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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Apr 16. 2023

캉티용과 기업가

박명호, 기업이론과 기업인 : 역사적 고찰



캉티옹에 의하면 기업가 또는 모험가는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 파는 모든 교환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기업가는 교환행위를 통해 시장을 균형으로 유도한다고 보았다. 기업가가 물건을 살 때는 어느 정도 확실한 상황에서 예상 가능한 가격에 구입하는 반면, 물건을 팔 때는 대단히 불확실한 상황에서 예상할 수 없는 가격에 판매한다. 따라서 기업가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투기적 성향을 지닌 인물, 즉 투기자라고 하였다.


기업가는 수요와 공급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윤기회를 계속 찾아내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만든다. 만일 이윤기회가 남는다면 새로운 기업가들이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진입한다. 만일 손실이 발생하면 기업가들의 퇴출이 일어난다.


한편, 기업가의 소득과 관련하여 캉티옹은 기업가를 고정된 봉급을 받는 사람과 구분하였다. 불확실한 환경하에서 위험에 따르는 보상을 받는 사람이야말로 기업가라고 지적하며, 이런 의미에서 위험을 감수하는 어떤 경제행위를 하는 사람도 기업가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캉티옹의 기업가는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단순히 거래를 중개하는 상인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위험을 방어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인물로 시장을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여 나가는 핵심적 존재이다.



van Praag (1999), Some Classic Views on Entrepreneurship.



Richard Cantillon(1680?–1734)는 우리가 알기에 기업가에게 상당한 관심을 기울인 최초의 학자였다. 그는 바로 '기업가'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그리고 그는 경제시스템 내에 기업가적 기능이 있음을 최초로 인정했다. 1755년 캉티용의 (사후) 출간작 '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énéral(일반 상업의 성격에 관한 에세이)' 이후, 기업가는 사회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기여자로서 경제 이론에 등장했다.


캉티용은 그의 경제 체제에서 세가지 유형의 참여자를 인식하고 있다: (1) 토지 소유자(자본가), (2) 기업가(차익거래자), (3) 단순작업자(임금노동자). 시장에 대한 그의 인식은 '상호적 교환 약정의 자율 규제 네트워크' 중 하나이다. 기업가는 '경제에서 모든 교환과 유통을 책임진다'는 이유로 이 시스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기업가의 계급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가져온다.  


기업가 계급은 순수한 차익거래를 함으로써 그 임무를 완수한다. '특정한 가격에 매수하고 불확실한 가격에 매도'하는 활동에서 발생하는 잠재적 이익이 동기부여 요인이다. 따라서 캉티용은 차익거래가 항상 불확실성을 수반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캉티용의 기업가는 또한 차익거래 이외의 전문적인 활동에 (예를 들어, 농부, 운송업자, 은행가, 또는 시장의 판매자) 종사한다. 다른 유형의 참여자와 비교하여 기업가적 과업(task)의 구별되는 특징은 불확실하고 비계약적으로 배정되는 소득을 산출하는 위험 부담 성격이다. 토지소유자와 단순작업자는 불확실한 소득을 받지 않는데, 전자는 계약으로 고정되는 임대료, 후자는 고정임금이 있기 때문이다.     

기업가의 과업이 기본적으로 차익거래로 구성돼 있는 만큼 경각심을 갖고 앞을 내다봐야 하지만 혁신적일 필요는 없다. 그는 공급량을 기존 수요에 맞춰 조절한다; 그는 수요와 공급을 늘리거나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기업가는 내재된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업가가 반드시 자신의 자본으로 벤처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또 다른 기업가적 직업인 은행가에게 빌리는 대가(이자)를 지불함으로써 (완벽하다고 가정되는) 자금 시장에서 빌릴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또한 각 직업에서 기업가의 수를 결정한다. 와인 상인들이 너무 많으면 잉여가 사라질 때까지 상당수가 도산한다. 이러한 조정 과정은 무작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자 생존' 원칙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최악의 설비를 갖춘 상인들은 파산할 것이다. 반면 기업가가 너무 적으면 기업의 장점에 새로운 기업가가 이끌리게 된다.     


요약하자면, 캉티용은 '기업가'라는 개념에 경제적 의미를 부여한 최초의 인물이다. 기업가는 기능적으로 차익거래자로 묘사된다. 차익거래에 참여하고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기업가 계급은 경제 시스템 내에서 균형 잡힌 기능을 가진다. 기업가 계급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불확실성이다.  



Hebert & Link, A History of Entrepreneurship.



경제 이론에서 기업가의 결정적인 역할은 가장 먼저 리샤르 캉티용(Richard Cantillon, 1680?–1734?)에 의해 인식되었다. 그의 <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énéral>은 프랑스 경제학자들의 소그룹 사이에서 20년 동안 사적으로 유포된 후 사후 1755년에 출판되었다. 비록 몇몇 프랑스 작가들이 그 사적 유포 기간 중 캉티용의 원고를 무료로 빌렸지만, 출판 후 신고전파 경제학의 개척자인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에 의해 19세기에 재발견될 때까지 상대적으로 무시되었다. 오늘날 캉티용의 <Essai>는 초기 경제학 문헌의 고전으로 간주된다. 제본스는 그것을 "정치경제학의 요람"이라고 열성적으로 불렀다.   


캉티용의 삶과 활동에 대한 세부 사항은 다소 빈약하다. 그는 아일랜드 혈통이었고 종종 같은 이름의 친척과 혼동되었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의 상황조차도 신비에 싸여 있다. 그는 성공한 은행가이자 금융가였지만 모든 면에서 논쟁이 그를 괴롭혔다. 파리에서 그는 "미시시피 거품"으로 알려진 존 로(John Law)의 악명 높은 인플레이션 계획을 활용하여 부를 축적했다. 나름대로 상당한 기업가적 기술을 보여주었던 캉티용은 로의 "시스템"에 의해 시작되는 사건의 과정을 예상하고 그것이 제공하는 재정적 기회로부터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1716년에 로는 프랑스의 섭정으로부터 왕실 은행을 설립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그 직후 그는 독점 면허를 확보하여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로 널리 알려진 신대륙 무역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프랑스의 대외 무역을 독점했고 결국 회사 주식의 지분을 부채 증명서로 거래함으로써 프랑스 정부의 부채를 인수하기 시작했다. 증명서와 함께 특정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가 부여되었다. 투자자들에게 거액의 배당을 약속하자 주가가 급등했고 주식 투기의 광풍이 뒤따랐다. 이 시스템은 1720년 주식 가치가 회사 자산의 실제 가치에 비례하지 않게 올랐을 때 무너졌다.


캉티용은 투기 붐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에 미시시피 회사 지분을 청산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자신의 주식 수익을 영국과 네덜란드에 재투자하면서 그는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구입한 영국 투기꾼들에게 자금을 제공하여 영국 투기 열풍을 부추겼다. 로의 계획이 궁극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한 캉티용은 주식 가격이 떨어지기 전에 담보된 주식을 매각하여 그가 만든 대출에 대해 징수한 이자와 함께 투기적 이익을 얻었다. 이 관행은 그의 차용인으로부터 수많은 소송을 일으켰지만 캉티용은 그들의 청구에 대해 성공적으로 변호했다. 이러한 재정적 통찰력은 캉티용을 성공적인 기업가로 각인시켰지만 그의 지적 유산은 그의 재능에 대한 더 큰 증거였다.          


기업가와 시장     

캉티용의 역사적인 <Essai>는 개별 재산권에 기반하고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하는 초기 시장 경제의 개요, 또는 그가 상호 "필요와 필요성"이라고 부른 것을 스케치했다. 이 초기 시장 경제에서 캉티용은 세 계급의 경제 대리인을 인정했다. (1) 재정적으로 독립적인 지주; (2) 이익을 얻기 위해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 시장 교환에 참여하는 기업가, (3) 안정적인 소득에 대한 계약상의 보증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의사결정을 포기하는 피고용인(즉, 고정 임금 계약).     


