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대마도 정벌 관련 조선왕조실록 자료를 조사해 보았다.
정벌의 목적은 해안가를 노략질하는 왜구의 본거지에 대한 공격이었다.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가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지휘하였다.
군대 규모는 병선 227척에 1만 7285명이며, 65일치의 양식을 실었다.
1419년 7월 11일(음 6/19)에 거제도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출군하였으며, 7월 12일(음 6/20)에 대마도 하현下縣 두지포(豆知浦)(도지土崎; 오사키우라尾崎浦; 다케시무라竹敷村)에 상륙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어 훈내곶(訓乃串)(코후나코시小船越; 오오후나고시大船越)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남섬(상현)과 북섬(하현)이 왕래하는 요충지를 막았다. 그러나 대마도주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고자 7월 18일(음 6/26)에 상현上縣 이로군(尼老郡)(니이仁位)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누가다케糠嶽에서) 적의 매복에 걸려 상륙한 아군(좌군 일부)의 상당한 피해(백수십 명의 전사)가 발생하였다. 그후 대마도주의 화친 제안 및 기상 악화에 대한 염려로 7월 25일(음 7/3)에 거제도로 회군하였다. 전체 정벌 과정에서 아군측 병선의 손실은 없었으나, 전사자는 180명으로 집계되었다.
빠른 회군의 이유로는 1. 원래의 계획이 대마도 초토화가 아니었다. 2. 기상 악화 전에 회군하라는 상왕(태종)의 선지가 있었다. 3. 요동에서 돌아오는 왜구를 중간(조선의 남해안)에서 섬멸하려는 작전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군에서의 작전은 주요 군사계획에는 없었으나, 전공을 더 확보하려다가 적군에 당한 것으로 대마도 정벌의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군후 대마도에 대한 재정벌을 단행할 예정이었으므로 회군할 때는 단순히 당하고 철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정벌은 전체적으로 왜구를 근절시키는데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하였고, 대마도주 입장에서는 조선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안겨 주었으므로 소기의 성과를 충분히 달성한 작전이었다. 정벌 이후 대마도는 명목상 경상도에 편입되어 관리되기에 이른다.
원정군 사령관 이종무는 정벌 후 바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제수되었고 그 6년후 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상륙시 패전에 책임이 있는 박실은 도총제(都摠制)로 졸하였으며,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이로군의 전투에서 조선군을 구해낸 이순몽은 영중추원사로 졸하였으며,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이상과 같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조선 정부에서는 대마도 정벌에 참여한 장수들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였다.
1419-6-7 음력5-14
...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삼아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ㆍ이숙묘(李叔畝)(朴成陽으로 교체)ㆍ황상(黃象)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李蕆으로 교체)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았다... 6월 8일에 각 도의 병선이 모두 견내량(見乃梁)에 모여 대기하기로 약속하였다.
1419-7-9 음력6-17
병선(兵船)은 경기에서 10척, 충청도에서 32척, 전라도에서 59척, 경상도에서 126척으로 총 227척이었다. 서울에서부터 정벌에 나간 장수들 이하 관군 및 종인(從人)은 모두 669명이고, 갑사(甲士), 별패(別牌), 시위(侍衛), 영(營)이나 진(鎭)에 소속되었거나 자진해서 응모한 굳세고 용감한 잡색군(雜色軍), 원래의 기선군(騎船軍)은 모두 1만 6616명으로 총 1만 7285명이며, 65일 치 양식을 가지고 갔다.
1419-7-11 음력6-19
거제도(巨濟島) 남쪽 방면의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배를 출발시켜 다시 대마도(對馬島)로 향하였다.
1419-7-12 음력6-20
... 두지포(豆知浦)에 정박하니, 적들은 모두 넋이 빠져 달아나고 50여 인만이 막아서 싸우다가 궤멸하여 양식과 재산을 다 버리고 험준한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 대적하지 않았다.
우리 군대는 길을 나누어서 적을 수색하여 잡았는데, 크고 작은 적선(賊船) 129척을 빼앗아 그중에 쓸 만한 배 20척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다 불태웠으며, 또 적들의 가옥 1939호를 불태웠다. 그동안 114구(口)를 참수하고, 21구를 사로잡았으며 농지에 있는 화곡(禾穀)을 베어 버렸다. 포로로 잡힌 중국 남녀 131명을 구해 냈는데, 장수(將帥)들이 구해 낸 한인(漢人)에게 물어보고서, 섬 안에 기근이 심하고 또 매우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아무리 부자라도 불과 양식 한두 말〔斗〕만 가지고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포위하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훈내곶(訓乃串)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적들이 왕래하는 요충지를 막아서 오래 머무를 뜻을 보였다.
