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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Apr 16. 2023

기업가 이론의 초기 역사

Hoselitz (조영필 역)

Bert F. Hoselitz (1951), The Early History of Entrepreneurial Theory, Explorations in Entrepreneurial History, 3(4), 193-220.  




단어에는 제도와 관습의 역사를 반영하는 역사가 있다.  새로운 단어가 언어에 나타나거나 오래된 단어가 새로운 의미를 가질 때 그것은 사회 발전이 새로운 실재에 대한 명칭을 찾기 위해 이 새로운 의미를 필요로 했다는 증거이다.    


      

I. 캉티용 이전 프랑스에서의 “기업가” 개념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기업가"라는 개념이 J. B. 세에 의해 경제 문헌에 도입되었다고 가정했다. 이 견해는 경제학 교리의 역사에 관한 Gide & Rist의 대중적이고 널리 읽히는 책의 짧은 구절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그들은 주로 스미스가 그 개념을 발전시키는 것을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경제학 문헌의 초기 저작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했다. 그들의 저작 7판에서 그들은 기업가의 역할이 이미 캉티용에 의해 강조되었다고 덧붙였다. Gide & Rist의 권위에 따라 문제는 분명히 해결되었고 경제학자들은 다른 문제로 눈을 돌렸다. Henry Higgs는 1897년에 케네가 "기업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언급했지만, 이것은 분명히 용어상 골동품으로 간주되어 적절하게 잊혀졌다. 아무도 캉티용 이전의 경제 문헌에서 개념의 초기 사용이나 발생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Redlich 박사는 이 문제를 다시 공개하고 이 문제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인 데 대해 우리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나는 캉티용 이전에 기업가정신에 대한 경제 이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지만, 기업가 개념의 역사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일부 영어는 대규모 사업수행(undertakings)의 조직과 성과에 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측면을 밝혀준다.  

   

기업가라는 단어의 최초 사용과 의미를 결정하려는 시도의 첫 번째 단계는 프랑스어의 역사적 사전을 검색하는 것이었다. 이 분야의 표준 작업인 E. Littré의 Dictionnaire de la langue française는 기업가라는 단어에 대한 세 가지 정의를 제공한다. 이 용어의 가장 일반적이고 아마도 초기 의미는 "celui qui entreprend quelque chose(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다. 즉, 단순히 능동적인 사람, 일을 해내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의미는 프랑스어의 정상적인 발달 과정에서 중세에 형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 어떤 행위자를 지칭하는 많은 명사들이 해당 동사에서 파생되었다. Entreprendre(어떤 일을 한다는 내포와 함께)는 12세기 초에 사용되었고 15세기에 상응하는 명사가 개발되었다. 어떤 일을 맡는 사람의 의미에서 기업가라는 단어는 중세 후기에 그리 드물지 않았고 François Villon, <La belle dame sans merci(자비없는 아름다운 여인)>의 저자인 Alain Chartier 같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그리고 심지어 14세기초에 "entreprendeur"라는 어형으로도 사용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Lemaire de Belges(ca. 1473 - ca. 1525) 및 16세기의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도 드물지 않게 사용되었는데, 그러나 그때까지는 의미가 다소 변하는 경향이 있다. 16세기의 전형적인 기업가가 참여하는 모험사업은 일반적으로 폭력적이며 호전적인 행동이다. Lemaire de Belges는 Hector와 다른 트로이 전사들을 기업가라고 부르며, 그리고 16세기의 다른 프랑스 작가들은 기업가들을 강인하고 강탈적이며,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로 열중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이제 기업가라는 단어의 이후의 함축을 보여주는 발전에 직면한다. 17세기초까지 기업가는 그의 활동이 확실히 (당시에는 불확실성 감수와 동일한) 위험 감수를 내포하는 사람으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 누구나가 기업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 용어는 제조업자나 상인에게는 적용되지 않고 실제로 대규모 사업을 스스로 담당하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대규모의 가장 흔한 사업은 건물의 건설, 군대를 위한 보급품의 제공 또는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왕실이나 기타 공공 또는 준공공 기관과 부유하거나 숙련된 사람 사이의 계약이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기업가는 서비스 수행 또는 상품 공급을 위해 정부와 계약 관계를 맺은 사람이었다. 그 계약의 평가된 가격은 고정되었고 기업가는 그 거래로 인한 손익의 위험을 감수했다.     


그 단어의 이러한 의미는 17세기와 18세기 초 프랑스의 법률 및 경제 문헌에서 매우 자주 등장했으며 이는 당시의 사전에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Furetière는 기업가를 "celuy qui entreprend. Il se dit premierement des Architectes qui entreprennent les batimens à forfait (사업을 착수하는 사람, 고정된 가격에 건물을 착수하는 1순위 건축가)."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는 다음 예를 추가한다. "L'Entrepreneur de la jonction des mers s'y est enrichi. On le dit aussi des autres marchéz à pris fait. On a traité avec un Entrepreneur pour fournir l'armée de vivres, de munition. (바다를 연결하는 기업가는 풍요로워진다. 다른 사람이 걸어 다니게 만들었다고도 한다(또는 다른 고정가격 시장에 대해서도 말한다). 우리는 군대에 식량과 탄약을 공급하는 기업가와 거래했다.)“ 프랑스 학술원의 사전 초판은 이 단어를 훨씬 더 좁게 정의한다: ”Entrepreneur, qui entreprend un bastiment, pour un certain prix (기업가, 건물을 특정 가격으로 착수하는 자).“ 즉, 기업가는 공공 사업의 계약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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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Dictionnaire de l'Académie Françoise, [초판], (Paris, 1694), Vol.  II, p.  314. 이 정의가 확대되기는 했지만 사전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6판(1835), 7판(1878) 및 8판(1932)에도 경제학에서의 기술적(technical) 의미에 해당하는 기업가의 정의가 포함되지 않는 점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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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전적 정의와 문학적 용법에서부터 법률 및 경제 문헌에서 기업가라는 단어의 출현으로 전환하면, 우리는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이 개념이 주로 정부 계약자의 함축과 함께 사용되었음을 발견한다. 프랑스 법률의 수많은 사례 중에서 몇 가지 사례만 인용하겠다. 16세기 말에 앙리 4세는 프랑스 남서부의 토지 배수를 촉진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네덜란드 엔지니어 Humphrey Bradley를 초대하여 이 작업을 감독하도록 했으며 1599년 4월 8일에 Bradley를 maître de digues(제방의 지도자)로 임명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무엇보다도 토양 소유자와 브래들리 및 그의 동료들과의 사이에서 배수된 토지의 분할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1607년 1월, 습지 배수에 대한 새로운 칙령이 발표되어 1599년의 초기 칙령을 확인했지만 여기서 계약자와 그의 동료는 더 이상 "전술한 브래들리와 그의 동료"로 언급되지 않고 대신에 "전술한 기업가들"로 언급된다. 유사한 방식으로 기업가라는 용어는 도로, 다리, 항구 및 요새를 건설하고 수리하는 계약자에게 적용되었다.        


경제학자들에게 특히 흥미로운 점은 Monchrétien이 기업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Monchrétien은 1562년에서 1567년 사이에 Jean Ribaud와 Dominique de Gourgues가 플로리다에 프랑스 정착촌 건설에 실패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에 산업의 부족과 기업가들의 나쁜 행동으로 인해 일부 전용된 플로리다의 프랑스 기업들의 종말이 있다...”* 이 용어의 출현은 16세기 초 유사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의 의미와 계약자의 후기 의미가 융합되기 때문에 특히 흥미롭다. 플로리다에 식민 정착지를 건설하려 시도한 프랑스 선장들은 스스로는 정복자가 아니었고, 그들은 제독 Coligny에 의해 이 임무를 위임받았고, 진정한 관계와는 별개로 Monchrétien은 그들을 왕의 계약자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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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yne de Montchrétien, Traicté de l'oeconomie politique, (ed. by Th. Funck-Brentano) (Paris, n.d. [1924]), p.  297. 예를 들어 Robert Beverly, 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Virginia(1705년 런던 초판, Louis B. Wright의 편집으로 재인쇄, Chapel Hill, 1947, p. 23.)의 한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인이 수행한 유사한 기업을 "프로젝트"라고 하고 그 지도자를 "기획사업자(projector)"라고 부른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흥미로울 것이다, 여기에서 Walter Raleigh 경은 "이러한 발견과 정착지의 위대한 기획사업자이자 추진자(furtherer)"라고 불린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기획사업자(projector)라는 용어는 불쾌한 느낌을 주었고 사기를 쳤거나 고도로 투기적인 기업가에게 적용되었다. 이것은 초기 식민지화 계획의 위험한 성격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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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공공사업의 실행을 감독하는 기술 및 관리 인력의 변화하는 역할에 대한 조사는 기업가라는 용어의 새로운 의미의 발전에 상당한 빛을 주며 또한 왜 이 개념이 캉티용과 그의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공공 건설 분야뿐만 아니라 농업 또는 제조 분야에서 기업의 위험을 감수한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채택될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세의 전형적인 (슘페터적 의미의) 기업가는 성, 요새, 공공건물, 수도원, 성당 등 위대한 건축 작업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범위적으로 가장 많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광범위한 것은 종교적 목적을 위한 건물이었다. 12세기 말까지 이러한 작업의 계획과 실행을 담당한 사람들은 대개 성직자였다. 그들은 작업의 발명자이자 기획자이었고 그들은 건축가, 건설자, 관리자의 기능을 수행했으며, 게다가 일반적으로 노동자를 고용하고 감독했으며, 건설 프로젝트의 실행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하고 사업을 집행했다. 그러나 그들이 완성된 작업의 실행을 위한 계약을 맺지 않았고 차라리 수중의 자원이 고갈될 때까지 그들의 건축을 진행했기 때문에 그들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13세기부터 건축자로서의 수도승이나 수도원장은 점차 평신도 건축책임자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maîtres de l'oeuvre(작업의 지도자들)는 가장 초기의 계약자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들의 기능이 아주 명확하게 결정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는 프로젝트의 전체 실행을 수행하지만, 때로는 순전히 전문 고문의 자격으로 봉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일부 성직자(또는 성직자 그룹)가 기업가적 기능(즉, 작업의 전반적인 계획 및 감독)을 수행하는 동안, 전문 건축가가 그의 계획과 견적을 제출하여 이 작업에 대한 비용을 지불받았다. 건축가는 종종 다른 도시에 살며 공사 진행 상황을 확인하거나 건축 중에 발생한 특히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사 현장을 주기적으로 방문했다.

