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미(2013), 고구려유적 출토 화폐 검토, 고구려발해연구 제47집.
고구려가 화폐를 발행하지 않고 계속해서 현물거래를 했던 이유?
고구려유적에서는 포전, 명도전, 제도폐, 일화전, 명화전(이상 전국시대), 반량전, 오수전(이상 서한), 왕망전(화천, 대천오십 등) 등 고구려 초기에 해당되는 시기의 화폐가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고대국가로 발전한 이후에는 화폐 출토가 많지 않다. 화폐는 분묘유적에서 다수 출토되고 있으며, 압록강 중·상류역을 중심으로 그 좌·우안, 즉 환인과 집안 일대에 밀집되어 있음.
고구려가 무화폐 경제시스템을 기본으로 하는 현물경제시스템을 유지한 이유 중의 하나로 조공무역을 주목.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말을 사오라고 함(삼국사기 45, 열전 5, 온달) -> 시장, 상업활동
고구려유적에서 출토된 포전은 평수평견의 방족포로서 도음포와 평음포이다. 이 도음과 평음의 명문은 전국시대 연에 속했던 지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유한, 고려시대의 화폐사 -화폐유통시도기의 전반-
한국화폐사에서 주조화폐는 996년(고려 성종 15) 철전의 주조가 처음으로(고려사 3, 세가 3, 성종 15년 4월 신미), 이때 주조된 철전은 1002년(목종 5)까지 지속되었다. 그후 1097년(숙종 2)에는 주전관을 설치하고 동전을 주조하였으며, 예종 초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주조가 진행되었다.
고려시대 주전사업의 실패의 원인은, 고려시대 사회경제발전단계를 자급자족 위주의 물물교환 단계로 보고 생산물의 유통은 직접생산자가 우연적으로 하는 상행위가 주류라고 파악할 때, 여기서의 교환과정에서는 일정한 액면 가치를 지니는 화폐의 보급을 바랄 수 없고 대신 반물품화폐가 발달한다는 견해(김병하(1972), 고려시대의 화폐유통; 김병하(1975), 고려조의 금속화폐 유통과 그 시각.)가 있음.
919년(태조 2)에 송악을 중심으로 궁궐과 시전을 세우고 방리를 구분(고려사 1, 태조 2년 1월) --- 시전상업의 활성화와 아울러 물품의 구매와 판매를 위한 매개체의 존재 여부가 주목되는데...'고려에서는 딴 물건들은 다 물건으로써 교역을 하였지만, 오직 약 판매에 있어서는 돈으로 무역한다'(서긍, 고려도경 16, 관부조)
'오직 저포나 은병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의 세미한 것으로 필이나 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조정에서 전보(화폐)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서긍, 고려도경 3, 성읍 무역조).
'이때부터 은병을 화폐로 사용하였는데 그 제도는 은 1근으로써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만들었으며 속칭은 활구(闊口)라고 하였다.'(고려사절요 권6, 숙종 1)
송은 국초부터 다량의 동전을 주조하여 초기에 당대의 주조액을 훨씬 능가하는 80만 관을 주조하였으며, 이후 매년 100만 관을 상회하여 1068년에는 최고로 연간 600만 관을 주조하였다(정용범(1997), 고려시대 중국전 유통과 주전책 - 성종·숙종 연간을 중심으로-.). 이처럼 많은 동전을 주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송은 만성적인 동전부족현상에 시달려 송 초에는 임시대응책으로 송 태종 말부터 진종 초까지 민간의 동전 사주를 묵인하였다. 또한 일부 지방에州서는 동전 부족현상을 만회하기 위해 종래의 악전인 철전의 사용을 인정하기도 하였으며 새로이 대철전을 주조하여 유통하기도 하였다(정정애(1965), 송초기의 화폐정책).
