 막탄에 상륙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주민들과 사소한 충돌로 마젤란이 살해당한 것이다. 마젤란 본인은 몰루카 제도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의 배와 선원들은 정향의 원산지, 테르나테 섬에 도착했다. 스페인을 떠난지 3년 18명으로 줄어든 생존 선원들은 마젤란 선단의 마지막배, 빅토리아 호의 오래되고 낡은 선체에 26톤의 향신료를 싣고 강을 거슬러 세비야로 돌아왔다.
정향과 육두구는 과가 다르고 원산지도 해양을 사이에 두고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독특한 향기 역시 다르지만, 분자모양이 매우 유사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정향유의 주성분은 유게놀(eugenol)이고 육두구유의 주성분은 아이소 유게놀이다. 이 두 방향족 화합물은 이중 결합의 위치만 다르다. 유게놀 및 아이소 유게놀의 구조와, 생강에서 볼 수 있는 진제론의 구조도 매우 유사하다. 세 분자의 구조는 유사하지만 향기는 전혀 다르다.
식물들이 우리 좋으라고 방향족 화합물을 만들어 낼리는 없다. 식물들은 풀을 뜯어먹는 동물이나 수액을 빨아먹고 잎을 갉아먹는 곤충, 체내에 침입하는 균류로부터 도망칠 수 없기 때문에 유게놀, 아이소유게놀, 피페린, 캡사이신, 진제론같은 방향족 화합물을 만들어 매우 강력한 천연살충제이다. 우리가 이런 방향족 화합물을(소량으로) 섭취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간에서 매우 효과적인 해독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론상 특정 향신료를 과다 섭취하면 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신진대사중 하나에 장애가 온다. 하지만 신진대사에 장애가 올 정도가 되려면 엄청난 양을 섭취해야 하는데, 이것은 일어나기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가 향신료 과다 섭취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정향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유게놀의 향기는 뚜렷하게 맡을 수 있다. 유게놀은 정향나무의 말린 꽃눈에서도 얻을 수 있고 다른 부분에서도 얻을 수 있다. 기원전 200년, 정향은 중국 한나라 왕실에서 신하들의 구취 제거제로 쓰였다. 정향유는 강력한 소독제 겸 치통약으로 귀하게 쓰였다. 지금도 정향유는 치과에서 종종 국소 마취제로 사용되고 있다.
육두구나무에서 육두구와 메이스가 나온다. 육두구는 살구처럼 생긴 열매에 들어있는 밝은 갈색의 씨앗을 갈아서 만든 것이고 메이스는 씨앗을 감싸고 있는 밝은 갈색의 씨앗을 갈아서 만든 것이고 메이스는 씨앗을 고 있는 붉은 빛깔의 껍질로 만든 것이다. 육두구는 오래전부터 약으로 쓰였다. 중국에서는 류머티즘과 위통을 치료하는 데 쓰였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설사와 복통에 쓰였다. 유럽에서는 최음제와 마취제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흑사병 예방약으로도 쓰였다. 흑사병은 1347년 처음 그 발생이 기록된 이후 주기적으로 유럽을 휩쓸었던 전염병이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막기 위해 육두구를 넣은 작은 자루를 목 주변에 둘렀다. 장티푸스, 천연두 같은 전염병들도 주기적으로 유럽의 여러지역을 강타했지만 가장 무서운 병은 역시 흑사병이었다. 흑사병은 세 유형(선 페스트, 폐 페스트, 패혈증)으로 발생했다. 선 페스트에 걸리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의 림프선이 부풀어 올라 고통을 받았다. 선 페스트 환자의 50~60퍼센트가 치명적인 내부 출혈과 신경 손상을 겪었다. 발생 빈도는 덜 하지만 훨씬 더 치명적인 유형은 폐 페스트였고, 폐 페스트보다 더 치명적인 패혈증이었다. 엄청난 양의 세균이 혈액을 공격하기 때문에 패혈증에 걸리면 하루를 못 넘기고 죽었다.
신선한 육두구에서 나온 아이소유게놀 분자가 선 페스트 세균을 나르는 벼룩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한 육두구의 다른 분자들도 충분히 살충성분을 가질 수 있다. 방향족 화합물인 미리스티신(myristicin)과 엘레미신(elemicin)도 육두구와 메이스에서 볼 수 있는 물질이다. 두 화합물의 구조는 서로 유사하며 우리가 이미 살펴본 육두구, 정향, 후추분자의 구조와도 비슷하다.
육두구는 흑사병을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물질’로도 여겨졌다. 육두구가 환각제 성분을 갖고 dLT다는 것은 수세기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1576년의 한 보고서를 보면 “임신한 한 영국 여성이 10~12알의 육두구를 먹고 향기에 취해 정신 착란을 일으켰다.”라고 나와 있다. 오늘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육두구 한 알만 먹어도 메스꺼움을 느끼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혈압이 매우 높게 상승하고 며칠 동안 환각에 시달린다고 한다. 이런 증상은 단순한 정신착란의 증상이다. 12알이 아니라 이보다 훨씬 적은 양만 섭취해도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리스티신을 다량으로 섭취하면 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육두구와 메이스 뿐만 아니라 당근, 셀러리, 딜, 파슬리, 검은후추 등도 미리스티신과 엘레미신을 소량 함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환각 효과를 느낄 목적으로 우리가 이런 물질을 다량으로 섭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미리스티신과 엘레미신이 환각 물질이라는 증거도 없다. 다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우리 몸의 신진대사 경로로 인해 이 물질들이 다른물질, 즉 암페타민(amphetamine,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각성제) 비슷한 소량의 화합물로 전환될 가능성은 있다.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한 이유는 엑스터시(ecstasy)라고 불리는3,4-메틸렌 다이옥시-엔-메틸 암페타민(3,4-methylenedioxy-N-methylamphetamine, MDMA)을 불법 제조할 때 사프롤(safrole)이라는 물질을 시작물질로 사용하는데 사프롤은 미리스티신에서 OCH3가 빠진 물질이기 때문이다.
사프롤은 사사프라스나무(sassafras tree)에서 얻는다. 사프롤은 코코아, 검은 후추, 메이스, 육두구, 야생생강등에서도 볼 수 있다. 뿌리에서 추출되는 사사프라스유는 약 85%가 사프롤이고 한때 루트비어의 주향신료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사프롤은 발암 물질로 간주되고 있고 사프롤과 사사프라스유는 중독 식품으로 분류되어 사용이 금지 되어 있다.
VOC가 육두구 무역을 독점하는 데 있어서 마지막 남은 걸림돌은 반다 제도의 가장 외딴 곳, 런 섬에 상주하고 있는 영국인 들이었다. 절벽에서초차 육두구나무가 자랄 정도로 육두구 나무가 무성했던 작은 환초, 런 섬은 유혈이 낭자한 전장이 되었다. 네덜란드의 무지막지한 포위 공격, 상륙, 육두구 숲의 파괴가 있은 후 1667년, 양국이 맺은 브레다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맨해튼 섬에 대한 권리를 포기 선언했고, 영국은 런 섬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네덜란드에 넘겨주었다. 맨해튼의 뉴암스테르담은 뉴욕이 되었고 네덜란드는 육두구를 손에 넣었다.
네덜란드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독점은 오래가지 못했다. 1770년 한 프랑스 외교관이 몰루카 제도의 정향묘목을 프랑스 식민지였던 모리셔스로 몰래 갖고 들어왔다. 정향은 모리셔스에서 아프리카 동해안을 따라 빠르게 퍼져 나가 잔지바르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정향과 달리 육두구는 원산지인 반다 제도 밖에서 재배하기가 어렵기로 유명했다. 육두구나무는 기름지고 촉촉하고 배수가 잘 되는 흙과, 그늘지고 덥고 습하면서 강한 바람이 있는 기후에서 잘 자랐다. 원산지 밖에서는 육두구 재배가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섬 밖으로 나가는 육두구 종자가 싹트는 걸 방지하기 위해 모든 육두구를 석회수에 담그는 조심성을 보였다. 하지만 끝내 영국은 육두구를 싱가포르와 서인도 제도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했다. 카리브 해의 그레나다는 육두구 섬으로 유명해졌고 향신료의 주요 생산지가 되었다.
만약 냉장고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적인 거대 향료 무역은 지금까지도 틀림없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냉장고가 출현하면서 후추, 정향, 육두구가 더 이상 방부제로서 필요 없게 되었고 이들 향신료의 성분인 피페린, 유게놀, 아이소유게놀, 기타 방향족 화합물 등에 대한 엄청난 수요도 사라졌다. 지금도 후추를 비롯한 기타 향신료들은 여전히 인도에서 재배되고 있지만 주요 수출품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일부가 된 테르나테 섬과 티도레 섬, 반다 제도는 옛날보다 더 한적하다.
스바의 여왕, 선원 신드바드, 마르코 폴로 등 동양의 신비를 환기시키는 전설적 인물들은 모두 향신료와 관련이 있다. 또 성서에도 기원전 10세기경 솔로몬을 방문한 스바의 여왕이 금과 많은 보석, 방향물(芳香物)을 선물로 드렸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방향물’이란 맛과 향에 변화를 주기 위해 음식이나 음료에 첨가하는 모든 물질을 가리킨다.