     

중세 시대가 쇠퇴하고 세속적 권력이 증가하면서 창의적인 기업가이자 건축가로서의 성직자의 중요성은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고 마침내 거의 사라졌다. 주요 건설 작업은 더 이상 대성당과 수도원이 아니라 요새, 도로, 교량, 운하, 항구, 궁전 및 기타 세속적 공공건물이었다. 초기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공공사업의 계획 및 실행에 사용되는 절차는 점점 더 합리화되었고 기업가적 및 관리적 기능은 더욱 전문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분업이 종종 그리 멀리 추진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Bradley와 같은 사람은 배수 프로젝트에서 발생하는 일상적인 사업도 관리하는 창의적인 기업가였다. 17세기 동안 프랑스 중부와 남부에서 광범위한 운하 시스템을 건설한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Briare 운하의 기업가인 Guillaume Boutheroue와 Languedoc 운하의 첫 건설자인 Riquet를 들 수 있다. 유사한 증거는 영국에서 나온다. 17세기 초에 Lincolnshire, Huntingdonshire 및 인근 카운티에 있는 거대한 울타리 지역의 배수는 종종 작업의 비즈니스 및 기술 측면을 처리하는 "undertakers(사업수행자)" 또는 "adventurers(모험가)"에 의해 수행되었다. Blenheim(1705-1712)의 건축가인 Vanbrugh가 그의 노동자, 석재 및 기타 자재 공급업체, 그리고 부수적으로 그의 후원자인 Marlborough 공작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경험은 Mr. Dobrée에 의해 훌륭하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17세기와 그 이후의 많은 공공 및 준공공 작업에서 기업의 예술적, 공학적 및 상업적 측면을 한 사람이나 동명의 개인에 의해 수행된 수많은 예를 가지고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 분업이 시작되고 건축가 또는 기술자(예술적 또는 기술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와 기업가 또는 계약자(작업의 상업적 측면을 담당하는 사람) 사이에 점진적으로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건축가들은 그들의 서비스가 일반 숙련석공이나 도급계약자보다 더 높은 품질이라고 느꼈다. 이러한 감정은 프랑스에서 건축 아카데미의 형성으로 고조되었으며, 1676년 숙련석공인 기업가들은 "Architecte du Roi(왕의 건축가)"라는 호칭을 채택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그 명칭은 뛰어난 예술가만 입학할 수 있는 왕의 건축 아카데미를 조직하기로 왕이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자격이 부여되었다. 세속적 공공건물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건축물의 기술적 또는 예술적 창작자와 다른 한편으로는 수급계약자 사이의 분업이 점진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수급계약자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기업가가 되었다. 수급계약자는 과업의 완성을 위한 경제적 기능을 실행했다. 즉 과업의 물리적 생산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 노동, 재료, 기계 등을 하나로 모으는 것을 책임졌다. 이 역할에서 수급계약자는 19세기 경제 이론에서 어떤 산출물을 얻기 위해 필요한 비율로 생산 요소를 결합하는 현대 기업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한 그는 자신의 책임으로(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것을 수행한다.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가 계약을 맺은 공권력에 의해 그의 입찰을 맡게 되며 그의 비용이 초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작업을 수행하기로 계약한 가격보다 가능한 한 낮게 유지되도록 감독할 임무가 있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기업가는 캉티용 이전의 경제 저술가들의 조사 대상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급계약자의 이러한 기능은 본질적으로 J. B. 세가 제시한 설명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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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례 중에서 세가 농업 기업가에 대해 말할 때 다음과 같이 말한 매우 명확한 예를 참조하시오. “그는 어떤 제품이든 얻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모으기 위해 몇 가지 조합에 참여해야 했다. 그는 제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 이러한 수단으로 인해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따져봐야 했다. 그는 성공할 수 있는 농업 방법을 스스로 배웠음에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프로세스의 실행을 관리해야 했다." Cours complet d'économie politique pratique, (Paris, 1840), Vol.  I, pp. 97-98. 세의 기업가정신에 대한 일반 이론은 이 논문의 아래 파트 IV를 참조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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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계약자로서 기업가 발전의 마지막 단계는 Vernard F. de Belidor, La science des ingénieurs의 저작에서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이 책은 1729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따라서 Savary 사전 및 캉티용의 Essai와 개념적으로 동시대이다. Belidor의 책은 당대에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Vauban에 의해 특별한 승인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저자 자신이 Ecole des Ponts et Chausées가 1752년에 설립되었을 때, 그 이사가 되었다. 비록 Belidor의 작업의 대부분이 다양한 종류의 공공 건축의 기술적 측면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는 여러 곳에서 기업가의 역할과 공공 건축의 계획 및 실행에 있어서 기업가의 기술자와의 관계에 대해 논의한다. 기업가의 기능에 대한 Belidor의 진술은 단지 실제 관계에 대한 설명으로 의도된 것이지만, 이 주제에 대한 그의 논의는 18세기 초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기업가의 사회적 역할과 동기를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에 기업가정신의 이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Belidor는 공공사업(예: 요새 건설)이 계약되는 절차를 설명한다. 기술 설계는 공개 광고를 통해 알려지며 작업 실행을 위한 경쟁 입찰을 확장하기 위해 기업가들이 모이는 날짜가 고정된다. 계약은 “qui a fait la condition du Roi la meilleure(왕의 조건을 최상으로 만든)” 해당 기업가에게 수여된다. 이 계약은 기업가가 다음 조건을 충족하도록 의무화한다: 기업가는 모든 자재, 임금용 자금, 차량, 발판, 다리, 보드, 도구, 기계, 로프 및 일반적으로 작업 수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한다. 그들은 지정된 시간 내에 엔지니어가 지정한 정확한 사양에 따라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 작업은 가능한 모든 주의를 기울여 수행되어야 하며 관례에 따라 담당 엔지니어로부터 검사 및 인증을 받아야 한다. 계약 가격은 작업 진행에 따라 분할 지급되며 다양한 "진행"은 작업의 기술적 측면을 담당하는 수석 엔지니어가 서명해야 한다. 따라서 기업가는 예상할 수 있는 총 수익을 알고 비용을 최소화하여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따라서 그는 분명히 이익 또는 손실의 위험과 그 이익 또는 손실의 크기를 부담했다.   

  

그 문제의 공식적인 법적 측면을 설명한 후 Belidor는 그 문제에 대한 행동에 대해 엔지니어에게 조언을 제공한다. 그는 기업가가 "en vue du gain(이익을 위한)" 작업에만 관심이 있다는 주장으로 시작하며 따라서 엔지니어는 모든 것이 올바른 순서로 수행되고 모든 "malfaçons ou de la négligence dans le travail(솜씨가 좋지 않거나 업무태만)"을 회피되도록 항상 지켜보아야 한다. 가장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는 절충의 가능성에 대한 긴 목록이 뒤따른다. 동시에 엔지니어는 기업가가 이윤을 남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그는 가능하다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야 하지만 기업가가 "a fait un mauvais marché, ou qu'il lui arrive dans le cours du travail des contre-temps fâcheux et inévitables, ce n'est  point à l'ingénieur à y entrer (나쁜 거래를 했거나 작업 과정에서 불행하고 피할 수 없는 차질이 발생하는 경우 엔지니어는 개입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Belidor는 ingénieur에게 "tons plaintifs qui sont assez ordinnaires à ces Messieurs (이 신사들에게는 다소 평범한 애처로운 음색)"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경고한다.     


결론적으로 Belidor는 전체 작업에 한 명의 계약자를 두는 것이 더 유리한지 또는 여러 부분에 대해 여러 명을 두는 것이 더 유리한지 묻는다. 그는 상호 비난과 결점 찾기가 적기 때문에 단일 기업가를 선호한다. 책임 소재를 파악하기가 더 쉽고, 보다 일관된 일정을 유지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큰 기업가는 항상 하청계약자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업의 다양한 부분이 다른 기업가에 의해 계약된 경우에도 Belidor는 그들 중 한 사람이 궁극적인 명령과 책임을 지는 위치에 놓이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Belidor의 기업가정신 이론이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된 캉티용의 이론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캉티용의 이론에서 기업가는 특정 원가에 사서 불확실한 가격에 파는 사람이다.  Belidor에 따르면 기업가는 특정 가격에 판매하지만 그의 비용은 불확실하다. 각 거래의 이익 또는 손실, 따라서 기업가의 총 소득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순 효과는 두 경우 모두 동일하다.         


