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자비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김용옥, 통나무, 2002.
달라이라마의 말씀(2002년 1월 12일)을 먼저 정리합니다.
[<3권> 658쪽~]
(기독교는 사건중심이고 불교는 법중심이라고 하셨는데, 그 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연기(pratitya-samutpada, paticca-samuppada)입니다.
연기(Depending Arising)란 모든 것이 서로 의존하여(paticca) 함께(sam) 일어난다(uppada)는 뜻입니다. 즉 이 우주의 어떠한 이벤트도 절대적인 독립성을 갖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과학입니다.
심리학이라 말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지요. 요즈음의 얄팍한 행동과학적 심리학에다가 그 개념을 국한시키지 않는 한 말이죠. 불교는 심리학입니다.
비그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시작이라는 상식적 이벤트가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문제,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현상의 기저인 시간과 공간 그 자체가 그로부터 생겨났다는 이야기이므로 그것은 연기론적 논의를 벗어난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연기론적 논의는 모두 시공간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한 논의입니다.
이 우주에는 절대적 진리가 있으며 그 절대적 진리를 매개하는 절대적 지식이 있다. 이 절대적 지식 즉 그노시스(영지)를 얻기만 하면 우주의 모든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따위의 사유는 이미 절대적 진리나 절대적 지식을 실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류의 절대론이 모든 신비주의의 함정입니다. 이것이 서구 신비주의의 한계이지요.
절대적 진리는 없습니다.
불타의 깨달음이 연기인 한에 있어서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진리라는 것이 모든 상대적 관계를 단절시키는 절대독립적인 실체일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저에게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âsti-vāda)의 삼세실유론(三世實有論)을 연상시키지만, 바로 나가르쥬나의 공론은 이러한 사유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석가여래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한마디가 그의 전 생애를 마감하는 최후의 일성이었습니다.
불교에 있어서 구태여 절대적 진리를 말하자면 '공(sunya)'이라는 한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것을 또 하나의 절대적 실체로 생각하면 그것은 공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일원론은 현상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체론적 일원론이라는 것은 도무지 성립불가능한 것입니다. 본체론적 일원론, 본질적 일원론은 또 다시 이원론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아드바야 advaya', 즉 '불이(不二)'입니다.
맑시즘의 종언은 곧 서구적 계몽주의의 낙관론의 종언을 의미합니다.
(불교를 심리학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심리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열반이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라고 규정하신다면, 우리가 열반적정의 마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번뇌도 곧 보리가 되는 것이므로, 윤회도 사라져버릴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떠한 마음의 상태에 이르든지 간에 그 마음의 상태가 윤회하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열반이 해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반은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apratisthita-nirvana)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깨달음의 세계에도 미망의 세계에도 안주하지 않습니다.
나는 해탈을 원하지 않습니다. 해탈이 마음의 모든 것의 완전한 종지이며 무(nothingness)라고 한다면 나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삼사라(윤회)가 더 좋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단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요!
붓다가 무아를 말했을 때의 아는 변하지 않고 상주하는 아며, 절대적이며 타에 의존치 않는 독립적인 아며, 또 집적태로서의 분할이 불가능한 단일한 아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립적이며 독립적이며 단일적인 성질을 구비하는 존재를 우리는 스바브하바(svabhava), 즉 실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무아론은 실체로서의 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체로서의 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론은 결코 윤회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즉 무아의 세계관은 전혀 윤회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실체적 자아는 연기적 자아와 대립되는 개념이며, 실체적 자아가 없어져도 연기적인 자아는 분명히 있는 것이므로, 그 연기적인 자아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의 무(無, Nothingness)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항상 거기 있는 겁니다(something there). 그러니까 무아라고 하는 뜻은 아라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나의 완전한 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에 대한 이해방식의 근원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시경전에서부터 부처님 자신이 열반이나 해탈이라는 말을 그렇게 엄밀하게 윤회로부터의 온전한 벗어남이라는 의미로 쓰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번뇌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의미로 가볍게 쓰였던 말입니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도 너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현재적 순간의 절대적 경지로 파악하는 것은 연기적 세계관에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현재라는 찰나는 과거의 업의 결과이며 또 미래의 지향성과 반드시 관계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 그 자체가 하나의 승계적인 흐름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내가 현세에서 대단한 각(覺)을 이루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기나긴 과거세의 업장을 다 소멸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무리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인간이라는 존재성의 관계그물이 있는 한에 있어서는 또 다시 업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윤회란 이러한 인간의 마음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허약하고 집착하고 치우치는 변계소집(遍計所執, parikalpita)의 마음이 있는 한 윤회의 굴레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속적 윤리(secular ethics)입니다.