캉티용은 토지 소유자를 경제의 "유행 선도자"로 묘사한다. 그들의 부와 사회적 지위 덕분에 그들은 개인의 취향과 선호에 맞는 소비 패턴을 확립한다. 캉티용은 지주를 그의 경제적 계급의 최상위에 두었다고 말하지만 그의 작업을 자세히 살펴보면 기업가가 중심 경제 행위자임을 알 수 있다. 캉티용의 <Essai>에는 경제 과정에서 중추적인 인물로서 기업가에 대한 100개 이상의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기업가가 시장 경제에서 모든 생산, 유통 및 교환을 수행한다는 것을 일반 원칙으로 설정했다. 원동력으로서 기업가는 지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지주는 집합적으로 총수요를 결정하지만 그 밖에는 경제 활동의 외곽으로 물러날 뿐이다.     


캉티용의 기업가는 이익을 교환하는 사람이다. 특히 그는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사업적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이 (최종 소비로 가는 상품의 미래 판매 가격의) 불확실성은 다소 조심스럽게 제한된다. 캉티용이 설명하는 것처럼 기업가는 불확실한 가격에 다시 판매하기 위해 특정 가격에 구매하며 그 차이는 이익 또는 손실이다.     


캉티용 시대의 주요 생산자는 농부였다. 캉티용은 "농부"는 "이 기업에서 얻을 이익에 대한 확신 없이 토지 소유자에게 자신의 농장이나 토지에 대해 고정 금액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는 기업가"라고 썼다. 기업가이자 생산자로서 농부는 "어떤 용도가 가장 좋은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토지를 다양한 용도에 할당하는 방법을 결정한다. 그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면서 변덕스러운 날씨와 수요와 싸워야 한다. 캉티용은 "한 해 동안 한 국가에서 인구의 출생 및 사망 수" 또는 가계 지출의 증가 및 감소를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러나 농부의 농산물의 가격은 자연적으로 이러한 요인에 달려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그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농장 사업을 수행한다.”(1931, pp. 47–9). 따라서 우리는 기업가정신과 불확실성 사이에 명시적인 연결 고리를 가진다.     


시장 경제에서 농부는 불확실한 소득에 직면하는 다른 경제 주체에 의해 소비자와 연결된다. 상품은 일반적으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중개자에 의해 유통된다. 이러한 중개자들이 시장에서 불확실성에 직면하는 한 그들 역시 기업가이다. 이 중개자는 주로 도시에서 서비스 시장을 찾는다. 캉티용(1931, p. 49)은 농장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서 소비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도시에서는 기업가가 농장에서 상품을 받고 최종 소비자에게 재판매하기 위해 상점을 차렸다. 농장에서 고객에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상품을 전달하는 운송인과 도매상도 도시의 매일 가격 변동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시간은 불확실성의 시녀이다.     


도시는 거주자이면서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의향이 있는 다른 기업가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각각은 유통 연쇄의 고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도시로 상품을 운반하는 기업가는 일반적으로 도매업자에게 판매하고, 이후 소매점에서 최종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위험의 일부가 운송업체에서 도매업체로, 도매업체에서 소매업체로 이전되며, 이들 각각은 소비자에게 시간과 장소 효용을 제공한다.     


시장이 발전함에 따라 이기적인 기업가들이 모든 곳에서 생겨나고 이윤의 유혹에 넘어가 상호 필요 또는 호혜에 의해 뭉친다. 이러한 기업가들은 소비자들이 궁극적인 사용을 위해 많은 양을 비축하는 불편과 비용을 부담하기보다는 편리할 때 소량을 구입하기 위해 약간의 추가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무된다(Cantillon 1931, pp. 51–3).     


캉티용은 그의 사회적 지위보다 기업가의 경제적 기능을 강조하면서 관습을 깨뜨렸다. 사회적 지위는 캉티용의 기업가정신 개념과 실질적으로 관련이 없다. 기업가의 계급은 모든 사회적 계층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거지와 강도도 기회만 있다면(즉, 경제적 불확실성에 직면하면) 기업가로 식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기업가가 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기업가와 비기업가는 모두 다른 시장 참가자와 상호 무역 협정에 참여하여 "서로에 대해 소비자와 고객이 되고"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그들 자신을 그들의 고객에게 비례적으로 맞추어 나간다. 다른 모든 시장과 마찬가지로 기업가를 위한 시장도 시장 상황에 적응할 것이다. "모자가 너무 많으면“ 캉티용은 썼다, ”모자를 사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 (단골의) 후원을 가장 적게 받는 사람들이 파산해야 한다." 반면에 "그 수가 너무 적다면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새로운 모자 장수들이 상점을 열도록 고무할 것이다 ... 그래서 모든 종류의 기업가들이 한 국가의 위험에 적응하는 것이다"(1931, p. 53).         


불확실성과 위험     

캉티용은 불확실성을 시장의 경제 활동에 내재된 것으로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위험과 불확실성의 본질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기업가의 기능을 불확실성과 함축적으로 위험과 연관시켰을 뿐이며 이러한 방식으로 개념에 경제적 내용을 부여했다.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 1885-1972)의 저술 이후 경제학에서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구별하는 것이 관례였다. 나이트는 일부 형태의 위험은 보험으로 완화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험에 가입하려면 많은 수의 개인이 위험에 노출되거나 동일한 개인의 동일한 위험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위험과 관련된 알려진 확률 분포가 있어야 한다.1 캉티용에게 이러한 구분을 부여할 수는 없지만 그의 분석에서 중심이 되는 불확실성의 개념이 보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분명하다.     


캉티용의 세계에서는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알 수 없다. 보험 회사는 예측 가능한 빈도로 발생하는 것으로 계산된 명명된 위험으로 인한 손실을 인수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판단 오류에 대해서는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캉티용의 기업가들은 계속해서 비즈니스 판단을 내려야 하며, 잘못 추측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영리한 사업가인 캉티용은 위험을 제한하기 위해 발동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그의 기업가정신 이론에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 불확실성에 대한 그의 논의는 알 수 없는 것들의 의미로 던져진다. 우리가 지금 "나이트적 불확실성"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종류의 불확실성은 경쟁적( 적대적) 시장 활동의 본질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캉티용의 경제 비전에서 경쟁과 기업가정신을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문자 그대로 없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결과이다.


자본과 기업가정신     

기업가정신에 대한 경쟁 이론에서 영원한 논쟁점 중 하나는 기업가와 자본가의 역할이 어느 정도 분리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 비즈니스 기업에서 자본은 일반적으로 위험에 처해 있다. 기업가가 자본도 공급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 위험을 감수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기업가정신의 위험 부담 이론은 기업가가 이익과 손실의 게임에 걸린 특정 자본 자산을 소유하도록 요구하는가? 자본가와 기업가가 하나이고 동일하다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각 기능에 대한 수익을 식별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그들이 동일하지 않다면 어떤 의미에서 기업가가 위험을 감수하는가? 잃을 것이 없으면 손실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캉티용은 그의 후계자들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광범위했다. 그의 기업가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금전적 의미에서 자본일 필요는 없다. 그는 비록 그가 개념을 실제로 공식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적 자본의 현대적 개념을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캉티용은 상업(굴뚝 청소, 물 나르는 사람), 예술(화가) 및 과학(의사, 변호사)의 예를 사용하여 "자신을 설립하는 데 자본이 필요하지 않은 스스로 노동하는 기업가"를 언급했다. 그는 심지어 거지와 강도를 기업가로 포함시켰다(Cantillon 1931, p. 53).    


