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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철학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I. 주제의 천명


1. 횡여우란 교수는 그의 [중국철학사](1)의 말미에서 미래의 철학을 이렇게 전망하였다. '완벽한 형이상학적 체계는 실증적 방법으로 출발하여 부정적 방법으로 끝난다.' 그러나 본고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완벽한 형이상학적 체계라면 부정적 방법에서 다시금 분석적 방법으로 돌아와야 한다.'(2)


2. 신(神)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만큼 세계관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본 리포트에서 신은 세계를 이해하는 시각에서 바라보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 본성이 필연적으로 다가서게 되는 전우주(全宇宙)와의 인격적인 교감이다.(3)


3. 위의 두 가지 주제의 핵심은 사회적 실천이다. 그러므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인 유학(儒學)이 이들 문제들과 어떻게 조우했을까?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주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매개로 하여 유가의 학적 체계의 일부를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4)



II. 유가(儒家)의 틀 -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중심으로


1. 유가의 기본적 틀은 다음과 같다.(5)

1) 소연(所然)을 바라본다: 이것은 존재의 실상이다. 이를 성(誠)이라 한다. 이것은 자연의 운행질서와 같은 성실함(6)에 대한 자각이다.

2) 소당연(所當然)을 파악한다(7): 하늘의 성실함에 비추어 인간의 윤리질서도 이와 같이 성실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3) 소이연(所以然)을 탐구한다: 소연과 소당연의 객관적 근거를 탐구하는 작업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8)

4) 소능연(所能然)을 행한다: 사물의 이치에 두루 통함으로써 행위에 걸림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9)


2. 주자(朱子)는 가장 거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축한 첫 유가이다. 그것은 이(理)와 기(氣)라는 틀로 바라본 세계이다. 이(理)란 온갖 사물에 미치지 않는 바가 없는 세계의 내재적 틀이다. 이것은 기(氣)로써 형상화된다.(10) 따라서 인간이 완전함을 추구하는 그 윤리적 근거가 확보되었다. 누구에게나 품수(稟受)된 이(理)를 통하여. 또한 사람은 마음(心)에 있어서까지도 이(理)와 기(氣)가 뒤섞여 있으므로 이러한 기질지성(氣質之性; 물질적 욕구의 성격을 띠는)을 순화(純化)함으로써 이(理)를 발현시키는 것이 행위적 요청으로 대두되었다.


여기서 주자의 '격물의(格物義)'가 이해되어진다. 그것은 인지심(認知心; 마음이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통하여 객관적 대상인 사물을 탐색하는 것이다.(11) 즉 사물을 객관적으로 탐구함으로써 그가 본래 갖고 있는 이(理)로써 개개의 사물의 이(理)를 파악하는 것이 어느 시기가 지나면 마침내 전우주의 총체적인 이(理)를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두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첫째 분석적 이성인 인지심(認知心)으로는 총체적인 이(理)가 결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직관적 앎인 양지(良知)로서만 가능하다.(14) 왜냐하면 총체적 이(理)는 개념적이고 분석적인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12) 둘째, 그의 격물(格物)은 총체적인 이(理)의 파악을 전제로 한 사물의 이(理)의 탐색으로 인하여 오히려 개별 사물 구조의 이(理)에 대해서는 무지한 측면을 노정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주자의 격물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한다손치더라도 과거의 행위와 경험에 대한 반성으로서밖에 기능하지 못하였고(13) 따라서 또한 객관적일 수 없는 도덕적 전제를 미리 내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활연관통(豁然貫通)한 선(善)한 군자라 할지라도 개개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설정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당면하는 돌발적 사건들에 대하여 주관적(사욕(私欲)은 없지만)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게 된다.


3. 양명(陽明)의 심학(心學)은 '먼저 큰 것에 선다(先立乎其大者)'로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주자에서와 같이 낱낱의 사물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갖고 있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의 옳음(맹자(孟子)의 사단(四端)과도 같은 것)을 자각하고 이를 실천을 통하여 확충함으로써 치양지(致良知)에 이른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물자체(物自體)도 마음에 소재하는 현재의 징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5)


그러나 양명학은 그 철학 자체의 성격(16)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행동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못함과 동시에 주자학이 가진 둘째 문제점도 해결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선산(船山)은 소위(所爲)의 동기와 소위(所爲)의 결과를 동시에 문제 삼는다. 그는 허(虛)로써 치지(致知)에 도달하고 사(事)로써 격물(格物)을 함으로써 양지(良知)의 구체적 완성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격물은 도덕적인 의미가 내포되지 않은 객관적인 탐색임으로 인하여 자연과학적인 방법의 개척의 성격을 띄고 있다.(17) 따라서 그의 철학은 본고의 첫째 주제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다.