1419-7-21 음력6-29
이종무(李從茂) 등이 두지포(豆知浦)에 배를 정박해 두고 날마다 편장(褊將)을 시켜 육지에 내려보내 수색해서 왜적을 잡게 하여, 다시 68호(戶)를 불태우고 배 15척을 불살랐으며 왜적의 머리 9급(級)을 참수하고 한인(漢人) 남녀 15명과 우리나라 사람 8명을 구해 냈다. 적은 밤낮으로 우리 군대를 막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기해일(26일)에 이종무가 진군하여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삼군에게 길을 나누어 육지에 내리게 해서 일전을 벌이려고 좌군과 우군을 독려하여 먼저 내리게 하였다.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이 적과 서로 만났는데, 적은 험한 지역을 점거하여 복병을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박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싸우려 하니 복병이 일어나 앞으로 돌진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편장 박홍신(朴弘信), 박무양(朴茂陽), 김해(金該), 김희(金熹) 등이 전사하였다. 박실이 군병을 수습해 도로 배에 오르려는데, 적이 이를 추격하여 전사하거나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우리 군사가 백수십 인이 되었다. 우군 절제사 이순몽(李順蒙)과 병마사 김효성(金孝誠) 등도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으니 적이 마침내 물러났다. 중군(中軍)은 결국 육지에 내리지 않았다.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무를까 걱정하여 글을 올려서 군사를 물리고 화친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7월 중에는 항상 바람의 재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였다.
1419-7-25 음력7-3
이종무(李從茂) 등이 주사(舟師)를 이끌고 거제도(巨濟島)로 돌아와 정박하였다.
1419-7-28 음력7-6
밤에 이종무(李從茂)가 보낸 진무(鎭撫) 송유인(宋宥仁)이 와서 아뢰기를,
“군대가 거제(巨濟)로 돌아왔고 침몰된 전함(戰艦)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즉시 불러서 만나 상황을 친히 물어보고 사복시의 말 1필을 내려 주었고, 주상도 옷 1벌〔襲〕을 내려 주었다.
1419-7-29 음력7-7
정역(鄭易)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권홍(權弘)을 영가군(永嘉君)으로, 이종무(李從茂)를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로, 이순몽(李順蒙)을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박성양(朴成陽)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삼고, 대마도(對馬島) 정벌군의 여러 절제사는 모두 그 좌목(座目)을 올렸다. 전사한 병마부사(兵馬副使) 이상에게는 쌀과 콩을 각 8섬씩, 군관에게는 각 5섬씩, 군정(軍丁)에게는 각 3섬씩 내려 주었다.
상왕이 동지총제 이춘생(李春生)을 시켜 선온(宣醞)을 받들고 대마도 정벌군의 군중에 가서 장수들을 위로하게 하고, 유정현(柳廷顯)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중국으로부터 돌아오는 적선 30여 척이 이달 3일에 황해도의 소청도(小靑島)에 도착하였고, 4일에는 안흥량(安興梁)에 와서 우리 배 9척을 약탈하고 다시 대마도로 향하였다. 우박(禹博)과 권만(權蔓)을 중군 절제사(中軍節制使)로, 박실(朴實)과 박초(朴礎)를 좌군 절제사로, 이순몽과 이천(李蕆)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각각 병선 20척을 인솔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가 통할하여 거느리고 다시 대마도에 가되, 육지에 내려 싸우지 말고 군사를 대기시켜 바다에 뜬 채로 변고에 대비하라. 또 박성양(朴成陽)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 절제사로, 황상(黃象)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각각 병선 25척을 거느리고 등산(登山)이나 굴두(窟頭) 등의 요충지에 분산하여 정박해 놓고, 적이 돌아오는 길목에서 맞아 추격하고 협공해서 기어이 대마도까지 가라.”
하고, 이어 이종무 이하 장수 10인에게 갑옷과 옷 1벌〔襲〕을 내려 주었다.
1419-8-1 음력7-10
유정현(柳廷顯)이 다시 아뢰었다.
“대마도(對馬島)에서 전사한 사람이 180인입니다.”
김일환 (2012), 세종대 대마도정벌의 군사적 전개과정. 초록.
... 이 전쟁은 세종 원년(1419) 대마도 왜인들이 식량을 약탈할 목적으로 중국의 요동지역을 공격하러 가는 가운데 충청도 비인의 도두음곶을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습적인 왜구의 침탈로 인한 엄청난 인명피해에 놀란 조선정부는 군사적 보복을 위해 대마도 정벌을 결정하였다. 이 전쟁은 두 가지로 작전계획을 짰는데, 첫째는 왜구의 주력부대가 중국으로 떠난 상황에서 그들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급습하여 이들의 가족을 포로로 잡는다는 것과, 둘째는 왜구들의 귀환을 기다려 해상에서 요격한 후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대마도 정벌은 시간적으로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이종무를 최고지휘관으로 한 1만7천여명의 조선군이 대마도의 아소만으로 진입하여 요충지인 두지포에 상륙하자 놀란 대마도주와 왜인들은 산속으로 도망을 하였고 원정군은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 사이 원정군은 대마도의 육상통로의 요충지인 훈내곶을 장악한 후 목책을 치고 대마도를 양분한 후, 수색을 통해 왜인의 잔당을 토벌하였다. 그 가운데 上縣지역의 니로군에 왜인들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이들을 토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하여 매복하고 있던 왜인들의 기습공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두지포로 철수하였다. 두지포에 돌아온 이종무 원정군은 7월 3일 결국 귀환을 결정한다.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귀환한 것은 요동으로 북상한 왜구 주력부대가 귀환할 시기가 되어 이들을 조선 연안에서 요격해야할 2차 작전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東征을 준비 중에 극적인 상황전환이 일어난다. 왜구의 요동 侵寇에 대한 정보를 전해 받은 중국정부가 복병을 이용해 금주 망해과에서 왜구를 궤멸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보를 접한 조선정부는 2차 동정을 중단하고 외교적 압박으로 대마도주를 굴복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조선과 중국 명나라의 共助에 의해 대마도 왜구를 궤멸시키고 대마도를 조선에 복속시키는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토벌전쟁의 결과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의 요동, 산둥 반도에 대한 왜구출몰이 종식되었다. 이 전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간에 입장을 달리 하지만, 이후 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 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조선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마도가 조선의 요구에 순응해 옴에 따라 각종 통교제한 정책의 실시가 가능해졌고 조선이 외교적 주도권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3포가 왜인들의 교역항구로 정립되었고 왜관을 설치하고 흥리선이 도박하여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부산일보, 1999.1.15., '잃어버린 우리땅' <대마도1>섬이름, 최성규.