 

II.  애덤 스미스 이전의 기업가적 활동을 지칭하는 영어 개념   

  

캉티용 이후의 기업가 이론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17세기와 18세기초에 이해되었던 기업가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일부 영어 단어에 주목하고 싶다. 프랑스어 기업가에 해당하는 가장 일반적인 영어 단어는 "undertaker(사업수행자)", 때로는 "adventurer(모험가)"였다. 두 번째 용어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5세기부터 "Merchant Adventurers (모험상인)"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는 17세기 내내 아일랜드 토지 투기꾼과 농업, 배수 프로젝트 및 이와 유사한 직업에 종사하는 기타 기업가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18세기 동안 이 특별한 의미에서 쓸모없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Johnson 박사의 사전(1755)에서 모험가라는 용어는 위험한 상황을 추구하는 자, 자신을 운수의 손에 맡기는 자로 정의되어 있다. C. R. Prinsep의 세의 Traité 번역에서 그 모험가라는 단어는 짧은 부활을 즐긴 것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는 "기업가라는 단어는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이에 상응하는 단어인 사업수행자(undertaker)는 이미 제한된 서비스(장의사)에 적용되고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관행을 정당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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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Baptiste Say, A Treatise on Political Economy, transl. 참조.  C. R. Prinsep, M. A. (필라델피아, 1827) p. 18의 주석을 참조하시오. 존 스튜어트 밀은 같은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각주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 단어가 이러한 의미에서 영국인의 귀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기업가의 이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정치경제학자들은 큰 이점을 누리고 있다."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ed. by Sir W. J. Ashley, (London, 1909 p.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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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는 더 강인했고 더 자주 그리고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그 역사는 프랑스 단어 기업가와 유사했다. 처음에는(14세기와 15세기에) 주로 단순히 어떤 일을 스스로 맡은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나 곧 그것은 정부가 그에게 부과한 임무를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고 수행하는 사람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Robert Payne은 1590년에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아일랜드에 영국인이 토지를 건설하는 것에 대해 논의하면서 "여왕의 귀족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더 나쁜 부류의 사업수행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아일랜드 임차인으로부터 그러한 이익을 찾아서... 영국인을 그곳에 두지 않아도 신경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영국인 "하인"을 끌어 들이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는 그들을 "여왕의 허가의 의미에 따라 영국인들과 함께 자신의 땅을 경작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찾는" "더 나은 종류의 사업수행자"와 대조한다. Payne은 1586년 법에 의해  75명에서 85명의 영국인 농부, 자유보유권 소유자, 등본소유권자 및 농장노동자를 평균 부동산에 정착시키는 조건으로 Cork 및 Waterford 카운티에서 저렴한 임대료로 부동산을 받은 소위 Munster(아일랜드 남서부 지역) 사업수행자를 언급한다. "사업수행자"라는 이름은 정착민에게 적용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여왕이 명령한 이러한 조건과 기타 조건을 준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는 나중의 기업가(entrepreneur)가 아니라 계약자(contractor)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Payne은 최대 이윤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꾸짖고 자신의 이윤 이해에 관계없이 허가의 조건을 꼼꼼하게 충족하는 사람들을 "좋은" 사업수행자로 칭찬하기 때문이다. 약 10년 후 Fynes Moryson에 의해 동일한 비판이 다시 제기되었는데, 그는 사업수행자들이 1598년 Tyrone 치하의 반란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한다. Moryson의 고려에서 “좋은” 사업수행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정착조건을 목록화한 후, 그는 계속해서 "그것과 같은 성약은 그들에 의해 일부도 수행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건너오지도 않았고, 그러나 그 땅에서 이윤을 취했다."     


그러나 Moryson의 작업은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가 정부 계약자를 지칭하는 데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이다. 그는 영국의 영주들로부터 아일랜드에 있는 영국군에게 식량과 약품을 공급할 때 남용되는 문제를 다루는, 1602년 9월 27일 더블린의 영주 대리에 의해 수령된 편지를 부연설명했다. 식량은 영국 항구에서 보내졌지만 제대로 된 목적지에 도착하는 대신에, 도착하자마자 자유롭게 팔렸고 심지어 반군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의심되었다. 따라서 영국의 영주들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선적이 도착시 확인할 수 있도록 "사업수행자와 계약을 맺는 즉시 귀하에게 초록을 보내겠다"라고 제안했다. 게다가 영국의 영주들은 검사원들에 의해 선적이 그곳에서 확인되었고 "사업수행자는 병사들을 지원하고 계약을 수행하는 이외에 저편으로 어떤 식량도 보내진 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영국 측에서 불법이 발생했다는 믿음을 부인했다. 여기서 다시 사업수행자라는 단어는 정부와의 계약 관계가 강조되는 맥락에서 사용되지만 그 의미는 소수의 정착민 집단뿐만 아니라 공권력과 이러한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도록 명확하게 확장된다.

    

점차 사업수행자라는 용어의 의미가 확장되었다. 나는 파리에서 온 1612년의 편지에서 "재단사이었으나, 거대한 염전의 주요한 사업청부인의 하나가 됨으로써 3-40만 크로네의 가치에 이르도록 부유하게 된 Moisett 또는 Montauban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인“에 대한 언급을 발견했다. 이 용어는 또한 왕으로부터 - 나중에는 의회로부터 - 소택지를 배수하기 위해 허가를 받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기에서 (프랑스 소금세의 징세청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업수행자가 이윤을 내야 한다는 개념이 이미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William Dugdale 경은 1620년 7월 12일자 평의회 영주의 명령을 인용했다. 그 명령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일부 명료한 이윤에 대한 훌륭한 보장이 사업수행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배수에 의해 모든 사람의 땅이 개선되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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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lliam Dugdale, The History of Imbanking and Draining of divers Fens and Marshes, etc. (처음 출판된 1662년, 재인쇄된 런던, 1772년) p.  406. 이 책은 17세기 배수 및 매립 작업에서 "사업수행자"의 작업에 대한 언급이 풍부하다. 또한 1640년 12월 11일 홀란드 동부와 Sibsey 주민들의 청원서를 참조하시오. "이 Anthony Thomas 경은 소택지가 약 10년 손상되게 포위된 척하면서 자신이 그 지역의 침수된 땅의 배수를 담당하는 주 사업수행자로 제시한“ 이래로 그들이 겪은 손해에 대해 그들이 보장받기를 요구한다. Calendar of State Papers, Domestic Series, 1640-41, (London, 1882) Vol.  17, p.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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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적으로 정부와의 계약 또는 준계약 관계에 대한 강조는 사업수행자가 입지를 잃고 사업수행자가 불확실한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위험한 프로젝트에 연루되었다는 상황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업수행자라는 단어는 기획사업자(projector)라는 단어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주로 18세기부터 기획사업자(projector)가 혁신가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수행자기획사업자 간의 일상적인 차이는 전자는 그 성과가 불확실한 사업에 참여하는 정직한 사람으로 생각된 반면, 후자는 대개 모사꾼, 사기꾼 또는 투기꾼으로 생각되었다. 이 구별은 1667년에 처음 등장한 S. Primatt의 다소 흥미로운 작업의 한 구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표현된다. 영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석탄 탄광 개발의 타당성에 대해 쓰면서 저자는 말한다:     


영국의 내지에는 내지 시장에서 이윤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탄갱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여러 곳에서 사업수행자들(Undertakers)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다른 것들만큼 불확실하다... 이것들과 다른 종류의 광산을 배수하는 데 착수하는 많은 (어떤 실제 운영보다도 더 그들의 계획에 있어 매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기획사업자들이 또 있다.      