모든 종교에 가장 본질적인 주제는 '신'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즉 인간의 유한성의 문제이지요.
바로 우리 불교는 이러한 내세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문명에도 깊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와 영혼불멸에 대한 갈망, 이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불교는 이러한 문제를 매우 근원적으로 해결했던 것입니다. 대승불교만 하더라도 윤회의 비관론(the pessimism of samsara)을 반야의 낙관론(the optimism of prajna)으로 전환시킨 일대 정신혁명(spiritual revolution)이었습니다.
윤회를 하는 것은 우리의 신체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조차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특수한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윤회를 하는 것은 미세마음(Subtle Mind)이지, '나'라고 하는 개체(Self)가 통째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뇌사와 더불어 상식적 의식은 소멸되어도 그러한 매우 심오한 업장은 바르도상태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유(中有, antara-bhava)의 상태에도 아라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의 업장은 유지된다는 말인가요?)
우리 티벳불교에서는 유식의 표현은 직접 활용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게 이해하셔도 대차는 없습니다.
물체를 꼭 형상을 지니는 존재 즉 공간적 점유로 생각치 않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의 의식이나 마음도 그러한 에너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마음의 에너지가 이동하는 것이죠.
한 사람의 미세마음이 바로 다음 사람의 미세마음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위대한 마음은 여러 화신을 가질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또 환생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고 돌이나 나무에 붙어있는 미세마음도 있습니다. 또 윤회는 인간세의 윤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6도(六道, sad-gati)윤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천계(天界)에 태어난 마음은 수천년을 살 수도 있습니다.
이성에 관한 졸렬한 논의의 대부분이 이성을 초월한 신에 대하여 대자적으로(antithetically) 설정하는 데서 유래되는 것입니다. 붓다는 이미 이천오백년전에 신을 부정했습니다. 그 이상의 강력한 합리성의 예시가 어디있겠습니까? 불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서양은 이성이라는 것을 신에 대항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성은 도구화되어 버리고만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성은 신을 비실체화시켰으며 자연을 나의 존재내부로 끌어들였으며 그 모든 것을 무분별의 자비로 감쌌던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나의 주관적 정신의 프로젝션(투사)으로서의 대상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서양식의 관념론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나가르쥬나도 그러한 유식론의 관념성을 철저히 비판했습니다. 이성이 알아야 할 것은 사실이며 현실이며 여여(如如, tathata)의 궁극적 실상입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성에 관한 모든 논의는 그 논의가 되고 있는 맥락이라는 어떤 삶의 장을 떠나서 이야기될 수가 없습니다. 이성은 절대적으로 논의되어서는 아니되며 반드시 그것은 어떤 필드(Field) 속에서의 이성에 관한 논의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성 자체가 천수관음처럼 무한히 다른 모습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성을 너무 수학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으며, 그리고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나치게 물리적 세계에 한정시켰습니다. 그러니까 계산이 가능하고 진·위의 분별이 정확한 그런 물리적 세계만을 이성의 영역으로 설정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수학적·연역적 사유에 의하여 개발한 물리적 세계의 변혁은 참으로 놀라울만한 문명의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성 자체가 매우 폭력적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 속에 내재하는 자연을 소외시켰으며 인간과 신의 긴장감을 대적적으로 유지시켰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이성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의 계산적 기능을 말하는 주관적 이성(Subjective Reason)이든지, 전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객관적 이성(Objective Reason)이든지 모두 실체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체화된 이성의 역사는 계속 다른 실체와 대적하거나 대치되거나 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런 방식의 이성의 이해는 끊임없는 대립과 기만과 극복, 이런 투쟁의 자취만을 남깁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체화될 수 없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마음에 관한 논의입니다. 