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찬
화랑세기는 위서이며, 창작소설에 불과하므로 아래 내용은 그냥 심심파적으로 참조할 일이다.
김동찬,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나타난 모계혈통체제(母系血統體制) 연구(硏究)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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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인이 혈통을 계승하는 주체는 모계이다.
2. 모계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3. 두 모계집단이 "이부체제"라 할 수 있는 하나의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4. 『화랑세기』의 대원신통은 6세기대 금석문의 喙部이며, 후에 박씨성으로 바뀐다.
5. 진골정통은 沙喙部이며 성씨 사용기에는 김씨로 불리게 된다.
6.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모계로 전해진 김씨, 박씨 성이 있다.
7. 두 모계집단의 최상층부가 교대로 왕과 갈문왕을 계승해간다.
8. 갈문왕은 두 모계집단 중 왕을 배출하지 않은 집단에서 맡으며 왕위계승체제의 한 축이다.
9. 두 모계집단의 여성 중 최고 수뇌인 宗이라는 여인이 왕과 갈문왕을 낳는다.
10. 宗이라는 신분의 여인에게서 성골신분이 배출되며 진골신분도 모계로 전승된다.
11. 중고기 말의 두 여왕도 宗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12. 모계체제는 금관가야 왕족인 김유신 가문이 진골 신분에 편입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13. 양대 모계집단의 결합은 원시사회의 한 형태인 모계 반족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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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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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계혈통체제를 감안하고 신라사를 보면 그동안 숱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여러 문제들이 해소될 여지가 보인다. 즉 朴, 昔, 金 3姓의 交立에 의한 복잡한 왕위계승문제, 骨品制의 실체, 近親婚問題, 女王의 登極, 金庾信家의 眞骨貴族 편입등이 해명될 수 있으며 아울러 금석문자료에 보이는 喙部와 沙喙部의 의문이 해결될 수 있다. 또 考古學上의 의문으로 남아 있는, 황남대총 여성의 묘에서 금관이 나온 점, 쌍둥이고분(瓢形墳)등의 의문도 해소될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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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花郞世紀에 나타난 母系血統體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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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계혈통으로 신분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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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未珍夫」 (53쪽) 法興王의 아들이라는 比臺라는 인물이 있었는데도 외손자인 眞興이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이다. 『삼국사기』에도 법흥왕의 아들이 없었다는 내용은 없으나 통상 법흥왕의 아들이 없어 외손자이며 조카인 진흥이 계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화랑세기』는 법흥왕의 아들이 있었고, 법흥왕 자신도 아들에게 왕위를 상속케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룰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신 법흥왕의 외손자이자 조카인 眞興이 계승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법흥왕의 딸 只召夫人이다. 이 때 지소는 법흥왕의 아우 立宗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을 낳은 상태다. 시집간 딸이 자신의 아들을 아버지의 후계로 계승시키고, 그것도 아버지의 친아들을 제치고 있다. 이 과정에 어떤 政變도 없었고 왕위에서 밀려난 비대는 아무런 장애없이 일생을 마쳤으며 高位官職도 거치고 있다. 이것은 왕위계승에 있어서 왕의 권위로도 어찌할 수 없는 독특한 繼承體制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왕의 아들이란 부계혈통을 가진 비대보다, 지소부인(법흥왕의 딸)의 아들이란, 모계혈통을 가진 진흥이 왕위계승에 있어서 優位에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에 혈통을 모계로 구분하고 모계혈통이 신분을 결정하는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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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骨品은 母系血統의 높고 낮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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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魏花郞」(51쪽) "公諫之曰 臣女無骨品.....공이 諫하여 말하길 신의 딸은 골품이 없고...."라고 했는데 법흥왕이 자신의 아들이며 위화랑의 외손자인 比臺에게 왕위를 승계하려 하는데 위화랑은 반대하는 이유로 비대의 母이며 자신의 딸인 玉珍이 無骨品이라 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어쨌든 왕의 아들임에도 어머니의 혈통이 낮아 문제가 된다는 뜻을 표현하는데 골품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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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계혈통에 두 계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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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夏宗」(128쪽) 眞骨(正統)은 只召를 宗으로 삼았고 大元神統은 思道를 宗으로 삼았다.
眞骨正統 系譜 : 雲帽-玉帽-紅帽-阿爾兮-光明-內留-阿老-鳥生-善兮-保道-只召
III. 大元神統과 眞骨正統, 喙部와 沙喙部
비문에 나온 인물들은 대체로 6세기중반의 인물인데 반해, 화랑세기에 모계가 분명히 드러나는 인물들의 활동기는 6세기후반-7세기전반경으로 시기가 어긋나기 때문으로 본다...