현대 경제학은 무일푼의 기업가라도 자신의 시간과 재능에 대한 기회비용에 직면할 정도로 잠재적인 손실을 입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자신의 수단이 없는 개인을 생각해 보시오. 그가 불확실한 수익률이 예상되는 기회를 예측하고 고정된 계약 이자율로 자본을 차입한다고 가정해 보겠다. 기업의 경영악화로 차용인이 약정한 원금과 이자를 상환할 수 없는 경우 재정적 손실은 전적으로 차용인에게 귀속된다. 그러나 S. M. 칸버(S. M. Kanbur, 1980, p. 493)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기업의 이익과 손실은 그 기업의 기회비용과 관련하여 평가되어야 한다. 장래의 기업가가 대안의 직업으로의 안전한 복귀가 열려 있다면, 기업가가 되기로 한 그의 결정에는 그가 안전한 직업을 선택했을 때보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손실 가능성이 포함된다. 이것은 장래의 기업가가 위험에 직면한다는 의미이다.     


불확실한 기회를 예측하고 행동하는 재력가(the man of means)에게 자본가로서의 위험 부담 역할과 기업가로서의 위험 부담 역할을 어떻게 분리할지가 문제로 남는다. 개념적으로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작동 모델에 대해서는 13세기 베니스의 콜레간차나 고대 그리스의 소시에타스 마리스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들 계약에서 자본가와 기업가의 기능은 분리되었다. 전자는 투자 파트너이고 후자는 여행/관리 파트너이다. 그러한 계약에서 자본의 기회비용은 기업가적 노고의 기회비용과 다를 것이며, 각 위험을 개념화하고 궁극적으로 측정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여러 비용에 비례한다.    


미래의 선구자     

캉티용은 기업가정신의 기원은 개인이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완벽한 예지력의 부족에 있다고 주장했다. 캉티용은 이러한 예측의 부족을 시장 시스템의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그것을 인간 조건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불확실성은 일상생활에 만연한 사실이며 경제적 결정에서 불확실성을 지속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사람들은 기업가이다. 결과적으로 경제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기업가의 인성이 아니라 기업가의 기능이다. 캉티용은 이 기능이 시장 시스템의 핵심에 있으며 이 기능이 없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시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매우 강조했다.     


캉티용의 개념의 또 다른 측면은 주목할 만하다. 시장 경제에서 기업가의 역할에 대한 그의 묘사는 뚜렷한 공급 측면을 강조한다. 그의 기업가는 새로운 생산이나 상품화 기법을 통해 수요를 창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유행 선도 계급(지주)의 지시를 따를 뿐이다. 따라서 기업가는 미리 정해진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 적절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한다. 효과적이려면 그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특정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그는 경계해야 한다. 이론은 기업가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캉티용의 기업가는 엄격한 의미에서 혁신적일 필요는 없다.   


기업가의 노력을 끌어들이는 행동은 생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개자와 소매업자에 대한 위의 구절에서뿐만 아니라 캉티용이 차익 거래자를 기업가로 인정한 것에서도 분명하다. 캉티용(1931, pp. 150–2)은 시골과 파리 사이의 가격 차이로 인해 창출되는 이윤 기회를 주목하면서 운송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한 기업가는 “마을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것이며, 더 높은 가격에 팔기 위해 그것들을 수도[도시]로 운송할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한 차익 거래 행위조차도 기업가 입장에서 약간의 불확실성을 수반한다. 차익 거래자는 제품이 한 곳에서는 한 가격으로, 다른 곳에서는 더 높은 가격으로 판매된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첫 번째에 사서 두 번째에 팔 때 그는 조심해야 한다. 거래는 즉각적이지 않으며, 도중에 겉보기에는 특정 이익이 손실로 변화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캉티용이나 어떤 초기 경제학자에게도 완전한 이윤 이론의 공을 귀속시킬 수는 없지만 그가 기업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기업가적 이윤의 정당성을 (그리고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그는 경제 이론의 역사 초기에 이윤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성을 확립했다.     


우리는 캉티용의 기업가 개념이 경제 분석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우세하지도 않았고 그 자체로 완전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근시안적이었다. 캉티용은 "왕자", 지주 및 특정 노동자들을 불확실성에서 제외했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적 불확실성이 그가 허용한 것보다 더 만연해 있음을 인식한다.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1949, p. 253)가 "유형의 상품이든 화폐이든 어떤 생산 수단의 소유자도 미래의 불확실성과 무관하게 남지는 못한다"라고 주장한 것은 옳았다. 캉티용의 기업가정신에 대한 개념은 확장될 필요가 있었고 훨씬 나중에 나이트와 폰 미제스에 의해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캉티용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중요한 분석 전통을 시작했다. 그는 총소득의 순환적 흐름이라는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업가에게 중추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 결과 대륙 경제학자들은 영국의 경쟁자들(적어도 애덤 스미스(Adam Smith)에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에 이르기까지)보다 기업가의 중요성에 대해 훨씬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개념의 완전한 개화는 빠르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았다.  



리샤르 캉티용(Richard Cantillon)* : 경제학의 원조

- 마크 쏜톤(Mark Thornton)

 

아일랜드 출신 프랑스 은행가 리샤르 캉티용(Richard Cantillon, 1680 -1734)의 경제학과 하나 남아 있는 그의 출판물 《상업 일반의 본성에 대한 논문(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eneral)》에서 중요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통찰들이 많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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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F. Hebert, <리샤르 캉티용은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인가(Was Richard Cantillon an Austrian Economist?)> 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 7, no. 2 (Fall 1985): 269-280; Murray N. Rothbard, ≪애덤 스미스 이전의 경제사상 1 – 경제사상사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관점(Economic Thought Before Adam Smith, vol. I, An Austrian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Cheltenham, U.K.: Edward Elgar, 1995); Jörg Guido Hülsmann, <오스트리아 학파의 원형으로서의 캉티용: 더 많은 증거(Cantillon as a Proto-Austrian: Further Evidence)>, 조사보고서, September 1997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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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의 발전에 캉티용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오스트리아 학파의 일원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카를 멩거는 《경제학원리(The Principles of Economics)》의 출간에 앞서 자신의 서가에 캉티용의 《논문(Essai)》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경제이론의 기원 자체는 캉티용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한계혁명의 공동 창시자들 중 하나이자 일반적으로 캉티용을 다시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는 《논문(Essai)》을 “경제학의 거의 전 영역을 치밀하게 관통하는 체계적이고 연결되어 있는 논저다. … 그것은 따라서 최초의 경제학 전공서적이다.” 라고 했다. 그는 그 저작에다 “정치경제학의 요람”*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의 학생이자 위대한 경제사가인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논문(Essai)》을 “경제학의 영역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책”**이라고 기술했다. 경제사상사에 대한 그의 전공서적에서 로스바드는 캉티용에 대해 “현대 경제학의 창시자”***라고 이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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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lliarn Stanley Jevons, <리샤르 캉티용과 정치경제학의 국적(Richard Cantillon and the Nationality of Political Economy)>, Contemporary Review January 1881), ≪리샤르 캉티용의 상업 일반의 본성에 관한 논문( [과 다른 논문들](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eneral, by Richard Cantillon [and other essays])으로 재출간, Henry Higgs, 편역. (London: Frank Cass, [1931] 1959), p. 342, 강조는 원문대로. 제본스(Jevons)는 계속해서 “리샤르 캉티용은 팜플렛 저자들이 여전히 논쟁을 하고 실수를 저지르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 건전하고 아주 완전한 파악을 하였다”고, 그리고 “특히 제 3부는 거의 다 칭찬 이상이다” 라고 말했다.

** 슘페터(Schumpeter)는 다음과 같이 계속하고 있다: 개별 문제들은 통일된 설명 원리들의 조명을 받아 제시되고 있고, 굵직하게 구상된 포괄적 분석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그 이전 시대의 사고 훈련의 협소성은 초월되었다. 철학의 영향력이 비난을 떠맡아야만 한다는 것들 못지않게 분석적 훈련을 결하고 있는데서 나오는 것들인, 원시적 실수들도 회피되고 있다. Joseph Schumpeter, ≪이론 및 방법론 역사의 시기들: 사회경제학 요강(Epochen der Dogmen-und Methodengeschichte, Grundriz der Sozialökonomik)≫, 1st ed. (Tübingen: J.C.B. Mohr, 1914), vol. 1, pt.1, p.143. - F. A. Hayek, [1931] <리샤르 캉티용(Richard Cantillon (c.1680-1734), Richard Cantillon에 대한 소개>, Essai sur la Nature du Commerce en General, Grete Heinz, trans., F. A. Hayek, ≪경제사(Economic History)≫, vol. 3, The Collected Works of F. A. Hayek, W. W. Bartley, III, and Stephen Kresge, eds. (Chicago: University ofChicago Press, 1991), p. 258-259로 재출간한 것에 인용된 대로.