이 구절은 두 단어의 특별한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며, 그 의미는 결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사업수행자라는 단어의 또 다른 특징은 일반적으로 탄광, 배수 작업 등과 같은 규모가 큰 기업의 기업가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사실 위험을 수반하는 사업의 기업가를 지칭하는 사업수행자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사용된 것은 1630년 9월 13일 Nottingham 시 의회의 문서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문서는  "maister Maior"가 이끄는 Nottingham 시민의 한 집단에게 "시의 숲과 공지에서 탄갱을 파는“ 독점권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자금의 일부 또는 비율을 모험"하려는 사람이 이익에 참여해야 하는 조건을 명시하고 "이 회사[즉, 시의회]는 수시로 이러한 사업수행자를 지원하여” 기업의 수익성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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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5년까지 존슨 박사는 사업수행자는 "프로젝트와 일에 관여하는 사람"으로, 기획사업자는 "계획이나 설계를 수행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두 단어 모두 추가로 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만 방금 인용한 두 정의는 두 개념의 근접성을 보여준다.  Samuel Johnson, op.  cit., Vol.  II, "projector"와 "underta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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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수행자가 대규모 기업가로 생각되었다는 추가적인 증거를 쉽게 제시할 수 있다.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예가 충족됨에 틀림없다. 1701년경 Robert Harley에게 보낸 편지에서 William Penn은 광산 확장으로 인한 영국 목재의 고갈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만약 거기 거대한 사업수행자들이 여기서 그것에 참여한다면, 우리가 영국에 공급하여 영국의 숲이 회복될 시간을 줄 수 있으며, 이 나라를 거래 가능한 경작할 수 있는 목초지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업수행자는 베블렌의 산업의 거물(Captain of Industry)을 연상시키는 용어로 거의 묘사된다. 그는 수익성 있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사막을 꽃피울 수 있는 창의적인 기업가이다. 좀바르트가 자본주의 정신의 효과로 이해한 것의 전형인 사적 이익의 사회적으로 유익한 효과는 이보다 더 명확하고 간결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 편지가 쓰여질 무렵에는 정부 계약자라는 의미에서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의 옛 의미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끔, 특히 공식 문서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1709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의 London Gazette에는 Hague에서의 급보가 포함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사업수행자(undertaker)가 개척지의 무기고에 이전에 공급했던 것만큼의 마초를, 군대의 생계에 필요한 만큼의 많은 빵을, 공공 서비스에 필요한 만큼의 많은 마차를 공급하는 약정이 체결되었다“는 보고이다. 사업수행자(undertaker)가 그들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충분한 자금 또는 필요한 신용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가 현재 심의 중이다. 여기서 정부 계약자로서의 사업수행자(undertaker)에 대한 강조는 매우 명백하지만, 이 의미는 적어도 향후 20년 동안 비공식 언어에서는 완전히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18세기 중반까지 사업수행자(undertaker)는 단순히 큰 사업가였으며 더 자주는 평범한 사업가였다. 이런 의미에서 애덤 스미스는 마치 지나가는 것처럼 "거대한 제조업의 사업수행자(undertaker)"에 대해 쓴다. 그의 사전에 캉티용의 Essai의 상당 부분이 번역되어 포함되어 있는 Postlethwayt는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를 프랑스어 단어 기업가(entrepreneur)의 직역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Postletthwayt와 Smith의 시대까지는 보다 일반적인 그 단어의 의미는 점점 구식이 되어갔고 장례식의 조정자(an arranger of funerals)라는 특별한 의미만 남았다. 영국 경제학에서 사업수행자(undertaker)는 자본가(the capitalist)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19세기말에 이르면 다시 기업가에게 자리를 내준다.        


  

III. 중농주의자의 기업가정신 이론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가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 정치 경제의 무기고에서 사라졌고 그것과 함께 기업가정신에 대한 적절한 이론이 사라졌다면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캉티용의 작업은 출판 후 상당한 인기를 얻었으며 중농주의 학파의 저술가들은 그것에 완전히 친숙했다. 실제로 혁명의 유명한 웅변가의 아버지인 미라보 후작은 이 책을 표절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출판하려 했다는 추측이 있다. 이 에피소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프랑수아 케네가 캉티용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기업가정신에 대한 케네의 견해가 캉티용에서 직접 파생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케네의 초기 경제 저작인 거대한 백과사전에서 현대 경제의 토대가 되는 사회 조직에 대한 그의 견해의 윤곽이 그려져 있고, 농업 생산의 표준과 관련된 측면은 동일한 주제에 대한 캉티용의 논의를 연상시킵니다. 그의 논문 "곡물"에서 케네는 캉티용이 대규모 농장의 이점을 언급하는 구절을 승인하여 인용한다. 같은 맥락에서 케네는 계속해서 대규모 농장의 운영자를 "자신의 지능과 부를 통해 기업을 이끌고 책임을 지는" 기업가로 묘사한다. 이 간결하게 표현된 아이디어가 어떻게 케네의 제자들에 의해 기업가정신에 대한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되었는지는 조금 후에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기업가의 적절한 위치를 보다 정확하게 결정하기 위해 케네의 체계에 대한 다소 완전한 설명으로 전환해야 한다.     


케네의 시스템에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명칭은 농업 자본주의이다. 그것의 두드러진 특징은 다양한 계층이 수행하는 역할이 각 구성원이 수행하는 경제적 기능과 관련이 있고 실제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케네 시스템의 분석가들은 일반적으로 사회를 생산적, 불임의, 소유적 계급으로 나누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이 구분의 실제 근거를 검토하면서 그들은 케네가 무엇보다도 불임의 계급에 대한 평가에서 오류를 범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시스템을 현실과 모순되는 시스템으로 노골적으로 거부하거나 왜 케네와 그의 제자들이 산업 직업에 생산력을 부여하지 않은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려는 시도에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더 유익한 또 다른 과정을 따를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주로 케네의 시스템을 그 시대의 실제 세계와 관련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가 그의 시스템 내에서 캉티용보다 진보한 기업가정신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찾는 데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불임계급을 고려하지 않고 소유계급과 생산계급의 관계에만 관심을 둘 것이다. 이러한 각 계급은 실제로 두 그룹의 사람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주권자(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그의 동료)와 지주를 포함한다. 두 번째는 농부와 농장 노동자를 포함한다. 케네 자신은 첫 번째 계급을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한때 국가의 모든 땅을 "소유"했던 군주의 역사적 역할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어 토지 소유자가 되는 조건에 따라 순생산의 일부에 대한 주권자의 권리를 부여한다. 그의 제자들, 특히 Le Mercier de la Rivière와 보도만이 주권자와 나머지 소유주 사이의 구별을 날카롭게 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농주의자들의 정치 이론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요인의 관점에서 사회 구조를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왕을 가장 큰 지주로 간주할 수 있다. 소유자는 사회의 나머지 부분을 착취할 수 있는 권한 때문도 아니고 (주권자를 제외하게 되면) 정치적 특권 때문도 아니고, 총 생산(produit brut)의 획득을 향한 그들의 기여의 유출량으로서 순생산에 권리를 가진다. 그들의 소득은 그들이 "avances foncières(토지 발전)"*를 만들었다는 것, 즉 그들이 그들의 재산을 생산 과정에 기여했다는 것을 근거로 정당화된다. 이것이 그들이 소득에 대한 소유권을 도출하고 소득이 순생산이라는 근거이다. 따라서 케네 시스템에서 임대료는 토지 소유자의 소득이고, 이는 순전히 그들이 노동과 별개인 유일한 생산적 행위자의 소유자라는 사실의 결과로서이다. 그러나 노동의 순생산은 (농업과 공업에서) o인데,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 생산된 것과 동일한 가치를 (균형 상태에서) 소비하기 때문인 반면 토지의 순생산은 (+)양수일 수 있고, “잘 통제된 왕국”에서는 보통 (+)양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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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vances foncières"라는 실제 용어는 케네가 사용한 것이 아니라 보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cf. 그의 Premiere 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économique, (ed. by A. Dubois, Paris, 1910) p. 12). 케네 자신은 "dépenses foncières"(op. cit., p. 471)에 대해 말하고 "premières avances pour mettre leurs [the proprietors'] terres en état d'être cultivées"(ibid., p. 529)라고 설명한다. 이 두 구절이 1766년 당시 중농주의자들의 "기관지"이었던 Journal de l'Agriculture에 기고된 기사에 나온다는 점과 케네가 경제표를 고안했 avances foncières의 개념이 발전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avances foncières의 개념은 시스템의 논리를 완성하는 동시에 생산적인 서비스의 기여에 기반한 임대 소득의 이유를 제공하는 사후 고려 사항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앞서 인용한 1767년에 처음 등장한 저서에서 보도에 의해 확장된 형태로 다루어진다. 보도는 또한 avances foncières와 avances souveraines을 추가로 구분한다(op. cit., p. 12). 후자는 도로, 운하 및 기타 시설의 개발뿐만 아니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법의 행정 등으로 구성된다. 이 확장된 시스템에서 소득(또는 수입)에 대한 모든 주장은 따라서 어떤 생산적인 서비스의 기여로 정당화된다.  여기서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계산의 신격화는 경제 원리에 관한 논문의 기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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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생산과 순생산의 차이는 농부와 농업 생산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소득을 구성한다.  이제 우리는 사회 소득의 이 부분의 구성 요소를 보다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농부들의 지출은 “avances primitives”와 "avances annuelles"의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자는 대략적으로 농장의 고정자본을 유지·교체하기 위한 지출이고, 후자는 생산과정에서 매년 소모되는 원자재 지출과 농업근로자의 임금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총국민생산은 avances annuelles, Avances primitives 및 produit net(avances foncières)의 합과 같다.

     

케네는 그의 경제표에서 자본 축적이 발생하지 않고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 정적 사회의 그림을 표현했다. 동일한 총생산물이 해마다 생산되고 동일한 몫이 여러 계층에 분배된다. 따라서 avances primitives는 매년 동일하고 확실하며 결과적으로 기업가 역할을 수행하는 소작농의 수입도 확실하고 고정된다. 따라서 케네의 시스템에서는 기업가적 기능에 대한 불확실성의 감수를 고려한 캉티용의 이론이 포기된 것으로 보인다. 기업가 이론은 무색무취하게 나타나고 기업가는 단순히 고정 임대료로 부동산을 임대하고 주어진 가격으로 주어진 요소로 주어진 산출물을 생산하는 소작농이다.     


