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2007), 주화도입 이전 화폐사용 양상 -아카익(Archaic) 시기 그리스의 도구화폐와 칭량은(稱量銀)-, 역사와 세계 31.
아직 불이 닿지 않은 세발솥(tripod)이 일곱 개, 황금 열 탈렌트.
번쩍이는 가마솥(cauldron) 스무 개 그리고 잰 걸음으로
경주에서 상을 탔던 힘센 말 열두 필.
...
그리고 훌륭한 공예에 능한 여인 일곱 명을 주겠소.
...
이들을 그에게 줄 것이며, 또 이들 속에는 얼마 전에 그에게서
빼앗아 온 브리세우스(Briseus)의 딸도 끼어 있을 것이오.(Iliad o. 122-132, 천병희 역)
아킬레스의 포로와 브리세우스의 딸 브리세이스(Briseis)를 전유함으로써 아킬레스를 화나게 했던 아가멤논(Agamemnon)이 아킬레스의 화가 가라앉기를 바라며 제공했던 선물의 내용이다... 세발솥과 가마솥 그리고 쇠꼬챙이(spits)는 모두 제의에 사용된 도구라는 점이 공통점이고.... 교환을 위한 화폐라는 이차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특이하다(라움(B. Laum)은 종교행사에서 시작된 가치 척도의 개념이 화폐발달의 시초가 되었고 그러한 개념이 점차 세속화되어... 교환의 목적에 점차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Bernhard Laum(1924), Heiliges Geld.)... 라움은 스파르타에서 여러 개가 출토되었던 철제 '낫'이 일종의 화폐로 쓰였다고 주장... 동북아시아에서 화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관자(管子)]에 나온다... 진주와 비취를 상급 돈, 금을 중급 돈, 삽과 칼은 하급 돈으로 여겼다(Jonathan Williams, 돈의 세계사(이인철 역).
고졸기 그리스에서 6개의 쇠꼬챙이를 한 세트로 하는 드라크마가 무게체계를 형성하고 있었고...근동에서 도입된 탈렌트, 미나가 고액권에 적용된 것과 더불어 소액권에 적용되어 주화가 도입될 시기에 주화의 무게체계로서 쉽게 접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화가 발명되기 이전 은의 무게를 재어 사용하던 단계, 즉 지은경제(internal economy based on silver bullion)가 고대근동에 존재하였다... 은의 무게를 재어서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저울이 상인들의 필수품이었다(비장(hoard: 비밀리에 은닉된 보물)으로 증명)... 국제무역과 일상생활에서 칭량은을 사용하던 지은경제는 주화가 발명되기 전에 사용되었던 화폐 중에서 가장 발달된 단계였다... 무게를 재는 대신에 의장과 명문을 집어넣는다는 생각만 도입된다면 언제든지 주화를 발명할 수 있었다.
*학실버(Haksilber): 고대 근동에서 발견되는 비장에서 흔히 출토되는 화폐로 사용된 은. 은조각이나 막대기, 고리 등을 통칭해서 학실버라고 한다.
이성규(1985), 전국시대 화폐정책의 이론과 실제, 진단학보 55.
현재 춘추시대 화폐주조에 관한 문헌사료는 그 사실여부가 극히 의심스러운 주경왕 21년(B.C. 524)의 대전(大錢)발행에 대한 [국어] 주어 하의 기사와, 초장왕의 대전발행과 그 취소에 관한 애매한 일화를 전하고 있는 [사기] 순리(循吏)열전 손숙오전의 기사에 불과하며, 전국시대의 경우도 B.C. 336년 진(秦)이 처음으로 화폐를 주조하였다는 짤막한 기록밖에(사기 권6 진시황본기) 없다... 이러한 사료상의 한계를 .. 극복하기 위하여 운몽출토의 진간(秦簡)과 [관자]에 ... 나오는 화폐론 및 화폐조작책에 관한 정론(政論)을 이 문제에 이용하려고 생각해 보았다.
화폐 상의 문자로 확인된 주조지만도 약 40여 처에 달하고, 또 병기의 주조지와 주전지(鑄錢地)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을 볼 때, 당시 거의 모든 주요 성읍의 주동작방(鑄銅作坊)에서도 필요한 경우 언제라도 주전을 하였던 것 같다.
