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寺詩(산사시)

이달(李達)

by 조영필 Zho YP

山寺詩

- 佛日庵贈因雲釋(불일암 인운스님에게)




寺在白雲中(사재백운중)

白雲僧不掃(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객래문시개)

萬壑松花老(만학송화로)


절은 흰 구름 속에 있는데

흰 구름을 스님은 쓸지 않네

손님이 와서야 문은 열리고

온 골짜기에 송화가루 내렸네




불일암(佛日庵)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지리산(智異山)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진감국사가 창건한 암자. 쌍계사의 부속암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부속암자이다. 신라 말에 쌍계사를 중창한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하였고,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고 수도도량으로 삼은 뒤 불일암이라 하였다.

그 뒤 폐허화된 것을 1911년에 쌍계사 승려 양용은(梁龍隱)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우로는 인법당(人法堂)이 있고, 중요한 문화재는 없으나 주위의 경치가 절경이다.

암자 옆에는 지리산 제1폭포라는 불일폭포(佛日瀑布)가 있으며, 암자 뒤쪽으로는 청학봉(靑鶴峰)과 백학봉(白鶴峰)이 있다. 이 암자에는 350년 전까지만 하여도 청학 한 쌍이 살았는데 어느 날 사냥꾼이 돌을 던져 날개가 상하자 날아가 버렸다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불일암(佛日庵))]



이달(李達)


조선시대 『손곡집』을 저술한 시인.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원주 손곡(蓀谷)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수함(李秀咸)의 서자이다.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그러나 박순(朴淳)은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깨우쳤다. 그리고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에 그는 이백·왕유·맹호연의 시를 보고 시의 오묘한 이치가 그들의 작품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열심히 익혔다. 『이태백집(李太白集)』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모두 외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5년 동안 열심히 당시를 배우자, 시풍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비슷한 품격의 시를 쓰던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奉恩寺)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이달은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했지만 또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했기에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기도 했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됐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한편 잠시 동안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의 한 여관에 얹혀살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하지 않으며, 충청남도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이달의 시는 신분 제한에서 생기는 울적한 심정과 가슴 속에 간직한 상처를 기본 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시어를 맛깔나게 사용했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에 이달이 지은 「별이예장(別李禮長)」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만큼 그의 오언절구는 유명했다.

한편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이달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그 가운데에 높은 경지에 오른 시는 왕유·맹호연·고적(高適)·잠삼(岑參)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전기(錢起)의 기풍을 잃지 않았다. 신라·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 6권 1책이 있다. 이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西潭集)』이 있다고 전하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 1) 이수광(李睟光)이 쓴 『서담집』의 서문(序文)만이 전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달(李達))]


허균은 성소부부고 손곡산인전에서 "그의 시는 청신하고 아려하여 수준 높게 지은 것은 왕유, 맹호연, 고적, 잠삼에 버금가고, 수준이 낮은 것도 유장경, 전기의 운율을 잃지 않았다. 신라, 고려 이래로 당시를 지었다고 하는 사람 중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고, 또 "평생 몸 붙일 곳도 없어 사방으로 유리걸식하여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궁색한 액운으로 늙어간 것은 그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몸은 곤궁했어도 불후의 명시를 남겼으니 한 때의 부귀로 어떻게 그와 같은 명예를 바꿀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옛글산책: 한시소풍, yetgle.net/5541)



Note:

인터넷의 많은 블로그에서 시의 제목을 ‘산사(山寺)’로 적고 있는데, <손곡집>에 따르면 ‘불일암증인운석(佛日庵贈因雲釋)’이다. (국역손곡집, 허경진역, 보고사; 손곡집, 안병학 역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인터넷의 거의 모든 블로그에서 첫 구절을 사재백운중(寺在白雲中)으로 하고 있는데 <손곡집>에 따르면 산재백운중(山在白雲中)이다. 사(寺)가 아니라, 산(山)인 것이다. (국역손곡집, 허경진역, 보고사; 손곡집, 안병학 역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그런데 내가 대학시절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에도 사재백운중(寺在白雲中)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 한 자에 불과하지만 이는 대단히 오래되었으며 또한 광범위하게 유포된 오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왜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였을지 그 원인이 상당히 궁금했다. 조사해보니 그것은 허균의 <학산초담(鶴山樵談)> 때문이었다. 허균의 <학산초담>에서는 이 시가 ‘산사시(山寺詩)’로 되어 있고 그 첫 구를 산(山)이 아닌 사(寺)로 적고 있다. (옛글산책: 한시소풍, yetgle.net/5541; 다음블로그, banyane, blog.daum.net/sjgold/17110467)