‘향신료’(e′pice)라는 단어는 1150년경에 프랑스에 나타났는데, 이는 프랑스어 ‘espe?ce’(돈)를 가리키는 라틴어 species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렇게 처음부터 금과 향신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금과 향신료는 역사 속에서 가장 값진 재물의 동의어로 남게 되었다.
바빌론의 왕은 향신료를 넣은 요리와 포도주를 좋아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0년경 페르시아에 침입했을 때 다리우스 2세의 궁전에서 300명에 가까운 요리사와 향신료만을 담당하는 수많은 노예들을 보았다. 고대 이집트 역시 약용식물과 향수와 방향물을 신들에게 봉헌물로 바치거나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고 향기롭게 하는 데 이용했다.
(출처 : seehint.com, 2010.9.17.)
말라카는 영어식 표현이고, 현지어는 믈라카(Melaka). 중국인들은 마육갑(馬六甲)으로 표기한다.
한반도와 말라카 간의 관계는 6세기경부터 기록에 나온다.
먼저 백제승 겸익을 들 수 있다. 522년 겸익은 광조우에서 서역인 배를 타고 험난한 뱃길을 통해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당시 인도 제일의 사찰로 유명한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백제가 부남(오늘날 베트남 남부)에 직접 갔다고 보여 지는 기록도 보인다. 이는 백제가 543년 부남 물품과 노예를 일본에 바쳤다는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고 있다.
7세기에는 더욱 많은 기록과 흔적이 나온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42년 일본에 온 백제 사신이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기록이 나온다. 곤륜은 당시 배트남 중부에 있었던 ‘참파왕국’을 가리킨다. 당시 참파와 동북아 국가 간에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또한 당나라 의정(635-713)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고구려 현유, 그리고 신라의 아리아발마, 혜업, 현태, 현각, 혜륜 등과 익명의 두 사람 등 모두 8명의 신라스님이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중에, 현유는 중국의 승철 선사를 따라 뱃길로 인도에 가다가 사자국(스리랑카)에서 출가하여 승녀가 되었다고 한다. 말라카해협 항해를 택했음은 물론이다. 혜륜선사는 당 태종 때에 육로(돈황→파미르공원→인도)로 인도에 갔으며, 현태법사 역시 육로(티벳→네팔→인도)로 인도에 갔다. 또한 아리야발마, 혜엄, 현각 법사는 육로인지 해로인지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두 스님은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인도로 가다가 “실리불서국”의 서족에 있는 파로사국에 이르러 모두 병에 거려 죽었다고 한다. 실리불서국은 7세기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흥기한 고대 해상왕국인 ‘스리위자야’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파로사국’은 역시 수마트라 섬 북부의 ‘바루스’ 일대에 있었던 고대 왕국으로 추정된다.
8세기에도 적지 않는 신라인들이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로 간 기록과 흔적이 보인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혜초도 그 중에 하나다. 723년 중국 광조우에서 배를 타고 말라카해협을 지나서 인도 서북부에 있던 동천축국에 도달한 후 인도와 서남아 일부까지 갔다가 육로로 727년 중국 신장을 통해 장안으로 돌아왔다.
(출처: 광주매일신문, 문병채, 2015.1.8.)
스리비자야(659~1377, 대승리 또는 영광스러운 정복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 지명), 혹은 스리위자야, 중국 문헌에서는 삼불제(三佛齊)라 부르는 불교왕국이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 있었다. 섬에 있는 불교왕국으로는 스리랑카가 중요하지만, 스리비자야는 ‘해상제국’이라 일컬을 정도로 그 영역과 힘이 남달랐다. 해상제국 스리비자야의 출현은 동남아시아 역사 및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말레이반도에서 명멸하던 많은 항시(港市) 국가들과 푸난(부남, 扶南) 등이 모두 육지부에 속해 있었다면, 비로소 섬에서 ‘섬 제국’이 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리비자야는 오늘날 베트남 메콩강가의 푸난 몰락 이후에 본격 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전부터 수마트라의 해상세력으로 세력을 키워오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느닷없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5세기 무렵, 칸톨리(Kantoli)는 스리비자야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칸톨리는 스리비자야와 말라유의 거점인 잠비와 팔렘방 사이에 위치했다. 스리바라나렌드란(Sri Varannarendran)왕이 중국 남조의 유송(454~464)에 사신을 보내고 있었다. 칸톨리는 수마트라 적도우림의 아로마나 벤젠 같은 숲 생산물로 중국시장의 수요에 응하면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6세기 중엽에 내리막길을 걷는데 이 시점에 팔렘방에 거점을 둔 스리비자야가 제압한다.
스리비자야 이전에 수마트라에 먼저 등장한 말라유가 중요하다. 팔렘방에서 북쪽으로 300㎞ 올라가면 무아라 잠비(Muara Jambi)가 나온다. 오늘날의 잠비시에서 26㎞ 떨어진 수마트라에서 가장 큰 고고학 유적지이자 고대 힌두-불교 사원 단지가 남아 있는 좋은 예다. 잠비는 말라유 왕국의 본거지다.
말라유 왕국은 그간 스리비자야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독립왕국으로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팔렘방과 마찬가지로 강을 이용하여 내륙과 바다를 연결했으며, 팔렘방보다 북쪽에 위치하여 중국이나 믈라카해협 무역로에 더 가깝게 전근할 수 있었다. 전형적 불교왕국으로 그 명성이 중국에 널리 알려져서 많은 구법승이 말라유에 들렀다.
중국 문헌에서 당(唐) 시기의 마라유(摩羅遊, 혹은 末羅瑜)와 몽골 시기의 몰랄유(沒剌由) 등은 모두 말레이어의 말라유(Malayu)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당이 성립된 이후에 수마트라에서 최초로 사신을 보낸 곳이 말라유다. 644년에 최초로 사신을 보냈으며, 200여 년 있다가 다시 853년, 871년에 잠비에서 사신을 보낸다.
당의 구법승 의정(635~713)이 방문했을 당시, 말라유는 이미 7세기 말에 스리비자야에 복속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말라유는 853년, 871년에 사신을 보내어 자신들의 독립성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정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에서 ‘말라유주(末羅遊州)가 지금의 시리불서국’이라고 했다. 의정은 695년에 팔렘방을 거쳐서 귀국하였으므로, 그의 기록은 이미 말라유가 스리비자야에 복속된 7세기 말의 상황을 말해준다. 현장(602~664)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 왕이 후원하고 말라유국으로 가도록 호송해주었다고 하였는데, <도이지략>은 ‘지금은 실리불서로 바뀌었다’고 첨언했다.
원(元)의 <도이지략>에서는 수마트라를 수문답랄(須文答剌)로 표기하고 뇌자, 거친 강진, 학정(鶴頂), 두석(斗錫) 등이 나는데 향 맛이 오래가지 않는다고 했다. <원사>의 속목도랄(速木都剌)도 같은 섬을 말하며, 모두 음가가 ‘Sumatra’를 뜻하는 수마드라(Sumadra)에 해당한다. 수마드라는 ‘큰 바다’라는 뜻이다.
이들 명칭은 고스란히 조선에도 전해졌다. 조선 후기 최한기의 기록은 아마도 중국 문헌을 통해 정보를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지구전요(地球典要)> 남양각도(南洋各島)에서 수마트라를 “소문답랍(蘇門答臘). 섬 길이가 2000리나 되고 가운데는 긴 산이 뻗어 있다. 종족은 말라유족이다”라고 했다. 최한기의 기록에 소문답랍과 말라유족이 등장하는 것이다.
671년, 당 의정은 인도 여정의 첫 기착지로 동남아 해안을 선택했다. 그가 탄 배는 중국과 인도 사이의 해협을 통치한 스리비자야 왕국에 도착했다. 250여 년 전 스리비자야에 불교가 없다고 비난하던 법현과 달리, 의정은 이 섬 왕국에 불교가 번성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법현과 의정의 기록으로 보아 동진과 당나라 시기 중간쯤에 불교가 전파된 것으로 확인된다.
중개무역으로 큰 돈을 벌어들이는 스리비자야 왕은 사원을 넉넉하게 후원했고, 승려들이 인도에 방문할 수 있도록 여비를 지원했다. 의정은 수마트라 중심지에 발달한 불교학에 깊이 감명 받아 중국 승려에게 인도에 가기 전 스리비자야에 들러 수학할 것을 권했다. 의정 자신이 스리비자야에서 수년간 머물렀다. 671년 인도로 가던 중 6개월간 머물렀을 뿐 아니라, 685년에 다시 돌아와 695년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의정이 본 스리비자야는 거대한 정치적 변화를 겪은 후였다. 법현이 살던 시기에는 역내 항구 간 경쟁이 치열했으나, 7세기 말에는 한 항구가 다른 경쟁자를 모두 압도하고, 스리비자야라는 왕국을 형성한 상태였다. 왕국은 중국해 남단을 비롯한 인근 해협 연안, 즉 말레이반도, 수마트라, 칼리만탄, 자바 서부 등지에서 패권을 잡고 있었다. 스리비자야는 믈라카해협과 순다해협까지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 사이의 모든 해로를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의정은 이러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인도로 갔다.