*** Rothbard, ≪애덤 스미스 이전의 경제사상 1 – 경제사상사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관점(Economic Thought Before Adam Smith, vol. I, An Austrian Perspective on the History of Economic Thought)≫ , chap. 12, pp. 343-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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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티용의 생애에 대한 핵심 일화는 존 로(John Law, 1671-1719 프랑스에서 활동한 영국의 재정가. 루이지애나 회사를 만들어 서인도회사로 발전시킴) 그리고 그의 화폐 계획과 관련된 것이다. 캉티용은 로의 인플레이션주의 계획에 반대했으나, 그는 로의 계획이 어떻게 작동하고 그것의 치명적 결점들이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System)과 남대서양회사 거품(South Sea Bubble)으로 큰 돈을 벌었다. 이것들이 재정적으로 대실패로 판명난 후, 캉티용은 그의 유명한 《논문(Essai)》을 썼다. 그의 시대의 돌대가리 중상주의적 사고를 깨고 우리의 방법론, 이론 그리고 정책에 대한 지식에 개척자적인 기여를 하였다. 《논문(Essai)》을 쓴 직후, 캉티용은 이상한 상황에서 살해되었으며, 그의 《논문(Essai)》은 20년 이상 출간되지 않은 채 있었다.


《논문(Essai)》은 중농주의자들과 고전파 경제학자들 양자의 발전에 모두 영향력이 있다고 여겨졌다. 캉티용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Wealth of Nations)》에서 언급했던 극소수 중의 하나였다. 불행하게도 스미스는 캉티용의 저작을 잘못 전하고 있다. 캉티용과 그의 《논문(Essai)》은 고전파 경제학의 시기 동안 대체로 잊혀졌다. 《논문(Essai)》의 진정한 중요성은 현대 오스트리아 학파의 중요한 선구자들이었던 프랑스 경제학자들 튀르고(A.R.J. Turgot)와 쟝 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에 의해서 조금씩 챙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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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ny Brewer, <캉티용과 토지의 가치이론(Cantillon and the Land Theory of Value)>, History of Political Economy 20, no. 1 (Spring 1988): 1-14; Leonard P. Liggio, <리샤르 캉티용과 프랑스 경제학자들: 세에 대한 프랑스의 뚜렷한 기여들(Richard Cantillon and the French Economists: Distinctive French Contributions to J. B. Say)>, 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 7, no. 2 (Fall 1985): 295-304; Joseph T. Salerno, <프랑스 자유주의 학파에 대한 비평(Comment on the French Liberal School)>, 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 2, no. 3 (Winter 1978): 65-68; and idem, <세의 방법론에 대한 캉티용 《논문(Essai)》의 영향(The Influence of Cantillon's Essai on the Methodology of J.B. Say)>, 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 7, no. 2 (Fall 1985): 305-316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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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혁명 도중에 그가 재발견된 이래, 문헌의 실질적인 실체가 캉티용에 대한 평가를 키워왔고, 그와 《논문(Essai)》을 둘러싼 수많은 수수께끼들도 풀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코틀랜드 철학자이자 세금 징수원인 애덤 스미스가 더 이상 경제학의 아버지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칭호는 이제 아일랜드 출신 기업가이자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인 리샤르 캉티용의 것이다.


<<캉티용과 《논문(Essai)》>>

리샤르 캉티용의 수수께끼는 그의 탄생부터 시작된다. 그의 탄생은 남 아일랜드에서 1680년대 동안이라고 비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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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toin E. Murphy, 《리샤르 캉티용: 기업가이자 경제학자(Richard Cantillon: Entrepreneur and Economis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6), p.10. 이 글은 주로 이 전기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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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튜어트 왕가의 대의를 위해서 싸웠고 크롬웰에 의해서 땅을 빼앗겼던 가톨릭 지주 가족에서 태어났다. 그가 토착 신사(landed gentry) 출신인 점은 《논문(Essai)》에서 경제에서 진정으로 독립적인 개인인 지주가 생산이나 소비 양 면에서 중대한 의사결정 역할을 한다는 곳에서 빛을 발한다.


《논문(Essai)》은 (멩거의 《원리(Principles)》처럼) 경제이론의 규명을 위해 적합한 사상들을 점진적으로 배열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으며, 캉티용 자신의 삶과 많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부는 그의 가족의 유산인 전 자본주의 경제에 느슨하게 근거한 고립된 국가의 실제 경제에 대한 분석이다. 여기서 수도에 사는 왕자는 도시들,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읍들, 그리고 마을들의 지주들을 다스린다. 지주들은 농부들에게서 지대를 거둬들이고, 농부들은 노동을 고용에 자신의 논밭에서 일하게 한다. 캉티용은 그의 조상들이 토지 소유권을 아일랜드인들로부터 빼앗았다는 사실 그리고 이 장원들이 그들에게서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돌아보며, 대 장원들이 무력으로 탈취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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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립된 국가라는 발상이 캉티용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논문(Essai)》에 스며들었을, 두 개의 큰 힘들을 무시하게 하였다. 첫 번째 힘은 외국무역의 경제적인 밀물과 썰물 그리고 민족들 간의 국제수지다. 두 번째 힘은 민족들 간의 상대적인 군사력이다. 캉티용은 《논문(Essai)》 전체에 걸쳐 (왕자의 의무인) 국가 방위라는 공공선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반간섭주의(laissez-faire)로부터의 그의 양보는 이런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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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의 후반부는 캉티용이 경제에서 기업가와 기업가정신이 하는 역할에 관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핵심적인 통찰력들을 발전시킨 최초의 경제학자가 되어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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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를 들어 Rothbard, Economic Thought Before Adam Smith, p. 351; 그리고 Hebert, <리샤르 캉티용은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였는가?(Was Richard Cantillon an Austrian Economist?)> p. 27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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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는 시장 수요의 변화에 의해 가해진 위험들을 감내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영국의 급여담당자 제임스 브리지스(James Brydges)의 보좌관으로서 활동했던 초기 경력의 직접적 반영이다. 거기서 그는 회계 역할과 계약 협상자의 역할을 배웠고 우수성을 발휘했다. 그리고 은행과 국제 금융의 기초를 배웠다. 이 경험으로 인해 캉티용은 정부의 총체적인 비능률과 부패도 알게 되었다. 전쟁 도중에 유럽 여행을 함으로써, 인구는 자원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지주의 결정에 근거하고 있고 그리고 문화적 선택에서의 차이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그의 주관주의 이론에 대한 관심과 통찰에 불이 붙었을 것이다.