이 견해는 케네가 기업가라는 용어의 정의나 기업가적 활동에 대한 설명을 어디에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나는 그의 글에서 기업가라는 단어가 언급된 세 곳을 발견했다.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대규모 농장의 운영자는 기업가라는 케네의 발언이다. 이 단어가 두 번째로 사용된 것은 케네가 다른 사람들이 동등한 지출을 하기 때문에 그가 설명하는 큰 수입을 가진 사업가(불임 계급의 구성원)를 지칭하기 위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곡물" 논문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단어는 특별한 정의나 설명이 필요 없는 일반적인 용어로 취급된다. 세 번째는 1760년에 작성된 Soissons의 감독관에게 보낸 편지에 있다. 케네는 여기에서 소규모 농장에 비해 대규모 농장의 이점을 다시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Vous dites encore que les trop gros laboureurs ne peuvent pas satisfaire au travail de leurs grandes enterprises. Le fermier ne doit pas être le travailleur. Un gros fermier est unhabitant notable, un riche enterpreneur qui est continuellement à cheval, pour se porter ponctuellement à toutes les parties de son entreprise (너무 큰 노동자는 대기업의 일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농부는 노동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뚱뚱한 농부는 눈에 띄는 주민이며, 사업의 모든 부분을 제때에 하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타고 다니는 부유한 기업가입니다)."

     

여기서 다시 이 단어는 무색무취한 의미로 사용된다. 기업가는 단순히  정규 노동 과정에 참여하지 않지만 감독하는 후원자이다. 따라서 케네는 기술적인 의미에서 기업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18세기 후반에 일반적으로 획득한 의미로 사용한다. 백과사전은 기업가를 단순히 "il se dit en général de celui qui se charge d'un ouvrages; on dit un entrepreneur de manufactures, un entrepreneur de bâtimens.(일반적으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제조업의 기업가, 건물의 기업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프랑스어의 가장 정교하고 박식한 프랑스어의 역사를 저술한 Ferdinand Brunot는 18세기 후반에 이 용어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기업의 수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케네와 그의 제자들은 기술적인 의미에서 기업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대적 요소를 포함하는 완전한 기업가정신 이론을 정교화했다. 요컨대 앞서 인용한 케네의 구절에 포함되어 있지만 보도가 더 완전하고 체계적으로 진술했다.  케네의 글에 그러한 이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로 경제표가 정적 분석만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이전에 언급한 바 있다. 이 가정이 포기되자마자 기업가적 기능은 완전한 생명력을 갖는다.     


비록 순생산이 잉여로 몇몇 중농주의 비평가들에 의해 간주되었지만, 이 견해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순전히 물리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생산에 필요한 비용에 대한 잉여이지만 화폐 경제의 결합 내에서 중농주의자들은 지대를 생산에 앞서 결정되는 비용이라고 가정했다. 사실 이들은 장기 임대를 옹호해 임대료를 최대한 안정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따라서 실제로 그들은 소작농이 매우 경직된 비용 구조에 직면하게 되는 시스템을 구상했다. 그의 임대료 지불은 상당히 고정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임금도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노동자의 유지 가치에 해당한다). 그러나 수확의 실제 결과는 불확실하다. 소작농이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기타 요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작물의 가격도 불확실하다. 따라서 기업가는 캉티용이 설정한 위치에 있으며 그의 비용은 확실하지만 수입은 불확실하다. 따라서 그의 순이익은 "위험"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보도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명확하게 표현된다: “수석 경작자는 자신의 비용, 자신의 위험, 위험 및 재산을 감수하고 발전을 이룬 사람이다... 마침내 자신의 책임하에(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전체 작업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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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ele, op.  cit., p.  647.에서 Soissons의 감독관에게 보낸 케네의 편지를 참조하시오. Mercier de la Rivière는 또한 농장 임대 시장에서 자유 경쟁이 우세한 경우 균일한 품질의 토지에 대한 균일한 임대료가 설정되고 임대료가 임차 운영자의 비용 요소를 형성할 것임을 보여준다. L'ordre naturel et essentiel des sociétés politiques in E. Daire, ed., Physiocrates, (Paris, 1846) p.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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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이상이다. 농업 기업가는 자신의 위험과 비용으로 생산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최대 이익을 위해 적절한 상품과 서비스를 경제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다시 보도는 매우 명시적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Tel est le but des grandes exploitations productives; premièrement de doubler, tripler, quadrupler, décupler s'il est possible la récolte...; secondement d'épargner le nombre des hommes employés à ce travail, en les réduisant à la moitié, au tiers, au quart, au dixième, s'il est possible." ("이것이 대규모 생산 농장의 목표이다. 먼저 수확량을 두 배, 세 배, 네 배, 열 배로 늘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 사업에 고용된 사람들의 수를 가능한 한 절반, 3분의 1, 4분의 1, 10분의 1로 줄임으로써 절약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석 경작자가 진정으로 혁신적인 기업가여야 한다. 보도는 발명이 가능하게 만드는 전진 단계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는 경작이 예술이며, 경작의 진보적 상태는 기업가가 "수완가"라는 사실에 의존하나다는, 그리고 그들이 "aient acquis les connoissances de leur art, ... soient animés par une grande emulation à mettre leur savoir en usage.(그들의 기술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고, ... 그들은 그들의 지식을 사용하기 위해 엄청난 경쟁에 의해 움직였다."고 하는 사실을 부지런히 지적한다. 그리고 만약 경작자가 가장 진보된 방법에 대해 종종 무지하다면 그들은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중농주의자들의 글은 농업 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제안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농업에 관한 영어 교재의 번역을 제안한다. 그들은 새로운 도구, 새로운 작물, 새로운 절차를 설명하는 핸드북과 가이드를 전국적으로 배포할 것을 제안한다. 그들은 상, 영예, 농업 연구, 모델 농장 및 파일럿 플랜트를 제안한다. 그들은 이 모든 지식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혁신이 채택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유방임과 이기심의 힘에 (그리고 새로운 기술과 기타 혁신을 경제적으로 채택할 수 있는 대 농장의 보급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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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류의 혁신을 농업에 도입하려는 중농주의자들의 많은 제안에 대해서는 Georges Weulersse, Le mouvement physiocratique en France, (Paris, 1910) Vol.  I. pp. 374-378.  중농주의자들이 그들이 설교한 것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예로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가능했던 것보다 빵을 더 싸게 생산할 수 있게 해 준 기술적으로 진보된 제분소와 빵집을 미라보 후작이 설립한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Louis de Lomenie, Les Mirabeau, (Paris, 1889) Vol.  II, pp. 27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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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를 "qui gouverne et fair valoir son entreprise par son intelligence et parses richesses (그의 지능과 부로 그의 사업을 지배하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케네의 간결한 문구는 중농주의 교리의 체계의 전체 관점에서 해석할 경우 풍부한 숨겨진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업가는 불확실성을 견디고, 생산을 조직 및 감독하고, 새로운 방법과 신제품을 도입하고, 새로운 시장을 모색한다. 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그는 다양한 시장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사업에서 최대한의 행동의 자유를 제공하는 정부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정치권력은 없지만 대소작농, 즉 농업 기업가는 경제의 중심에 있다. 다른 모든 것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보도와 중농주의 학파의 보다 정통적인 구성원들은 성공적인 기업가가 부유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가장 생산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합리적으로 운영하려는 그의 영리함, 지식 및 의지를 주로 강조한다. 이 학파 바깥으로 한 발을 내디뎠고 결코 정통적이지 않은 이 학파의 한 구성원인 튀르고는 기업가가 성공하기 위해 가져야 하는 부를 더 강조한다.

    

보도와 튀르고의 차이점을 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결국에 그들은 동일한 지적 흐름에 참여했으며 전체적으로 같은 진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둘 다 케네로부터 경제 이론을 도출하고 그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기업가는 그의 지능과 부를 모두 부여받아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튀르고와 보도의 차이점은 주로 강조점의 하나이지만 그 자체로는 틀림이 없다. 보도의 기업가는 계획하고, 조직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우연히 부자가 된 농장 운영자이다. 튀르고의 기업가는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특정 위험한 작업 또는 계획에 참여하고 생산 활동을 감독하는 부유한 산업가 또는 상인이다.


튀르고가 기업가적 개념에 부여한 이 새로운 강조는 그가 사용하는 용어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일반적으로 기업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기업가 제조업자" 또는 "기업가 자본가"에 대해 말한다. 실제로 이 마지막 표현은 튀르고가 자본가와 기업가를 동의어로 간주하기 때문에 중복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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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ne Robert Jaczues Turgot, Réflexions sur la formation et la distribution des richesses, in Gustave Schelle, ed., Oeuvres de Turgot, (Paris, 1913-23) Vol. II, pp. 572, 569, 570을 참조하시오. 튀르고의 Réflexions에 대한 두 개의 영어 번역본이 존재한다. 하나는 익명의 저자가 1793년에 처음 출판했고 나중에 J. R. McCulloch, A Select Collection of Scarce and Valuable Economical Tracts, (런던, 1859)에 통합되었다; 다른 하나는 W. J. Ashley 경이 쓴 것으로, Reflections on the Formation and the Distribution of Riches(New York, 1898)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두 번역에서 튀르고의 "자본가-기업가"는 "자본가-사업수행자"로 번역되는데, 1793년 익명의 작가와 관련하여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Ashley 교수의 번역에서는 다소 과장된 골동품처럼 보인다.  확실히 1898년까지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는 영국 경제학 언어에서 기업가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     