이사부(苔宗), 거칠부(黃荒宗) - 喙部
도설지, 무력지 - 沙喙部
이렇게 금석문에서 부명이 드러난 유명인물도 <화랑세기>에서는 어느 계통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이들의 아들로 드러난 인물들, 예컨대 이사부의 아들 世宗, 거칠부의 딸 淑明공주가 모두 진골정통이고 무력의 아들 서현이 대원신통으로 나타난 것은 대체로 모계혈통과 部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근거이다. 이 인물들의 혼인형태가 대체로 兩大 母系集團사이의 交婚이었기에 子女들은 아버지와 모계가 다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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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聖骨과 眞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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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시대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왕위계승체제 자체에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는 신라사회전체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히 혈통의 단절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 변화의 단서 하나는 聖骨王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갈문왕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갈문왕이 바로 성골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근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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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신통계의 몰락으로 兩大 母系集團이 균형을 이루며 신라를 지배하던 체제에서 진골정통의 독주체제로 굳어짐으로서 진골이란 이름은 兩大血統의 한 갈래를 지칭하던 이름에서 전체 신라귀족층의 신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서서히 변해간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대원신통계를 대체한 김유신일족이 또한 진골정통이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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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母系血統에 의한 王位繼承
『화랑세기』는 신라 왕실이 모계혈통에 의해 왕위계승을 해 왔음을 나타내고 있다. 母系繼承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지만 왕위계승에 있어 兩大 모계혈통인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중요한 변수로서 작용하고 있고, 모계의 直系血統이 석씨와 김씨 등 王姓의 變動과 관계없이 中古시대까지 이어진 점을 보면 모계계승이라 볼 정황은 충분하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제외한 여타 자료에는 모계에 의한 계승이라는 단서가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시조 혁거세왕부터 진덕여왕까지 이른바 聖骨王시대의 왕위계승 사례는 물론, 下代에도 모계위주의 계승체제가 보인다. 그 근거는 전왕의 사위 또는 외손자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는 사례가 많은 점, 박씨와 석씨, 김씨가 서로 뒤섞이어 왕위를 계승하는 점, 고구려 백제와 달리 王曆에 母系와 왕비의 家系에 대한 기록이 빠지지 않은 점 등을 들 수 있다. 新羅의 王位繼承에 있어 모계가 重視되었다거나 모계에 의한 계승이 있었다는 주장은 과거부터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는 모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기존 문헌자료를 근거로 도출된 것들이다. 『화랑세기』에는 이들 연구 성과와 상당히 유사하며, 구체적인 母系繼承의 形態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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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의 특이한 王位繼承
新羅王曆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초기에 三姓交立이란 현상이 나타나는 점과 사위 또는 외손자계승이 많은 점, 그리고 갈문왕이 왕위계승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三姓交立과 사위계승은 서로 맞물려 있는 문제다. 왕의 姓이 바뀔 때 사위가 계승하는 사례가 많은 것이다. 탈해왕, 미추왕, 내물왕 등 왕의 姓이 바뀔 때 사위가 계승하는 사실을 들어 전통 학설은 아들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사위가 代를 이었다거나, 父系가 다른 집단이 무력으로 왕조를 교체한 사실을 숨겨 그렇게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다. 아들이 없을 경우 다른 王朝에서는 항상 조카나 사촌, 그도 아니면 父系의 傍系親族 중에서 왕위계승자를 찾았다. 아들이 없을 때 사위가 계승하는 경우는 신라 외에 찾아 보기 힘들다. 後者의 경우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탈해왕이 물러난 뒤 다시 박씨 파사왕이 등장하는 거나 김씨 미추왕 다음에 다시 석씨왕이 등장하는 사례로 보면 결코 다른 父系集團이 왕조를 찬탈했다고 볼 상황은 아니다.
사위나 외손자가 여러 차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은 母系에 의한 왕위계승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이다. 기록에서 사위라고 明示한 경우는 4대 탈해왕 뿐이지만, 다른 경우에도 왕비가 前王의 딸이라고 하므로 사위임을 알 수 있다. 왕력에서 모계계승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를 보겠다.
<사위계승>
4대 탈해왕(남해왕의 사위)
11대 조분왕(왕비가 내해왕의 딸)
13대 미추왕(왕비가 조분왕의 딸)
17대 내물왕(왕비가 미추왕의 딸)
18대 실성왕(왕비가 미추왕의 딸)
19대 눌지왕(왕비가 실성왕의 딸)
<외손자계승>
8대 아달라왕(母가 지마왕의 딸)
16대 흘해왕(母가 조분왕의 딸)
19대 눌지왕(母가 미추왕의 딸)
20대 자비왕(母가 실성왕의 딸)
22대 지증왕(母가 눌지왕의 딸)
24대 진흥왕(母가 법흥왕의 딸)
사위 또는 외손자계승이라고 한 위의 왕실계보가 父系繼承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조분왕은 내해왕의 사위 자격보다 벌휴왕의 손자라는 자격으로, 또 진흥왕은 법흥왕의 사위로서보다, 조카라는 자격으로 계승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또 외손자계승이라고 한 아달라왕, 흘해왕, 눌지왕, 자비왕, 지증왕, 진흥왕 중 지증왕을 제외하면 모두 父系로서도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聖骨時代 전체 王曆을 하나의 틀로 보면 독특한 왕위계승체제가 드러난다.
먼저 부계계승이 아니고 모계계승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은 왕의 姓이 바뀌는 시점, 즉 父系의 轉換期에 항상 모계가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남해왕의 사위인 탈해가 박씨 유리왕의 代를 이으면서 남해왕비 雲帝夫人과 脫解王妃 사이에 모계가 연결되고 있다. 박씨 아달라왕에서 석씨 벌휴, 내해왕으로 다시 석씨로 돌아가는 과정에도 內禮夫人이란 연결고리가 나타난다. 내례부인은 박씨 아달라왕비이면서 석씨 내해왕의 王母로 등장한다. 이 경우 두 인물이 同名異人일 수도 있겠지만 아달라왕대 나타난 仇道라는 인물이 내해왕대에도 활약하는 것을 보면 아달라왕비와 奈解王母는 동일인물로 볼 여지가 있다.
11대 조분왕은 벌휴왕의 손자라 했지만 구도갈문왕의 딸을 어머니로 두었기에 김씨쪽 性向을 보인다. 仇道는 味鄒王의 父로 알려졌지만 이미 그 前代 조분왕의 장인으로 王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경우도 구도의 딸이라는 모계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김씨로 알려진 구도와 미추도 昔氏王朝 代의 인물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면이 여기에 있다. 金氏 勢習體制를 연 내물왕도 昔氏王朝 인물인 味鄒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다음 18대 실성왕의 어머니가 昔氏라고 한 것도 석씨와의 연결고리다. 미추와 내물 사이에는 유례, 기림, 흘해 3명의 왕이 있지만 이 3대의 간격은 다른 곳에도 나타나고 있으니 조분왕비 아이혜는 첨해, 미추, 유례 3대를 거친 후 기림이사금의 母로 등장한다. 내물, 실성, 2왕의 丈人인 미추왕보다, 왕비 광명부인 쪽을 보면 3대를 거친 후 왕의 丈母로 등장하는 공통점을 볼 수 있다. 朴氏나 昔氏, 金氏 집단을 혈통이나 性向, 문화 등으로 뚜렷이 분리해 보는 경향이 많지만, 서로 모계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달리 볼 수 있는 단서이다.
1대 박혁거세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 聖骨王時代를 보면 부계의 직계상속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또한, 다른 王位繼承體制가 있음을 짐작케하는 단서이다. 대부분의 왕조에서는 高祖-曾祖-祖-父순의 直系繼承을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부계계승의 흔적이 분명히 보이면서도 이상하게 父子 사이에 다른 姓의 왕이 끼어들거나 한 세대를 缺落시키고 등장하는 등, 직계상속이 아주 드물게 보이는 점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로 왕위를 넘긴 경우는 초기의 혁거세-남해-유리, 파사-지마, 눌지-자비-소지, 지증-법흥 등 6차례가 전부다. 이상 신라왕위 계승체제의 특징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① 前王의 사위나 외손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사례가 많다.