《논문(Essai)》의 2부에서 캉티용은 (화폐를 부(富)로 보는) 중상주의의 커다란 실수를 밝히면서 화폐 경제에 대한 그의 개척자적인 오스트리아 학파적 분석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사촌 형의 은행에서 일하기 시작한 파리 은행가로서의 캉티용의 두 번째 경력에 상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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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캉티용의 두 번째 사업은 포도주 상인이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업가, 위험 부담, 그리고 이자와 가격형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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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계승전쟁 이후 수많은 경제적 불안정성이 있었고, 이것이 은행 사업을 특히 위험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사촌은 결국 자신의 은행을 캉티용에게 넘겨주는 서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1716년에 파산을 선언했다. <양국의 무역과 사치품에 대한 고찰(Observations on the Trade and Luxury of Both Nations)>이라는 사라져버린 원고에서 캉티용은 영국과 프랑스의 화려함과 무거운 전쟁부채들이 있는 조건들을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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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rphy, Richard Cantillon, p. 50을 보라. 캉티용은 종종 삶의 풍요로움은 부의 일부였지만, 마치 그가 엄청난 사치품에 반대했던 듯이 썼다. 특히 캉티용은 수입된 사치품목들로 왕과 그의 조정이 화려하게 지내는데 반대했다. 이는 토지의 생산 능력이라는 점에서 지방에서 너무나 큰 희생을 요구하였고 따라서 농부들과 지주들을 해치고 국가를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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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중요한 두 명의 사람들이 이 단계의 캉티용의 생애에 영향력을 끼쳤다. 동인도 회사의 이사이자 우수한 은행가인 데커(Matthew Decker)는 그가 캉티용이 은행업에서 자립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 다른 중요한 영향력은 프랑스로 도망쳐서 은행업을 하는 내내 캉티용의 친구가 된 스튜어트파(Jacobite)의 지도자 볼링브로크(Bolingbroke) 경이다. 그는 캉티용을 몽테스키외(Montesquieu)와 볼테르(Voltaire) 같은 그 당시의 주도적인 많은 사상가들에게 소개시켜주었다. 새로운 금융 체제에 대한 주도적인 반대자로서의 볼링브로크는 화폐정책 및 국가부채와 같은 현안들에 대한 캉티용의 “선천적인 보수주의”를 굳힘으로써 중요한 지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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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bid., pp. 48-49. 머피는 볼링브로크(Bolingbroke)의 사회에 관한 강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가 캉티용의 《논문(Essai)》의 1부 12장에 주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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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Essai)》 제3부에서 캉티용은 외국 무역, 환율, 그리고 은행의 역할이라는 현안들을 강조하였다. 캉티용은 여기서 경제적 이해에 대한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들을 했다. 이 부분은 중상주의 정책들에 대한 비판이자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System)와 남대서양회사 거품(South Sea Bubble) 동안에 있었던 존 로의 금융 혁신들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캉티용의 경력의 세 번째 시기를 반영한 것이다. 이 동안에 그는 로의 체제와 그 불가피한 결과들을 이해함으로써 행운을 거머쥐었다.


1721년부터 1734년 사망할 때까지, 캉티용은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 그는 그의 은행사업과 남대서양회사 거품을 포함한 여러 건의 소송에 휘말렸다. 그는 또한 살인 미수로 기소되기도 했고, 짧은 기간 두 번이나 투옥되었다. 《논문(Essai)》은 이 시기에 저술되었고, 여기에 캉티용이 고리대금업 혐의에 대해 자신을 법적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경제 이론을 개발했다고 의심할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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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bid., p. 247, 《논문(Essai)》의 절들은 그의 법률가들의 법적 방어 증언의 절들과 아주 흡사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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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이론의 기원>>

캉티용은 그 시절의 중대한 사건들에 연루되었고, 몇몇 중요한 중상주의 저자들을 포함한 당대의 많은 위대한 지식인들을 알았다. 그는 중상주의적인 마음과 언어로부터 완전히 탈출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최초의 일관되고 포괄적인 경제 이론 저작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명확하게 과거를 깨고 그 자신의 것을 쳐냈는가를 보면 정말이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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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에크가 관찰했듯이, “이 천재적인 독립적 관찰자는, 행동 와중에 비할 데 없이 유리한 지위를 누리면서, 타고난 이론가의 눈으로 그가 본 것을 조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지금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거의 전 영역을 관통하는데 성공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 성공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F. A. Hayek, [1931] "Richard Cantillon," Micheál. Ó Súilleabháin, trans., Journal of Libertarian Studies 7, no. 2 (Fall 1985) 227을 보라. 아니면, 브류어(Anthony Brewer)가 관찰했듯이, 《논문(Essai)》은 “경제 원리들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다룬 것이었고, 현대 경제학자들이 그것을 천재의 저작으로 인식할 그런 종류의 최초의 것이다.” Brewer, <캉티용과 토지의 가치이론(Cantillon and the Land Theory of Value)>, p. 10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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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티용의 경제학 방법론에 대한 기여들은, 그 당시에는 평가되지 못했고 대체로 잊혀졌지만,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진정으로 특기할만한 것이다. 제본스, 슘페터, 하이에크, 그리고 로스바드 같은 중요한 경제학자들을 감동시킨 것은 오스트리아 학파와 한계 혁명의 특징인 캉티용의 과학적 접근과 논리적 연역적인 이론화였다. 《논문(Essai)》 내내 캉티용은 경제적 현상들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의 탐구들은 인과관계를 수립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캉티용은 그가 《논문(Essai)》에서 30번이나 사용했던 “자연적”이라는 용어와 함께 인과관계를 자주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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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yek, "Richard Cantillon," p. 260. 캉티용은 인구의 증가를 야기하는 자연적 방법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고 그들이 먹고 살 수단을 땅으로 하여금 생산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썼다. Cantillon, Essai, p. 85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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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오스트리아 학파적 분석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자신을 자신의 주제인 실증 경제학에 국한시켰던 자신의 의도인데, 그것은 하이에크가 그의 시대의 저자들에 특별히 두드러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속성이다.(Hayek, "Richard Cantillon," p. 260.) 여러 장들에서 캉티용은 자신의 주석들을 멈추었으며 인접 주제에 관한 가치판단 제시를 사양하였다. 예를 들어 캉티용은 많지만 가난한 주민들과 적지만 부유한 주민들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하는 현안은 그가 다루는 주제 바깥의 문제다라고 쓰고 있다. (Cantillon, Essai, p. 85.) 그는 통화의 품질을 저하시켰던 프랑스 장관의 동기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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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my Higgs, "Richard Cantillon," Economic Journal 1 (1891): 279. 물론 캉티용은 불필요한 가치 판단들을 삼가거나 그 자신이 자신의 임무인 주요 목적들에서 일탈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한계선들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한 가지 경우에, 그는 세금들에 관한 짧은 가치판단들을 한다. 그러나 곧바로 그 주제를 그의 목적에 핵심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끝맺는다. Cantillon, Essai, p. 159를 보라. 《논문(Essai)》을 읽을 때, 캉티용이 수많은 가치를 담고 있는 진술들을 하고 있음을 보지만 이들 중 다수는 《논문(Essai)》의 이론적 전개와 그의 이전의 발견들에 대한 언급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캉티용의 저작을 해석할 때 혼동의 원천일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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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티용은 또한 경제에 관해 이론화하기 위하여 추상(abstraction)의 방법 혹은 모형(imaginary construction)의 방법을 채용하였다. 그는 예컨대 노동생산성을 논할 때 다른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가정을 사용하였다. “더 많은 노동이 거기(토지)에 지출된다면, 다른 조건이 같다면, 그것은 더 많이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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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bid., p. 47. 더 많은 노동이 더 많은 생산으로 귀결된다는 명백한 경우에서 “모든 조건들이 같다면”이라는 문구를 그가 사용했다는 사실은 명확한 의도의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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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현대의 이론가들이 화폐적 교란이나 국제무역과 같은 복잡한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하듯이, 작은 고립국가라는 이론적 도구를 사용하였다. 더욱 중요하게는 그는 생산이 수요에 달려있다는, 이 경우에는 대 장원의 토지 소유자의 수요에 달려있다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핵심적 주장을 연역하기 위해서 이 모형이나 모델을 사용하였다. 더 나아가 영주가 그의 토지에서의 생산을 농부들에게 위탁할 때 그 영주는 기업가를 창출하고, 그리고 경제는 교환, 가격들, 화폐, 그리고 경쟁과 함께 발전한다. 캉티용은 《논문(Essai)》 14장의 말미에서 다음 진술과 함께 이 점을 분명히 했다:


나는 내 주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여기서 그 해에 풍작이었는지 흉작이었는지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시장 가격들에서의 변화, 혹은 외국 군대나 다른 사건들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초과 소비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시장가격들에서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자연적이고 동일한 조건 속에 있는 국가만 생각한다.(p. 65)