대마도(일본명 쓰시마)는 부산에서 남남동 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동서 폭 18km, 남북 길이 82km의 광대한 섬이다. 지금은 공해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지만 옛날에는 우리나라에서 지척으로 보이던, 항해술에 능했던 경상도 사람들의 표현을 빌면 "돛을 달면 한 담배참 쯤으로 당도하는 섬"이었다. 일본 역사서에 "갈대 무성한 들판"(풍위원)이라고 기록돼 있는 이 섬은 우리 선조들이 벼농사와 토기, 철기 등의 선진문화를 갖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대마도의 최초의 지명은 그래서 "나룻섬"으로 통칭됐다. 후일 한자를 빌어 진도, 산이 많은 나룻 섬이라는 의미로 진도, 바다 건너편에 있는 섬이라고 해서 대주로 기록하기도 했다. 모두 일본 말로는 쓰시마라고 읽힌다.
대는 건너편, 혹은 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부산이나 김해 등 남해안에서 바라보면 건너편에 해당하며, 대마도가 두개 섬으로 이뤄졌음을 뜻하는 말이다. 또 하도의 시라다케(원이름은 신라산, 표고 519m)와 상도의 미다케(표고 490m)는 흡사 두 마리의 말이 머리를 들고 누워있는 형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이같은 특징을 두루 함축시켜 대마도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실로 절묘한 이름짓기라 할 만하다. 바로 이 이름에 이 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일본 본주에서는 대마도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건너편일 수 없고, 두 섬으로 보이지도 않으며, 두 마리 말의 형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의 위지동이전에는 "왜(일본)에는 소와 말이 없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말도 없고 한자도 몰랐던 고대 일본에서 섬 이름에 마자를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 지은 섬 이름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쓰시마라는 일본 발음에도 중요한 단서가 나타난다. 대는 "쓰" 또는 "다이"로 읽히며, 마는 "마" 혹은 "우마"로 발음된다. 도는 "시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대마라는 두 글자만을 이용해 표기법과 전혀 맞지 않는 쓰시마라고 부르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우리 식의 섬 이름과 옛적 토착민들의 발음을 억지로 결합했다는 해석이 아니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일본 고대사인 일본서기 신공기에 대마도를 "한향지도"라고 명시한 부분이 있다. 한은 가라 혹은 가락국을 지칭하는 말로 곧 "가락국에 소속된 섬"이라는 표기이다. 이야말로 대마도는 가야 및 신라 시대에 우리 관할의 영지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다.
[조선왕조실록]
1419-6-3 음력5-10
충청도좌도 도만호(忠淸道左道都萬戶) 김성길(金成吉)이 복주(伏誅)되었다. 앞서 전라도 감사가 왜적이 경내를 지나갔다고 급히 알렸는데 김성길이 이를 알고도 방비하지 않아 패전에 이르니 체복사(體覆使)가 그를 벤 것이다.
후에 해주 목사(海州牧使) 박령(朴齡)이 왜적 하나를 사로잡아 바쳤는데, 병조가 신문하니, 말하기를,
“나는 대마도(對馬島) 사람입니다. 섬 안에 기근이 들어 배 수십 척을 가지고 절강(浙江) 등 지역을 노략질하려고 하다가, 그저 식량이 떨어져서 비인(庇仁)을 침범하였습니다. 마침내 해주(海州)에 이르러 약탈을 하려고 엿보았는데, 내가 물을 길어 가기 위하여 혼자 작은 배를 타고 해안 기슭에 올라갔다가 갑자기 관병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우두머리는 도두음곶(都豆音串)에서 약탈할 때 만호(萬戶)의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였다. 김성길이 처음에는 비록 방비하지 못했지만 적을 만나게 되자 부자가 힘껏 싸웠는데 모두 죽었으니, 사람들이 매우 불쌍히 여겼다.