자본가-기업가에 대한 튀르고의 취급과 관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상황은 그것이 완전히 무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튀르고와 "중농주의 분파"의 더 정통적인 구성원 사이의 다른 차이점을 지적하는 데 실패하지 않은 Gide & Rist에게 특히 놀라운 일이다. 확실히 튀르고는 신중하게 연구할 만큼 충분히 중요하게 여겨졌고,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에서는 그가 애덤 스미스보다 현대 경제학의 진정한 창시자라는 주장이 드물지 않았다. 기업가정신에 관한 그의 이론과 관련하여 그는 분명히 스미스보다 우월하지만 이 사실은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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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와 튀르고 사이의 강조점의 차이는 각각 다른 생산 분야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 같다. 보도는 무엇보다도 농업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18세기 프랑스 농업에 만연했던 기술적 조건 하에서 인간이 아닌 주요 생산 요소는 토지였습니다. 그것에 비해 자본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이었다. 이 생산 부문에서 가장 비싼 요소는 구매할 필요가 없지만 기업가가 임대할 수 있다. 동시에 더 나은 기술과 더 나은 농장 노동 조직을 통해 농업 생산량을 늘리는 문제가 시급했다. 영국인들은 길을 보여주었고 우수한 방법을 실험하고 실제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보도는 농업 기업가의 지식과 정보("지능")의 필요성을 올바르게 강조했다. 대조적으로 튀르고는 주로 경제 산업 부문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농부가 기업가라는 점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업가-제조업자를 주로 고려한다. 그러나 산업 기업가는 자신의 생산 사업에 사용되는 자산의 일부만 임대할 수 있다. 산업에서는 새로운 자본이 지속적으로 창출되어야 했다. 자본축적의 과정은 농업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눈에 띄었다. 여기에서 자본(또는 동일한 것은 축적을 위한 자금)의 공급자로서의 기업가의 기능이 주요 관심을 받는다.     


따라서 기업가정신에 대한 튀르고의 관점은 기업가를 주로 위험 부담자(캉티용 및 어느 정도는 보도) 또는 생산 계획자(세 및 어느 정도는 보도)로 보는 전통적인 프랑스 관점과 그를 주로 자본의 공급자이자 축적자로 본 고전 영국 경제학자들의 관점의 중간에 있다. 이 후자의 견해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 동안 영국 정치 경제에서 우세한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경제 발전의 속도를 설정한 산업의 급속한 성장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1/4분기 말까지 산업 혁명이 실제로 진행되지 않았던 프랑스에서도 Chaptal은 프랑스 혁명과 그의 저서가 등장하기 전까지 30년 동안 석탄 생산량이 3배 이상 증가했고 다른 산업들은 동등한 증가를 보였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국 경제 문헌에서 기업가를 자본가와 동일시하고 후자의 개념이 전자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중반 이후에 시작되어 마샬적 시스템에서 절정에 달한 복잡한 사회에서 경제 기능에 대한 보다 세련된 분석을 통해서만 영국 경제학자들은 기업가를 재발견했다.          



IV. 캉티용과 세 사이의 연결고리     


앞 절의 끝 부분에 있는 분석이 받아들여진다면, 자본가의 기능과 구별되는 기업가적 기능에 대한 세의 주장이 그의 작업의 독특한 표시라는 것이 즉시 분명해진다. 이러한 사고의 경향이 그의 삶의 경험에 의해 그에게 주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는가? 스미스, Lauderdale, 맬서스, 리카도, 제임스 밀, Senior 등 당시 저명한 영국 경제학자 중 어느 누구도 기업가로서 실질적인 경험이 없었다. 그들은 교수나 상속이나 증권 거래소를 통해 자산을 취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는 산업 기업가였다. 1804년부터 1812년까지 그는 방적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먼저 Maubuisson에 설립하고 1806년에 Aulchy-les-Moines(Pas-de-Calais) 마을로 이전했으며, 그의 노동자들의 태만, 무관심, 냉담함과 싸우는 데에는 부단한 노력으로서만 그리고 자연이 부과한 불리한 조건과 Aulchy 및 주변 주민들의 숨겨진 적의는 용감하게 대처함으로써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사람들의 진정한 리더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지도 하에 생산적인 작업을 계획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계획이 실행되는 것을 지속적으로 감독해야 하는 기업가가 수행하는 독특한 역할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본격적인 기업가정신 이론은 Aulchy에서 파리로 돌아온 후 등장한 그의 Traité의 후기 판본과 Cours에서만 세에 의해 정교화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캉티용과 세 사이에 어떤 지적 연결이 설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여전히 열어 둔다. 기업가라는 단어가 상당히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순전히 언어적 다리가 존재했다는 것은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어렵다. 또 다른 연결고리는 중농주의자들의 작품을 통해서일 것이다. 캉티용의 저작이 그들에게 알려진 것으로 나타났으며 세는 물론 케네와 튀르고의 작업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가 그들을 통해 캉티용에 의해 간접적으로조차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유형의 데이터를 제공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미약하다. 세 번째 가능한 연결고리는 세와 Dupont de Nemours의 서신을 통한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경제학의 보다 일반적인 방법론적 질문을 다루며 기업가 이론과 같은 특별한 질문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스미스의 국부론 번역가인 Germain Garnier를 통한 또 다른 가능한 연결 고리가 있다. Garnier는 1796년에 Abrégé élémentaire des principes de l'économie politique라는 제목의 작은 책을 (익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캉티용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어떤 곳에서는 캉티용의 구절을 그대로 반복한다. 세는 Garnier의 작업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Garnier를 주로 중농학파의 뒤늦은 대표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그의 반응은 주로 부정적이었다. 따라서 세가 이 출처에서 기업가정신에 대한 캉티용의 견해를 채택했을 가능성은 없다. 더욱이 우리가 세의 저서에서 Garnier를 참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고대의 경제 상황의 질문과 Garnier의 중농주의적 견해에 대한 세의 반박 및 노동의 가치, 세금, 국부의 계산의 몇몇 사소한 점에 관련되는 것이며, 이 모두는 Garnier가 케네와 그의 학파의 경제 이론을 고수하고 세가 반대한 결과이다.     


캉티용과 세의 기업가정신 이론 사이에 다른 어느 정도 직접적인 지적 연결 고리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물어봐야 한다. 두 이론이 너무 비슷하거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하나가 다른 하나의 후손이라고 의심할 정도인가?  대체로 대답은 부정적임에 틀림없다. 캉티용과 세는 둘 다 기업가정신에 대한 이론을 정교화했지만 기업가라는 단어(우리가 본 것처럼 케네, 튀르고 및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사용됨)와 특정의 명백한 외형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사상사에 대한 연구가 두 이론 사이의 지적인 관계를 확립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할 것이라고 의심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겨우 한 세대 차이가 나고 서로를 개인적으로 거의 알고 지냈던 마르크스와 마샬은 둘 다 자본 이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두 이론이 서로 모순되기는 해도 관련이 있다고 제안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그들의 이론에서 특정 외형은 동일하다.   

  

캉티용의 기업가정신 이론은 매우 간단하다. 기업가의 기능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것이다. 캉티용은 자신의 이론에서 기업가도 자본을 공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배제하고, 명시적으로 “나머지 모두는 사업수행자들(undertakers)이다, 그들이 기업을 수행하기 위해 자본으로 설립했든, 자본 없이 그들 자신의 노동의 사업수행자들이든, 그들은 불확실성의 삶을 사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거지라도 그리고 강도도 이 계급의 사업수행자들이다”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캉티용의 작업에는 기업가가 자신이 고용한 생산 요소의 계획자, 조직자 및 감독자이기도 했다는 표시가 없다. 우리는 중농주의자들과 튀르고가 기업가적 활동이 한 가지 유형 이상의 행동을 포괄하는 것으로 기술되고 다른 저자들이 계획 및 조직화 기능, 혁신 기능 또는 기업가의 자본 공급 기능을 다양하게 강조하는 훨씬 더 정교한 기업가정신 이론 세트를 개발했음을 보았다. 세의 기업가정신 이론은 캉티용의 이론보다 중농주의자의 이론에 훨씬 더 가깝다. 그러나 튀르고나 케네의 작품이 세의 영감의 원천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엄밀히 그들의 이론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반대 때문이다. 사실, 세는 그들의 자유방임주의 옹호와 특히 튀르고의 경제 정책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튀르고를 위대한 정치가로 여기는 한편 그의 정치를 인정한 것은 튀르고의 견해가 전체적으로 확실히 잘못된 해석인 “경제학 분파”에서 도출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세가 자신의 기업가정신 이론을 독립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어떤 지적 선조보다 면 방적업 명장으로서의 그의 경험이 고전 경제 이론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공헌에 보다 책임이 있다고 믿게 만든다.   