동전의 많은 해외유출은 동가를 폭등시켜 민간에서는 오히려 동전을 녹여 그릇을 만듦으로써 다섯 배 가까운 폭리를 취할 정도였다(송사 180, 식화 하2, 전폐) ... 동전의 해외유출은 송의 재정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위해 염(鹽)·차의 전매제나 관세를 비롯한 상세(商稅) 징수에 주력하였다. 송은 대외무역에 많이 주력한 나라였기 때문에 상세 중에서도 관세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송은 광주(廣州)·천주(泉州)·명주(明州)·항주(杭州) 등 주요 항구에 일종의 세관인 시박사(市舶司)를 설치하여 관세의 수입증대에 노력하였다. 그 중 항주는 주전감도 설치되어 있었는데(정정애(1965), 송초기의 화폐정책), 중국동전의 해외유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13세기에 화폐 유통 이후 초래된 사회경제적 폐단을 의인화하여 지은 임춘(林椿)의 공방전(孔方傳)이 간행된 사실도 있다(동문선 100, 공방전).
고려 때 사용되었던 지폐로는 중국에서 유입되었던 보초(寶鈔)와 저화(楮貨)를 들 수 있다.... 원은 중국에 입성하기 전에는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으나, 중국에 입성한 후 중국통치 100여 년간 지폐인 보초만을 단일통화로 삼았다... 원의 보초는 실질가치를 지닌 은으로 태환비율이 정해져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불환지폐였다... 때문에 고려의 입장에서는 보초의 유통에 따른 은의 유출이 큰 문제이었다.
고려왕조가 가장 먼저 철전을 주조한 이유는 원료 구입의 편리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한반도에서 많이 생산되는 철을 주원료로 한 철전을 주조 유통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 철은 원료의 재질상 부식이 빠르다. 이는 화폐로서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 은과 동이 본래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닌 만큼 동전과 은병은 마침내 다시 실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니....(고려사 79, 식화지 2, 화폐)'
이철성, 상평통보는 왜 만들어졌나.
왜 엽전인가
엽전은 돈의 탄생과정에서 생긴 말이다. 구리로 동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주물을 위한 형틀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나뭇가지에 잎사귀가 매달린 것과 같은 모양의 형틀을 짰다. 한 번 주물을 부어 여러 개를 만들기 위해 고안한 디자인이었다. 이 형틀에 동전의 재료를 붓고 굳기를 기다려 꺼내면, 돈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잎사귀 마냥 달라붙어 나왔다. 나뭇가지에서 그 잎사귀를 떼어내면 엽전(葉錢)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엽전의 대명사는 1678년(숙종 4)에 만들어진 상평통보(尙平通寶)이다.... 1592년 임진왜란은 은화와 동전을 사용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있던 명나라 군사에게 조선은 급료와 식량을 지급해야 했고 그 부담은 한 달에 은화 12만냥을 훌쩍 넘겼다. 이후 17세기 국제무역의 발달도 조선에서의 은화 유통을 자극했다. 이 시기 조선에서는 북경으로부터 수입한 비단실을 왜관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중개무역이 성행하였다. 역관과 상인은 미곡2천 석 값어치의 은화를 가지고 북경으로 갔으며, 중개무역을 통해 얻는 이익은 원가의 3배에 달했다. 국제무역이 상업계를 성장시키고 자본 축적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은화는 주로 대외 무역 결제 수단 및 정치·외교 분야 재정 축적을 위한 고액 화폐였다.... 청·일을 잇는 대외무역은 화폐 주조의 원료인 동(銅)의 조달을 원활하게 했다.
박지원의 [예덕선생전]과 [허생전]은 엽전이 활발히 유통되던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예덕선생을 똥을 져 나르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역부의 우두머리로 엄행수(嚴行首)라 불렸다. 그들은 사람똥은 물론 말똥, 쇠똥, 횃대 아래 떨어진 닭똥까지 긁어모아 원예작물을 재배하고 있었다. 왕십리의 배추·무우, 석교의 가지·오이·수박·호박, 연희궁 근방의 고추·마늘·파,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원의 토란은 모두 상업적 농업을 위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1년에 6천냥 정도의 이득을 올릴 수 있었다. 평안도의 담배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도 유명했다.