마음은 식(識)이며, 식은 인간의 의식작용의 총체적 측면들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불교에 있어서의 이성적 탐색은 반드시 자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성적 깨달음의 궁극에는 모든 것은 결국 연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존재며 실체성을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공의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의 체험은 이성적 자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성적 자각의 절대적 가치가 따로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비의 실천입니다. 즉 이성이란 연역적인 사유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곧 감정의 세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라는 존재에 있어서 이성과 감정을 양분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성적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무한한 이타(infinite altruism)의 자비행의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과학 그 자체가 이미 가치를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 가치의 본질은 보살의 정신이 구현하려는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같이 공영하고 같이 구원을 얻는 사회를 실현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얄팍한 의무감이나 규범적 도덕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아의 지혜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허망한 자아의 주체성이 상실되고 진실한 실상으로 전환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반야의 실천인 것입니다. 불교의 이성은 반야에 포괄되는 것이며 반야는 실천이며 실천은 곧 행위입니다. 이성적 깨달음이 곧 자비의 행(行)이지요.
저는 자라나면서 어느 순간엔가 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비를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을 물으신다면, 이 공과 자비를 통해 무엇인가 조금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해 통찰을 얻었다는 것, 그런 것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안은 도올의 질문.
<1권>
21쪽: 신적인 술 소마(蘇摩, soma)가 달을 신격화한 월천(月天), 즉 소마데바(蘇摩提婆, Soma-deva)와 동일시된 것도, 바로 달이 신들이 마시는 소마를 담고 있는 용기라는 생각에서 유래된 것이다.
27쪽~: [주역]이라는 중국경전의 곤괘 「문언(文言)」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아니 될 하나의 단어는 "적선지가"의 "가(家)"라는 단어다... 영어로 말하면 업보나 업보로 인한 윤회의 주체가 인디비쥬알(individual)이 아닌 패밀리(family)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대승불학에서 일어난 인도의 까르마사상에 대한 최대의 왜곡이다.
38쪽~: 중도(中道, majjhima patipada)라는 표현... 그것은 고통과 쾌락의 가운데 눈금이 아니라, 고통이나 쾌락으로는 도저히 도달될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길인 것이다. 중(中)이란 가운데가 아니요, 새로움이다.
88쪽: 싯달타란 "그 목적을 성취한 사람(he whose aims are fulfilled.)"이란 뜻이다... [수행본기경]에는... 이름을 지어 싯달타라 소리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싯달타의 음역을 보통 "실달(悉達)"이라 하는데 이것 역시 "모두 이루었다"라는 뜻을 교묘하게 내포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한 마지막 말과도 상통하는 표현이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19:30.)
96쪽: 보살(bodhisattva)이라는 개념이 대승불교에서 처음으로 조어된 것은 아니다... 대승의 보살이 모든 중생들의 성불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개방적 개념임에 반하여, 소승의 보살은 "앞으로 부처가 될 사람(a Buddha-to-be)"이라는 의미로만 쓰인 말이었으며, 그것은 싯달타 전생의 인물들에게 국한된 개념이었다.
112쪽: 싯달타는 애민한 마음으로 그 요혹한 마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케 하고
오욕에 물들음은 신통을 흐리는 도다.
내 모든 번뇌를 떠난 지 이미 오래되었거늘,
어찌 다시 독궤의 불구덩이로 뛰어들까보냐.
세간의 오욕이 중생을 불태움이,
아~ 세찬 불이 마른 풀을 태우는 것 같도다.
너희들의 몸뚱이는 허환이요 실체가 없으니
파도의 거품과도 같이 오래 머물 수가 없구나.
너희들의 엉킨 핏줄과 근골은,
사대와 오온의 가합일 뿐.
어찌 내 범부들과 같이 욕심을 내리오?