4. 다산(茶山)은 천(天)의 사상이 자연(自然)·상제(上帝)·역리(易理)에 근거하는 바에 따라 천성(天性)·천명(天命)·천리(天理)의 형태로 나뉜다고 보고 과연 공자시대의 중심과제인 천명사상의 성격은 무엇인가에 시각의 초점을 잡았다. 그리하여 그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풀이하기에 성즉리(性卽理)의 주자학적인 역리천(易理天)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명즉성(命卽性)의 인성론(人性論)적 천명(天命)으로 이해하였다.(18) 이러한 까닭은 천리(天理)가 결코 신과 인간 사이를 일관할 수 있는 성정(性情)이 될 수 없는 객관적 이법(理法)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19)


그러나 그 실천적 이유는 무엇인가? 실로 상제(上帝)가 아니고서는 그 무서움과 도움이 아니고서는, 효(孝)·제(悌)·자(慈)의 실천(20)을 인간이 도저히 감당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23) 그리하여 그는 지존지대한 존재자로서 인간행위의 윤리적 감시자로서 상제를 모시기에 이른다.(21)


그렇다면 인간은 상제의 꼭둑각시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의 주체적 결단에 의하여 행위하고 책임을 진다. 그러나 천명의 앞에서는 언제나 경건한 자세를 가눌 줄 알아야 한다.(22)



III. 과정적(24) 형이상학의 설정


1. 우주는 형상과 질료 그리고 동력 등의 모든 것을 자체로 구유하고 있다.(2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이나 천명을 배제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성은 그 자체로서 초월자와의 교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본고에 있어 그 초월자는 유기체적 세계 그 자체이다. 전일(全一)적 세계관에 입각할 때 인간은 우주 그 자체를 인격적으로 가까이 함으로써 더욱더 우주적인 마음을 확보할 수 있다.(26)


또한 믿음은 그 자체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을 인도하는 힘이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어려움을 잘 견디게 하고 선한 방향으로 사람을 이끈다. 유기체적 세계 자체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비인격적으로 대하여도 논리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의 삶은 우주의 조화에로 나아가는 보다 쉬운 길을 놓쳐 그 영혼의(27) 풍요로움을 적게 맛볼 것이다.


2. 이제 부정적 방법에서 분석적 방법으로 내려와야 할 때이다. 이것은 다전제(多前提)의 사고(28)를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보다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실천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한 삶의 태도(29)에서 내려올 필요는 없다. 그것은 유교가 가르쳐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자세이다.



IV. 참고문헌


1. 이을호, [다산경학사상연구], 을유문화사

2. 증소욱, '주자양명선산의 격물의', [퇴계학보] 26집(서울, 퇴계학연구소, 1980)

3. 김교빈, '본체론과 심성론을 통해본 주자의 격물치지 이해', [중국철학사상논구1](동양철학연구회 편), 여강출판사

4. 김용옥, [절차탁마대기만성], 통나무

5. 김용옥, [철학강의], 통나무

6. 김용옥, '나의 양심선언에 대한 기철학적 시론',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통나무(서울, 1987)

7. 풍우란, [중국철학사], 정인재역, 형설출판사

8. 박이문, '인식상대주의', [인식과 실존],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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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를 가리킨다.

(2) 횡여우란에 있어 철학의 의미는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이며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정신)을 한 차원씩 높여주는 것이지, 사실의 문제에 관한 지식을 증대시키는 데는 무용한 것이다.(중국철학사 p420) 따라서 위의 언표는 그의 철학적 맥락에서는 하자가 없다. 그러나 본고의 철학은 가장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에서도 유용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으로 입론된다. 그래야만 구체적인 상황 속의 객관적인 기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실천은 단순한 수양의 영역을 넘어서 역사의 객관적 귀추에 의거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3) 이러한 구분은 다산의 '존재론적 천리'와 '인성론적 천명'에 대한 구분에서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다산이 이 둘을 별개로 파악한 데 대하여 본고에서는 하나로 이해한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물질이 입자와 파동으로 나타나듯이

(4) 본 리포트는 작성자의 능력부족으로 인하여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훗날의 연구작업을 위하여 현재의 문제시각을 중심으로 이해의 틀의 체계화를 시도해보는 것도 무익한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5) 김교빈, pp 217-219

(6) 김용옥(절차탁마대기만성), p 178

(7) 이러한 존재와 당위에 대한 동일시는 숙고를 요한다. 왜냐하면 막스베버가 그의 [객관성]논문에서 천명하였듯이 '우리의 모든 인식은 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즉 실재에 대한 공통된 지식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문화는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문화가 실재 자체의 사실적 속성에 의하여 한정된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존재와 당위의 일원론과 이원론은 앞으로의 과제이지만 유교는 이원론에 대한 반성없이 일원론을 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8) 주자의 '격물'이 바로 이러한 작업이다. 그러나 선산의 격물은 오히려 소연적 작업이다.