기업가의 역할에 대한 경제적 이해는 캉티용의 위대한 기여들 중 하나다. 그는 대사업이라는 모험을 떠맡는다는 고전파적 의미에서 기업가를 말한다. 그러나 캉티용은 또한 고정 수익 혹은 임금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과 농부들(Ibid., pp. 48-49), 독립 수공업자들, 상인들 그리고 공장주들을 포함하여 불확실한 수익들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의 이론적 구별도 하고 있다. 이들 기업가들은 생산하기 위해서 주어진 가격에 투입하고 이후에 불확실한 가격에 판다.(Ibid., p. 51.) 이윤을 추구할 때 기업가는 그가 시장에서 만연한 불확실성에 직면하듯이 반드시 위험을 무릅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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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캉티용은 튀르고의 초석을 놓았고 이윤 이론의 초석을 놓았다. Renee Prendergast, <캉티용과 이윤이론의 출현(Cantillon and the Emergence of the Theory of Profit)>, History of Political Economy 23 (Fall 1991): 429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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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농부는 고정된 지출들을 하지만:

이 생산물들의 가격은 부분적으로는 날씨에 달려 있고 부분적으로는 수요에 달려있다. 만일 곡물이 소비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하다면 그것은 더럽게 쌀 것이고, 만일 희귀하다면 그것은 비싸질 것이다. 그 해에 국가에 있는 사람들의 탄생과 사망 숫자를 예견할 수 있을까? 누가 가족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지출의 증가 혹은 감소를 예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농부가 생산한 것의 가격은 자연적으로는 이처럼 예견될 수 없는 환경들에 달려있고, 결국 그는 불확실성(uncertainty) 속에서 그의 농장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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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tillon, Essai, p. 49. 그가 “자연적으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언급하는 변화들이 가격에서 예견할 수 있는 변화들을 야기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성공적이지 못한 기업가는 가난하게 살거나 파산할 것이다. 반명 성공적인 기업가는 이윤이나 이익을 얻을 것이고 시장에 진입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종류의 위험을 떠맡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 국가 안에서의 위험들에 맞출 것이다.”(Ibid., p. 53.)

기업가는 가격들과 생산을 수요에 맞출 것이다. 잘 조직된 사회들에서는 정부 관료들은 커다란 불평 없이 기본 품목들의 가격들을 고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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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bid., p. 31. 캉티용이 잘 조직된 사회들(well organized societies)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는 화폐 교환과 은행 서비스들이 장기적이고 철두철미하게 수립되어 있는 진보된 시장경제를 언급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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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티용은 현대 오스트리아 학파적 분석의 요소들 대부분을 담고 있는 가격 체제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하고 있다. 가격은 수요와 상대적 희소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수요는 사람들의 “기분들(humors)”과 “기호들(fancies)”에 근거한 주관적 개념이다. 시장가격이 판매자에게 지불되는 가격이라고 이해되는 곳에서는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생산물의 상대적 희소성에 발맞춘 “사람들의 동의”다. 마찬가지로 금속들의 시장 가치도 “풍부함과 희소성에 따라, 수요에 따라 변화한다.”(Ibid., p. 97.)


캉티용은 가격과 시장 가격 사이에, 그리고 가치와 시장 가치 사이에 중요한 구별을 한다. 그것은 그의 경제학의 의미에 관한 혼동의 원천이 되고 있다. 시장 가격과 시장 가치는 수요 공급의 힘에 근거한 시장에서 일어나는 실제 가격이다. 가격과 가치는 시장가격들로부터 분리되어있고 구별되는 개념이다. 그것들은 캉티용의 용어인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와 관련된 것이고, 문제의 특정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된 원료들, 그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서 희생되는 특정 토지와 노동의 기회비용을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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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ülsmann, <오스트리아 학파 원형으로서의 캉티용(Cantillon as a Proto-Austrian)>, p. 3은 캉티용이 명확하게 시장 가격들이 토지와 노동 등의 비용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내재적 가치를 그저 토지와 노동량 측정에만 사용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적음으로써, 그를 방어하고 있다. 캉티용은 그래서 토지와 노동이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이후의 경제학자들의 실수를 피하고 있다. 그의 견해들은 오로지 교환비율과 시장 가격들만이 경제 계산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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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적 가치라는 용어는 혼동의 원천이 되어왔다. 비평가들은 그의 가치 이론을 조롱해왔고, 그를 객관적 가치이론가로 여겼으며, 그를 경제 사상사에서 잘못 자리매김했다. 캉티용은 이 혼동의 근원을 인식했다:

이 《논문(Essai)》에서 나는 항상 내재적 가치라는 용어를 생산에 투입되는 토지와 노동의 양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해왔다. 나는 내가 의미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더 적합한 어떤 용어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이것을 오로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만 언급했다.(Cantillon, Essai, p.l07.)


《논문(Essai)》 을 잘 읽으면 아주 명확한 것은 내재적 가치가 (금괴의 순수성 같은) 재화의 객관적 속성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혹은 몇몇 장기 균형 가치를 언급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특정 재화를 생산하는데 소요된 원료들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하이에크가 관찰했듯이:

캉티용이 가치와 가격 이론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다양한 재화들의 가치 혹은 가격 사이의 “정상적” 관계들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법칙들과 공식들에 대한 탐구를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는 것이고, 그 대신 이 정상적 관계들을 회복시키는데 끊임없이 작용하는 힘들과 기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Hayek, "Richard Cantillon," p. 263.)


대단히 중요한 것은, 캉티용이 많은 다른 언어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용어가 기존에 서구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에 대해 이름짓고 기술했다는 점이다.


캉티용이 비용 개념을 포기된 토지와 노동의 희생이라고 본 것은 중농주의자들이 개진했던 토지의 비용과 가치 이론보다, 혹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개진했던 노동의 비용과 가치 이론보다 훨씬 더 진보된 것이다. 그러나 캉티용은 비용에 대해서 생산에 투입된 토지와 노동의 양에 대한 단순한 측정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이해하였다. 캉티용은 《논문(Essai)》 전체에 걸쳐 그의 비용 개념에 더 큰 심오함을 제공하는 두 개의 중요한 개념들을 강조했다. 첫째, 캉티용은 모든 원료들을 이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각각의 토지는 질이 서로 다르며, 각각의 노동자도 질이 서로 다르다. 따라서 내재적 가치가 비용을 측정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시간과 정보(町步 acre)의 숫자를 단순히 헤아리는 것은 추상적 방식일 경우와 단순 예시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실상 예비적인 토지와 노동의 가치 이론을 1부에서 수립한 후, 2부의 시작 부분에서 실제 경제에서의 특정 재화에 “그들의 객관적인 내재적 가치들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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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ntillon, Essai, p. 115. 그렇지만 그는 특정한 내재적 가치가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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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강조했던 다른 개념은 원료를 다른데 사용하는 대안이었다. 토지는 곡물을 기르는데 사용될 수도 있고 혹은 말에게 먹일 건초를 제공하는데도 사용될 수 있다. 노동은 농장에서 땀흘리는 데 사용될 수도 있고 혹은 수공업에 종사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캉티용은 영주가 더 많은 말들을 소유하는 것을 선택했을 때 그가 포기하는 것은 곡물의 생산(그리고 판매)이라는 점, 그리고 만일 프랑스가 촛대 장식용으로 세공된 유리구슬을 수입하고 싶어 하면 그때 프랑스는 포도원에서 생산되는 포도주 상당량을 포기하고 수출해야 할 것임을 명확히 보았다. 캉티용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 개념을 이해했고, 그의 《논문(Essai)》은 경제적 선택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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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점은 Hebert 교수가 나에게 처음 제안한 것이었다; Hebert, <리샤르 캉티용은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였는가?(Was Richard Cantillon an Austrian Economist?)> p. 272를 보라. Spengler도 또한 이 점에 대해 귀띰을 해주었다. Joseph J. Spengler, <리샤르 캉티용: 최초의 현대인들 II(Richard Cantillon: First of the Moderns II)>,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62, no. 5 (October 1954): 407; 또한 Michael D. Bordo, <리샤르 캉티용의 화폐 경제학의 몇몇 측면들(Some Aspects of the Monetary Economics of Richard Cantillon)>, Journal of Monetary Economics 12, no.2 (August 1983): 235-25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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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 중요한 선구자가 해냈던 기회비용의 발견이야말로 경제 이론의 기원이라는 이정표다.