스리비자야의 종교생활은 활기에 넘쳤다. 의정은 수천 명의 학생과 승려가 정진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에서 오는 수도승이 많았으며, 1011년에서 1023년 사이에 티베트 승려 아티사(Atisa)가 종교적 지식을 심화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 멀리 나란다(Nalanda) 불교대학에 기숙사를 지어 유학생을 배려했다. 나란다대학의 비문에 스리비자야의 지대한 공헌이 잘 기록되어있다. 이처럼 스리비자야는 600여 년 간 동남아 해상의 중간거점에 거대한 해상제국이 버티고 있어 동서 불교문명 교류를 주도했다.
(출처 : 불교신문, 주강현, 2022.8.2.)
당나라 시대에 조선과 항법기술의 발달로 동남아, 믈라카해협, 인도양, 홍해, 아프리카 항로가 개통되어 마침내 해양실크로드가 육상실크로드를 대체했다. 당대 해로는 <신당서> 지리지에 수록된 가탐의 <광주통해이도(廣州通海夷道)>에서 잘 정리됐다. ‘광주통해이도’는 당 시대 중국 동해안을 따라 동남아, 인도양 북부, 홍해 연안, 아프리카 북동부, 페르시아만 국가로 이어지는 해로다. 해양실크로드의 다른 말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남중국해 광주에서 해남도를 거쳐서 현재의 베트남 참파, 신가파(新加波, 현 싱가포르) 해협을 내려와 불서국(佛逝國, 현 수마트라)에 당도한다. 불서국에서 바닷길은 사자국(스리링카)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팔렘방에서 북상하면 믈라카 해협을 통해 말레이반도를 끼고서 벵골만으로 접어들어 손쉽게 인도로 갈 수 있다. 북동으로 올라가면 베트남과 남중국해에 닿는다. 팔렘방은 수마트라에서도 남동쪽에 위치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순다해협을 통해 손쉽게 인도양으로 빠져나와 스리랑카나 남인도로 갈 수 있다. 스리비자야가 팔렘방에 수도를 정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해양실크로드의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지리적 위치 덕분에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 전역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이어서 말레이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며, 믈라카 해협을 통제할 수 있었다. 팔렘방은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고 거대한 창고에 교역품(밀, 목재, 철 등)을 저장해 그곳을 경유하는 상품의 가격을 결정했다. 적어도 500년 이상 동남아시아의 해양무역을 지배했다. 팔렘방은 해군, 교역, 금융에서 동시대 유럽의 주요 해양세력인 브뤼헤, 제노바, 베네치아를 포함해 세계의 어떤 다른 항구도시보다 우월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팔렘방은 여러 시기에 걸쳐 세계 경제의 중심지였다. 나란다대학에 경비를 지원하고, 중국과 천축에서 오가는 구법승들의 체류비를 전적으로 부담하고, 수천여 명의 스님들이 불경을 번역하는 등 다양한 불교사업은 경제력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구법승 의정이 장기 체류하면서 불경을 번역할 수 있던 것도 이같은 경제력에 기반한다. 그런데도 서방 역사서들은 이제껏 팔렘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스리비자야 불교왕국의 중요성은 뒤늦게 밝혀지는 중이다.
(출처 : 불교신문, 주강현, 2022.8.9.)
바다를 건넌 불교는 해상왕국 스리비자야 왕권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옹호 발전된다. 스리비자야의 종교생활은 활기에 넘쳤다. 구법승 의정은 수천 명의 학생과 승려가 정진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에서 오는 수도승이 많았으며, 1011년에서 1023년 사이에 티베트 승려 아티사(Atisa)가 종교 지식을 심화하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 나란다대학의 비문에는 스리비자야가 기숙사를 세워서 유학생을 배려한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다. 당대의 나란다대학에는 밀교 이론가들이 다수 주석하고 있었으며, 아티사가 스리비자야까지 바다를 건너온 이유가 설명된다.
밀교에 기반을 둔 티베트 불교가 스리비자야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무수한 증거들이 있다. 스리비자야가 당대 최고의 해상국가였다는 것은 그만큼 국제적 교류 통상과 문명교류가 잦았다는 것이기도 하며 빈번한 해상루트를 통하여 밀교가 확산되었다. 중부인도의 마라야국(摩羅耶國)에서 태어난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는 나란다에서 10년 수행했으며, 사자국과 스리비자야를 경유하여 당 개원(開元) 7년(719) 바다를 건너서 광주에 당도했다. 장안으로 초빙되어 자은사(慈恩寺)와 천복사(薦福寺)에서 밀교 전도에 전념했다. 금강지의 장기간의 스리비자야 체류가 주목된다.
금강지의 제자 불공(不空, 705~774)은 싱할라(스리랑카) 사람이다. 719년 자바에서 금강지를 만나면서 함께 중국으로 들어와 경전을 번역했다. 금강지가 죽은 후, 당 조정은 그에게 싱할라에 보낼 국서를 전달했다. 불공은 광주로 와서 배를 타고 스리비자야를 거쳤으며, 1년여 만에 싱할라의 아누라다푸라에 당도했다. 그는 불경 1200여 권을 수집했으며, 오천축(五天竺)을 두루 방문했다. 그가 수집한 경전의 다수가 밀교 경전이었다. 746년에 장안으로 돌아와 번역을 다시 시작했으며 중국 밀교의 종사(宗師)가 됐다.
신라 승려 혜초(慧超)는 719년 광주에서 금강지를 만나 제자가 되어 밀교를 배웠다. 혜초는 불공에게서 유가심지비밀법문(瑜伽心地秘密法門)을 익히고 그의 권유로 인도로 건너갔다. 중국 유학승이 인도에 간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나란다불교대학에서 수학하려는 것이었다. 혜초의 경우, 나란다에서 공부한 흔적은 없다. 그러나 혜초는 불적지(佛蹟地)를 참배하고 밀교를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인도에 갔음을 알 수 있다. 혜초는 천축으로 들어갈 때는 해로를,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다. 만 4년 동안 인도를 여행했고, 오늘날의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대를 답사했다.
중국 밀교의 법맥은 ‘금강지→불공→혜초’다. 불공의 입적 직후 동문ㆍ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스승의 장례에 대하여 황제가 베풀어준 하사(下賜)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또 스승이 세웠던 사찰을 존속시켜 달라는 청원이었다. 그 뒤 혜초는 수년 동안 장안에 머물러 있다가 780년 불경을 번역하기 위하여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래 머무르던 곳이며, 첫 제자인 함광(含光)도 여기에 있었다. 혜초는 노년을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보내면서, 전에 필수(筆受)를 맡았던 <천비천발대교왕경(千臂千鉢大敎王經)> 한역과 한자음사(漢字音寫)를 시도하여 약 20일 동안 이 한역본을 다시 채록했다.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787년에 입적했다.
이들과 동시대 인물로 선무외(善無畏, Subhakarasimha, 637~735)가 주목된다. 그는 중부 인도의 마가다국의 국왕으로 나란다대학에서 사사하고 밀교를 배운다. 716년 현종 통치하의 당나라 장안으로 향했으며 중국 밀교에서 삼장법사 중 한 명이 된다. 정확한 문헌은 남아있지 않지만, 선무외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건너와 진언종의 조종이 되었다는 전설이 곳곳에 남아있다.
밀교는 어찌 보면 ‘상인의 종교’로 전파되었다. 스리비자야의 활발한 무역로를 따라서 밀교가 확산되었다. 해안가나 섬, 포구와 항구 등에 밀교가 널리 퍼졌다. 신재관의 연구(<인도-동남아시아의 해양실크로드와 7~9세기 밀교의 확산>, 2019)에 따르면, 7~8세기 이슬람 상인이 출현하면서 불교를 후원하던 상인들이 대거 위축되는 상황에서 밀교 수행자들이 국가의 대소사 자문과 왕실의 번영을 위한 의례를 제공해줌으로써 불교의 확장과 보호를 약속받았다. 북동 인도의 팔라 왕조나 오리사와 스리랑카의 왕들, 그리고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와 자바의 샤일렌드라왕 같이 해상무역의 거점을 지배했던 곳이 대부분 이러한 특징을 보여준다.
인도동부, 즉 벵골과 비하르 등지는 서인도보다 밀교가 훨씬 유행한 곳이다. 비하르의 오리사는 뛰어난 항해 세력들로 스리비자야에도 빈번하게 기항했다. 오늘날 오리사에 남아있는 오랜 전통 의례와 축제에는 동남아로 떠났던 배가 무사 귀환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그만큼 오리사와 스리비자야의 무역통상이 잦았으며 밀교도 뱃길을 따라 확산되었을 것이다. 오리사는 고대의 칼링가 왕국이 있던 곳으로 아쇼카가 대학살을 통하여 불교로 전향하게 된 곳이기도 하다.
스리비자야가 강력하게 후원하던 나란다대학의 뛰어난 밀교 이론가들이 스리비자야에 영향을 미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스리비자야 왕이 나란다대학에 다양하게 지원하는 반면 나란다의 유수의 학자들이 스리비자야로 넘어와서 활동했다. 당연히 동인도와 벵골만의 무역선을 이용했다. 대표적인 밀교승 아티사도 나란다와 스리비자야 두 곳에 모두 족적을 남긴다.