채색한 항아리 속의 독사들이여!
똥찌꺼기 가득 찬 가죽주머니에 불과한 그대들이여!
어찌 세간을 벗어난 나를 잡으려 하느뇨?
나는 공중을 자유로히 나는 바람과 같으니
그대들의 애욕으로는 영원히 날 묶어두지 못하리.
169쪽~: ... 생성되는 과정을 사유한 것을 순관(順觀)이라고 부른다...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기(起)하고
행(行)에 연하여 식(識)이 생하고
식(識)에 연하여 명색(名色)이 생하고
명색(名色)에 연하여 육처(六處)가 생하고
육처(六處)에 연하여 촉(觸)이 생하고
촉(觸)에 연하여 수(受)가 생하고
수(受)에 연하여 애(愛)가 생하고
애(愛)에 연하여 취(取)가 생하고
취(取)에 연하여 유(有)가 생하고
유(有)에 연하여 생(生)이 생하고
생(生)에 연하여 노사(老死)가 생한다.
... 그런데 싯달타의 인과(연기)의 특징은 반드시 생성의 인과와 소멸의 인과를 동시에 관(觀)한다는 것이다.
"생하는 법은 곧 멸하는 법이다." 이 한마디를 깨닫는 것을 곧 법안(法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83쪽~: 정(定, samadhi)이라 하면 우리는 선정이나, 좌선, 혹은 요가수행이나, 갖가지 명상법 등을 생각하기 쉽다... 그 말의 음사가 삼매(三昧)인데... 그것은 "어텐션(attention)"이라 번역하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
<2권>
348쪽~: 인류문명의 모든 장례는 분리의 제식(Rites of Separation)과 융합의 제식(Rites of Integration)이라는 이중장례(the Double Funeral)를 그 심층구조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초분"의 경우에 쉽게 알 수 있듯이... 소위 빈례(殯禮)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빈소를 차린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분리의 제식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시체가 다 썩고 나면 뼉다귀를 추려서... 이것이 장례(葬禮)인 것이다... 빈(殯)과 장(葬), 이것은 고대의 모든 죽음의 예식의 기본 스트럭쳐였으며 이중장례구조였다.
355쪽~: 사리(舍利)는 광물결정체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뼉다귀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 싯달타의 화장은 실제적으로 어떻게 거행되었을까?... 뼈를 안태우고 불을 껐다는 것이다... 해부학적으로 뼈를 연결하는 힘줄이 다 타버리면 중추성 골격 74개와 부속성 골격 126개, 이소골 6개 도합 206개의 뼉다귀가 남는다. 싯달타의 다비는 싯달타의 206개 뼉다귀를 얻기 위한 불의 제식이었던 것이다.
364쪽~: 스투파에 대한 의역은 없었는가? 물론 있다... "방분(方墳)", "대취(大聚)", "취상(聚相)"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모두 무덤의 형태와 관련된 것이다. [보살본업경]에는 아예 "부처님의 종묘(佛之宗廟)라고 표현하고 있다.
372쪽: 속리산 법주사에 가서 팔상전 5층목탑을 보면서 누가 산치대탑 스투파를 연상할 것인가? 팔상전 5층누각 꼭대기를 잘 살펴보면 그 정수리에 노반(露盤)이 있고 그 위에 복발(覆鉢)이 있으며 그 위에 보륜(寶輪)의 장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꼭대기의 눈꼽만한 장식품들이 산치대탑같은 스투파가 퇴화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389쪽~: 부처님 뼈가 들어있으면 그것을 스투파라 부르고, 부처님 뼈가 들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차이띠야라고 부른다... 차이띠야는 우리 감각으로 이야기하자면 불상 대신 부처님의 부도(浮屠)를 모신 법당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영묘, 사당 등으로 의역되는 것만 보아도 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차이띠야와 승려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비하라(vihara, 승방)와의 접합이 일어나고 그렇게 해서 가람이 형성되어 갔던 것이다.
396쪽~: 현재 고타마 싯달타의 생몰연대는 이렇게 다양하다.