② 姓이 바뀌면서도 모계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③ 왕위의 父系 直系相續이 드물다.
④ 왕실 내의 近親婚이 많다.
⑤ 갈문왕이 혈통상 왕실의 한 주체로 등장한다.
이런 특징들은 순수한 부계계승체제와 다른 특이한 체제가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 대해 기록의 混線이나 漏落에 의해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런 복잡한 계승관계에서 하나의 법칙이 도출된다면 달리 볼 여지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왕력」에서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의 王曆만이 王母의 家系와 왕비의 家系에 대한 기록이 풍부한 점도 그에 관한 단서의 하나이다.
2.『화랑세기』에 나타난 王位繼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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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여인들과 실력자들이 반대한 이유는 법흥왕의 아들 比臺의 母인 玉珍이 正妃가 아니었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正統難立... 진골정통이 서기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것이 또한 법흥왕의 의도를 좌절시키는 주 요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이 대원신통이고 比臺도 대원신통이니 진골정통이 서기 어렵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진골정통인 진흥왕이 代를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목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라는 기존 자료에서 가졌던 왕위계승체제의 의문을 한꺼번에 풀어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진흥왕이 법흥왕의 사위라는 자격을 가진 점은 앞서 사위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여러 사례를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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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과 갈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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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신라본기」중 왕의 系譜에서 갈문왕과의 관계를 찾아 본다.
<초기왕력의 갈문왕관계: 3대-28대>
3대 유리왕 - 왕비가 일지갈문왕의 딸
5대 파사왕 - 왕비가 허루갈문왕의 딸
6대 지마왕 - 왕비가 마제갈문왕의 딸
7대 일성왕 - 일지갈문왕의 아들 (或云)
11대 조분왕 - 골정갈문왕의 아들, 母가 구도갈문왕의 딸
13대 미추왕 - 母가 이칠갈문왕의 딸
14대 유리왕 - 母가 내음갈문왕의 딸
17대 내물왕 - 구도갈문왕의 손자.
22대 지증왕 - 습보갈문왕의 아들
24대 진흥왕 - 입종갈문왕의 아들
26대 진평왕 - 왕비가 복승갈문왕의 딸
28대 진덕여왕 - 국반갈문왕의 딸
아울러 왕의 친척으로 왕통에 들어간 왕이라도 자신의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부르지 않은 사례가 상당수 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9대 벌휴왕 - 각간 구추의 아들
10대 내해왕 - 이매의 아들
15대 기림왕 - 이찬 걸숙의 아들
16대 흘해왕 - 각간 우로의 아들
17대 내물왕 - 각간 말구의 아들
18대 실성왕 - 이찬 대서지의 아들
26대 진평왕 - 동륜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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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인의 핵심인물이 형성하는 계승체제
앞에서 왕위계승체제를 형성하는 핵심인물로 왕과 갈문왕, 진골정통의 宗, 대원신통의 宗 4인을 지적했다. 이제 이 4인이 어떤 형태로 왕위계승과 최고혈통을 계승해 나가는지, 추정을 통해 圖式을 만들어 본다.
왕위계승체계 (== : 혼인관계)
1대 : 王(沙喙部)====喙宮主(대원신통의 宗) 葛文王(喙部)=====沙喙宮主(진골정통의 宗)
2대 : 王(喙部)=====沙喙宮主(진골정통의 宗) 葛文王(沙喙部)===喙宮主 (대원신통의 宗)
① 1대 왕은 아들을 1대 갈문왕의 딸과 혼인시키고 갈문왕을 계승하니 2대 갈문왕이다.
② 1대의 갈문왕은 아들을 왕의 딸과 혼인시키고 왕위를 계승하니 2대 왕이다.
③ 2대 왕과 갈문왕은 1대와 같이 혼인상대를 교환하여 3대의 왕과 갈문왕을 배출한다.
왕의 아들은 갈문왕이 되고 갈문왕의 아들은 왕이 되는 이러한 체제는 특이한 계승체제의 원형이라 보는데, 昔氏 王代에 이와 대체로 유사한 계승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도식은 자체모순이 있다. 2대의 왕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모계 혈통을 따르면 沙喙部가 되어 部(母系)의 교대가 되지 않은 것이다. 요체는 모계의 교대와 왕위와 갈문왕의 교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평범한 4촌간의 交婚으로는 이런 二重의 교대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세대를 비껴가는 叔姪간의 혼인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실제 석씨 왕대에 같은 세대 4촌간의 혼인보다 세대가 빗나가는 3촌, 5촌사이 숙질간의 혼인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석씨 왕대는 아니지만 입종갈문왕이 법흥왕의 딸과 혼인하고 그 사이에 태어난 진흥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모계의 교대와 왕위와 갈문왕의 2중 교대를 한 원형과 가깝다.
이 4인의 핵심인물이 대체로 이와 같은 계승체제를 구성했다고 보지만 실제 이러한 도식과 일치하는 계승관계가 있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왕이나 갈문왕이 자식을 낳지 못할 수도 있고 아들이나 딸만 낳을 수도 있다. 혼인에 있어서 반드시 족외혼이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母系의 族外婚을 지향하고 兩部가 대등한 세력균형을 위해 이런 계승체제를 가졌다고 본다. 이것은 남성인 왕과 갈문왕에 기준을 두었지만 실제는 양대 모계의 宗인 여인의 혈통을 기준으로 계승체제가 연결되어 나갔을 것으로 본다.
탁부와 사탁부가 왕위를 교대하고 왕과 갈문왕은 각기 자신의 部를 대표하는 지위를 겸했으며, 兩大 모계의 宗은 다른 모계의 남성과 혼인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체제를 가정할 수 있다.