오랫동안 스리비자야에 체류한 의정이 수집하고 번역한 불경 가운데 밀교 경전이 다수 포함된다. 동아시아 구법승들이 7세기에 이르러 압도적으로 많이 인도로 들어갈 당시, 반대로 인도의 밀교 승려들도 동아시아로 넘어와서 전법을 펼쳤다.
무시강변에서는 불상만 발굴되는 것이 아니라 밀교 의식의 상징적 증거물인 청동 바즈라(Vajra, 金剛杵)나 바즈라가 달린 요령이 발굴된다. 바즈라는 본디 인도 신화에서 적을 물리칠 때 인드라가 사용하는 번개 형태의 아스트라이다. 훗날 바즈라는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 등에서 영혼과 영성의 견실함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는데 특히 밀교의 상징 도구가 된다. 바즈라가 수마트라나 자바에서 많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밀교의 확산도가 높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출처 : 불교신문, 주강현, 2022.8.16.)
인도네시아 Srivijaya 제국, CE 7-12세기 (출처: ko.eferrit.com/위키피디아)
팔렘방은 수마트라 섬 남동쪽 무시 강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 지명은 '하천이 모이는 곳' 또는 '하천의 충적지'라는 뜻으로, 고대로부터 항구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중국 「신당서」(新唐書)와 「송사」(宋史)에서 스리비자야는 '삼불제‘(三佛齊, San fu qi) 또는 '실리불서(室利佛逝)' 등으로 표기되어 중국과의 내왕이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의정(義淨, 635-713)이라는 유명한 승려가 인도에서 공부하러 오가면서 스리비자에 몇 년간 머물렀던 기록을 자신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와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남겼다.
그 내용을 보면 의정(義淨)은 광저우(廣州)에서 페르시아 배를 타고 약 20일 걸려 수마트라에 도착했다. 팔렘방에서 그는 6개월간 머물며 장차 학업에 필요한 산스크리트어를 익힌 후 인도로 갔다. 의정의 관찰에 따르면, 성채로 둘러싸인 도시 스리비자야에는 약 일천 명의 불승들이 있었다. 불승들의 경전 내용이나 의식이 중국과 별 차이 없었다고 한다.
의정의 기록에 따르면, 팔렘방은 무역선들의 기착지였고 불교의 중심지였다. 의정은 도자기, 진주, 비단 등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며, 장뇌, 백단향, 향료 등이 몰루카스로부터, 면직물은 인도로부터 수입되면서 거래되고 있음을 기록했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이곳을 거쳐 간 신라승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팔렘방은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 당나라 또는 신라 승려들이 인도로 순례를 떠나 전에 머물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는 것이 곳이었다.
(출처: 아틀라스뉴스, 2019.5.24.)
718년 스리바자야의 마하라자는 우마이야드 칼리프에게 외교문서를 보냈는데, 우마이야드 칼리프는 답례로 잔지바르 여인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724년에는 스리비자야의 마하라자가 중국 황제에게 아프리카 여인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1세기 인도 남부의 촐라 왕국이 태국의 남부를 침공, 점령한 후, 20년 동안 말레이반도, 수마트라를 계속 침범함으로 세력이 많이 약해지고, 바다에서 팔렘방으로 들어오는 무시강의 하류가 토사가 쌓여서 배와 상선들이 들어올 수 없자, 스리비자야의 중심지가 잠비로 옮겨간다. 한편으로 13세기 자바에서 마자파힛 왕국이 세력을 키우면서 차츰차츰 자바섬의 영토도 잃게 된다.
14세기 스리바자야의 한 왕자가 테마섹(지금의 싱가포르)으로 옮겨와, 스리비자야의 부흥을 꿈꿨지만, 얼마가지 않아 자바의 마지파힛 왕국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가 말라카 왕국을 건설한다.
스리비자야의 유적이나 유물은 얼마 남아있지 않지만, 스리비자야의 가장 큰 유산을 Bahasa Melayu(말레이어)라고 하겠다. 당시부터 현재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모든 항구에서 말레이어가 통용되었고, 말레이어는 당시 동남아의 lingua franca였다.
(출처: Malaysia Diary, 2012.4.20.)
AD 7세기경에 자바 섬의 서부에 자리를 잡은 순다(Sunda)왕국과 갈루(Galuh)왕국은 통합과 분리를 반복하며 안정적인 치세를 누리고 있었다. 반면 중부에서 동부까지는 여러 세력이 통합과 분열을 이어가며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혼란의 이유는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더불어 불교, 힌두교와 같은 종교적인 영향까지 있었다. 혼란을 추스르고 중동부를 통합하여 세운 나라가 싱하사리(Singhasari)다. 자바섬을 중심으로 1275년의 말라유 원정과 1284년에 발리원정을 통해 수마트라 남부, 지금의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섬 남부, 슬라베시섬 남부, 부루, 암본, 스람까지 영향권에 두었다. 베트남지역의 참파와 외교관계를 맺는 등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도 대내적으로 안정을 기하던 싱하사리의 치세에 역사는 가혹하게도 몽골이라는 거대한 산을 만나게 했다. 몽골의 침입을 대비하던 중 내부갈등까지 겹치면서 크르타나가라(Kertanagara)왕은 반기를 자야카투앙(Jayakatwang)에게 암살당하고 싱하사리는 멸망한다.
암살당한 왕의 사위였던 라덴 비자야(Raden Vijaya)는 무리를 이끌고 마두라 섬으로 피했다. 이후 자바 섬 동쪽 타리크(Tariq) 지역에 터를 잡은 라덴 비자야는 목재가 풍부했던 숲을 개간하여 벌목한 목재로 도시를 세웠다. 사람들은 일하면서 갈증을 채우기 위해 숲에 있던 마자(Maja)라는 과일을 먹었는데 쓴맛(pahit)을 냈다. 쓴맛을 맛보며 세워진 도시는 사람들에 의해서 ‘마자파힛(Majapahit)’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네시아 역사는 물론 동남아시아역사에서 최강국으로 이름을 올리는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가 된다.
후대에 라덴 비자야의 손자 하얌 우룩(Hayam Wuruk, 재위1350–1389)황제 때에 이르러 마자파힛은 본격적으로 제국으로 발돋움한다. 대외원정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며 세력을 떨쳤다. 자바섬에서 출발한 해상원정으로 서쪽으로는 말레이 반도부터 수마트라섬을 정복하였고 보르네오 섬과 동쪽으로는 슬라베시 섬, 술루, 민다나오(필라핀 남부), 말루쿠 일대와 소순다열도를 비롯해 뉴기니 섬 서부지역과 오스트레일이아 북쪽까지 영역을 확보하였다.
마자파힛은 조선왕조실록에 조와국(爪哇國)또는 조와국(爪蛙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실록에는 조와국에서 온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태조 때부터 태종 때까지 등장하며 오랜 시간 무역과 교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자파힛 제국은 1527년에 이르러서는 세력이 축소되어 제국은 종말을 고하지만 자바 섬 동쪽에 있는 발리 섬으로 옮긴 마자파힛의 후계는 섬을 지배하며 1908년 시점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런 영향으로 발리는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슬람보다는 힌두교 문화가 유지되고 있다.
(출처 : 소비라이프뉴스, 이강희, 2022.9.15.)
프레디는 1946년 아프리카 잔지바르(Zanzibar) 술탄국에서 태어났는데 그 지역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1964년 옆나라 탕가니카와 연합정부를 수립하면서 탄자니아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모 국적은 인도였다. 인도가 영국 식민지이던 시절 공무원인 아버지가 또다른 영국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근무하다 프레디를 낳았다. 하지만 부모의 혈통 자체는 인도인이 아니라 파르시(parsi·인도에 사는 페르시아 사람)다.
파르시는 원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조로아스터교 신도들이었는데,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이슬람 제국에 멸망당하자 인도로 피난을 갔다. 조로아스터교는 중국 전래 시 불을 숭상한다고 하여 ‘배화교’라고 불린 종교인데 이 종교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의 또다른 발음이 바로 ‘짜라투스트라’이다. 이후 자기들끼리 혼인을 맺고 민족과 종교를 지켜온 파르시는 경제 수완도 뛰어나 인도 최대의 기업, 타타그룹을 운영하는 등 상류층을 형성해 ‘인도의 유대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계일보, 2019.1.25.)
프레디는 아버지의 고향인 인도에서 고교까지 마치고 18세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해 대학교 졸업 무렵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즉, 프레디 머큐리는 이란 혈통을 가진 인도 국적의 부모에게서 아프리카 잔지바르에서 태어난 뒤 나중에 영국으로 귀화한 셈이다.
원래 ‘파로크 불사라’가 본명이지만 인도에서 학교 다닐 때 프레디라고 영어식 이름을 만들었고, 퀸 데뷔 직전 성도 ‘머큐리’라고 바꾼다.
그리스신화 올림포스 12신중 막내신인 머큐리는 ‘음악의 신’이기도 하니 그가 얼마나 음악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잔지바르에서 쫓기듯 도망쳤다고 말하는 장면과 관련한 이야기는 이렇다. 1964년 영국에서 독립한 직후 폭동이 일어나 영국식민지 시절 이주해 온 수많은 아랍인과 인도인이 학살당하는 소위 ‘잔지바르 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레디 가족이 겨우 영국으로 도망쳐 온 아픈 기억이 있다고. 프레디는 이후 고향 땅을 결코 가지 않았다고 한다.