어느 쪽을 정본으로 할까? 고민이 된다. 허균의 <학산초담>은 1593년에 엮은 것이고, <손곡집>은 1618년에 간행한 것이다. 허균(許筠)은 이달(李達)의 말년 제자로서 이달의 사후 그의 문집인 <손곡집>을 정리해서 출간하였다. 그런데 1593년의 <학산초담>도 그렇고, 1618년의 <손곡집>도 그렇거니와 둘다 허균의 기억에 의거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인하여 <학산초담>의 쪽이 더 원본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학산초담>은 허균이 25세로 매우 젊을 때 저술한 것으로 그만큼 기억이 정확하였을 것이며, 또 당시에는 이달이 살아있을 때이므로 교정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달이 생전에 교정하라고 했기 때문에 나중에 이달의 사후 허균이 <손곡집>을 간행할 때 '산'으로 바로 잡았을 수도 있다. 이것도 저것도 가능한 주장이라 이런 문제는 평생 고민해도 알 수가 없다. 오래도록 고민한 끝에 필자는 '산'을 정본으로 하였다. 시의 이미지를 좁고 단순하게 보면 '사'가 어울리지만, 시인이 멀리서 절을 품은 산을 찾아 갈 때의 느낌을 연상해 보면 '산'이 더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시인은 '산'을 바라보는 순간, 이미 그 '산'의 한 스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산'에는 여러 사찰과 많은 스님이 있으므로 그 '절(좁은 공간)'에 가야만 그 스님의 공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산(넓은 공간)'을 오르는 순간 이미 작자는 그 스님과 한 공간에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는 보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다시 ‘산’을 ‘사’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3번째 연에서 손님이 와서 절문이 열리려면, 아무래도 산보다는 사가 문맥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2025. 12. 25.)


인터넷의 몇몇 블로그에서는 작자 이달을 의병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시인 이달(1539-1612)과 의병장 이달(1561-1618)은 비슷한 시대의 인물이지만, 이름만 같을 뿐 서로 다른 분이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의 어떤 블로그에서는 이 시의 불일암을 송광사 불일암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불일암은 지리산 쌍계사의 불일암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손곡집>에는 이 시의 시제와 제목이 동일한 시가 하나 더 있다. 그 시는 오언율시로 <손곡집> 권3에 실려 있는데, 그 시의 바로 다음 시의 시제가 '쌍계사'이다. 또한 그 오언율시 '불일암증인운석'에는 불일폭포와 청학봉, 백학봉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오언절구로 분류를 달리하여 <손곡집> 권5에 실려 있다. (국역손곡집, 허경진역, 보고사)

2. 안병학은 ‘불일암은 지리산 쌍계사에 속하는 암자이다’ 라고 주를 달았다. (손곡집, 안병학 역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p. 397, 232번 주석)

3. 이 시에 보이는 구름이 산을 가리는 경관에 대한 묘사와 만학(萬壑)이라는 표현은 지리산이나 금강산 정도로 산이 높으면서도 지세가 상당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작은 산의 불일암은 해당될 수가 없다.



감상:

암자 뒤쪽으로는 청학봉(靑鶴峰)과 백학봉(白鶴峰)이 있다고 한다. 鶴(학)과 壑(학)은 서로 다른 뜻이지만, 음상학적으로는 만학(萬壑)이라는 표현과 잘 어울린다.

시는 구름을 표현의 장치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구름은 스님의 법명 인운(因雲)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스님의 법명이 ‘구름(雲)으로 말미암아(因)’ 스님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제 佛日庵贈因雲釋을 단순히 문장으로 읽게 되면 물주구문(物主句文)으로 이해하여, 불일암이라는 절이 인운스님에게 시를 주는 것으로 생각할 구실이 생긴다. 따라서 '불일암이 시를 지어 구름으로 원인을 삼아 깨닫게(釋) 하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불일암이 시를 지었는데 나(이달)보고 받아쓰게 해서 당신(인운)에게 주라고 하네요 하는 유머러스한 해석이 감각적으로 떠오른다.

그런데 국역손곡집을 보니 이달이 시의 제목을 짓는 작법이 대부분 '장소 + 증 + 수증자'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물주구문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거지 오역일 수밖에 없다. 유머가 사라진다.

불일암의 불일(佛日)은 불일(不一)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만상이 구름과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시에서 백운(白雲)은 하얗게 늙은 노스님인 인운(因雲)을 슬그머니 겹치도록 만들면서 동시에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寺(山)在白雲中: 산이 있는데, 흰 구름 속이라 (절을 찾아 산을 오르고 있는데 구름 안개가 자욱하다)

白雲僧不掃: 이렇게 눈을 가리는 구름을 스님은 왜 쓸지 않고 내버려 둔 걸까? (거의 다 온 것 같은데도 지척지간의 절이 보이지 않네)

客來門始開: 손님이 절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는데 (문이 보여 절의 싸립문을 삐그덕 열어보는데)

萬壑松花老: 그 소리에 그만 골짜기마다 가득 송화가루가 내리네 (갑자기 구름 안개가 걷히고 그제서야 온 골짜기에 샛노랗게 덮힌 송화가루가 보이네(佛日의 세계))


이 시는 대학시절 처음 접했는데, 그때는 시의 제목을 산사시(山寺詩)로만 알았다. 이제 시의 원제가 불일암증인운석(佛日庵贈因雲釋)임을 비로소 알게 되니 시를 보는 느낌이 또 달라진다.

(2021. 10. 10.)


난 이 시를 그저 풍경시 뿐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최근 곽예의 상련과 이이의 산중 이 두 편의 시를 읽고 보니, 이 시에서 풍경시 이상의 품격이 느껴진다. 그것은 인운스님의 풍모에 대한 은은함이다. 백발의 노스님(또는 백미/백수의 노스님)... 그는 언제 머리(눈썹/터럭)를 깍으려는가? 그런데 그가 한번 법문을 펼치니 사바세계가 용화세계로 바뀌누나~ (2022. 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