[주1] 김성길은 처음에 술에 취해 왜적을 방비하지 못했다가 왜적이 쳐들어오자 아들 김륜(金倫)과 함께 막아 싸웠다. 김성길은 창을 맞고 물에 빠졌지만 헤엄을 쳐서 살아났는데, 김륜은 활을 쏘아 왜적을 죽이다가 부친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世宗實錄 1年 5月 7日》
1419-6-6 음력5-13
황해도 감사가 급히 보고하기를,
“이달 11일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사검(李思儉)이 만호(萬戶) 이덕생(李德生)과 함께 병선(兵船) 5척으로 해주(海州)의 연평곶(延平串)에서 적을 망보고 있었는데, 적선 38척이 안개를 틈타 몰래 돌진하여 포위하고는 위협하며 양식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사검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선에 온 것이 아니라 본래 중국으로 가려다가 양식이 떨어져서 여기에 왔다. 우리에게 양식을 준다면 우리는 당연히 물러가겠다. 전일에 도두음곶(都豆音串)의 싸움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그대 나라 사람들이 먼저 손썼기 때문에 우리가 부득이하게 대응했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검이 아전을 보내 쌀 5곡(斛)과 술 10병을 주니, 적이 아전을 붙잡아 놓고 또 양식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사검이 진무(鎭撫) 2인과 선군(船軍) 1인을 보내 쌀 40곡을 주니, 적이 아전과 진무는 돌려보내고 또 선군을 구류하고는 이사검 등과 서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성달생(成達生)이 경기의 병선은 역풍(逆風) 때문에 전진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에 역마를 타고 급히 달려와 황해도의 병선을 가지고 출전하려 했는데, 도착해 보니 그 배가 본래 적은 데다가 이미 이사검 등이 타고 있어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왕과 주상이 매우 걱정하고 즉시 명하여 대호군 김효성(金孝誠)을 경기황해도 조전병마사(京畿黃海道助戰兵馬使)로, 전 예빈시 소윤(禮賓寺少尹) 장우량(張友良)을 황해도 경차관(黃海道敬差官)으로 삼았다. 이어 김효성은 별군(別軍)과 약장(藥匠) 20인을 거느리고, 장우량은 30인을 거느리고 당일에 즉시 출발하게 하고, 어가를 급히 달려 궁으로 돌아왔다. 또 이지실(李之實)을 황해도 조전병마도절제사로, 김만수(金萬壽)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로 삼았다. 이때 김만수는 죄를 얻어 평안도 정주(定州)에 있었는데 지인(知印)을 시켜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박은(朴訔), 이원(李原) 및 조말생(趙末生), 이명덕(李明德)을 대내(大內)로 불러 만나서 빈틈을 타 대마도(對馬島)를 섬멸하고 물러났다가 적이 돌아가는 것을 요격하는 계책을 비밀리에 논의하고,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주1] 모두 군기감(軍器監) 소속으로 별군은 화포(火砲)를 쏘는 일, 약장은 화약의 배합과 화포의 제조를 담당하였다. 《世宗實錄 20年 6月 14日》
1419-6-7 음력5-14
상왕과 주상이 유정현(柳廷顯), 박은(朴訔), 이원(李原), 허조(許稠) 등을 부르라고 명하여, 빈틈을 타서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는 것이 어떨지 여부를 논의하게 하니, 모두 아뢰기를,
“빈틈을 타는 것은 안 됩니다. 적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공격해야 합니다.”
하고, 조말생(趙末生)만 아뢰기를,
“빈틈을 타서 공격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오늘의 논의는 지난날의 계책과는 다르다. 만일 깨끗이 소탕하지 않아 늘 침략을 당한다면 한(漢)나라가 흉노(匈奴)에게 치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빈틈을 타서 정벌하여 그 처자를 사로잡고, 거제(巨濟)로 군사를 물렸다가 적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서 요격하여 그들의 배를 빼앗아 불태워 버리는 것이 가장 좋다. 장사하러 온 자 및 배에 남아 있는 자는 아울러 모두 구류하고 만약 명을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제거해야 한다. 구주(九州)의 왜인은 구류하여 놀라지 말게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훗날의 우환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고, 즉시 명하여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삼아 중군(中軍)을 거느리게 하고, 우박(禹博)ㆍ이숙묘(李叔畝)ㆍ황상(黃象)을 중군 절제사로,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로,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金乙和)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았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3개 도의 병선(兵船) 200척과 하번 갑사(下番甲士), 별패(別牌), 시위패(侍衛牌) 및 수성군(守城軍), 영(營)에 소속된 재인(才人)과 화척(禾尺), 한량인민(閑良人民), 향리(鄕吏), 일수양반(日守兩班) 중에서 배를 타는 데 능숙한 자와 배를 타는 군정(軍丁) 등을 거느리고 왜구가 돌아가는 길목에서 맞이하게 하되, 6월 8일에 각 도의 병선이 모두 견내량(見乃梁)에 모여 대기하기로 약속하였다.