영화 초반부에 프레디의 아버지가 방황하는 아들에게 충고하는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은 집안 가훈이 아니라 조로아스터교의 3가지 덕행 교리이다. 참고로 영화에서 아버지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던 프레디는 15년 뒤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고 ‘라이브 에이드’ 공연에 참가하기 전 집에 들러 “아버지께 들은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하고 살아왔다”며 서로 화해의 포옹을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과 혈통이다.
그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위치한 잔지바르에서 태어났으며 인도와 페르시아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머큐리는 1946년 9월 5일 잔지바르 정부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다.
그의 부모 보미와 젤 불사라는 파르시였다.
파르시는 조로아스터교리를 따르며 인도에 거주하는 페르시아의 후예를 가리킨다.
머큐리의 사촌 페르비즈 다룬카나왈라에 따르면 머큐리는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머큐리의 가족은 아름답기로 유명한 잔지바르 스톤타운에 위치한 해변이 보이는 집에서 살았다.
머큐리는 잔지바르에 위치한 성공회교도 학교에 재학하며 수녀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머큐리의 부모는 8살 때 그를 인도에 있는 학교로 보내기로 했다.
그는 인도 뭄바이 동남쪽에 위치한 빤찌가니에 세인트 피터스 처치 오브 잉글랜드 학교로 전학 갔다.
영국 교회 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인트 피터스 학교는 모든 종교의 학생들을 받아들였고, 머큐리는 재학시절 조로아스터교 교리를 충실히 따랐다.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뭄바이에 있는 이모와 조부모와 시간을 보내며 점점 음악에 대한 사랑을 키워갔다.
머큐리는 1963년 잔지바르로 돌아갔다. 1963년은 잔지바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연도다.
머큐리는 이곳에서 마지막 학교생활을 마친다.
당시 함께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에 따르면 그는 종종 친구들과 수영 및 자전거 타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의 친구 본조 헤르난데즈는 "머큐리는 항상 '똑똑하게' 옷을 입었어요"라며 머큐리를 회상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오래가지 않았다.
1964년 혁명이 일어났고 군림하던 아랍 엘리트층은 붕괴했다. 이 과정에서 최소 17,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잔지바르와 탕가니카가 합병하며 탄자니아가 됐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럤듯 불사라 가족도 군도를 빠져나왔다.
(BBC News Korea, 2018.11.12.)
일반적으로 ‘대항해 시대’라면 15∼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3차 대항해이다. 세계 해양 무역사를 보면 이미 8세기에 동양과 이슬람의 상선단이 해상 실크로드를 완성했다. 이것이 1차 대항해다. 이들은 양쯔강 하구 곧 상하이 입구의 주산군도, 영파(명저우), 양저우 등에서 만나 교역을 했다.
그 무렵 이슬람 상인들은 삼각형의 세로 돛을 단 ‘다우선’으로 페르시아만에서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까지 항로를 개척했다. 다우선은 작지만 조종하기가 매우 편리한 배로 아프리카와 인도, 아시아 등 대양을 연결했다. 이때 이슬람 상인들의 항로는 중국 광저우 지나 양쯔강 하구의 양저우에까지 이르러 그곳에 이들의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백제, 신라와 이슬람의 교류도 이뤄졌다.
불어로 된 이 지도는 고대 한민족 세력권 곧 한반도와 발해만 내역과 주산군도를 비롯한 양쯔강 좌우, 그리고 규슈 등이 같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당시 주산군도와 영파에는 백제와 신라 유민들이 많이 건너와 살고 있었고 비단과 도자기, 철광석 교역 등 본국과의 교류가 빈번했다. 그들은 연안 항로 이외에도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했다. 주산군도와 규슈 그리고 전남 영암 사이에는 구로시오(흑조) 해류가 북쪽으로 흘러 이를 이용해 뗏목을 이어 만든 연선과 선박 운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주산군도에는 심청의 사당이 있고 우리 민족의 백김치와 젓갈이 있다고 한다.
동서양의 뱃길은 고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로마에는 비단이 유행하여 1세기 중엽에 이미 로마에 비단 전문시장이 들어섰다. 로마인들은 비단이 두 나라로부터 왔다고 했다. ‘세리카’와 ‘시나이’였다. 로마인들은 육지를 통해 들여온 비단은 ‘세리카’라 불리는 중국에서 온 것이고, 바다를 통해 들여온 비단은 ‘시나이’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구분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세리카나 시나이가 모두 중국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시나이가 ‘신라’를 뜻하거나 주산군도에 있었던 ‘신라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당시 신라와 로마가 어떤 형태로든 교류가 있었다. 유독 신라 고분에서만 고대 로만 글라스가 발굴되고 있다.
◇다우선의 활약
다우선. /위키피디아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에서 주로 쓰였던 다우선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다만 고대 수메르 문명과 인더스 문명의 교류가 활발했던 점을 보면, 이 시기에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을 오갔던 다우선을 추정할 수 있다. 실제 ‘네이버 백과사전’에 보면, 정수일 박사가 “고대 인도양에서 항해하던 선박으로, 삼각돛을 단 목조선 일반에 대한 범칭. 일찍이 5000년 전부터 다우선은 인도양에서 부는 계절풍을 타고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와 인도의 모헨조다로 사이를 항해하면서 교역에 사용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듯 고대로부터 사용했던 다우선은 목재와 목재 이음을 쇠못이 아닌 노끈으로 꿰매어 묶었다. 노끈으로 묶은 배라 튼튼하지 못한 단점도 있지만 암초가 많은 바다에서는 장점도 있었다. 중세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1368)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야자섬유인 칸바르(qanbar)는 배를 꿰매는 데 쓰는 노끈을 말한다. 인도나 예멘의 배들은 이 노끈으로 꿰맨다. 왜냐하면 두 지방의 바다 밑에는 암초가 많아 쇠못을 박은 배의 경우 못이 암초에 부딪히면 깨지고 만다. 그러나 노끈으로 꿰매면 노끈이 젖어 있어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6세기에 발흥한 이슬람은 신정일치의 종교와 형제애로 다져진 ‘움마 공동체’를 만들어 빠른 시간에 사라센 제국을 건설했다. 이슬람은 7세기 말에 서양과 화폐 통합을 이루었다. 곧 동로마 제국의 금화와 사산왕조의 은화를 통합했다. 금화 1닢은 은화 22닢과 교환되었다. 이로써 서양과 이슬람의 화폐 교환이 한결 수월해져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750년 압바스 왕조가 이슬람 세계를 장악하자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동양과 좀 더 가까운 메소포타미아에 계획 도시 바그다드를 만들어 옮겼다. 이후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 인구가 150만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도시가 되었다. 당시 바그다드와 견줄 수 있는 도시는 당나라 수도 장안과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 정도였다.
이후 이슬람은 인도와 남중국해로 해상 무역 반경을 넓혀나갔다. 삼각돛의 ‘다우’선으로 비단, 도자기 등 각종 교역 품목을 실어 날랐다. 당시 해상 실크로드 무역은 부의 원천이었다. 외국 무역상들이 중국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광저우와 그 인근에만 20만명의 이슬람 상인과 유대 상인, 페르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는 자치 구역이 있을 정도였다.
875~884년에 발생한 ‘황소의 난’ 때 광저우를 점령한 반란군들은 이들 중 12만명을 학살했다. 특히 유대 상인 4만명이 살해되어 광둥 지역 유대인 정착촌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슬람 상인들은 이 같은 ‘차이나 리스크’에 충격받아 믈라카 해협의 작은 섬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후 중국과 이슬람 상인은 인도 남부 항구 퀼론(쿠이론)을 경계로 동서 해역에서 각각 해상 무역을 담당했다.
이슬람 상인과 중국 상인의 해상 교류로 인도양 주변 해안 도시들의 상업이 활발해지자 유라시아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게다가 중국은 비단과 도자기 수출 대금을 은으로만 받았다. 그러자 은 공급량이 경제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10세기에 이슬람 세계는 극심한 은 부족 현상을 겪게 되었다. 중국은 은이 조세의 기본이라 은이 금에 비해 고평가되었는데, 서양의 금과 은 교환 비율이 1대12인데, 이슬람은 1대9, 중국은 1대6 정도였다. 당연히 서양과 이슬람의 은이 고평가된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러한 은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이슬람 지역에서 외상 거래와 어음이 탄생했다. 당시 이슬람 사회의 유대인 공동체와 이슬람 움마 공동체는 그들의 경전인 탈무드와 코란이 국제법 역할을 해 먼 거리에 위치한 공동체 간에도 서로 신뢰하며 거래할 수 있었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는 디아스포라 간의 오랜 정보 공유 전통으로 지역별 환시세에 정통했다. 그들은 시장에서 서로 다른 화폐를 바꾸어 주는 환전상 업무를 하면서 들고 다니기 무겁고 위험한 금속 화폐 대신 다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통용되는 어음과 수표를 960년께부터 발행함으로써 부족한 은화를 보충했다.
그 뒤 연이어 일어난 시아파의 봉기로 바그다드 주변이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경제와 무역의 중심이 이슬람에서 지중해로 옮겨 갔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는 유대 상인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해상 무역을 발전시켰고, 어음도 이들을 따라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다.