(9) 주자에게 있어 '활연관통'한 상태

(10) 풍우란, p 379

(11) 증소욱, p 44

(12) Ibid, p 46,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증소욱은 정주학(程朱學)을 '보조공부'라 하고 육왕학(陸王學)을 '본질공부'라고 규정하였다.

(13) Ibid, p 51

(14) 양지에 대한 논리적 인식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즉 박이문은 '존재와 인식은 존재적으로 연속되어 있으나, 존재에 대한 인식은 논리적으로 존재와 분리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 이전에 사물 현상 자체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다. (박이문, pp 140-142) 그러므로 인간은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실재의 본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5) Ibid, p 51

(16) 양명의 심학은 일견 서양철학에서 존재에 대한 관념론적 성격을 띄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목적에 있어서 인식의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도덕적 성찰의 문제라는데 그 근본적 성격의 상위가 있다.

또한 불교의 선과는 그 차이를 거의 논하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단 그 입론의 처음에 사회적 실천과 관련되는 것임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불교도 대승의 차원에서 보살행의 경지에까지 다가오게 되면 사회적 실천이 중시된다. 그러나 유교는 정치질서와 사화관계 속에서의 실천임에 비하여 불교는 그러한 사회관계성에 대한 자각이 없다. 그러나 둘다 사회구조에 대한 자각이 없음은 동일하다. 분석적 방법의 미비로 인하여.

(17) 증소욱, p 54

(18) 이을호, p 59

(19) Ibid, p 71

(20) Ibid, p 212, 효(孝)·제(悌)·자(慈)의 실천을 떠나서는 성의정심(誠意正心)도 있을 수 없다.

(21) Ibid, p 54

(22) Ibid, p 307: 그의 천명관은 일견 해방신학의 역사적 실천과 일치한다. 해방신학에서는 맑시즘과 달리 역사를 인간이 이루어 나가는 것이라고 결코 설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상황에 대한 경제적 분석을 통하여 현재적 실천의 기준을 확보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인간의 능력이 미치는 데까지 사회적 실천을 행한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끝내 신에게 돌림으로써 그 겸손과 기도를 잃지 않는다.

(23) Ibid, p 303: 다산은 천리를 통하여서도 치양지(致良知)나 활연관통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보통사람에게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길이었다. 따라서 상제의 명에 근거한 도심(道心)으로서 사욕과 물욕인 인심(人心)을 극(克)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24) 김용옥(철학강의), p209: 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세계 자체가 변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생성(Becoming)이기도 하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과거는 현재에 집약된다.

(25) Ibid, p315: 유기체적 세계관을 기술한 것이다.

(26) 불교의 화엄연기론에 입각하면 모든 것은 관계성이다. 그러므로 우주적인 마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를 뛰어넘을 수 없다. 불교에서도 믿음은 보살도의 수행을 위한 깨달음의 방편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본고의 믿음은 단순한 방편이 아니다. 이것은 전우주와 교감하는 것이며 물질과 정신을 동전의 앞뒷면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27) 사실 영혼이라는 개념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정신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정된 방편적 개념에 불과하다.

(28) 다전제의 사고는 독단을 거부하는 이해의 철학이다. 즉 타인의 논리적인 주장과 직관적 주장을 모두 이해하는 철학이다. 어떠한 과학적인 견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필연적으로 가치 전제가 포함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형식적 사고능력은 내용적 가치판단이 전제되지 않고는 아무런 사고도 전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학에서도 공리(公理)가 있는 바와 같이. 그러나 하나의 전제에 입각한 논리전개는 아무리 그것이 논리적이라 할지라도 먼저 가치판단이 전제되어진 논리이므로 일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학문의 객관성은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 이것은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이 순서적으로 선후(先後)의 관계가 있다는 자각(自覺)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고의 체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가치전제를 바꾸어보면서 사고를 이해할 수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양지(良知)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양지는 분석적 실증의 여러 국면을 통과한 양지이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보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실천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29) 동양철학이 서양철학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 동양철학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근원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바로 삶의 철학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상이한 이해에서 근원한다. 그것은 존재(Being)와 생성(Becoming)이다. 그러나 생성적 이해 속에서 존재를 융화함으로써 존재적 사고를 흡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의 형식적이고 분석적인 논리가 무용(無用)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토대로 하여 생성적 사고로 한층 더 도약해야 한다.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이해없는 종교가 광신이듯이 인간은 거쳐야 할 단계를 하나씩 밟고 올라서야 한다.(김용옥(나의 양심선언에 대한 기철학적 시론) 참고)




(198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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