1419-6-11 음력5-18
주상이 수강궁(壽康宮)을 찾아뵈었다. 상왕과 주상이 두모포(豆毛浦)의 백사정(白沙汀)에 거둥하여 이종무 등 여덟 장수를 전송하였다. 상왕이 장수들에게 친히 술을 내려 주고, 그 군관들에게는 환관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술을 돌리게 하였으며, 장수들에게 활과 화살을 내려 주었다. 상왕이 박성양(朴成陽)에게 말하기를,
“경은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어 일하는 데 어긋난 점이 있었지만 작은 일이라 용서하였다. 만일 큰일이었다면 어찌 함부로 용서하겠는가.”
하고, 또 이종무 등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명을 따르는 자는 조상의 사당(祠堂)에서 상을 내리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직에서 죽이는 것이니 예로부터 상벌이 이와 같다. 우리나라에 비록 금은이 모자라지만 토지와 노비, 관직의 포상은 어렵지 않게 시행할 수 있다. 장수들은 군사들에게 알려 각자 마음과 힘을 다하게 하라.”
하였다. 상왕과 주상은 그길로 낙천정(樂天亭)에 갔다가 해가 저물어 궁으로 돌아왔다.
[주-D001] 어찌 : 원문은 ‘河’이다. 《세종실록》 정족산본(鼎足山本) 이날 기사에 근거하여 ‘何’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 명을 따르는 …… 것이니 : 우(禹) 임금의 아들 계(啓)가 감(甘) 땅에서 유호씨(有扈氏)와 싸울 때 육경(六卿)을 불러서 경계한 말이다. 《書經 甘誓》
1419-6-13 음력5-20
대마도(對馬島)의 종준(宗俊)이 사인(使人)으로 보낸 왜인 등이 대마도로 돌아간다고 고하였다. 주상이 음식을 대접하라고 명하고, 이어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을 시켜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종정무(宗貞茂)와 함께 화평하고 사이가 좋은 지 오래되었으므로 바라는 것이라면 모두 따라 주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도적을 풀어놓아 우리 변경을 침략해 와서 병선(兵船)을 불태워 부수고 사람을 매우 많이 죽이니 이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마주(對馬州) 사람의 마음이 하나같지 않기 때문에 더러 이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종정무가 살아 있을 때 전하를 향한 성의가 지극히 독실하였고, 지금 그 아들이 자리를 이어받고는 성의가 종정무보다 더하여, 조선은 형제와 같아 영원히 그러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적이 침략해 왔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부끄럽습니다.”
하였다. 원숙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대마도에 가서 수호(守護)에게 고하여 도적질을 꾀한 우두머리를 찾아 법대로 처리하고, 그 처자를 찾아 보내라. 또 사로잡혀 간 사람들을 찾아 돌려보내라.”
하니, 대답하기를,
“속히 돌아가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얼마 후 이 왜인 8인을 함길도에 분산해 안치하라고 명하였다.
[주1] 원문은 ‘宗峻’이다. 《세종실록》 1년 3월 4일 기사 등 《조선왕조실록》 내 다수 사례에 근거하여 ‘峻’을 ‘俊’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419-6-16 음력5-23
조말생(趙末生)과 허조(許稠)에게 명하여 일본국 구주(九州)에서 사인(使人)으로 보낸 정우(正祐) 등 4인에게 제군소(諸君所)에서 음식을 대접하게 하고, 각자 종인(從人)을 배가 정박한 곳에 보내 우리나라가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겠다는 뜻을 말하되 놀라 동요하지 않게 하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그들이 각자 종자(從者) 총 5인을 내놓으니, 주상이 의복을 내려 주고 보내며, 판관(判官) 최기(崔歧)를 시켜 데리고 가게 하였다.
[주1] 원문은 ‘敬動’이다. 《세종실록》 정족산본(鼎足山本) 이날 기사에 근거하여 ‘敬’을 ‘驚’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419-6-22 음력5-29
도체찰사에게 명하여 먼저 사람을 보내 대마도 수호(對馬島守護)에게 서계(書契)를 보내게 하였다. 서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리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하는 자는 자손에게까지 후하게 하고 은혜를 배반하고 쳐들어와 도적질하는 자는 처자식을 잡아 다 죽이는 법이니, 이것은 당연한 하늘의 이치요, 왕자(王者)의 중요한 법입니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우리의 보호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 말기에 쇠약하고 혼란해진 때를 틈타서 경인년(1350, 충정왕2)부터 우리 변경을 침범하고 군사와 백성을 살육하였으며 가옥을 불태우고 그 재산을 모조리 약탈하여, 연해(沿海) 지역에 사상자가 잇따른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즉위하여 천운(天運)에 응하시고 나서 그대들을 위무하고 편안히 해 주며 서로 미덥게 했는데, 오히려 마음을 바르게 고쳐먹지 않고 병자년(1396, 태조5)에 동래(東萊)에 쳐들어와서 노략질하고 병선(兵船)을 약탈하였으며 군사들을 살육하였습니다. 우리 성덕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께서 즉위하시고 나서 병술년(1406, 태종6)에는 전라도에서 조운선(漕運船)을 빼앗았고, 무자년(1408)에는 충청도에서 병선을 불태우고 만호(萬戶)를 죽였으며, 제주(濟州)에 두 차례 침입하여 살상이 또한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전하께서 거친 행동을 포용하고 욕된 일을 참는 도량으로 그대들과 따지려 하지 않고 올 때면 두터운 예우로 접대하고 갈 때면 물건을 갖추어 후대하였으며, 기근을 진휼해 주고 국경의 통상을 터 주었습니다. 그대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그대들에게 무엇을 저버렸단 말입니까. 그런데 지금 또 배 32척을 이끌고 우리의 허실을 엿보고서 비인(庇仁) 포구에 몰래 들어와 배를 불태우고 거의 300여 군사를 죽였으며, 황해에 배를 띄워서 평안도에 이르러 장차 중국 국경을 범하려고 하니,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며 하늘이 정한 도리를 어지럽히는 것이 심합니다.