중국에서도 이슬람과 비슷한 시기에 어음이 출현했다.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대운하 개발로 당나라 말기부터 강남 지역이 활발히 개발되었다. 경제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거래할 때 쓸 철전과 동전이 심각하게 부족해지자 북송 시대 쓰촨에서 민간 금융업자가 철전과 동전 대신 종이로 만든 어음인 ‘교자(交子)’를 유통시켰다. 10세기 후반 발행된 ‘교자’는 철전이나 동전을 맡기고 받은 예탁 증서였다.
교자의 편리성이 입증되자 나중에는 나라가 직접 발행을 관장했다. 교자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거치면서 ‘교초(交鈔)’라는 지폐로 발전했다. 원래 여진족은 동전을 기본 통화로 썼는데,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을 점령한 후 구리가 부족해지자 1142년에 비단을 기반으로 지폐를 발행했다. 금나라는 동시에 은화와 동전도 발행해 금속 화폐와 지폐가 함께 통용되었다.
이후 금나라가 아래로는 남송과 싸우고 위로는 몽골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전쟁 비용이 증가하자 지폐가 남발되었다. 금나라 말기인 1214년 무렵엔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1000관짜리 지폐도 발행되었다. 금나라는 화폐 개혁을 단행해 새로운 지폐인 보천(寶泉)을 발행했으나 이미 실추한 신뢰의 상실로 시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도한 지폐 남발로 인한 통화 붕괴는 금나라 멸망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13세기 몽골인들이 대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칸이 25년간 정복한 땅은 로마제국이 400년간 정복한 땅보다 넓었고,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히틀러 등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도 넓었다. 당시 15만명의 군사로 그 넓은 땅을 정복한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칭기즈칸의 사망으로 몽골군이 회군하지 않았다면 서유럽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몽골군은 신출귀몰한 기동력 덕분에 순식간에 적들을 제압하고 정복할 수 있었다. 보통 몽골 기병 한 명이 서너 마리의 말을 끌고 다니며 바꿔 타 하루 이동 거리가 200㎞에 달할 때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적들은 전광석화와 같은 몽골군의 기습에 혼비백산했다.
고대로부터 대규모 부대가 움직일 때는 그 뒤를 따라가는 보급 부대가 있어야 했지만, 몽골군은 보급 부대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 행군 속도가 빠르고 기동력 있는 작전이 가능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몽골군은 장병 스스로 자기 먹을 걸 안장 밑에 갖고 다니며 식사를 해결했다. 바로 말젖 분말과 육포 가루였다. 마르코 폴로에 의하면 몽골군은 4~5㎏ 정도의 말젖 분말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아침 무렵에 500g 정도를 가죽 자루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녁 때 불려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중에는 육포 가루를 물에 타 먹었다. 특히 전쟁 중에 불을 피워 조리를 할 필요도 없어 부대가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몽골은 전 유라시아를 통일했기 때문에 기존의 실크로드 이외에 초원길이 더 뚫렸다. 그들은 네 개의 중요한 동서 교통로, 곧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길’로 아시아와 유럽을 이었다. 그리고 통행로 요소요소 마다 마구간과 숙소를 겸한 역참을 세웠다. 이는 동서 무역을 위한 무역 진흥책이었다.
원나라 초기만 해도 은과 비단이 주요 화폐였다. 교초 지폐는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금나라에서 관료로 일했던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눈에 들어 원나라에서도 재무 담당 관료로 일했다. 그는 금나라에서 사용하던 지폐를 활용할 것을 건의해 2대 황제 오고타이 때 교초를 발행했다. 원나라 때 시행한 역참제로 안전하게 열린 실크로드는 동서 무역의 비약적인 활성화를 가져왔다.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원나라는 각 지역의 도시와 항구 그리고 나루터와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내는 통행세나 관세를 없애고 모든 물품의 세금은 마지막 판매지에서 한 번만 지불토록 했다. 그 결과 상업과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육로뿐 아니라 해상 교역도 활발했다. 천주 항구에만 1만5000척의 선박이 해상 수송에 종사했다.
본격적인 지폐 시대가 열린 것은 5대 황제 세조 쿠빌라이가 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면서부터였다. 그는 교역 활성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지폐의 사용을 빠르게 확대하기 위해 은과 비단에 기반한 냥(兩) 단위 교초(지원통행보초)를 발행했다. 이는 은 1냥을 교초 10관으로 정해 유통시킨 태환 지폐였다. 원나라 교초는 동판으로 인쇄해 황제의 옥새를 날인해 발행되었다. ‘위조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문구도 새겨 넣었다. 덕분에 대량의 주조비용이 절약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쿠빌라이 초기엔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폐와 은의 철저한 교환 비율을 지켰다. 은을 확보한 만큼만 지폐를 발행했다. 원나라는 지폐 인쇄를 위해 수도 연경(燕京·베이징)에 조폐창을 두었다.
이로써 은본위 제도의 이슬람권과 몽골이 공통된 통화 기반을 갖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지역이 모두 은을 기반으로 삼는 화폐 경제 체제 안에 통합되었다. 이로써 교초는 고려부터 시리아까지 몽골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지역에서 통용됐다.
원나라는 아예 지폐만 유통시키기 위해 모든 금은과 동전을 몰수하고 이를 지폐로 바꿔주었다. 지폐 받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이었다. 이전 송나라 때 지폐를 사용하긴 했어도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지폐(교초)만 통용된 것은 원나라 때가 처음이다. 당시 이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의 지폐 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동방견문록’에서 지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도 유럽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종이가 돈 구실을 한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10세기 후반 중국 상인들이 여러 개의 사다리꼴 세로돛을 단 원양 범선인 ‘정크’선과 나침반 등 새로운 항해술을 이용해 남중국해와 인도양으로 진출했다. 이로써 2차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2차 대항해는 대개 10∼11세기를 기점으로 13∼14세기에 정점을 이룬다. 그리고 정화의 대항해가 대미를 장식한다.
정화 대항해에 동원된 배는 함대의 중심으로 보선(寶船·보물을 가지러 가는 배)이라 불린 대형 함선만 60여 척이었다. 보선의 크기는, 비록 과장설이 있긴 하나, 가장 큰 배의 경우 길이 151.8m, 폭 61.6m에 무게 약 3,000톤이었다고 한다. 당시로서 이 같은 함대의 규모와 배의 크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가는 1492년 콜럼버스의 1차 항해 때 참가한 인원이 120명, 함선은 3척에 불과했고 기함 산타마리아호도 230톤밖에 되지 않았던 사실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세계에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다. 도자기, 금속활자, 측우기, 신기전 등 수준급 과학기술을 보유한 조선이 500년간의 해금 정책으로 눈과 귀를 막아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흐름에서 소외되었다. 반면 이 시기에 일본은 개방 정책을 폈다.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교류하며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와 조선의 은제련 기술로 제련한 ‘은’을 팔아 경제 대국의 기틀을 이때 마련했다. 그 돈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쇄국 정책과 개방 정책의 차이가 후에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아라비아에서 농사법, 모직물 제조, 항해, 천문, 지리, 지도 제작, 조선 기술, 행정·사법·군대 제도 등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도입되거나 개선, 개량되었다.
역대 포르투갈 왕들은 해상 강국을 꿈꾸며 국민에게 해운을 장려하여 많은 인센티브를 주었다. 특히 페르난두 왕(재위 1367∼1383)은 100톤 이상의 큰 배를 건조할 경우, 왕실 소유 삼림의 나무를 자유롭게 사용토록 했다. 그리고 배를 건조하기 위해 수입하는 원자재는 관세를 면제했다. 외국에서 건조된 100톤 이상의 배를 수입할 때도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 배를 만드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들은 해운업에 진력할 수 있도록 병역도 면제해 주었다. 또한 선박이 난파되거나 적에게 강탈되었을 때 선주에게 보상을 해주는 해상보험 제도도 실시하는 등 해운 발전에 노력했다.
1415년 엔히크(Henrique) 왕자는 아버지 주앙 1세가 이끄는 아프리카 세우타 정복 전쟁에 참전했다. 1415년 8월 15일 지브롤터 해협의 세우타 앞바다에 238척의 포르투갈 군함이 나타났다. 4만5000여 포르투갈 군인은 무어인들을 백병전으로 격파하고 세우타를 함락시켰다. 이는 탐험 시대를 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슬람권의 중요한 교역 도시인 ‘세우타’ 점령은 유럽이 처음으로 자기 대륙 바깥에 건설한 최초의 ‘해외 식민지’였다.
세우타는 카르타고인들이 건설한 항구로 지중해 출입구를 지키는 전략적인 요충지인 관계로 로마· 반달· 비잔틴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고, 771년부터는 아랍령, 1415년부터는 포르투갈령, 1580년부터는 스페인령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스페인 관할 지역이다.
포르투갈의 세우타 침략은 무어인의 침략 방지와 해상 무역 확대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한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금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브롤터 해협의 세우타가 10세기부터 순도 높은 금화를 주조한 금의 산지라는 점이 포르투갈의 정복 의욕을 부추겼다. 점령 직후부터 포르투갈은 세우타 금화를 그대로 본떠 포르투갈 금화를 찍어냈다. 포르투갈이 금화를 찍어 유통시키자 그때까지 금화가 없었던 스페인이 크게 자극받았다.