상평통보의 계산 단위는 10진법에 의하여 엽전 하나가 1푼(文)이고, 10푼이 1전, 10전이 1냥, 10냥이 1관이었다. 그러나 이때 주조된 상평통보 1푼의 중량은 1푼이 아니라 20전 곧 2전(錢)이었다.... 상평통보의 가치는 법률로 규정되어 있었는데, 은과의 교환비율을 법률로 정하여 강제적으로 통용시키려 했다. 그 교환비율은 대개 상평통보 1문을 은 1푼에 준하도록 했는데 이는 쌀 1되에 해당했다.
1679년(숙종 5) 허적은.... 주전은 비용을 빼고도 100%의 이익이 있었던 것이다... 1778년(정조 2) 홍국영도...근래에는 2/10의 이익을 남기는 데 불과합니다.
상평통보는 이후 약간의 부침은 있었으나 정부가 각종 부세를 현물대신 돈으로 받게 하여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대동세의 일부가 돈으로 징수된 것은 물론 군포를 비롯한 각종 신역과 노비 신공까지도 돈으로 바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상평통보는 날로 확대되어 가는 수요에 비해 원료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고 금속화폐를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수장하는 경우가 많아져 돈이 쌓여 유통되지 않는 전황(錢荒) 현상을 낳았다.
동전 1푼의 무게가 1742년 2전에서 1752년에는 1전 7푼, 1800년대에는 1전 2푼까지 떨어졌다. 소재가치가 절반 이상 떨어진 엽전이 동일한 명목가치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이전·당오전·당십전 등 고액전 주조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상평통보 즉 엽전의 가치와 신용을 결정적으로 실추시킨 것은 대원군의 당백전 주조였다. 대원군은 1866년... 1천6백만 냥이나 남발했다. 1867년부터는 3~4백만 냥의 중국 동전을 수입하여 화폐 질서를 어지럽혔다.... 대원군 때 생성된 악화 엽전에 대한 불신감은 결국 개항기까지 이어졌다.
박평식, 조선전기의 화폐론
국초 태종-세종조에 펼쳐진 화폐론과 그에 따른 화폐정책은 그 의욕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화나 동전 중 어느 것의 보급에도 실패한 채 끝내 교환경제의 현실에서 5승포를 비롯한 포화와의 겸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권인혁, 조선초기 화폐유통 연구 - 특히 태종대 저화를 중심으로-
자체의 실질가치가 없어서 화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도 없었다. 당시의 경제수준이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산업구조였고 또한 자급자족 상태에서 이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저화(지폐)의 위력은 충분히 발휘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제반 제약하에서 기존의 오승포 지위를 대신하여 저화가 원활히 유통될 수 있으려면 저화에 대한 국가 공신력이 적극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저화의 명목가치만큼 현물로 교환해줄 수 있는 항구적인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태종대 이루어진 국고 현물과 저화의 교역을 보면 항구적 성격을 띄지 못하고 일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시책이 저화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저화유통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저화가 지방에 분송되었다 해서 그것이 곧 유통계에 투입된 것은 아니고 그곳 관아에 쌓여 있는 것이(태종실록 23, 태종 12년 6월 무오) 상례였다.
한편 저화가 널리 유통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서는 저화 자체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저화는 그 크기가... 저주지 경우엔 길이가 1척6촌 폭이 1척4촌이 되고 저상지는 길이가 1척1촌, 폭이 1척이 되기 때문에 이용하기에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화지에 있어서도 그 종이가 각도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후, 박, 정, 추의 차이가(태종실록 23, 태종 12년 2월 경오) 발생하여 심한 간택현상을 낳게 하였다. 더우기 오랫동안 사용함에 따라 나타나는 연파현상은 그에 대한 간택현상을 보다 가열화시켜 이에 대한 규제를 펴게 하는데 그 성과는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것 같다.
위조저화가 시중에 나돌고(태종실록 24, 태종 12년 10월 기사) 나아가서는 지방에까지 유통됨에 따라 저화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다. 위조행위는 주로 관리들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저화가 백성들에 친숙해질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명목가치가 조미 2두, 오승포 1필이라는 등가로 정해져 그 미만의 소액거래엔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이때 주조될 동전은 조선통보라 호칭하고 동전 100개가 저화 1장의 가치에 준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동전이 병용된다는 사실이 유포되자 백성들 사이에는 저화가 무용지물로 전락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타나 저화가치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민심의 동요와 저화가치의 하락현상을 결국 주전정지의 명으로 귀착되게 되었다.