이 때문에 변경을 지키는 장수가 이미 추격해서 붙잡았고, 도두음곶(都豆音串)에서 만호인 승려 소오금(小吾金)을 죽이고 백령도(白翎島)에서 만호인 승려 요이(饒伊)를 베었으며, 구라(仇羅) 등 60여 인을 붙잡아 대궐로 이송하였지만, 우리 전하께서는 분노하여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가서 그 죄를 물어 정벌하라고 명하기를 ‘수호의 선부(先父 종정무(宗貞茂))는 우리 왕실에 충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성과 순종을 다 바쳐서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겼는데 이제는 그만이로다. 내가 그 사람을 그리워해도 어쩔 수 없으니 그 아들을 아끼기를 바로 그 아버지와 같이 하리라. 가서 토벌할 때에 수호의 가까운 권속 및 지난날 순종하여 귀순한 자와 지금 우리의 명망을 듣고 투항하는 자는 부디 죽이지 말라. 다만 쳐들어와 도적질한 자의 처자식과 그 패거리를 잡아서 돌아오라.’라고 하셨습니다.
아아, 우리 성덕신공 상왕 전하의 더없는 인자함과 대의(大義)는 고금에 매우 뛰어나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수호가 우리 전하의 뜻을 받들어 섬에 있는 적의 무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추쇄(推刷)하여 보내어, 정성을 다하던 선부의 뜻을 계승하고 영구한 세월 동안 화평을 돈독하게 한다면 어찌 온 섬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뉘우쳐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수호는 대의를 아는 섬사람들과 함께 대책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주1] 왜선(倭船) 120척이 경상도를 노략질하여 병선 16척을 빼앗아 가고, 수군 만호 이춘수(李春壽)를 죽였으며, 동래 등지를 함락하였다. 《太祖實錄 5年 8月 9日》
[주2] 성덕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 : 세종이 즉위한 후 상왕인 태종과 대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에게 각각 성덕신공 상왕,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라는 존호를 올렸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世宗實錄 卽位年 11月 8日》
[주3] 병술년에는 …… 죽였으며 : 병술년(1406) 4월에 왜선 18척이 안행량(安行梁)의 전라도 조선(漕船)을 공격하여 쌀 4090섬을 탈취해 갔다. 《太宗實錄 6年 4月 8日》 무자년(1408)에는 왜선 23척이 충청도 수영(水營)을 노략질하자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현인귀(玄仁貴)가 왜구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太宗實錄 8年 3月 6日》
[주4] 제주(濟州)에 …… 많았습니다 : 태종 4년(1404)과 15년(1415)에 왜적이 제주를 노략질하여 객관과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죽이고 잡아가는 등 피해가 많았다. 《太宗實錄 4年 2月 22日, 15年 5月 29日》
1419-6-23 음력6-1
일본 서해로(西海路)의 축전주(筑前州) 석성부(石城府)의 관사(管事) 평만경(平萬景)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이어 평만경 명의(名義)의 인자(印子)를 요구하여 우호 관계의 증명으로 삼고자 하였다. 예조에 명하여 서계(書契)로 답장하게 하기를,
“귀 명의로 된 인자는 이미 새기게 하여 돌아가는 사자에게 넘겼습니다. 정우(正祐)가 우리나라에 머무르며 스승을 찾아 도(道)를 배우기를 원하여 주상께서 명하여 흥천사(興天寺)에 있게 하고 이어 그에게 안구마(鞍具馬)와 하인을 주셨으니, 족하(足下)가 정성을 다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근일에 대마도(對馬島)의 적도(賊徒)가 은혜를 저버리고 불화의 틈을 만들어 우리 변경을 도적질하여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면서 일본의 도적이라고 자칭하여 귀국의 이름에 누를 끼치니, 이보다 큰 죄가 없습니다. 족하는 나라를 위해 잘 도모하여 위에 말한 도적 패거리를 엄하게 질책하여 뒷사람을 경계하십시오. 이어 잡혀간 사람들을 다 찾아 돌려보내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살게 한다면, 양국의 우호를 더욱 견고히 할 것이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호피(虎皮)와 표피(豹皮) 각 2벌, 잡채화석(雜彩花席) 10장, 주포(紬布) 10필, 면포(綿布) 50필을 내려 주었다.