5. 『三國史記』와 『三國遺事』「王曆」에 나타난 兩大 母系集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왕력」에서도 양대 모계집단의 교대계승이란 사실을 볼 수 있다. 박혁거세왕비 閼英夫人이 김씨족 시조 김알지와 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알영설화에 鷄龍이나 鷄嘴가 등장하는 등 유사한 점을 여럿 지적하지만, 필자는 알영의 탄생지를 沙梁里라고 한 점을 주목한다. 박혁거세를 탁부(대원신통), 알영을 사탁부(진골정통)라 가정하고 8대 아달라왕까지 양대 모계집단의 흔적을 찾아 본다.(<표1> 참조)
박혁거세를 왕을 배출하는 부계혈족집단, 알영을 왕비족, 즉 모계친족집단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지만 후대의 사실을 놓고 볼 때 처음부터 두 모계집단의 체계를 갖추고 출발했다고 볼 여지가 많다. 알영을 시조로 한 모계집단이 있었다고 보면, 박혁거세를 낳은 모계집단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이 경우 南解王妃 雲帝夫人은 박혁거세와 같은 모계집단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3대 유리왕비는 알영과 같은 모계가 된다. 『삼국유사』「왕력」은 유리왕비가 김씨임을 나타낸다. 大元神統은 이름에서 종교적인 성격을 띠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雜誌」 祭祀條에는 남해왕의 親妹 阿老에게 박혁거세의 四時祭를 주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로는 탁부의 女系始祖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아로가 남해왕의 친누이라는 기록이 문제되지만, 친누이라도 母系가 다를 수 있다. 더구나 『삼국유사』「왕력」은 아로부인이 남해왕의 딸이라 했으므로 더욱 그런 심증을 짙게 한다. 박혁거세이후 8대 아달라왕대까지 왕비의 모계가 두 집단으로 갈라지는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5대 파사왕, 6대 지마왕의 왕비는 김씨고, 7대 일성왕, 8대 아달라왕비는 박씨이다. 김씨와 박씨가 바로 교대하지 않는다. 비록 불안한 설정이지만 1, 3, 5, 6대 왕비가 김씨이고 2, 4, 7, 8대가 박씨로 추정할 수 있다. 4대 탈해왕비와 8대 아달라왕비는 각기 남해왕, 지마왕의 딸임을 볼 때 뒤에 보이는 왕가와 갈문왕가의 交婚이란 면이 드러난다. 9대 伐休王부터 시작되는 석씨왕대에는 兩大 모계혈통의 交代繼承 체제가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
탈해왕의 直系系譜: 脫解王-仇趨-伐休王-伊買-奈解王-于老-訖解王
한 세대를 건너뛰어 한 사람씩 왕이 된 사실을 알 수 있다. 母系 半族社會에서 父子간은 모계혈통(部)이 다르나 祖-孫간은 같은 모계(同族)이다. 모계의 族外婚을 지켜 같은 집단끼리는 혼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나-祖父-高祖父가 한 집단에 속하고 父-曾祖는 다른 집단이 된다. 위 계보에서 왕이 된 사람과 왕이 되지 못한 사람을 다른 部에 속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 王妃나 王母도 두 집단으로 나뉘어지는지 보겠다.
탈해의 손자인 9대 벌휴왕은 母가 김씨라 했고 다음 10대 奈解王은 母가 內禮夫人으로 앞서 말했다시피 아달라왕비와 동일인물이다. 일단 朴氏王母로 지칭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음 11대 助賁王은 母가 구도갈문왕의 딸 玉帽이며 김씨라 했다. 옥모는 화랑세기에서 진골정통의 祖로 불리고 있다. 이하 옥모의 후손들은 김씨로 보면 무방하다. 그러므로 옥모와 옥모의 아들 조분도 김씨다.
12대 첨해는 助賁王의 동복아우라 했으므로 일단 김씨로 가정한다. 내해와 조분은 사촌간이면서 장인 사위관계이며 모계가 다르다. 다음 미추왕은 김씨로 알려졌지만 母가 박씨이므로 내해와 같은 계통으로 볼 수 있으며, 조분왕과는 장인 사위관계이다. 미추의 다음 代는 조분의 아들로 14대 儒禮가 즉위한다. 그런데 유례의 母는 박씨라 했는데 조분왕의 왕비라는 阿爾兮가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15대 基臨王은 조분의 손자(父-乞淑)이며 아이혜의 아들이다. 16대 訖解는 내해왕의 손자이며 母가 조분왕의 딸이다. 앞서 조분왕비 중 내음갈문왕의 딸이라는 여인은 박씨라고 했으므로 訖解王母도 박씨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석씨왕조에서 왕모가 두 갈래의 혈통으로 갈라짐을 알 수 있다. 왕모의 계통을 박씨와 김씨로 나누었는데 王母는 왕의 계통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은 분석으로 석씨왕들의 모계를 박씨와 김씨로 나누어 보았다.
벌휴(김)-내해(박)-조분(김)-첨해(김)-미추(박)-유례(박)-기림(김)-흘해(박)
박씨와 김씨가 반드시 교대하는 상황은 아니나 거의 1대 1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왕의 모계를 분석하여 두 계통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왕비의 계통은 交婚의 관습으로 보아 모계와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분왕의 경우처럼 같은 모계와 혼인하고 그 자손이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내해왕비는 석씨라고 했지만 조분왕의 누이동생이니 김씨로 봐야 하고 조분왕비는 김씨 아이혜와 박씨 O召부인 둘임을 확인했다. 미추왕비는 光明夫人인데 역시 김씨이다. 이후 유례, 기림, 흘해는 왕비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확인할 수 없다. 이제 김씨왕조로 불리는 내물왕 이후를 보겠다.
내물왕은 석씨왕조와 별도로 권력을 찬탈한 새로운 세력집단이란 주장을 하는 연구자가 많지만 내물과 실성은 석씨왕조를 잇는 석씨 집단과 같은 계통임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 실성은 外祖父가 昔登保라 했으므로 모계가 석씨임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내물의 장인이며 祖父인 味鄒왕 역시 석씨왕代의 한 인물로 봐야지, 따로 분리해 볼 수 있을 만큼 특별한 면모가 없다.
혹자는 미추와 내물 사이에 3대의 왕이 있었던 사실을 들어 미추와 내물사이 몇 代가 缺落되었다거나 석씨왕조와 김씨왕조가 별도로 존재했었는데 후세 사가들이 인위적으로 결합한 흔적이라 하는데, 초기 왕실의 독특한 계승체제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온 억측일 뿐이다. 王曆을 보면 유리의 아들 逸聖이 3대를 隔한 뒤에 등극하고 탈해의 손자 벌휴가 4대를 거른뒤에 나타나며 내해의 손자 흘해가 5대가 지난 뒤에 왕위에 오른 사실과 비교하면 특이한 면이 거의 없다. 이런 점을 보면 내물과 실성은 석씨왕조代의 왕위계승체제를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내물왕의 母는 김씨라고 했으므로, 박씨 흘해왕을 이어 다시 김씨모계를 잇고 있다. 奈勿王母 休禮夫人도 역시 석씨 왕가의 유력인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내물왕의 아들이 어려 실성이 대를 이었다고 하지만 이것도 후대의 해석일 뿐, 석씨왕들이 단 한번도 자신의 아들에게 바로 왕위를 상속하지 않은 사실을 보면 이상할 것이 없다.
