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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성의 실화 - 불교적 계기를 통한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총체성의 실화(實話)* - 불교적 계기를 통한


* 아직 어떠한 사상도 '총체성의 신화(神話)'의 딱지를 떼어내지 못했다.



I. 사고의 자유


1. 횡여우란 교수는 그의 [중국철학사](1)의 말미에서 미래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전망하였다. '완벽한 형이상학적 체계는 실증적 방법으로 출발하여 부정적 방법으로 끝난다.' 그러나 본고의 입장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완벽한 형이상학적 체계라면(2) 부정적 방법에서 다시금 분석적 방법으로 돌아와야 한다.'(3)


2.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불타의 가르침은 언제나 <와서 보라>이지 <와서 믿으라>가 아니다.(4) 그러나 대승불교의 흥기 이후 부처님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 미륵보살 등은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말하자면 믿음은 단순한 허구적 관념으로서보다는 보살도의 실천을 통한 깨달음에로의 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신관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5)


3. 불타는 종교의 역사상 유례없는 충고를 우리에게 하였다. '어떤 것들이 부분적이며 악하고 나쁘다고 (不善, akusala) 스스로 알게 되면 그때는 그것을 버리시오...... 어떤 것들이 완전하고 좋으면 (善, kusala)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따르시오'(6)


이러한 사고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7)은 본고의 처음과 끝이다.



II.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1. 고(苦, 괴로움): 괴로움이 있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8) 이것은 밤을 새워타는 불꽃과 같다.(9)


2. 집(集, 괴로움의 원인): 불타는 가르친다. '비구여, 윤회(10)의 사슬은 보일 수 있는 끝도 시작도 없으며 무명(無明)에 닫혀있고 갈애(渴愛, tanha)의 속박에 묶여 있어서 인식될 수 없다.(11) 언제나 미소지으면서.(12)


3. 멸(滅, 괴로움의 소멸): 무엇이든지 그 자신이 그의 생겨남의 원인이며 그 자신이 그의 끊음(소멸)의 원인이다.(13) 그러나 열반(涅槃)은 원인이나 결과를 넘어서 있다. 그러므로 나가르쥬나(Nagarjuna, 龍樹)는 분명히 '윤회는 열반과 다르지 않고 열반은 윤회와 다르지 않다(中論)'고 했다.(14)


4. 도(道,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자비와 지혜를 닦기 위한 팔정도(八正道)(15)가 있다. 이는 먼저 자기의 인격을 완성시키기 위한 수행도이므로 육바라밀(六波羅密)류의 자리이타(自利利他)적 수행도로 더 확충되어야 할 것이다.



III.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16)


1. 욕액(欲軛) (법유아무문 法有我無門): 색을 떠나 공에 이르고자 한다.


2. 유액(有軛)(17) (생즉무생문 生卽無生門)): 명(名 Name)이란 결국 물자체(物自體)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우리의 내부에서 사물로부터 오는 특정한 현상(相 or 思)에 관계되는 의식의 산물이다. 법(法)이 결국 인간적인 명(名)과 상(相)의 문제로 전환되어 나타남을 인식할 때, 법 그 자체는 우리에게 공허한 것이며 드러내는(生) 것과는 무관(無)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18) 불생불멸(不生不滅)


3. 견액(見軛) (사리원융문 事理圓融門): 일체의 차별의식이 사라지고 능소(能所)의 구별마저 없앤다. 불구부정(不垢不淨)


4. 무명류액(無明流軛) (어관쌍절문 語觀雙絶門):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에서 돈오(頓悟)를 하게 되어 색공(色空)에 거리낌이 없이 무애행(無碍行)을 구한다. 부증불감(不增不減)


5. 화엄삼매문(華嚴三昧門) (19): 본고에서는 이 법문을 바로 보살도 정신이 완연히 나타나는 경지로 규정하고 싶다.



IV.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1. 보살도: 깨달음의 경계(境界)를 살지만 그렇다고 깨달음 속에 머무르지 않고 영원불변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인연으로 만들어진 것은 버리지 않는다.(20) 중생과 보살의 구별이 없으므로 중생이 모두 깨닫지 않으면 깨닫지 않고(21) 중생이 병들면 함께 병든다.(22) 비록 세상에 살지만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는다.(23) 또한 중생의 국토가 바로 보살의 불국토(佛國土)이다.(24)


2. 유교: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세계관 자체가 내성(內省)적임으로 인하여 비록 생성적 시각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아무러한 행동지침도 없다. 따라서 보살의 완성자가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그가 하는 보시(報施)의 기준은 오로지 그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


이에 비해 유교는 동일한 생성적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외향적임으로 인하여 하늘에 그 성(性)의 근원을 둠으로써 유교적 무애행(無碍行)인 예(禮)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나 주자의 활연관통(豁然貫通) 모두 그 정당성의 근원은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러한 사회적 객관적인 기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V.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1. 보살행은 너무도 이상적이어서 일반적 범부(凡夫)에게는 좀처럼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제불(諸佛)과 불보살(佛菩薩)에 귀의(歸依)하여 그 힘으로써 구제를 받고 그 힘에 의한 자비의 실천을 행하게 되었다.(25)


2. 이 세계는 노장(老莊)적 세계관으로 스스로 그러하게 충분히 설명되어진다. 그러므로 신을 믿고자 하는 사람은 일단 일차적인 이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연후에 신을 믿게 되면 그 믿음은 합리적임과 동시에 사물 곳곳에 숨어 있는 신의 향기를 타인이 못보는 눈으로 발견할 수 있다.