[주1] 원문은 ‘平萬京’이다. 《세종실록》 정족산본(鼎足山本) 이날 기사 및 본 기사에 근거하여 ‘京’을 ‘景’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세종실록》 즉위년 10월 29일 기사 등에는 ‘萬’이 ‘滿’으로 되어 있다.
1419-7-1 음력6-9
상왕이 서울과 지방에 교서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력을 기울여 무력을 일삼는 것은 본래 성현이 경계한 바이지만 죄를 성토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제왕으로서 부득이한 일이다. 옛날 탕왕(湯王)은 농사일을 제쳐 놓고 하(夏)나라를 정벌하였고 주 선왕(周宣王)은 6월에 험윤(玁狁)을 정벌하였으니, 그 일에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그 모두 죄를 성토하는 조치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대마도(對馬島)라는 섬은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단지 험하고 궁벽하며 비좁고 누추하기 때문에 왜놈들이 의지해 살도록 해 주었는데 도리어 개나 쥐새끼처럼 좀도둑질하려는 꾀를 품었다. 경인년(1350, 충정왕2)부터 변경에서 함부로 날뛰기 시작하여 군사와 백성을 살육하고 부형(父兄)을 잡아가고 그 집을 불태우니, 고아와 과부가 해도(海島)를 바라보며 해마다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 들이 팔뚝에 불끈 힘을 주고 탄식하면서 놈들의 살점을 씹어 먹고 가죽을 깔고 자려고 생각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즉위하여 천운(天運)에 응하여 위엄과 덕을 널리 펴서 위무하여 편하게 하고 서로 미덥게 하였지만, 그 흉악하고 탐욕스러운 버릇은 소란스레 그치지 않아 병자년(1396, 태조5)에 동래(東萊)의 병선(兵船) 20여 척을 약탈하고 군사들을 살육하였다. 내가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즉위한 이후로 병술년(1406, 태종6)에는 전라도에서, 무자년(1408)에는 충청도에서 조운선(漕運船)을 약탈하기도 하고 병선을 불태우기도 하고 만호(萬戶)를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그 포악함이 그지없으며, 제주(濟州)에 재차 침입하여 살상이 또한 많았다. 대개 그들은 기분 좋으면 사람이고 성이 나면 짐승이며 간교한 생각을 품고 있으니 귀신과 사람이 모두 분개하는 바이지만, 나는 그래도 거친 행동을 포용하고 욕된 일을 참으며 그들과 따지지 않았다. 그 기근을 진휼해 주고 통상을 터 주었으며 그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어 함께 살아가기를 기약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지금 또 우리의 허실을 엿보고서 비인(庇仁) 포구에 몰래 들어와 거의 300여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였으며 배를 불태우고 장졸(將卒)을 참혹하게 해쳤다. 황해에 배를 띄우고 평안도에 이르러 우리 백성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장차 중국 국경을 범하려고 한다. 그들이 은혜를 잊고 의리를 배반하며 하늘이 정한 도리를 어지럽히는 것이 어찌 심하지 않겠는가.
생명을 아끼는 나의 마음으로는 만일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잃게 되면 오히려 천지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더구나 지금 왜구가 제멋대로 탐욕을 부리고 많은 백성을 해치고 죽여 스스로 하늘의 재앙을 부르는데도 용인하면서 가서 정벌하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지금 농사가 바쁜 달을 맞아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내서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은 이 또한 부득이한 일이다. 아, 간흉을 쓸어버리고 백성을 고통 속에서 건져 내려고 하니, 이에 그 이해관계를 이야기하여 내 뜻을 신민(臣民)에게 알려 주노라.”
[주1] 은(殷)나라 탕왕은, 하나라에 죄가 있으므로 상제(上帝)가 두려워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농사일을 버려두고 정벌하였다. 《書經 湯誓》 주나라 선왕 때 유목민 험윤이 침략하자 겨울과 여름에는 군대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마법(司馬法)이 있음에도 험윤의 일이 위급하다 하여 6월에 윤길보(尹吉甫)를 시켜 정벌하게 하였다. 《詩經集傳 小雅 六月》 모두 정벌의 정당성을 말한 것이다.
[주-D002] 변경 : 원문은 ‘邊繳’이다. 《세종실록》 정족산본(鼎足山本) 이날 기사에 근거하여 ‘繳’을 ‘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 더구나 : 원문은 ‘蚓’이다. 《세종실록》 정족산본 이날 기사에 근거하여 ‘矧’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1419-7-9 음력6-17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가 9명의 절제사를 거느리고 거제도(巨濟島)를 떠났다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역풍(逆風)이 불어 거제도로 돌아와 정박하였다. 병선(兵船)은 경기에서 10척, 충청도에서 32척, 전라도에서 59척, 경상도에서 126척으로 총 227척이었다. 서울에서부터 정벌에 나간 장수들 이하 관군 및 종인(從人)은 모두 669명이고, 갑사(甲士), 별패(別牌), 시위(侍衛), 영(營)이나 진(鎭)에 소속되었거나 자진해서 응모한 굳세고 용감한 잡색군(雜色軍), 원래의 기선군(騎船軍)은 모두 1만 6616명으로 총 1만 7285명이며, 65일 치 양식을 가지고 갔다.