이때 실시된 획기적인 저화유통책으로는 부분적인 금납화와 저화수속법을 손꼽을 수 있다.... 저화로 수납하여도 국가재정에 하등의 위협을 주지 못하는.. 그 중에 공상세, 행상세, 재인·화척신공, 혁거사지노비신공 등이 저화로 수납되었고 그외 세공저화, 호저화, 연호저화 등의 세목이 설정운영되었던 것이다. 한편 저화수속은 장 1백이하의 유죄자에게 형집행 대신에 저화로 대속하는 제도가 된다.
우선 당시의 경제수준이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자급자족단계에 있었고 화폐에 대한 백성들의 인식도 그 자체의 실질, 실용가치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화는 이미 그가 설 땅과 그를 소유할 사람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저화유통의 1차적 조건을 상실한 저화는 자체의 크기와 지질 문제 그리고 소액거래엔 하등의 도움을 줄 수 없는 명목가치로 인해서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더우기 국고현물(미, 두, 잡물)과의 교역이 영속적 성격을 띄지 못함에 따라 저화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도ㅡㄴ 더욱 하락했던 것이다... 오히려 여말에 들어온 목면이 주요 유통수단으로서 각광을 받게 된다. 목면의 유통매체로서의 등장은 후일을 기약한다.
원유한, 조선전기 화폐유통정책의 역사적 의의
운수교통이 불편하다는 점과 화폐 제조기술이 미숙하고 기술인력동원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운수교통의 불편은 화폐원료를 중앙으로 운반해 오고 제조한 화폐를 각 지방으로 운송하는 일을 어렵게 하였으며 화폐제조기술의 미숙성 내지 기술인력의 동원난은 적절한 때에 필요한 수량의 화폐를 만들 수 없게 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왕조당국은 상품생산 내지 교환경제가 비교적 활발하여 화폐수용력이 큰 지역으로부터 화폐를 점진적으로 유통보급시켜 나가려 하지 않고 처음부터 서울과 지방 등 광범한 지역을 화폐 유통보급 대상지로 삼았다.
중국 내지 세계 화폐발달사를 보면 저화와 같은 전근대적 지폐는 동전이나 철전 등 주화의 유통기반이 확립된 이후에 주화의 다량 운반이 불편하다고 하는 등 그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고려시대에도 그러했지만 주화의 유통기반이 확립되기 이전 단계에서 동전 보다 앞서서 저화를 법화로 유통보급시키기 위해 화폐 유통정책을 추진하였다.... 한국 화폐사 발달과정에서 볼 때, 전근대적 지폐(저화)가 법화로서 통용되 수 있는 적절한 시기는 동전의 운반이 불편하다고 하는 등 동전이 가지는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어음과 환전표가 통용되는 한편 지폐 사용문제가 제기 논의된 18~19세기경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왕조는 명에 대한 과중한 금·은 세공의 면제를 위한 외교를 추진하고 있던 15세기 초에 고려시대부터 통용된 은병의 사용을 금지하였고... 칭량 금·은화의 국내외 유통의 금지는 물론 금·은 생산을 통제하였다...칭량 구금속 화폐는 본시 저화나 동전 등 명목화폐의 본위화폐로서 그 유통기반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전기 화폐유통 정책의 중요한 실패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왜란 중에 명군이 다량의 칭량은화를 가져와 군사비로 사용하였고 이것은 조선왕조 초기 이래로 통제되었던 은광개발이 비교적 활발해지는 동시에 금지되었던 칭량은화 유통이 허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칭량은화는 공·사유통계에서 활발히 유통되는 동시에 국제무역 결제수단으로 사용되는 한편, 17세기 초엽부터 유통이 시도되었던 동전의 유통가치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는 등 본위화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여 동전의 유통보급 내지 화폐경제 확대발전의 기반형성에 기여하게 되었다.