실성왕 역시 미추의 사위라는 자격으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실성이 내물왕 재위시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 갔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실성은 미추왕의 사위라는 자격보다 母系에서 자격을 가졌다고 본다. 실성의 母가 昔씨라는건 앞서 말했다시피 아달라왕비 내례부인을 잇는 박씨 모계이다. 모계는 김씨에서 박씨로 넘어 왔다.
그런데 다음 눌지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눌지왕代에 중대변화가 발생한다. 『삼국사기』에 눌지왕은 실성을 죽이고 왕이 됐다 했고 『삼국유사』는 고구려군이 실성을 죽였다 했지만, 어쨌든 신라사 최초의 流血政變이라 볼만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눌지의 母는 保反夫人인데 진골정통계보에 없으므로 박씨로 추정해도 무방하다. 실성이 박씨 모계이니 정상적인 왕위계승체제를 이탈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고구려의 내정간섭으로 신라 특유의 계승체제를 유지하지 못한 탓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눌지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있다. 이 체제는 자비왕대에도 이어져 자비왕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시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박씨 여인이 나타나지 않는다. 兩大 母系體制가 와해되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골정통계보의 여인이 석씨 代와 마찬가지로 1代씩 걸러 나타나므로 그 체제에서 벗어났다고 볼 상황은 아니다. 눌지왕비 阿老夫人과 소지왕비 善兮夫人이 진골정통이고 『삼국유사』「왕력」에는 慈悲王妃에 대해 巴胡葛文王 또는 未欣角干(미사흔)의 딸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는 소지왕母가 김씨라고 해서 필자의 추정과 빗나간다. 후에 姓氏問題에서 다시 거론하지만 이 姓氏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修正, 加筆이 있었을 가능성을 감안해야 하므로 절대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따라서 소지왕의 母는 박씨로 보아야 한다. 앞서 정리한 석씨왕대 이후 왕력에서 박씨모계와 김씨모계로 구분하여 『화랑세기』에 나타난 지증-진평간의 대원신통, 진골정통 교대계승 상황과 연결해 본다.
벌휴(김) - 내해(박) - 조분(김) - 첨해(김) - 미추(박) - 유례(박) - 기림(김) - 흘해(박) - 내물(김) - 실성(박) - 눌지(박) - 자비(김) - 소지(박) - 지증(김) - 법흥(박) - 진흥(김) - 진지(박) - 진평(김)
두 갈래의 모계혈통 집단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의 분석이 명확한 근거에 의해 나오지는 못했지만 두 집단이 왕과 갈문왕을 맡고 왕위와 갈문왕위를 교대로 계승하는 체제를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이러한 구도가 이어져 왔다고 보지만 눌지왕 이전과 눌지왕 이후가 명확히 구분되는 점은 분명하다. 눌지왕 이후부터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눌지왕 이전에는 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바로 넘길 수 없는 체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보지만 『삼국사기』에 눌지왕부터 마립간으로 王號가 변하는 점, 그리고 이사금이 "나이 많은 사람" 이란 의미를 가졌다는 점을 주목한다. 2대 王系의 인물 중 나이 많은 사람순으로 왕위에 오르다 보니 父子 直系繼承이 가능하지 않았던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두 갈래의 王系때문이기도 했겠지만 父子間의 혈연의식이 후대처럼 강하지 못했던 이유도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6. 여왕의 등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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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혈통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졌더라도 모계의 최고혈통으로 정상적인 왕위계승을 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나, 왕비보다 한 단계 낮은 신분으로 왕이 된 경우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화랑세기에는 성골과 진골이 뚜렷이 구별되어 나타나지 않지만 聖骨身分내에도 서로 간에 격차가 있었음이 나타난다. 특히 사서에 모계나 부계에 대한 기록이 뚜렷하지 않은 채 前王의 사위라는 자격이 강조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탈해나 미추, 내물, 실성 등이 그렇다. 남편인 왕은 왕비와의 혼인이 깨어지는 순간 신분이 하락하고 만다. 그래서 표주박형고분(瓢形墳)이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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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金哲埈의 二部體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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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의 모계혈통체제를 분석한 결과, 이 시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金哲埈의 二部體制論이다. 다른 연구자들은 신라의 모계문제를 막연히 혈통의 문제로 제기했을 뿐이지만 김철준은 하나의 體制로 인식하고 설명을 시도한 것이다. 「신라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 1952」에서 밝힌 바는 주로 외국의 인류학 연구자료를 응용해 2개 半族集團이 신라 지배층을 구성하였음을 시사하였으니, 2개 반족집단을 각각 박씨 집단과 김씨 집단으로 지목하였다. 그 후 中古期 왕실에서 김씨 왕족과 박씨 왕비족이 형성하는 二重繼承體制, 즉 Double Descent이론을 제기했다. 먼저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 박씨 집단과 알영부인을 시조로 한 김씨 집단이 혼인관계로 결합되어 二部體制를 형성했으며, 중고기에는 김씨 왕족과 박씨 왕비족이라는 2개 집단이 하나의 계승체제를 지속시켜 나갔다는 것이다. 피영희(1979)는 이 Double Descent이론에 대해 더욱 세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Double Descent이론을 전체 신라사에 확대 적용하여 모계문제에 대한 해석을 기한 것이다. 그 결과 무열왕대부터 혜공왕에 이르는 中代를 제외하고 전 시기에 걸쳐 모계에 의한 왕위계승이 있었으며 아울러 Double Descent적인 면이 고찰된다고 하였다. 二部體制를 약간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① 상호 대립하고 경쟁하는 2개 집단이 혼인관계로 하나의 집단체제를 형성한다.
② 二部體制의 탄생은 한 집단의 분열에 기인한다고 보지만 서로 이질적인 집단의 결합 즉 토착인과 이주민 집단간의 결합에 의한 탄생으로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③ 외부에서 볼때는 한 집단인데, 내부에서는 서로를 철저히 구분하여 다른 집단임을 믿고 있다.