1419-7-11 음력6-19
이날 사시(巳時)에 이종무(李從茂)가 거제도(巨濟島) 남쪽 방면의 주원방포(周原防浦)에서 배를 출발시켜 다시 대마도(對馬島)로 향하였다.
1419-7-12 음력6-20
오시(午時)에 우리 군대 10여 척이 먼저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였다. 적들은 이를 바라보고서 자기 섬사람들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줄 알고 술과 고기를 가지고 기다렸다. 대군(大軍)이 계속 도착하여 두지포(豆知浦)에 정박하니, 적들은 모두 넋이 빠져 달아나고 50여 인만이 막아서 싸우다가 궤멸하여 양식과 재산을 다 버리고 험준한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 대적하지 않았다. 투항하여 귀화한 왜인 지문(池文)을 먼저 보내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글로 타일렀으나 답하지 않았다.
우리 군대는 길을 나누어서 적을 수색하여 잡았는데, 크고 작은 적선(賊船) 129척을 빼앗아 그중에 쓸 만한 배 20척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다 불태웠으며, 또 적들의 가옥 1939호를 불태웠다. 그동안 114구(口)를 참수하고, 21구를 사로잡았으며 농지에 있는 화곡(禾穀)을 베어 버렸다. 포로로 잡힌 중국 남녀 131명을 구해 냈는데, 장수(將帥)들이 구해 낸 한인(漢人)에게 물어보고서, 섬 안에 기근이 심하고 또 매우 급작스러운 상황이라 아무리 부자라도 불과 양식 한두 말〔斗〕만 가지고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포위하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훈내곶(訓乃串)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적들이 왕래하는 요충지를 막아서 오래 머무를 뜻을 보였다.
이날 상왕은 정벌에 나간 장수의 배가 출발했다는 보고가 오지 않는다고 하여 형조 참판 홍여방(洪汝方)을 체복사(體覆使)로 삼으라고 명하였다가, 마침 유정현(柳廷顯)의 보고가 도착하여 17일 경인일에 배가 출발했다고 하므로 이에 중지하였다. 얼마 후 장수들이 역풍(逆風) 때문에 거제도(巨濟島)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명하여 병조 정랑 권맹손(權孟孫)을 경차관(敬差官)으로 삼아 선지(宣旨)를 주어 보냈다. 선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달 11일 갑신일은 바로 배가 출발할 길일이었는데 장수들이 배를 출발시키려 하지 않았고, 12일 을유일에야 배를 출발시켜 거제도에 도착하였다. 17일 경인일이 되어서도 배를 출발시키려 하지 않았고, 또 장수들의 보고에 따르면 17일에 배를 출발시켰다가 역풍 때문에 거제도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군대를 이동시키는 큰일인데 경은 어찌 분별해서 아뢰지 않았는가. 위에 말한 각 날짜에 지체한 사유 및 역풍의 진위(眞僞)를 속히 분별하여 아뢰라. 또 배를 출발시키도록 장수들을 독려하라.”
[주1] 종정무(宗貞茂)의 아들인 종정성(宗貞盛)의 아명이다. 대마도의 수호대명(守護大名)이자 종씨(宗氏)의 9대 당주(當主)이다.
1419-7-17 음력6-25
병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대마도(對馬島)의 왜적이 자기 섬으로 돌아갈 때 반드시 땔나무와 물을 준비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해도 조전절제사(海道助戰節制使)를 시켜 각각 병선을 거느리고 요충지에 나누어 정박해 있다가 맞아서 공격하게 하소서.”
하니,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 전 도절제사 권만(權蔓)과 동지총제(同知摠制) 이천(李蕆)을 모두 경상해도 조전절제사로, 동지총제 박초(朴礎)를 전라해도 조전절제사로, 공조 판서 이지실(李之實)을 충청해도 조전절제사로 삼았다.
1419-7-21 음력6-29
유정현(柳廷顯)의 종사관(從事官) 조의구(趙義昫)가 대마도(對馬島)에서 돌아와서 승전을 고하였다. 3품 이상 관원이 수강궁(壽康宮)에 나아가 하례하였다. 상왕이 훈련관 판관(訓鍊觀判官) 최기(崔歧)를 시켜 선지(宣旨) 2통을 받들고 군중에 가서 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에게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그 첫 번째 선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것은 죄를 묻는 데에 뜻이 있으니 많이 죽일 필요가 없다. 배도(裴度)가 헌종(憲宗)의 명을 받아 채(蔡)를 토벌한 일과 조빈(曹彬)이 태조(太祖)의 명을 받들어 촉(蜀)에 내려간 일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경은 나의 지극한 심정을 받들어 되도록 투항시켜 다 우리에게 오게 하라. 또 왜놈들의 마음은 간사하여 예측할 수 없어서, 승세를 탔다고 방비하지 않다가 혹시 일을 그르치게 만들 수 있으니, 또한 고려해야 한다. 또 7월 중에는 으레 폭풍이 많아 염려되니, 경은 잘 헤아려서 해상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 두 번째 선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