그런데 정작 엔히크가 세우타에서 본 것은 무어인들의 엄청난 향신료였다. 그곳에는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에서 온 물건을 파는 상점이 수천 개나 있었다. 후추, 정향(丁香) 등 다양한 종류의 향신료가 창고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엔히크는 이슬람 상인을 거치지 않고 향신료를 직접 수입할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한다면 포르투갈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생각은 이미 동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향신료 길에 오스만제국이 버티고 있어 바다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엔히크는 선대를 편성해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마데이라 제도와 포르투 산투 제도를 포르투갈령으로 만들었다. 1419년 그는 포르투갈 남단 알가르베 주의 총독이 되었다.
엔히크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 개척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그는 사그레스 항구에 항해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그리스 조선 기술자, 유대인 천문학자와 지도 제작자들을 초청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항해학교를 설립해 우수한 항해 기술자들을 길러내는 한편 조선소를 만들어 선박을 개량하는 등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대항해를 준비했다. 그의 위대한 점은 그간의 경험에 의존하기보다는 과학적인 시스템에 의해 대항해를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기독교 지리학자들이 그린 조잡한 지도를 버리고 대신 훈련된 항해사들이 실제 답사해서 그린 해도를 하나하나 맞추어 정확한 지도를 제작했다. 정확한 지도야말로 항해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이 분야에서도 세계 곳곳에 커뮤니티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이 탁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수학, 정밀 도구의 제조, 지도와 항해도 제작 등에 뛰어난 기술자들이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지도 제작자로 평가받는 유대인 자푸다 크레스케스를 스페인의 마요르카섬에서 사그레스로 모셔왔다.
한 항해 일지와 해도를 작성하고 해안에서 본 모든 것을 반드시 기록하도록 했다. 사그레스에는 포르투갈인은 물론 유대인, 무어인, 이탈리아인, 스칸디나비아인, 여행자,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지도 제작은 정밀 과학의 수준으로 올라섰다. 또한 아직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던 항해용 나침반이 사용되게 되었고, 유대인 랍비이자 천문학자 아브라함 자쿠토가 개발한 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거리 항해 기구 아스트롤라베가 제작되었다. 이 기구 덕에 비로소 북극성을 볼 수 없는 남반구에서도 원양 항해가 가능해졌다.
최전선에서 공격을 주도했던 21세의 엔히크 왕자는 유럽 각국으로부터 자신들의 군대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였다. 각국 왕실로부터 청혼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엔히크의 선택은... 먼 거리 항해에 적합한 삼각돛의 카라벨 선을 개발했다. 카라벨 선은 삼각형의 돛을 사용해 역풍에 강할 뿐 아니라 배 밑바닥이 평탄하고 너비가 좁아 속력이 빨랐다. 삼각돛은 항해사에 한 획을 긋는 획기적 변화였다.
삼각돛이 발명되기 전까지 바다에서 이동은 제한적이었다. 사람이 노를 젓는 갤리선 아니면 뒤편 바람을 이용해 앞으로 나가는 범선 정도였다. 바람이 앞에서 불어오면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범선은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 육지에서 바다로 부는 바람(육풍)을 이용해 바다로 나갔다가, 낮에 반대로 부는 바람을 이용해 집으로 돌아오는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 이후 오스만제국에 의해 실크로드 길목이 막혀버리자, 유럽 각국은 바다를 통해 동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거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동양까지 노를 젓는 갤리선이나 사각 돛의 범선으로 가기는 불가능했다.
삼각돛은 이슬람 선단이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면서 전해졌다. 아마 그들도 7~8세기 아랍 상인들이 동아프리카에서 인도까지 항해하는 데 사용한 다우선의 삼각돛을 보고 이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각돛을 이용하면 뒤에서 부는 바람은 물론, 앞에서 불어오는 역풍에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 이전까지의 돛은 대부분 옆으로 펼친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삼각돛은 배의 앞쪽에 달린 삼각 모양의 돛을 좌우로 회전시키면 지그재그 형태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삼각돛이 역풍에도 앞으로 나가는 원리는 돛의 바깥쪽 바람이 돛 안쪽 바람보다 빠르게 흐르면서 바깥쪽 압력이 낮아져 배를 앞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생긴다. 이는 비행기를 뜨게 하는 양력인 ‘베르누이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삼각돛의 발명으로 노 없이 바람만으로도 먼 거리를 운항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편서풍이 부는 북위 30도에서 60도 사이에서 해상 무역을 하기 위해서는 역풍에도 앞으로 나가는 배가 필요했다. 서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삼각돛을 이용해 포르투갈에서 해안선을 따라 아프리카까지 장거리 항해에 성공했다. 이로써 드디어 대항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바다를 이용해 운반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은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낙타나 말이 운반하는 상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다양하고 규모가 커졌다.
엔히크는 해양학교 출신 항해자들을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보자도르곶 남단의 바다를 탐험하는 항해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으로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기반으로 1431년에 아조레스 군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1418년 정복한 마데이라와 이 섬들을 곡물, 사탕수수 경작과 인디고 염료용 대청 재배 산지로 만들었다. 특히 사탕수수와 대청은 포르투갈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당시는 아프리카 서안 보자도르곶을 대서양의 끝으로 보았다. 당시 뱃사람들은 그 아래 ‘암흑의 녹색 바다’에 대한 두려움으로 남쪽으로 항해하는 것을 꺼려했다. 열대 바다는 뜨겁기 때문에 바닷물이 펄펄 끓는 해역을 항해하게 되면 모두 검둥이가 된다고 생각해 항해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죽음의 바다로 알려진 그곳을 탐험해 보겠다는 항해자들에게는 어떤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도 돛만으로 원양 항해가 가능한 크고 성능 좋은 배를 지원했다. 1434년 탐험가 질 에아네스가 도전해 카나리아 제도를 발견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이듬해 마침내 그곳으로부터 240㎞ 정도 떨어진 보자도르곶에 도달했는데, 펄펄 끓는 바닷물이 없는 고요하고 푸른 바다였다. 공포가 사라지자 이제는 더 남방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15세기 들어 선박의 모습이 급격히 달라졌다. 1400년대의 배는 주로 돛대와 돛이 1개씩이었다. 그러나 먼 거리 탐험에 필요한 선박으로 개량되면서 돛의 수가 3개로 늘어났다. 3개의 삼각돛만을 쓰는 가볍고 기동성이 뛰어난 카라벨선이 제작된 후 개량을 거듭해 사각 돛도 함께 쓰는 쾌속 범선이 등장했다. 삼각 돛대 하나, 사각 돛대 두개, 다시 삼각 돛대 하나, 이런 식으로 구성된 이 배는 뛰어난 기동성을 지녔다. 캐랙선은 역풍에 유리한 삼각돛과 순풍에 유리한 사각 돛의 장점을 혼용했다. 그래서 강한 계절풍을 타고 큰 바다를 항해하는 데 적합했다. 1430년 포르투갈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 배는 먼 거리 항해에 안성맞춤이었다. 엔히크 왕자가 이 배를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에 사용했다.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도 캐랙선이었다.
캐랙선의 등장으로 비로소 먼 거리 항해가 가능해졌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초 불과 30년 사이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하고(1492),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며(1498∼1499), 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했다(1519∼1522). 이로써 대항해 시대가 활짝 열렸다. 캐랙선 크기는 점차 커져 15세기 400톤 정도였던 것이 16세기에는 1000톤 이상이 되었다.
스페인에서와 같이 중세 포르투갈에서도 유대인들이 상업과 대부업, 의사, 관리 등 경제활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대략 9만명의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이어 유대 경제와 문화를 이어가는 곳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곳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4년 뒤 포르투갈도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야망이 큰 마누엘 왕이 반유대 정책을 고수하는 스페인 왕국과의 정략결혼을 위해 유대인 추방을 결행한 것이다. 1496년 12월 칙령에 의하면, 이듬해 10월까지 개종을 거부한 모든 유대인이 떠나야 했다. 그래도 스페인보다는 시간을 많이 준 편이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재산을 갑작스럽게 처분할 수 없어 임시방편으로 영세를 받아 개종을 택했다. 이처럼 이곳에서도 많은 유대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적은 수의 유대인만 추방되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과는 달리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모질게 굴지는 않았다. 스페인 왕국이 그랬듯 포르투갈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시기가 대항해와 경제적 번영기를 함께하는 전성기였다.
(출처 : 조선일보, 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2022.12.11.-18.)
포르투갈은 대서양이 시작되는 나라다. 중세 지중해 시대에만 해도 포르투갈의 존재는 미미했다. 하지만 15세기에 항해왕자라고 불린 엔리케(Henrique, 1394~1460)에 의해 잠자던 포르투갈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주앙 1세(João I)의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엔리케 왕자는 형들과 함께 이베리아반도 남쪽을 차지했던 이슬람 무어인들을 쫓아내는데 참여한 뒤 1415년 아버지로부터 바다 건너 아프리카 세우타(Ceuta) 섬 진격에 총사령관으로 지명되었다. 엔리케는 그곳에 쫓겨간 무어인들이 다시 포르투갈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섬멸했다.