④ 혼인에 있어서 2개 집단의 계속된 交婚을 지속해 간다. 그 중에서도 4촌 범위내의 근친혼이 주류를 이룬다.
⑤ 고대문명단계에 세계 각지에 전파된 보편적인 사회체제이다.
⑥ 지배계급만이 2부체제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
⑦ 半族社會 또는 二元化社會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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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姓氏와 母系血統體制
1. 최초의 金氏와 朴氏
신라인들이 母系 또는 女系로 혈통을 구분하고 인식했다면 史書에 나타난 朴씨나 金씨 昔씨 등 姓과는 어떤 관계인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필자는 『화랑세기』의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바로 喙部와 沙喙部이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박씨와 김씨라는 모계의 姓이 나타난다고 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초기부터 박씨나 김씨 등 姓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6-7세기대의 금석문에는 姓을 볼 수 없다. 중국사서에 처음으로 진흥왕이 김씨 성을 사용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진흥왕이 김씨성을 사용했다고 해서 이 姓이 바로 확산되어 신라 왕족이 일제히 姓을 사용하였거나 일반화된 건 아닐 것이다. 진평왕대(598년) 작성된 남산신성비에도 여전히 성이 보이지 않고 탁부와 사탁부라는 部名이 기록되고 있다.
어쨌든 진흥왕이 金氏 姓을 선언한 사실은 신라사 전체의 姓氏 문제와 현재 한국인의 성씨에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시발점이라 여겨진다. 『화랑세기』에서 진흥왕은 진골정통임을 나타내고 있다. 앞서 진골정통이 沙喙部임을 주장했는데 이제 진골정통과 사탁부가 바로 金氏집단임을 말하고 있다.
진골정통=사탁부=김씨족 이런 가정을 바탕으로 혈통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그렇다면 朴氏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을까? 기존사서에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필자는 진흥왕비 思道夫人이 최초의 박씨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사도부인은 대원신통으로 진흥왕과는 소속 집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沙喙部와 喙部 중 喙部가 먼저 생기고 沙喙部는 喙部에서 분화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大元神統도 『크고 으뜸이며 神의 계통』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眞骨正統보다 높은 혈통을 의미하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신라시조 박혁거세는 喙部이며 대원신통임을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대원신통 진골정통은 모계혈통이고 姓은 부계혈통으로 반대의 혈통관념이기에 혼동이 있을 수 있다. 中古期의 많은 인물이 기록에 따라 성이 다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라인이 모계로 계승하는 혈통관념을 가졌다면 중국식의 姓氏制度를 도입했더라도 혈통 관념이 하루 아침에 모계에서 부계로 전환되는것은 불가능하다. 진흥왕대 喙部가 박씨, 沙喙部가 김씨를 선언하면서 한동안 이 姓은 모계로 전승되다가, 점차 부계로 전환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봐야 한다.
진흥왕의 혈통은 당시의 혈통관념으로는 시조 박혁거세와 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진흥왕은 시조와 다른 성을 채택했다고 본다. 어쨌든 金이라는 姓이 탄생하는 시점, 이 김씨는 진흥왕이 속한 모계혈통 즉 沙喙部(진골정통)를 가리키는 혈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의 신라 시조 설화중 왕비 閼英夫人설화는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설화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鷄龍, 鷄嘴, 閼智居西干이 등장하는 것이 그렇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알영이 沙梁里에서 태어났다고 한 점이다. 건국시기부터 喙部(梁部)와 沙喙部(沙梁部)의 혼인형태의 결합으로 국가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하겠다. 박혁거세의 母 娑蘇설화도 삼국유사에 보이므로 始祖母설화를 가진 2대 모계집단에 의해 신라가 형성되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럼 『삼국사기』「신라본기」 탈해이사금 9년에 기록된 金閼智 탄생설화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때 태어난 김알지가 김씨의 시조가 될 수 없다고 본다. 탈해왕의 대를 이은 파사왕은 왕비가 김씨 史省夫人인데 탈해왕 9년에 태어난 알지는 파사왕 원년에 13살이 될 뿐이다. 딸을 낳아 파사왕과 혼인시킬 수 없음은 분명하다. 또 사성부인의 父가 탈해(알지?)가 아니고 허루갈문왕이라 했다. 다음 지마이사금대 기사에 등장하는 김씨 愛禮夫人도 알지의 후손으로 보기 어렵다. 알지가 46세쯤에 해당하나 父가 摩帝葛文王이므로 알지의 손녀라고 보기도 어렵다. 閼智이전에 김씨로 지칭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탈해왕대의 김알지 탄생설화는 김씨 시조와 관련없는 시조 조작인가? 그렇게 볼 수만은 없는 정황이 또 있다. 仇道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화랑세기』에서 진골정통 집단의 시조가 玉帽인데 부계혈통관념으로 전환되면서 남성시조를 찾게 되고 자연히 옥모의 아버지 구도에 대한 시조관념이 생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구도의 출생시기가 김알지 탄생설화가 생겨난 시점과 대체로 일치하므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仇道는 『삼국사기』「신라본기」아달라이사금 19년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 탈해의 손자 伐休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64세에 왕위에 올랐다는 탈해의 재위 중에 구도가 출생하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사서에 등장하는 김씨 시조설화는 박혁거세왕비 알영 설화와 진골정통의 남성시조인 구도설화로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다. 구도 이전의 김씨와, 구도로부터 내려가는 진골정통간에 혈통의 直系的 연결은 없었다고 보더라도 후대의 진골정통집단은 仇道 以前의 같은 혈족집단속에서 나왔을 것으로 봐야 한다. 이것은 진골정통의 시조 옥모가 출생하기 전에도 진골집단이 있었다는 『화랑세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2. 『삼국사기』및 『삼국유사』초기 기록의 姓
진흥왕대 진흥왕과 사도부인이 각기 김씨와 박씨라는 최초의 姓을 사용하였다고 본다면 진흥왕대 이전 인물들에 대해서는 어떤 경로로 姓이 붙여졌는지 추적해 보겠다. 시조 박혁거세는 喙部, 알영부인은 沙喙部였기에 진흥왕은 시조와는 혈통이 달랐고 사도부인의 혈통과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박혁거세와 부계혈통이 연결되는 초기 왕들은 자연히 박씨 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진골정통의 시조인 구도와 그 후손들은 김씨성을 가지게 된다. 구도의 아들로 알려진 미추와 미추의 조카로 알려진 내물이 김씨가 되고, 내물 이후는 왕위의 직계계승이 이어지니 내물은 중시조역할을 하게 된다.