선진시대의 화폐는 ... 대체로 그 형태면에서는 패형·포(산)형(布(鏟)型)·도형(刀型)·환형 등으로서 각각 실용물을 방제하였다는 점과 초의 금·은폐를 제외하면(금판, 금병.. 포형의 은화) 모두 청동을 소재로 하였다는 점이 그 외형상의 특색이다. .. 당시 중국사회에서 청동이 귀금속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가? 서주금문 중 청동이 [균(鈞)] 또는 [률(寽)]을 단위로 상사(賞賜)되거나 교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벌금으로도 징수되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서주시대에는 청동지금이 귀금속으로서 상당히 중시되면서... 적어도 철보다는 귀금속으로 인식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좌전]...[관자]... 춘추·전국시대에는 이미 청동지금이 그 자체로서 경제적인 의미가 크지 못하였음을 시사하지만, 특히 화폐에 사용된 청동의 질도 극히 조악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외국의 금속화폐가 귀금속인데 비해 중국의 화폐가 청동으로 주조된 이유를 중국의 상업무역이 대외무역보다는 국내무역이 주도적인 위치를 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지만.... 소생산자나 소상인의 교환경제에는 오히려 내구성만 어느 정도 보장되는 천(賤)금속화폐가 보다 적합하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화폐가 대체로 실용물을 방제(仿製)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지적하였지만 일반적으로 화폐의 발달은 교환과정에서 특정한 상품이 점차 일반등가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면서, 그것이 화폐로 전환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먼저 초지역(楚地域)에서 주로 사용된 의비전(蟻鼻錢)의 경우,이것이 패각을 방제(仿製)한 동패(銅貝)에서 유래된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으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패각(貝殼)이 중국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화폐의 형태였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는 것과 동패(銅貝)가 패형주폐(貝型鑄幣)로 직접 연결될 정도로 광범위하게 유통되면서 실제 화폐의 기능을 하였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동패(銅貝)를 비롯한 골패(骨貝)·석패(石貝)·도패(陶貝)·옥패(玉貝)·칠패(漆貝)·각패(角貝) 등의 각종 방제패(仿製貝) 중에서 초기 청동의 가치를 고려할 때 동패가 화폐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사실이며 실제 서주초(西周初)의 금문(金文) 중 「사패세률(易貝世寽)」라는 명문(銘文)이나 「붕(朋)」을 단위로한 청동(青銅)의 사여례(賜與例)가 보이는 것을 보면, 적어도 서주초(西周初) 동패(銅貝)가 상사(賞賜) 또는 증여(贈與)의 수단이 된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일반적인 재화(財貨)로서보다는 장식(裝飾禮器)의 사여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 같으며, 서주(西周) 금문(金文) 중 청동(青銅)이 「균(鈞)」「률(寽)」등의 칭량단위로 양도된 것은 청동(青銅)의 양도조차 동패(銅貝)보다는 지금(地金)을 계량(計量)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던 것이 보다 일반적인 상황이 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더우기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동패(銅貝)가 재화(財貨)의 양도나 지불수단으로 이용된 예가 없다는 사실도 패각(貝殼)과 함께 동패(銅貝)도 점차 그 경제적인 의미와 기능이 상실된 것을 반영한 것 같다...
문제는 왜 유독 초(楚)에서만 패형의 화폐가 주조되었느냐는 점이다...진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화폐통일정책을 추진하면서 [주옥구패은석지속(珠玉龜貝銀錫之屬)]을 화폐로 사용하지 못하게 명한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일부지역에서는 패가 화폐처럼 사용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비록 의비전(蟻鼻錢)이 당시 교환의 수단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지라도...패각에 의존하고 있었다면, 사실상 화폐경제의 조건은 성숙되지 못하였다고 보아도 대과는 없을 것이다(인용자 ???).
화폐를 이용하여 재정수입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3가지의 방법 1) 실물로 지불해야 하는 부분을 자신이 주조한 화폐로 지불한다. 2) 농민과 수공업자의 잉여생산물을 화폐로 구매하는 형식으로 조세의 증가를 꾀하면서 실질적으로 수탈한다. 3) 화폐·곡물·일반상품 3자의 관계를 이용한 물가조작을 통해 그 차액을 국가가 차지한다.... 물가조절이란 측면이며...
대부분의 경우는 대체로 표기중량과 실제중량이 비교적 접근하고 있다.
국가권력이 지나치게 명목가치만 높은 화폐를 유통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단적으로 시사하고 있으며, 사실 일반 동기(銅器)에 비해 동폐의 명목가치가 지나치게 높으면 도주(盜鑄)의 위험성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청동화폐의 기본적인 속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전국시대 화폐의 감량추세는 ... 동가의 일반적인 하락에 기인하는... 화폐에 중량을 표시한 것은 규격의 소형화에 따른 공신력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가 아닌가 한다... 당시 화폐가 적어도 도주의 가능성이 처음부터 배제하기 위해 일반 동가(銅價)를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하여 주조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진(先秦)화폐를 실체화폐로 보는 견해도 타당한 것 같다.
박경수(2014), 에도시대 삼화제도와 '본위화폐' -금·은 이원제에서 금본위로 전환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28.
에도막부는 귀금속화폐인 금화·은화와 비금속화폐인 전화를 포괄한 삼화를 전국에 걸쳐 법화로 유통시켰다. 이를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삼화제도' 또는 '삼화체제'라고 통칭한다.
삼화제도 하의 금화·전화가 그 수량으로 환산되는 계수화폐이었음에 반해 은화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무게로 통용되는 칭량화폐이었다... 금화는 '쇼군' 슬하의 에도·관동을 중심으로 한 동일본 지역에서 주로 영주층 및 중상층 무사들의 재생산에 활용되었다. 하지만 은화는 가미가타(上方, 교토·오사카를 포함한 畿內지역)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 지역에서 주로 상인들의 상거래에 기준통화로 활용되었다... 막번체제가 전국적인 단일경제권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삼화제도 하의 화폐경제는 현실적으로 열도의 동과 서가 금본위 경제권, 은본위 경제권으로 이원화한 것이다.
한편.. 일본열도는 16~17세기경 환동중국해 경제권에 본격적으로 편입된다. 당시 이 해역의 국제통화는 은 지금이었다... 빈번한 대륙과의 교역을 통해 은을 무역결제수단으로 사용해온 가미가타 상인들 사이에는 1590년대 이후 은의 화폐적 사용이 급속히 확대된다.
금·은 이원제는 1. 가미가타를 중심으로 한 은본위 경제권의 상대적으로 도저한 경제적 실력과 은의 해외 대량유출, 2. 막번 영주계급의 금·은 지금에 의존한 재정적 물류 및 막부 자체의 금 보유 현황, 3. 에도·관동을 지반으로 한 막부권력의 가미가타에 대한 우위성 유지 등... 귀결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