세우타에서 엔리케는 무어인들이 남긴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인도와 중국, 아프리카에서 온 물건을 파는 상점이 2만4천개나 있었고, 계피, 후추, 정향(丁香), 생강 등 다양한 종류의 향료가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톤에 달한 향료는 아시아에서 중동을 거쳐 들어온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가져가 유럽에 팔면 포르투갈의 몇 년치 재정을 거뜬히 메울수 있었다.
엔리케의 생각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멀리 대양을 건너갈 것을 생각했다. 세우타에서 본 향료의 길에는 오스만투르크가 버티고 있었고, 포르투갈의 힘으로 그 길을 개척할수 없었다. 그렇다면 바다로 가는 길밖에 없다.
그의 통찰력은 바다로 나가 향료 무역을 지배하는 것에 닿았다. 바다로 가면 향료의 산지 인도로 갈수 있고, 차(茶)의 산지 중국과도 연결된다. 본국으로 돌아온 엔리케는 선대를 편성해 아프리카 서해안에 있는 마데이라(Madeira) 제도와 포르투산투(Porto Santo) 제도를 발견했다.
곧이어 1419년 그는 포르투갈 남단 알가르베(Algarve) 주의 총독이 되었다. 엔리케는 사그레스(Sagres)라는 항구에 항해학교를 세웠다. 말이 학교지, 선박 건조와 항해기술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그리스 조선기술자, 이탈리아 수학자, 유대인 천문학자, 페니키아 선박설계자, 이슬람의 지도제작자들이 초청되었다.
엔리케는 그들에게 비밀 지령을 내렸다. 세계의 바다를 탐험할 수 있는 혁신적인 선박 건조와 항해기술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엔리케가 만들려는 것은 먼바다를 건너갈수 있는 배였다. 당시 유럽에서 사용되는 갤리선(galley)은 너무 느렸고, 사람이 노를 저어야 했기 때문에 노동력이 많이 들었다. 또 선원들의 공포심을 없애 주어야 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대서양 남쪽으로 가면 태양 빛이 너무 뜨거워 배가 타버리고 사람들이 검둥이로 변한다는 미신에 젖어 있었다.
엔리케의 그 많은 요구사항을 담은 배가 마침내 탄생되었으니, 50톤급 캐러벨선(caravelle)이다. 캐러벨선은 범선으로 갑판이 예전 배보다 훨씬 흘수선 위쪽으로 올라갔으며, 삼각돛과 가로돛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
새로 만든 캐러벨선은 종전 갤리선보다 빨랐고 튼튼했고, 많은 화물을 실을수 있었으며 대포도 설치할수 있었다. 사그레스의 설계자들은 고물의 키를 타륜(舵輪)과 연결시키는 방법도 개발해 냈다. 게다가 중국에서 개발된 나침반을 달았다. 구름이 낀 날, 북극성을 바라보지 않아도 밤과 낮으로 항해가 가능했다.
1453년 엔리케 왕자는 신무기 캐러벨선을 이끌고 적도근처까지 항해했다. 두려움에 떨던 선원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적도 근처 아프리키 땅이 사막이 아니고 녹음이 우거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아프리카를 조금씩 남쪽으로 더 내려갔다.
6년후 엔리케가 지휘하는 캐러벨 선단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어느 해안에 닿았다. 그곳에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흑인들은 이상하게 생긴 인간들이 도착하자 무릎을 꿇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원주민을 쇠사슬로 포박해 기독교 방식으로 세례를 한 다음에 데려가 노예로 삼았다.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포획이라는 범죄는 이때 시작되었다. 노예들은 농장에 배치되었는데 농장주들이 무임금의 노동력을 얻게 되어 기뻐했고, 그 후부터 노예 장사가 광범위하게 번져 나갔다.
어쨌든 엔리케는 항해 왕자(Prince the Navigator)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포르투갈로 하여금 유럽에서 가장 먼저 해양으로 진출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항해술은 정확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항해지도였다. 당시 해도는 육지에 가까운 연안에서는 정확했지만 먼바다로 나가면 거의 쓸모가 없었다. 항해자들은 배가 어디에 와있는지 몰랐고, 해류와 해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곳에 도착하기 일쑤였다.
그 문제점을 해결한 사람이 이탈리아 수학자이자 지도제작자 파올로 토스카넬리(Paolo dal Pozzo Toscanelli, 1397~1482)였다. 그의 방식은 지도에 눈금을 그어 위치를 쉽게 식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항해사가 항해 속도와 방향을 계산해 지도의 눈금에 맞춰 위치를 확인하는 지도였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지도 기법을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에게 가져갔다. 그런데 엔리케 왕자는 놀랍게도 그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토스카넬리는 경쟁국인 스페인으로 갔다. 스페인은 그 지도 방식을 사들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드 왕의 결혼으로 통합하고, 남쪽에 남아 있던 그라나다를 몰아내고 1492년 스페인 왕국을 탄생시킨다.
그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국왕의 명령을 받고 신대륙 탐험에 나섰다. 이때 콜럼버스가 가지고 간 지도는 토스카넬리가 고안한 지도였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에 놀란 포르투갈은 인도 항로에 매진했다. 1500년 페드로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은 포르투갈 국왕의 명령을 받고 인도로 가는데 해도를 잘못 읽었다. 그에겐 토스카넬리의 지도가 없었다. 카브랄의 배는 아프리카 서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풍랑을 만나 예정항로에서 3,200마일이나 벗어나 브라질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은 차제에 그 땅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브라질이 포르투갈령이 된 것은 당시 해도의 오류 때문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이 숨어 있다..
뒤늦게 해양으로 진출한 스페인이 항해기술에서 포르투갈을 앞서나가면서 서서히 세계 해양의 주도권을 잡아나가게 된다.
스페인보다 뒤늦게 대양에 뛰어든 나라가 영국이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개척한 대양사업에 끼어든 든 영국 국왕은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였다. 그는 섬 나라를 강하게 하는 길이 해양으로 진출하는 것이라 결론내렸다. 이 왕은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에서 향료무역을 독점하고, 스페인이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을 가득 싣고 오는 것을 시기했다.
헨리 8세는 바다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싸워 이길수 있는 배를 원했다. 그 배는 어떤 함선보다 크고 많은 대포를 실어야 했다. 국왕은 왕실 직영으로 선박연구개발 조직을 만들어 해외의 유능한 인재를 뽑았다. 그 원천은 과학과 기술이었다. 헨리 8세의 방침이 알려지면서 포르투갈의 유능한 기술자가 주인을 버리고 영국으로 건너왔다. 새로운 주인은 돈을 많이 주었다. 총포 제작기술자, 조선기술자들이 몰려들었다. 영국 국왕은 교황청과 싸우면서 성당 부지를 대량으로 몰수했기 때문에 전함을 개발하고 조직하는데 돈을 펑펑 썼다. 해양강국을 만들기 위해 성당보다는 전함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국왕은 알고 있었다.
헨리 8세는 더 많은 화물을 싣고 더 빠르며,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하는 배를 만들라고 기술자들에게 주문했다. 기술자들은 물리학 원리를 이용해 배의 바닥을 평평하게 하면 부력이 커지고, 더 많은 화물을 실을수 있다는 점을 감안했다. 하지만 무거운 대포를 갑판에 실을수는 없었다.
국왕은 기술자에게 질책했다. “왜 당신은 대포가 반드시 갑판 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배의 아래에 두면 되지 않느냐.” 국왕의 아이디어는 참신했다. 기술자들은 대포를 배 아랫부분 용골(龍骨)에 설치했다. 배 측면에 방수창(防水窓)을 만들어 평상시엔 닫았다가 대포를 쏠 때 문을 여는 방식이 개발되었다.
게다가 대포를 지탱하는 포가(砲架)에 레일을 깔아 발사후 반동으로 밀려났다가 제 위치로 돌아오는 기술이 개발되어 적용되었다.
1545년 템스강에 국왕의 지시로 만든 배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왕은 그 배를 '위대한 해리호'(The Great Harry)라고 명명했다. ‘위대한 해리호’에는 60파운드의 포 4문과 32파운드 포 12문, 수많은 소형 포들이 장착되었다.
영국은 항해 기술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달성했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나침반이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느 위도에 이르면 배는 북극성을 향하는데,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여왕 시절에 로버트 노먼(Robert Norman)이라는 연구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끙끙거리다가 여왕의 주치의인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의사인 길버트는 스스로 과학적 연구를 시작해 대단한 가설을 세웠다. 지구가 커다른 자석이며 나침반은 지구 자석에 의해 움직인다는 이론이었다. 길버트는 진짜 북극(眞北)과 지구자석의 북극(磁北)의 편차(자침 편차)를 항해사가 계산에 넣으면 항해상 오류를 극복할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항해법은 영국 해군에 적용되었다.
영국의 최신 전함 개발과 새로운 항해기술 개발은 해군력을 증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영국의 해적선들은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스페인 상선을 나포해 엄청난 보물을 노략질해왔다. 결국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엘리자베스 1세의 전함은 일대 전투를 벌였는데, 승리는 영국으로 돌아갔다. 역사가들은 드레이크(Francis Drake)의 전략과 전술, 풍향 등을 영국 승전의 이유로 대지만, 그 원천에는 과학자를 우대하고 과학기술을 중시한 전략 덕분이라 할수 있다. 스페인 배보다 더 빠르고 더 많은 포를 탑재한 영국 전함은 어느날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 2019.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