5대 파사왕의 왕비는 김씨 사성부인이며 허루갈문왕의 딸이라 했다. 앞서 탈해왕대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있지만 김알지가 허루갈문왕의 아버지가 될 수는 없다. 김알지 탄생 이전에 태어난 인물을 金이라는 성을 붙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김씨란 성을 가진 인물은 沙喙部이며 眞骨正統에 앞선 진골집단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씨집단인 구도와 미추, 내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박씨나 석씨 왕조에 왕비로 등장하는 김씨 여인들은 역시 沙喙部(진골)소속이란 이유로 김씨 성을 부여했다고 본다.
앞서 필자는 벌휴왕대부터 진평왕까지 모계혈통이 두 갈래로 뚜렷이 갈라짐을 들어 모계의 姓을 박씨와 김씨로 나누었다. 『삼국사기』의 姓氏 기록과 『화랑세기』의 모계계보를 절충하고 빠진 부분을 교대계승이란 점으로 가정하여 9대 벌휴왕대부터 왕들의 王母姓을 추정해 본다.
벌휴(김) - 내해(박) - 조분(김) - 점해(김) - 미추(박) - 유례(박) - 기림(김) - 흘해(박)- 내물(김) - 실성(박) - 눌지(박) - 자비(김) - 소지(박) - 지증(김) - 법흥(박) - 진흥(김) - 진지(박) - 진평(김)
벌휴, 내해, 조분, 미추, 유례, 내물, 지증, 진흥, 진지, 진평은 실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왕력」의 王母姓과 일치한다. 『화랑세기』 진골정통계보와도 대체로 일치한다. 필자의 분석과 기록이 어긋나는 母姓은 소지왕이 있는데 소지왕은 王母의 부계(미사흔의 딸)가 명확하므로 후대 기록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수정되었을 가능성을 거론했다.
위의 <표2>는 『화랑세기』에 나타난 모계혈통과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여인들의 姓을 대조한 것이다. 법흥왕비 保道夫人을 제외하고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성씨 기록들이 후대 전승과정에서의 오류가능성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일치만으로 "당시의 姓은 모계혈통이다." 라는 결론을 내려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화랑세기』에서 대원신통계보를 알 수 없으므로 주로 진골정통 위주의 분석을 했지만 『삼국사기』 초기기록부터 일관되게 나오는 김씨와 박씨 여인들을 혈통이 연결되는 같은 집단으로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 사서에서 말하는 박씨, 김씨와 정확히 일치하진 않지만 혈통을 나타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면 남성인 왕들의 姓은 왜 모계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을까? 먼저 왕들의 姓을 보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왕력」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는 혁거세(박), 석탈해(석), 벌휴(석), 조분(석), 미추(김), 내물(김), 지증(김) 등 聖骨時代 왕들에게 이 정도의 姓氏 기록만 남기고 있고 『삼국유사』는 대체로 부계의 성을 그대로 남기고 있다. 모계의 성이든 부계의 성이든 이 성씨 기록은 모두 후대 사서기록자가 소급해 기록한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왕들의 계보는 각 始祖와 부계 연결이 명확한 만큼 始祖의 姓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나 王母 등 여성들은 시조와 부계가 명확하게 연결되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런 여인들이 『화랑세기』에서 확인되는 모계혈통과 일치하는 성을 갖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만으로도 모계의 姓이 사용되었다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왕실여인도 아니고 왕도 아닌, 기타 인물들의 성은 어떻게 된 것일까? 『삼국사기』「열전」에 많은 신라인의 人名이 있지만 성이 기록된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성이 기록된 사람은 대부분 왕들과 부계혈통이 연결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金后稷(지증왕의 증손), 昔于老(내해왕의 아들), 朴堤上(파사왕의 5대손), 金歆運(내물왕의 8대손),
이 인물들의 성은 왕들의 성에 기초하여 부계로 연결한 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성들의 성에는 모계의 성이 반영되지 않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異斯夫, 堤上, 圓光, 異次頓 등 기록에 따라 姓을 달리 기록하거나 애매한 경우는 성을 소급하여 적용하다보니 생겨난 착오라고 볼수도 있지만 모계의 성을 적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이차돈과 이사부의 姓을 추적해 본다.
『삼국유사』제3권.「興法」염촉멸신조 - 內養子, 姓朴字厭壻, (중략)其父未詳, 祖阿珍宗, 卽習寶葛文王之子也, (중략) 又按金用行撰阿道碑, 舍人時二十六, 父吉升祖功漢, 曾祖乞解大王
이차돈의 姓이 박씨이며 祖父가 阿珍宗이고 習寶갈문왕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니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알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대신 阿道碑에는 아버지가 吉升, 조부가 功漢, 증조부가 乞解대왕이라는 다른 계보를 附記했다. 이에 대해 아진종과 습보는 외가쪽 계보이고 길승, 공한, 걸해대왕은 부계라는 주장이 있다. 아버지를 알 수 없고 아진종이 조부라면 바로 외조부임을 알 수 있다. 阿道碑에 나온 계보를 부계계보로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차돈은 성이 昔씨여야 한다. 습보갈문왕이 부계라면 김씨가 돼야 한다. 그런데도 그의 성이 朴이란 건 그의 모계가 대원신통(탁부)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얻은 성임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와 단양적성비에 그 근거가 있다. 이차돈의 외조부가 아진종이라 했는데, 『화랑세기』에는 異斯夫(苔宗)가 바로 이 아진종의 아들이라 했다. 이사부와 이차돈은 모계가 같으므로 姓이 같아야 한다. 단양적성비에 나오는 喙部 伊史夫智를 동일인물로 본다면 이사부의 姓은 박씨가 되어야 하고, 이차돈과 모계가 같으므로 이차돈도 박씨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昔氏王과 兩大 모계집단
姓氏問題에서 脫解王의 후손 昔氏를 빼놓을 수 없다. 김씨와 박씨 兩大 母系集團으로 구성된 초기 신라왕실에서 석씨는 어떤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석씨는 따로 집단을 형성했다는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昔氏가 실제 사용된 성이 아니고 後世史家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姓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진흥왕대에 姓이 최초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그 이후 姓이 본격 사용된 시기에 昔姓은 보이지 않는다. 성이 없던 시대에 태어나고 성이 본격 사용된 시기에는 보이지 않으니 기록상의 姓이라 추정한다.