남방전승 624 ~ 544 BC
희랍전승 566 ~ 486 BC
인도·중국·티벳·일본 463 ~ 383 BC 또는 448 ~ 368 BC
<3권>
512쪽: 달라이라마曰, "난 나의 전생의 화신(the reincarnation of my previous life)일 뿐입니다."
537쪽: 달라이라마曰, "티벹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성에 바탕을 두지 않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데로나 흘러갈 수 있는 개울물과 같다'"
542쪽: 달라이라마曰, "나는 보편종교를 신봉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의 교리를 인수분해해서 만든 하나의 보편적 종교의 가능성을 믿지 않습니다... 이 지구에는 다양한 정신적 성향과 관심, 영적 기질, 그리고 문화적 풍토, 언어적 감각과 기호, 심미적 통찰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양성에 따라 종교적 해결도 다양한 선택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양성을 말살시키면 오히려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것입니다."
555쪽: 달라이라마曰, "신의 해석입니다. 신을 인격적 존재로서 이야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비인격적 추상적 진리체계로서 이야기할 것인가?... 그런데 기독교는 신에게서 인격적 존재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습니다."
559쪽: 달라이라마曰, "불교가 인간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켜준다라는 도올선생의 말씀은 제 가슴을 깊게 후려치는 명언입니다."
561쪽: 도올曰, "어떻게 이 과학의 시대에 있어서 동정녀탄생이나 육신부활의 비인과적인 신화적 사태를 사실로서 강요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화는 신화로서 족한 것이 아닙니까?"
571쪽: 달라이라마曰, "우리 불교도들은 인류의 역사가 어떤 위대한 초월적 실체에 의하여 계획된 대로 움직여간다는 거시적 사관을 거부합니다. 즉 그러한 섭리적 사관은 무아론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제국주의적 탐욕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이론으로 악용될 수 있는 무한한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573쪽: 도올曰, "일본의 불교는 어디까지나 신토이즘(Shintoism, 神道)이라고 하는 영원히 떼어 버릴 수 없는 자체 샤마니즘의 토양 위에서만 배접된 것이며, 그나마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반기독교정책으로 인하여 모든 테라(절)는 일종의 관청같은 것으로 변모하여 버렸습니다. 일본의 현실적 불교는 일종의 형해화된 대처승들의 제식일 뿐입니다... 일본불교의 가치는 종교적 실천에 있다기 보다는 탁월한 학문적 업적에 있습니다."
580쪽~: 도올曰, "르네쌍스의 과학자들은 이 우주에 대한 신의 입법체계를 알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즉 과학이라는 기독교의 사생아는 더 이상 기독교라는 아버지와의 핏줄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582쪽: 달라이라마曰, "인간과 우주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자로서의 신의 개념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맥락에서는 불교는 분명한 무신론입니다."
583쪽: 도올曰, "무신론 그 자체가 하나의 심오한 신론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망각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과학이라는 인과세계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영성(spirituality)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에 저는 21세기 인류사의 정신적 패러다임 쉬프트가 불교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617쪽~: 도올曰, "가이드曰, '... 소승에는 불상이 없고 대승에는 불상이 있습니다.'"
달라이라마曰, "여기서 말하는 소승(Hinayana Buddhism)이란 결국 원시부파불교를 말하는 것이겠군요... 산치대탑이나 바르후트대탑(Bharhut stupa)에 많은 부도가 그려져 있지만 불타의 인간모습은 없습니다. 보리수나무나 발자국이나 금강좌 등 그 상징적 표현만 새겨져 있지요."
624쪽~: 달라이라마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싯달타의 열반 때문입니다. 그의 열반은 완전한 윤회로부터의 해탈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다시 인간의 몸을 지닌 어떤 형상체로서는 환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온전한 열반을 기리는 초기승단에 있어서 붓다를 인간의 형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경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타부였습니다."
감상:
인도에 대한 자료를 이것저것 꺼내보다가 옛날 읽은 이 책을 다시 들춰보는데, 그것은 새로 얻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