  

기업가 정신에 대한 세의 생각을 분석할 때 두 가지 관점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경제적 균형에서 기업가의 기능을 고려하는 기업가정신의 순수 이론과 현대 자본주의 기업가가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대한 경험적 설명이다. 나는 결론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간략하게 진술하고 검토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기업가에 대한 세의 이론은 모든 생산 과정에서 충족되어야 하는 삼자 기능 분할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기능은 과학자의 연구, 기업가의 "적용" 및 노동자의 수행이라는 세 가지 작업으로 나타난다 (Cours, vol. 1, p. 97). 세 가지 작업 모두 한 사람이 수행할 수 있지만 분석적으로 격리할 수 있다. 따라서 기업가는 (중농주의자처럼) 별개의 사회계급의 구성원이 아니라 사회적 기능의 수행자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는 반드시 사회 구조에서 특별한 위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업가의 적용"이란 무엇인가? 기업가는 생산의 주요 대리인이다. 다른 기능들이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창조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기업가는 그것들을 작동시킨다. "필요를 평가하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충족시키는 수단을 평가하며, 목적을 이러한 수단과 비교하는 사람이 기업가이다. 따라서 이 주요 특성은 판단력이 뛰어난 것이다. 그는 과학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이 부족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지식을 현명하게 사용하며, 그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손을 사용할 수 있지만, 판단력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는 가치가 없는 무언가를 엄청난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Cours, vol. I, p. 100). 따라서 기업가의 기능은 중재자의 기능이다. 기업가는 목적으로서 재화의 생산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생산 요소)을 결합하며, 그의 기능은 정확히 이 조합을 수행하는 데 있다. 기업가는 세가 다른 곳에 말한 것처럼  "L'intermediaire entre toutes les classes de produsteurs, et entre ceux-ci et le consommateur. Il administre l'oeuvre de la production; il estle center de plusieurs rapports.(모든 종류의 생산자 사이, 그리고 그들과 소비자 사이의 중개자. 그는 생산 작업을 관리한다. 그것은 여러 보고서의 초점이다.)"라고 말한다 (Traité,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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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중농주의자들은 같은 사람이 소유주, 농부, 농업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상황을 침체와 쇠퇴 또는 야만의 표시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Baudeau, op. cit., pp. 45-46 참조). 반대로 세는 기업가적 기능은 사회 구조와 관계없이 생산이 수행되는 모든 문화에서 발견된다고 규정한다. (Cours, vol. I, pp. 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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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기업가의 적용"은 무작위가 아니다. 마지막 단락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가치를 지닌 물건이나 서비스의 생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따라서 기업가의 결합 활동은 수단과 목적 사이의 적절한 관계, 즉 생산 요소의 소진과 생산 과정에서 산출되는 예상 생산물 사이의 적절한 관계가 관찰될 때만 완전한 의미를 얻는다. 여기에서 기업가의 가치 판단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이 판단은 특정 생산 과정 내에서 발생하는 관계에 엄격히 국한되며, 사회 구조의 변화에 의해 궁극적으로 결정되는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이 과정을 넘어서는 경제적 관계에 대한 고려로 확장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더욱이 세는 역동적인 환경에서 기업가적 기능을 논의하지 않고 제품 가격과 생산 비용의 균등을 특징으로 하는 순전히 정지된 균형 상태에서 논의한다. 특히 그는 기업가적 활동과 자본 축적 또는 투자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결국에 기업가정신에 대한 그의 이론은 균형에서 기업가적 이윤이 필연적으로 0이며 따라서 역동적인 과정에서만 기업가적 기능을 행사할 장소를 찾는 슘페터의 이론과 완전히 대조된다. 즉, 슘페터에게 기업가적 활동의 특징은 혁신의 도입인 반면, 세에게 그것은 주어진 작업을 위한 생산적 요소의 조직 및 조합이다. 동시에 세는 기업가가 경제의 중심 인물이라는 개념을 명시적으로 강조했는데, 중농주의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는 찾았다. 기업가는 보편적인 중재자이다. 그는 지주와 자본가 사이, 과학자와 육체노동자 사이, 다양한 생산적 서비스 공급자들 사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를 중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세의 기업가정신 이론은 후기 기업가정신 이론뿐만 아니라 이전의 캉티용, 보도 및 튀르고의 기업가정신 이론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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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6) 예를 들어 Traité, p.  323. 기업가적 소득에 대한 세의 근본적인 통계적 견해는 아마도 그의 Traité, pp. 370-371의 한 구절에서 가장 잘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 그는 다양한 산업에서 이익의 차이에 대한 원인을 논의한다. "모든 종류의 산업은 기업가에게 같은 양의 기술과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농업 기업가인 농부는 먼 나라와 무역하는 상인만큼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없다... 좋은 농부를 만드는 지식이 좋은 상인을 만드는 지식보다 더 일반적이라면 첫 번째 사람의 노동이 두 번째 사람의 노동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놀랄 필요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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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추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Cours의 한 곳에서 세는 기업가에 대한 설명을 가치가 있는 상품의 생산 요소를 단순히 결합하는 사람에서 자신의 책임하에(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한 개인의 것으로 확장한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한 시장경제에서, 기업가는 구매 또는 고용에 의해 생산적인 서비스를 얻는다. 그가 그것들을 위해 계약한 한도 내에서 그는 그것들에 대한 재산권을 얻거나 그것들을 자유롭게 그리고 그의 의지에 따라 처분할 수 있는 조건 하에서 그것들을 얻는다 (Cours, vol. 1, p. 510). 따라서 그는 자신의 생산적 활동에 그것들을 사용하고 완제품의 소유자가 된다. 따라서 생산은 기업가의 책임 하에 그리고 그가 위험을 안고 이루어진다 (Cours, vol. II, p. 34). "Il n'en est pas moins entrepreneur puisqu'il produit pour son compte, et que son profit dépend de la valeur du produit qui results de ses soins. (그는 자신의 책임 하에(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생산하고 그의 이익은 그의 보살핌에서 나오는 제품의 가치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기업가이다.)(ibid.)"라는 문장은 따라서 세에 의한 기업가정신의 두 번째 관점의 핵심이다.   

   

경제학이 추상적인 공리보다는 경험적 증거에 그것의 일반화를 기초해야 한다는 견해를 세보다 더 확고하고 일관되게 표현한 사람은 없다. 중농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주된 반대는 그들 주변의 실제 세계에 대한 신중한 조사가 아니라 그러한 추상적인 공리에서 그들이 시작한다고 그가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기업가정신에 대한 세의 이중적 특성화는 그의 경험적 방법의 유출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세기 초의 기업가는 세가 기업가에게 귀속시키는 조직 활동에 참여했고, 기업가는 대개 자신의 책임 하에(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쉽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의 기업가정신에 대한 이론 평가와 관련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업가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아니라 세가 자신의 이론을 위해 선택한 그들의 행동 측면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경험 과학, 특히 경험 사회 과학에 결정적인 과학적 방법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기업가의 실제 행동 패턴, 그들의 동기 및 목표는 사람이나 산업 간 뿐만 아니라, 국가 및 지리적 영역 간에도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기업가정신 이론을 개발하는 임무는 가장 중요한 기업가적 행동 측면을 선택하고 그것들이 발견되는 일반성의 정도를 결정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기업가가 수행했거나 수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지각색의 다양한 행위 중에서 우리는 "우연적"이거나 사람, 시간, 지역, 산업 또는 기타 요인의 특별한 상황의 결과인 것 모두를 제거해야 한다. 남겨진 행위는 기업가적 행동의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구성하고 우리는 그러한 행동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발견되는지 나타낼 수 있다. 이 절차는 기업가적 이론을 낳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업가적 활동이 특정 제도적 관계에 의존하는지 여부와 그 정도를 나타낸다. 세는 이러한 분석을 상당히 적절하게 수행했으며 기업가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생산에서의 중재자 또는 조정자로서의 그의 위치이며, 그렇게 정의된 기업가적 기능은 인간이 희소한 수단으로 잠재적으로 무제한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는 모든 상황, 다시 말해 생산적 자원들의 대안적 사용 사이의 선택인 경제활동이 실행되어져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발견된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종류의 기업가적 활동은 야만적인 사회에서도 발견되며, 논리적으로 확장하면 그것은 로빈슨 크루소의 일상 노동의 일부라고 세가 명시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이것이 인정된다면 기업가가 자기 책임으로(자기 이익을 위해) 생산한다는 사실은 기업가정신에 대한 일반 이론의 일부가 아니라 세가 글을 썼던 시대에는 매우 흔했지만, 더 이른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훗날 법인기업의 성장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 특수한 역사적 관계의 관찰이다. 세의 기업가는 -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한편으로는 그와 슘페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칸티용과 중농주의자 및 기타와의 차이점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업가는 생산이 수행되는 모든 곳, 이 생산이 가치 창출을 가져오는 곳,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상품과 서비스가 공짜 상품이 아닌 곳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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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의 기업가 개념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한 세 자신의 견해였다는 것은 - 위험 부담 및 자신의 책임 하에(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따른 생산과 같은 요소는 개념의 필수 요소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것은 - 그의 Epitome des principes fondamentaux de l  économie politique, Traité의 후기 판에 추가된 정의 및 기본 이론적 관계 목록에 의해 검증된다. 이것은 매우 압축된 진술이므로 다음과 같은 핵심 부분을 자유롭게 인용한다: “Ils (les entrepreneurs) concourent a la production en applicant les connaissances acquises, le service des capitaux et celui des agens naturels, a la confection des produits auxquels les hommes attachent une valeur ... Ce qui fait la difficulté de la tâche de l'entrepreneur, c'est de creér des produits qui vaillent autant ou plus que leurs frais de production ... Si les produits valent plus que les frais de production, c'est un surcroît de profit pour l'entrepreneur, surcroit qui lui est ordinairement enlevé par la concurrence. (그들(기업가)은 습득한 지식, 자본과 자연 대리인의 서비스를 인간이 가치를 부여하는 제품의 제조에 적용함으로써 생산에 기여한다... 기업가의 임무는 가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들의 생산 비용만큼 또는 그 이상... 제품이 생산 비용보다 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기업가에게 추가 이익이며 일반적으로 경쟁에 의해 빼앗기는 추가 이익이다." Traité, pp. 579-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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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세가 기업가정신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는 일반적이며 특정 사회적 프레임워크에 독립적이다. 두 번째는 자본가 기업가 이론인데, 튀르고가 표현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개인 소유 기업이 우세한 경쟁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가 이론이다. 이 기업가는 생산의 조직자이자 계획자라는 특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임 하에(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활동을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특정한 위험을 감수할 수도 있고, 다시 말해 그의 수입이 불확실할 수도 있다. 따라서 그의 수입은 두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첫 번째는 특정 종류의 기업가적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힘에 의해 설정되는 가격이다. 따라서 세는 기업가적 활동의 각 계층에 필요한 능력과 지식의 희소성에 의존하는 기업가적 노동의 등급을 규정하는 데 도달한다. 이것은 이미 주56에서 언급하였다. 세는 그의 Cours (Vol. II, pp. 35-38)에서 기업가적 노동의 공급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을 나열한다. 그것들은 (1) 이런 종류의 일이 요구하는 도덕적 자격을 가질 필요성, (2) 기업에 충분한 자본을 부여할 필요성, 그리고 (3)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여부와 어떤 이익을 얻을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필요한 도덕적 자격을 갖추고 자신의 자본을 공급하거나 다른 사람이 충분한 규모로 자본을 제공하도록 유도할 수 있고 관련된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사람만이 기업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관련된 자본 또는 위험의 규모와 사업의 복잡성에 따라 기업가적 노동의 공급은 달라질 것이다. 평범한 한-가족-농장에서는 자본이 거의 없고, 위험도 크지 않으며, 필요한 유일한 "도덕적 자격"은 세가 생각하기에 꽤 자주 발견되는 일반적인 정도의 판단이다. 고액 금융 기관이나 대규모 상업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이 시스템 하에서도 기업가 수입의 주요 원천은 위험에 대한 프리미엄으로서의 이윤이 아니라, 희소한 고도로 숙련된 유형의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임금이다 (Cours, Vol. II, p. 3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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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이러한 통찰력에 도달하자마자 Say는 "un peintre, un statuaire du premier ordre, ... peuvent etre consideres entrepreneurs, puisqu'ils agissent pour leur propre compte (화가, 일류 조각가, ... 그들은 자신의 책임으로(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기업가로 간주될 수 있다)."는 Cantillon의 의견에 동의하게 된다. Cours, Vol.  II, 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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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고려 사항으로만 Say는 기업가적 소득이 혁신의 활용에서 파생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것은 적어도 새 제품의 도입이나 새로운 회사 설립에 대한 세의 논의와 좋은 기업가는 새로운 방법의 적용에 있어, 그의 경쟁자를 따라야 하고 가능하면 경쟁자보다 앞서야 한다는 그의 조언에 내포되어 있다 (Cours, Vol. I, pp. 298-301). 세는 이러한 생각을 따라가다 마침내 기업가에게 필요한 자격을 규정하는 데 도달한다. 그는 다른 것들 중에서 무엇보다도 "모든 종류의 위험을 예측할 수 있는 현명한 용기와 그러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침착한 냉정"을 나열한다 (Ibid., p. 303.). 따라서 기업가는 미지의 새로운 나라에 자신의 기준을 세우는 강인하고 용감한 혁신가임이 밝혀진다.    

