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나도 노숙을 한 경험이 있다.
서클에서 회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어쩌다 여자 친구 학교를 지나치게 되었다. 불현듯 그녀의 하숙집을 찾아갔다. 그녀는 마침 집에 없었다. 혹시 오겠지 하면서 기다리는데 너무 늦게 귀가하였다.
미팅을 하고 온 것이다. 미안해하며 함께 약간 시간을 보냈지만 밤늦게 어딜 갈 데도 없어 그냥 전철을 타고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당시에 술이 좀 취했나 보다. 내릴 기차역을 지나쳤다. 다시 탔는데 또 역을 지나치고야 말았다. 막차도 끊긴 터라 다시 차를 탈 수도 없는데, 그 역 인근에 외삼촌댁이 있어 찾아갔다.
외삼촌댁은 현재 도곡 삼성래미안 자리의 옛날 주공아파트였다. 언덕길을 올라 아파트를 찾았는데 외삼촌댁이 4층인지 5층인지 그리고 호수도 헷갈렸다. 그중의 한 곳의 문을 두들겼는데 새벽 2시경에 엉뚱한 집에 가서 엄청난 욕을 들어야 했다.
이토록 난감한 상황이라면 담배를 한 대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성냥갑 속에 성냥 개피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아파트 상가 부근의 공중전화박스를 찾아 다시 아파트 언덕길을 내려왔다. 공중전화로 외삼촌댁에 전화하려다가 새벽 3시에 이게 뭔 결례인가 싶었다.
전화를 단념하고 다시 언덕길을 오르는데 웬 개가 나를 쫓아와 자꾸 짖는다. 책가방을 휘두르며 쫓아갔는데 이 개가 도망치다가 되려 대드는 것 아닌가 순간 이거 미친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와의 대결을 단념하고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분명히 이곳에서 사촌들과 놀았는데 삼촌집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지막 성냥개비로 불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최대한 천천히 빨아 마셨다. 담배가 꺼지기 전에 다음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네 대를 연달아 피우니 머리가 핑 돈다. 아파트 계단에 이러고 있다고 달리 좋아질 것은 없었다.
전철역의 벤치가 떠올랐다. 전철역에 가니 빈 벤치가 있었다. 푹 쉬려는데, 역무원이 나를 내쫓았다. 몇 번 쫓겨나갔다가 다시 들어가서 눕고를 반복하다가 새벽이 되었다.
새해 해돋이보다 반갑게 첫차를 기다려서 타고 하숙집에 무사히 돌아왔다. 풋풋하던 나의 80년대 기승전결도 없는 한 소절을 나의 뉴런들이 되살려냈다.
노숙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 1. 전철역의 벤치도 노숙자에게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2. 밤에는 전철역이 폐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