캉티용은 주관적 인구 이론에 대한 개척자적 기여를 하였다. 그의 전반적 경제 모델의 일부로서 인구 밀도와 분산은 생산 원료들을 소유한 이들의 기호에 의해서 결정된다. 왕자와 지주들은 그들의 소비에 대한 선택으로, 따라서 토지가 얼마나 노동집약적으로 사용될 것인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인구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기술과 자원의 풍부함은 인구밀도의 중요한 결정인자들이지만, 문화와 종교도 인구 결정에 역할을 한다. 캉티용은 인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했다. 그는 인간들이 “생존 수단들을 무제한 갖고 있다면 곡물창고에 있는 쥐처럼” 늘어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인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실질적으로는 줄어들 것이라고 보았다.(Cantillon, Essai, p. 83.)

캉티용은 심지어, 토지가 적은 나라들이 공장제 재화들을 토지가 풍부한 나라들에 식량, 섬유, 그리고 원료들에 대한 대가로 수출할 수 있듯이, 그럼으로써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듯이, 국제 무역도 인구의 수준과 분산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캉티용은 흔히 중상주의자로 잘못 낙인찍혀지고 있다. 그러나 캉티용은 인구 규모라는 주제에서 가치중립적인 경제학자로 남아있다. (주: Brewer, <캉티용과 토지의 가치이론(Cantillon and the Land Theory of Value)>, p. 452; 그리고 Cantillon, Essai, p.85.)

그렇지만 그는 국가방위에 좋다고 여겨지는 더 큰 인구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왕자에게 민족주의적 본성을 가진 기술적 조언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브뤼셀에서 소량의 촛대 장식용 세공 유리구슬을 아주 높은 시장가격에 지불하기 위해서 프랑스 와인 상당량을 수출해야 함을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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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사람이 이 현안에 관심을 가지지 못할 것인가? 캉티용은 그가 부(富)를 《논문(Essai)》 첫 쪽에서 생활 편의물들과 장식물들을 포함한 소비라고 정의하였기에 명확히 사치품 그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생산이다. 생산 없이는 소비를 지속하는 것, 혹은 더 많은 양을 소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캉티용에 따르면 국가의 상대적 거대함은 국가를 개선하고 흉년이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화폐나 물질들 양자로 측정된 저축인 그들의 재고다. 국가로서는 금이야말로 진정한 재고다. 왜냐하면 금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적으로부터도 전쟁 도구들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Cantillon, Essai, pp. 89, 91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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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캉티용의 분석은 맬서스(Malthus)나 스미스(Smith) 같이 그가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경제성장이 더 많은 인구의 불쌍한 사람들이 생존에 연연하는 수준으로 사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기에 인구에 관심을 가졌다. 타라스키오(Tarascio) 교수에 따르면, “스미스와 맬서스는 캉티용의 《논문(Essai)》의 정신을 반영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어지는 이후 저자들의 독자들에게는 그 메시지가 실종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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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ncent J. Tarascio, <캉티용의 인구 규모와 분산에 관한 이론(Cantillon's Theory of Population Size and Distribution), Atlantic Economic Journal 9, no. 2 Ouly 1981): 12-18은 캉티용의 기여가 실종되었다는 점, 그리고 실질 임금들이 신고전파 경제학의 발생 이전에 장기간 명확하게 상승하였기 때문에 신고전파 경제학은 고전파 인구 이론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차렸다는 점에서 민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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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티용이 숙련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이 주어지는 경향이 있을 것임을 알았던 반면(Cantillon, Essai, pt. 1, chaps. 7 그리고 8을 보라.), 스미스와 맬서스는 생존에 연연하는 임금이 산업 노동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사실 캉티용은 생계 임금에 대해서 썼는데, 그것은 생존에 연연하는 임금이란 뜻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재 일자리에서 자신을 유지해나가는데 충분한 임금이란 뜻이었다(Ibid., pt. 1, chap. 9; 특히 Higgs, p. 25를 보라.).


그의 모델에서는 경제성장은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생활수준으로 이어진다.

캉티용이 중요한 기여를 했던 또 다른 영역은 《논문(Essai)》에 많이 스며들고 있는 주제인 공간 경제학이었다. 캉티용은 국가의 경제적 지형도를 설명했다. 그 핵심은 왕자와 정부가 사는 수도였다. 도시들은 커다란 시장들과 인구들을 가진 지역 중심들이다. 이는 마을과 농장들의 생산물들이 판매되는 시장을 가진 읍들로 둘러싸여 있다. 캉티용은 마을 주민들은 좋은 가격을 받고 거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그들이 만들어낸 것을 시장에 가지고 온다고 설명했다. 그는 왜 원료들이 도시 주변에서 더 비싼지, 왜 무거운 제조업이 원료 공급지 주변에 위치하는지, 그리고 왜 상하기 쉬운 것들이 인구 중심 가까이에 위치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송비용이 수행하는 역할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대단했다. 수송비용이 하는 역할은 그의 화폐와 은행업에 대한 저술에서도 중심 현안이다. 왜냐하면 (캉티용 자신처럼) 은행가는 거액의 화폐를 원거리에 전해주는 위험과 수송비용을 줄이기 위한 중개인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캉티용은 일반 경제 전공서적에 공간 경제학의 원리들을 적용했던 최초의 경제학자였다. 그는 “입지 이론과 공간 가격형성 분야에서 기꺼이 수용될만한 첫 번째 원리들이라는 본성 면에서 … 공간 경제학에 대한 본래의 그리고 지속적인 기여들을 하였다.”(Robert F. Hebert, <공간 경제학에 대한 리샤르 캉티용의 초기 기여들(Richard Cantillon's Early Contributions to Spatial Economics), Economica 48, no. 189 (February 1981): 71-77.)


은행업에서의 캉티용의 성공적인 경력 덕에 그것은 그의 화폐 경제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이에크는 이를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보았다(Hayek, Economic History, p. 264.).


캉티용은 교환의 매개물로서의 화폐의 본성이 화폐의 진화를 귀금속으로 향하게 했다는 점, 그리고 왕자들은 가상의 화폐를 도입할 수 없고 화폐의 품질저하에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한 경화(硬貨)주의자였다(Bordo, <몇몇 측면들(Some Aspects)>, p. 236; 그리고 Cantillon, Essai, pp. 111, 113을 보라.).


그의 오스트리아 학파적 분석의 중심은 화폐 연구에 대한 미시경제 과정의 접근법을 선호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화폐수량설이라는 집단적 접근법을 거부한데 있다. 그는 화폐 공급에서의 변화 유형과 어디서 그것이 경제에 유입되는가가 그 효과가 무엇일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금을 많이 발견하면, 그것은 금광 소유자들과 광부들이 수요하는 재화의 가격들을 올릴 것이다. 화폐의 거대한 증가는 어떤 것이든 소비에서의 새로운 전기를 제공해줄 것이고, 그럼으로써 상대가격들, 유통속도, 그리고 소득의 분배를 변화시킬 것이다.