원유한, 조선시대 화폐사 시기 구분론
영의정 허적(1610~1680)... 1678년(숙종 4)에 동전을 법화로 채택, 유통할 것을 제의하고 초기의 화폐정책운용을 주도한 인물이다.
'화폐유통보급기'의 전반에 실천적 실학자이며 진보적 개혁사상가로 활약한 김육이 동전을 법화로 유통보급하기 위해 화폐정책을 추진한 사실은... 같은 시기의 실학자 유형원이 정리 쳬계화한 화폐정책론, 즉 동전 유통 보급론은 뒷날 왕조당국이 화폐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이론적 근거로 참고 활용되었다.
효종 즉위초부터 내밀히 추진한 북벌계획은 효종의 죽음으로 이완되었고... 즉 북벌정책이 지지부진하자 ... 당시 감축한 군대와 군사적 목적으로 동원된 노동력은 생산노동력으로 전용될 수 있었고 군기 제조원료로 비축한 동은 화폐원료로 충당될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동전이 제반 화폐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자.. 국가의 재정궁핍을 화폐주조사업의 임시적 수익으로써 충당하려는 경향...이를 계기로 민간인의 동전 사주행위가 성행하여.. 유통량 과다로...유통가치가 폭락하는... 그리하여 국가의 화폐정책은 종래와 달리 동전 유통보급 우선주의에서 동전유통량을 적정히 조절하여 화폐가치를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서는 관청 보유의 포를 일반 유통계에 방출하여 동전을 환수함으로써 화폐유통량 과다에서 오는 모순과 폐단을 극복하고 화폐가치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화폐경제가 발달됨에 따라서 관직의 상품화가 촉진되어 중앙정계에는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지방관리의 회뢰(賄賂)와 청탁은 물론 농민착취가 자행되는 등 관기문란 내지 행정질서의 문란이 조장되었다.
화폐경제의 발달로 문벌이나 정치권력 지향적인 봉건 조선왕조의 사회위신척도가 재부 중심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촉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조선시대에 있어 수리시설은 미비했고 영농기술 역시 미숙하였기 때문에 한수해(旱水害)는 농사의 풍흉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국가재정의 보완과 구호비 조달의 응급성에 비추어 가장 짧은 시일 내에 최다량의 재화를 마련하는 길은 당시 봉건사회의 전통적 생산양식상에서 볼 때 오로지 화폐를 주조 발행하여 임시적 수익을 취하는 것으로만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1725년(영조 1)....1731년(영조 7)...1742년(영조 18)에 이르러서야 영조가...'화폐 유통에 대한 반동기'가 '화폐경제 확대발전기'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은 ... 상설 조폐기관으로 '전환서(典圜署)'의 설치 운용방안을 구상 제시하였다.
정성일, 조선의 동전과 일본의 은화: 화폐의 유통을 통해 본 15~17세기 한일관계
15~17세기 한일경제교류사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양국간 화폐유통이다. .. 대체로 16세기 초반까지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일본에서 조선으로 양국의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15세기 전반기에는 조선의 동전이 일본으로 유출되고 있었으며 16세기 초반까지도 조선의 은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었다. 그런데 1530~40년대부터는 화폐유통의 흐름이 역전되어 일본의 은이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약 50년 동안 일본은화의 조선 유입이 피크를 이루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일본 도쿠가와 바쿠후의 은화에 대한 통제로 말미암아 은화의 해외유출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으며 결국 조선의 일본은화 수입도 쇠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공간을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그리고 시기를 17-18세기로 한정할 경우 이때 주목을 받고 있는 교역품 중의 하나가 [일본의 은·은화]이다. 그것이 조선뿐 아니라 중국이나 유럽시장으로까지 유출·유입되어 간 점에 주목하여 그 유통경로를 가리켜 [실버 로드]라든가 [은의 길]이라 부르기도 한다(田代和生(2002), 근세일조통교무역사의 연구, 創文社). 당시 조일간 경제교류의 성쇄를 결정한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서 [일본의 은(은화)]를 꼽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