3. 그러나 인간이 믿고 의지할 것은 자기자신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니체는 초인 도덕을 외쳤고 불타는 스스로를 안식처로 하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우주의 조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우주의 조화에 대해 인격적으로 대한다면 더욱더 이 우주의 조화에 몸을 맡길 수 있지 않을까?


*結: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하여 신에 대한 믿음은 객관적으로 가능하며 불교와 양립가능(兩立可能)하다. 또한 불교는 그 도달한 경지에서 다시 속세로 내려와 사회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시행을 행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VI. 참고문헌


1. 이기영 역해, [반야심경], 한국불교연구원

2. 이기영 역해, [금강경], 한국불교연구원

3. 박경훈 역해, [유마경], 동국대불간위

4. 월포라 라후라, '불타의 가르침', 전재성역, [현대사회와불교], 한길사(서울, 1986)

5. 풍우란, [중국철학사], 정인재역, 형설출판사(서울 1987)

6. 중촌원, [인도사상사], 이기영역, 동국대불간위

7. 이효걸, '화엄오교지관의 화엄종적 의의', [중국철학], 중국철학연구회

8. 무진장 편역, [불교의 기초지식], 홍법원

9. 김용옥, '나의 양심선언에 대한 기철학적 시론',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통나무(서울, 1987)

10. 황필호, [분석철학과 종교], 종로서적(서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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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사실은 [A Short History of Chineses Philosophy]이다

(2) 횡여우란의 맥락에서 형이상학이란 인간의 정신적 수준을 고양시키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그러나 본고의 형이상학은 다시금 세상사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져야 하는 체계이다.

(3) 불교를 비판하기 위한 언명(言明)인데 체득의 경지인 불교의 심오함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오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불교는 내성적(內省的) 수양에 집착함으로써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는 편견없는 무애한 보살이라도 아무 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

(4) 월포라 라후라, p 22

(5) 물질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구족된 세계질서와 조금도 충돌함이 없는 시각이 가능하다면? V장을 보기 바람

(6) Ibid, p 16

(7) 인간의 사유는 그 자체가 문화적이다. 그렇다면 객관성은 무엇으로 보장될 수 있을까? 이것은 분석적 사유질서의 능력이다. 그러나 단지 공허한 형식일 뿐이므로 그 이전에 순서적으로 먼저 가치판단을 띄는 전제가 개입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유는 이 가치전제와 형식논리의 분리가 그리 명확치 않다. 그러므로 다양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제 속에서 다양한 사고를 하면서도 이 가치전제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유방법을 '다전제의 철학'이라고 하는 바 논리적으로는 서로 다른 기초로부터 세워진 논점이 통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을 넘어 의식의 깊숙한 곳에서 이러한 사고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에 바탕을 둔 탐구는 어느 새 삶 속에서 대긍정의 융화를 가져온다. 불교의 가르침이 분석적 방법과 밀접할 수 있는 접점이 아닐까?

(8) Ibid, p 37,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9) Ibid, p 47, 파괴되지 않은 채로 지속하지만 순간마다 변화하는 연속이다. 이 연속이란 실제로 움직임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10) 무진장, p 172, 사법인(四法)印: 제행무상(시간적) + 제법무아(논리적) = 연기일반, 일체개고(윤회) + 열반적정(열반) = 가치적 연기

(11) 월포라 라후라, p 40

(12)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객관적 이해를 통하여

(13) Ibid, p 44

(14) Ibid, p 53

(15) 무진장, p 227 계정혜(戒定慧)의 삼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올바른 지혜와 올바른 해탈을 덧붙여 십무학법(十無學法)이 되면 신계정혜로 나눌 수 있다.

(16) 반야심경, p 39 명광은 고액의 고를 팔고로 보되 사액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액이란 첫째 욕액, 둘째 유액, 세째 견액, 네째 무명류액.

이것은 화엄오교지관(華嚴五教止觀)(중국철학 pp 136-156)의 오법문과 아주 잘 대응되는 외에 중도종(中道宗)의 이체설(二諦說)과도 제 3 층차까지 대응된다. 또한 반야심경의 '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과도 연결된다.

(17) 유액(有軛)의 단계를 벗어나려는 불교는 어떤 의미에서 분석철학의 입장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분석철학과 종교 pp 227-322)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이해근거는 실제이며 또한 삶의 형식의 일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언어가 반드시 사물의 이름은 아니라는 것이며 언어를 그 맥락으로부터 추상화시켜서 - 다시 말하면, 언어의 일상적인 용법을 벗어나서 - 그 기능적 기반을 벗어나서 이해하려고 할 때 철학적 혼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언어의 용법으로 일상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런 사고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무애행이 될 수가 있다. 윤회는 열반이고 열반은 윤회이므로.

여기서 일상언어를 넘어서는 언어용법에 대한 그의 부정은 존재론적이 아니라 문법적이다. 비록 [중론]에서의 용수의 논리전개가 문법적이었다 하더라도 불교의 경지는 이러한 유액의 경지에 머물러서 전개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것을 떠난 후의 크낙한 사랑의 마음으로서만이 가능한 것인바 단지 문법적 부정에 불과했다하더라도 존재론 부정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이후의 대긍정을 위하여.

그러므로 분석철학으로 불교의 한 단면만을 이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자신의 수준에서.

(18) 이효걸, pp 145-146

(19) 나귀를 타고 있으면서 찾음도 지나 이제는 나귀에서 내린 후의 경지이다.

(20) 유마경, p 223

(21) Ibid, p 113

(22) Ibid, p 57

(23) Ibid, p 49

(24) Ibid, P 31

(25) 중촌원, p 152




(1987. 6.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