새로운 화폐는, 화폐가 대부자들의 수중에 들어오면, 이자율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캉티용은 이자율이 순수하게 화폐적 현상이라는 로크(Lock)적 중상주의 관점을 거부했다. 미제스처럼, 그는 이자율이 대출할 수 있는 기금에 대한 시장에서의 수요 공급의 힘에 근거한 것임을 알았고, 그리고 만일 새로운 화폐가 공급이 증대되면 이자율이 낮아질 것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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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만일 화폐가 먼저 지출을 하는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온다면, 증가된 소비는 투자 수요를 자극시킬 것이고 이자율을 올릴 것이다. (가격이 오르면 명목 이자율도 마찬가지로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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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티용은 이자율에서의 변화들을 일으키는 힘들을 철저하게 기술했고, 이자율이 정상적이고 중요한 경제의 측면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심지어 더 높은 율로 이윤과 지대를 버는 것과의 비교를 통해 높은 이자율을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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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캉티용이 은행가였다는 점을 기억하라. 그가 남대서양회사 거품(South Sea Bubble) 뒤에 고리대금업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그가 방어한 부분은 높은 이자율에 대한 방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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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율 그리고 이자율을 높게 만드는 것에 대한 그의 기술을 기초로 캉티용은 정부가 고리대금업법으로 이자율을 규제하여야 한다는 관념에 대해서 조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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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래를 거의 몰랐지만 아는 체 하는 사람들이 항상 했었고 또 항상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던 화폐의 이자라는 주제에 대해, 모든 세대에 법률들과 교회법들이 늘어났다는 것보다 더 흥미 있는 것은 없다.” Cantillon, Essai, p.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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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티용은 그가 화폐 공급에서의 변화들을 분석했을 때 오스트리아 학파 이론과 아주 흡사한 경기순환이론을 제시했다. 증가된 화폐 공급은 경기순환을 개시하는 호황 국면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더 많은 화폐가 더 높은 수준의 경제 활동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 국면의 순환에 대한 캉티용의 기술을 근거로 하여 그를 중상주의자로 낙인찍어왔다 (Anthony Brewer, <캉티용과 중상주의(Cantillon and Mercantilism)>, History of Political Economy 20, no.3 (Fall 1988): 447-60.).


그렇지만 조만간 문제들이 발생한다. 기본적 문제는 가격 인플레이션과 국내 산업의 붕괴를 둘러싸고 일어난다. 캉티용의 오스트리아 학파적 교훈은 중상주의 정책이 장기적으로는 실패하고 말 단기적 편의라는 것이었다.

캉티용은 유명한 정화 흐름과 가격 기구(specie-flow price mechanism)의 작용을 서술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것은 오스트리아 학파 경기순환 이론의 중대한 요소인데, 보통은 흄(Hume) 덕분으로 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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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흄(Hume)이 캉티용보다 먼저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캉티용이 흄 이전에 썼다는 점, 그리고 이미 흄이 캉티용을 읽었다는 점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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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는 국내의 화폐공급 변화가 앞에서 기술했던 국내 금 공급에서의 변화와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국제수지의 변화에 의해서도 야기된다고 분석했다. 그는 왕자가 화폐 인플레이션의 부정적 효과들을 상쇄하려고 할 수 있고, 혹은 그것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그렇지만 이론적으로는 역전시키지 않을 수 없는 방법들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캉티용은 조정과정의 미세 관리를 할 능력이 정부에 있다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Cantillon, Essai, pp. 185,323.).


외국 무역, 국제수지, 그리고 은행업이라는 소재를 논의할 때, 캉티용은 제조업에서 숙련된 노동력을 개발하고, 외국무역에 참가하고, 국립 은행을 피하는 나라가 어떻게 번영하게 될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의 논평은 또한 브뤼셀에서 “프랑스에게 짐이 되고 이윤도 내지 못할 것”으로서 기호품을 구매하는 것을 한탄해마지 않을 때, 그리고 외국 무역이 유용하게 규제될 수 있는 사례로 이것을 사용할 때는 중상주의적인 듯이 보인다(Ibid., pp. 231, 233.).


비록 그가 중상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러한 정책을 지지하는 근거는 중상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분석과 세계 경제에 대한 그의 경험적 관찰에 있다는 점이 그럴듯하다. 그는 공장제 재화들이 미숙련 농장 노동자들보다 더 높은 실질 임금을 버는 숙련 노동자들에 의해서 생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높은 가치를 갖는 공장제 재화들을 수출함으로써, 평균 임금율이 더 높아질 것이고, 수송비용의 부담이 더 낮아질 것이고 경제는 화폐를 수입하든지 더 많은 양의 곡식과 원료를 수입하든지 할 수 있다. 캉티용은 화폐가 빨리 지출된다면 가격들이 오를 것이고 화폐의 긍정적 충격은 빠르게 부정적으로 바뀔 것임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그는 국가방위 목적을 위해서, 흉년에 대비하여, 왕자가 외화를 저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마도 그 추가적인 현금은 국내 경제에 투자될 수 있다.


최종적으로 캉티용은 경제에 화폐를 공급하는 것은 좋으나, 좋은 것을 너무 많이 얻을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중상주의의 가장 큰 실수를 내보이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현대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처럼, 캉티용은 영원히 증대되는 화폐공급이라는 중상주의적 통화주의 정책의 목표를 거부했다. 비록 은행 서비스들과 화폐 유통 속도의 증가 등 자연적으로 화폐에 대한 필요를 줄일 몇 가지 요소들이 있지만, 그는 일정액의 화폐로 충분하며, 그 양은 물물교역에서 화폐 교환으로 경제가 전환할 때 그 변화에 필요한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캉티용은 왜 이중 금속주의가 화폐의 부족을 창출할지를 보여주었고, 지폐의 사용과 국립은행에 대해서 경고하였다(Ibid., p. 319.)


그는 또한 남대서양회사(South Sea Company), 영국은행(Bank of England), 그리고 아직까지 존재하는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System)과 같은 공공적 본성 그리고 민간적 본성을 가진 일반 은행들의 문제도 보았다. 그는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중요한 (그리고 무시되어온) 경고의 역할을 한, 존 로(John Law)와 그의 체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발로 그의 《논문(Essai)》을 끝냈다:


장관과 공모한 은행이 대중 주식의 가격을 올리거나 부양하는 것, 조치들이 신중하게 취해지고, 그래서 국가 부채를 상환할 때 이 장관이 기뻐하도록 국가의 이자율을 낮출 수 있다는 점은 그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커다란 부를 일구는 것에 문을 연 이들 개선 조치들은 거의 오로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이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부패하였다. 이 때 만들어지고 발행되는 초과 은행권들이 순환을 뒤집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가계의 지출을 위해서 봉사하지도 못하고 은(銀)으로 변화되지도 않는 주식 매매에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몇몇 공황이나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가 은행권 보유자들로 하여금 은행에서 은을 수요하는 것으로 몰고 간다면, 폭탄은 터질 것이고 이것들이 위험한 짓거리였음이 드러날 것이다(Ibid., p. 323.)


짧은 글로는 리샤르 캉티용과 경제학에 대한 그의 기여들에 대한 온전한 그림을 도저히 제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아주 훌륭한 금기(禁忌)의 이론들을 제시하였다. 그는 정부 부채에 대해 훌륭한 분석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노예제 경제학에 대한 흥미 있고 유용한 전망도 제시하였다. 캉티용은 중상주의자 내지 객관적 (즉 내재적) 가치 이론가로 잘못 알려져 왔지만, 사실 그는 중상주의의 오류들을 혁파했고, 경제이론의 근본 원리인 기회비용 개념도 명확히 이해하였다. 캉티용과 그의 《논문(Essai)》은 경제 이론의 기원이다. 그리고 그 이론은 명확히 훗날의 오스트리아 학파적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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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ert, <리샤르 캉티용은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였는가?(Was Richard Cantillon an Austrian Economist?)>를 보라. 캉티용의 성취들을 환호했던 경제사상사가들은 하이에크와 로스바드와 같은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이었음을, 그리고 슘페터같은 동료 반려자들과 공감자들이었음을 기록해둘 가치가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논문(Essai)》의 복사본이 카를 멩거의 서재에서 발견되었고, 또한 그 독일어판(1931)이 미제스의 서재에도 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캉티용에게서 자신의 영감 다수를 끌어냈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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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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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cinside.com; 경제사상사-오스트리아 학파의 위대한 경제학자 15인_박종운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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