 

이러한 고려 사항은 세의 기업가정신 이론의 일부가 아니라 경쟁적 자유 기업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기업가적 활동을 결정하는 사회심리학적 및 제도적 틀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세는 기업가에 대한 규정된 특별 자격에 도달했지만 그의 이론적 체계는 기업가적 활동을 특정 계층의 남성이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이 아니라 경제적 기능으로 간주한다. 경제 이론의 관점에서 기업가정신에 대한 그의 견해는 사업가의 개인적인 서비스가 생산에 기여하는 것을 사업가가 소유하거나 통제하는 비인간적 생산 주체의 서비스와 명확하게 구별하기 때문에 중요한 진보를 구성한다. 그러나 세 자신이 이론적 경제 문제가 관련된 더 넓은 사회 문제와 엄격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엄격한 요구를 항상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지만, 전자에 대한 그의 강조는 그로 하여금 역동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적 기능을 설명하기에는 유난히 불모지인 기업가정신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유도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중농주의자들이 얻은 통찰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것이다. 기업가가 경제적 균형의 수호자가 아니라 균형의 교란자이었다는 것을 슘페터가 보여준 이후에서야 기업가적 이론의 새롭고 유익한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Note:

기업가 어휘의 역사에 관한 내용은 모두 상기 Hoselitz의 연구가 그 출처이다. 결국 원문을 직접 읽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2023.5.7.)



기업가정신은 "entreprendre (무언가를 하는 함축과 함께) 가 12세기초에 사용되었고 15세기 중에 해당 명사가 개발되었기 때문에“ 지난 800년 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뜻했다. 모험가(adverturer) 또는 사업수행자(undertaker)과 관련된 영어 용어 (예: 'Merchant Adventurers')는 15세기부터 줄곧 사용되었다 (Hoselitz 1951, pp. 194, 200). 기업가정신 개념의 최초의 공식적인 이론적 사용은 1730년경 Richard Cantillon의 저작에서 나타난다. - Long (1988), The Meaning of Entrepreneurship



Long (1983)은 용어의 개발과 사용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제공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8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프랑스 동사 entreprendre, 즉 "어떤 일을 하기 위해"로 거슬러 올라간다. 300년 후, 그 용어의 명사 형태가 나타났고, 곧이어 동사와 명사 모두 영어에 들어갔다. 1730년 Richard Cantillon은 위험에 대한 관용을 가진 자영업자를 의미하기 위해 기업가를 사용했는데, 그는 위험이란 자신의 경제적 성공을 위해 제공하는 것에 내재한다고 믿고 있다.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 Jean-Baptiste Say는 성공적인 기업가의 정의를 관리 기술의 소유를 포함하도록 더욱 확장했다. - Mokaya, Namusonge & Sikalieh (2012), The Concept of Entrepreneurship: in pursuit of a Universally Acceptable Definition.



'기업가'라는 용어는 경제학의 선사 시대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바리(Savary)의 상업의 보편 사전(Dictionnaire Universel de Commerce, 1723)에 의해 확증된 바와 같이 18세기에 부정확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프랑스어 기원의 단어로, 기업가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 제조업자, 건축책임자로 정의한다. 기업가라는 단어의 초기 형태는 일찍이 14세기에 나타난다(Hoselitz 1960). 16세기와 17세기 내내 이 용어의 가장 빈번한 사용은 일반적으로 군사 요새나 공공 공사의 정부 계약자를 의미했다.   

  

중세의 전형적인 기업가는 주로 성직자로서 "성과 요새, 공공건물, 수도원 및 대성당과 같은 위대한 건축 작업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Hoselitz 1960, p. 237). 12세기말까지 발명가, 기획자, 건축가, 건축업자, 관리자, 고용주 및 감독자의 기능은 모두 기업가의 개념으로 결합되었지만 위험 부담과 자본 제공은 개념의 일부가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봉건제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예술적, 기술적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과 거대한 과제의 상업적 측면을 수행하는 사람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나타났다.


애덤 스미스 이전의 영국 관습    

18세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프랑스어 용어 "기업가"에 해당하는 세 가지 영어 표현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험가(adventurer)", "기획사업자(projector)" 및 "사업수행자(undertaker)"이다. 첫 번째 용어는 15세기에 일부 위험을 무릅쓰는 상인에게 적용되었고 17세기에는 토지 투기꾼, 농부 및 특정 공공사업 프로젝트를 감독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18세기 동안 모험가라는 용어는 애덤 스미스가 정치경제학의 선구자로 떠오를 즈음에는 평범한 사업가(businessman)와 동의어가 된 보다 일반적 용어인 사업수행자(undertaker)에게 점차 자리를 내주었다. 기획사업자(Projector)라는 용어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다른 두 가지와 동일하지만 사기꾼과 도적의 경멸적인 의미를 더 자주 가지고 있었다. 사업수행자(undertaker)이라는 단어는 더 자주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의미를 취했으며, 그 역사는 프랑스 언어의 발전과 어느 정도 비슷했다.


처음에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용어는 단순히 일을 하거나 어떤 프로젝트를 완료하기 시작하는 사람을 가리켰지만 그 개념은 자신의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고 정부가 부과한 작업을 수행하는 정부 계약자라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이 용어는 나중에 징세청부인 또는 소택지 배수를 위임받은 사람과 같이 왕실이나 의회에서 독점 면허를 보유한 개인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정부와의 연결이 점차 끊어지자 불확실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위험한 프로젝트에 관련된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Hoselitz 1960, pp. 240–2). 알 수 없는 이유로 19세기까지 사업수행자(undertaker)라는 단어는 장례식 조정자(an arranger of funerals)의 특별한 의미를 얻었다. 부분적으로 애덤 스미스가 용어를 사용한 방식 때문에 사업수행자(undertaker)는 결국 영국 저자들 사이에서 "자본가(capitalist)"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

- Hebert &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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