석씨가 내물왕 이후 김씨에게 완전히 멸족되었다는 어떤 근거도 없고 석씨와 김씨가 교대하는 상황에서 어떤 유혈사태의 흔적도 없다. 오히려 실성왕과 이차돈 등 석씨왕족들과 혈연이 연결되는 사람이 있다.
앞서 거론했다시피 『화랑세기』를 따르면 진골정통계보는 석씨왕조의 開始期에 탄생하여 김씨왕조에 그대로 연결되고 있다. 또 김씨모계의 반대편에는 박씨 왕비들이 존재하고 있다. 석씨왕조대에 昔이라는 성이 부여된 왕비는 1110대 내해왕비가 유일하다. 그런데 내해왕비는 조분왕의 누이동생이라 했다. 조분왕이 석씨이니 내해왕비도 석씨로 기록했을 것으로 본다. 다른 석씨왕들은 오직 석탈해와 부계 계보가 연결된다고 姓을 같이 기록했을 뿐이다.
석탈해도 신라 시조중의 한 인물로 볼 수 있지만 昔氏 성을 가진 인물들은 2부체제 속에 속한 인물로 보아야 할 뿐, 박씨 집단이나 김씨 집단과 달리 세력을 형성한 별도의 세력집단이라고 볼 여지는 찾을 수 없다.
앞서 석씨 왕조대에 완전한 2부체제를 형성했고 박씨 왕비족과 후대 진골정통계보와 연결되는 김씨 왕비족이 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다고 했다. 탈해라는 시조가 등장하고, 그 시조에게 昔氏 姓을 부여하므로써 시조와 부계혈통이 연결되는 왕들에게도 昔이라는 성을 부여한 것이 이른바 석씨 왕조라는 것이다. 김씨나 박씨왕들도 마찬가지다. 앞서 여성들의 姓이 母姓을 따랐다고 했듯이 당시에 사용된 姓은 母姓이었고 부계혈통관념을 가진 후손들이 부계조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父姓이 나왔다고 볼 수 있다.
4. 朴, 昔, 金 등 姓氏 사용 이전의 姓
성씨문제에서 또 하나 짚고 갈 것은 이들 박씨와 김씨 모계집단이 朴이나 金이라는 姓을 사용하기 전에는 어떻게 혈통을 구분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서 部體制 문제에서 언급했지만 금석문에 보이는 部가 바로 姓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는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는가 하는 혈통의 주체만이 다를 뿐, 같은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部가 姓과 같이 혈통구분에만 사용되고 다른 역할이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部는 같은 혈통으로 구성된 집단을 지칭함은 부인할 수 없다.
중국 5호16국시대 중국내륙에 진입한 여러 塞外民族들이 자신들의 部名을 후에 姓으로 사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중국한문을 빌려 쓴 신라인들이 중국에서 쓰는 部의 用例를 달리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무리한 사고이다. 沙喙部, 喙部, 本彼部, 斯彼部 등 이런 部가 바로 姓이라는 것이다. 다만 탁부와 사탁부가 모계의 姓임을 주장하지만 본피부와 사피부 등 다른 部 집단도 모계로 혈통을 구분하였는지는 알길이 없다.
『화랑세기』에 7세 풍월주 薛原郞의 아버지 薛成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薛이란 성을 사용하는데 이상하게도 자식에게는 자신의 薛씨 姓을 그대로 물려주어 부계계승을 하고 있다. 骨族으로 불리는 신라왕실은 모계관념을 갖고 있었기에 설성에게 母姓을 내렸지만 薛씨 집단 자체는 부계계승관념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원랑의 世系」에는 薛成이 활동할 즈음 이미 薛優輝라는 사람이 及干이란 관직에 있었다고 했다. 특히 설성의 어머니 선조를 高耶村長 虎珍公의 후손이라 했으므로 설씨는 習比部에서 나왔다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6부 시조기록」과 일치한다. 이런 상황은 화랑세기가 기록될 시점에도 姓氏와 혈통계승에 있어 모계와 부계의 혼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5. 신라의 始祖
신라인의 시조는 사서 기록으로는 朴赫居世다. 그런데 일부 연구자들은 『삼국사기』에 왕이 바뀔 때마다 始祖墓나 始祖祠堂을 참배했다는 내용에서의 始祖에 대해 박혁거세가 아닌 김알지나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이 아닌가고 말하고 있다. 김씨가 왕이 되고 모든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데 다른 姓氏의 시조를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모계혈통 체제로 보면 후대 김씨 왕족이 박혁거세를 시조로 믿고 있었던 사실이 이상하지 않다. 앞서 김씨집단의 모계시조는 閼英부인이라 했으므로, 알영부인이 어머니면 박혁거세는 아버지일 뿐이다.
부계혈통관념으로는 박혁거세가 시조이다. 사탁부가 탁부에서 갈라져 나오고 박씨 김씨 모계집단이 半族社會의 한 갈래라면 박씨와 김씨를 묶어 하나의 種族으로 보는 인식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양대 모계집단을 骨人이라 부르고 양대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骨이란 말이 이 양대 집단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인이 기록한 금석문에는 나타난 또 하나의 始祖가 있으니 星漢이다. 문무왕碑, 김인문碑, 흥덕왕릉碑, 眞徹大師塔碑, 眞空大師塔碑 등에 한결같이 시조를 星漢, 漢王, 또는 聖韓이라 했다. 이 星漢이 누구인가에 대해 연구자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이사금조 기사에 김알지의 아들로 나오는 勢漢에 비정하여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앞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김알지는 미추왕의 아버지 仇道를 粉飾한 인물이다. 하지만 勢漢-阿道-首留-郁甫 이 계보가 구도의 윗대 선조계보일 가능성도 높다. 勢漢 과 星漢을 같은 인물로 보고 다른 실마리를 찾아 본다. 눌지왕때 활약한 박제상의 계보가 있다. 눌지왕과 박제상은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눌지왕계보와 파사왕의 5대손이라는 박제상의 박씨계보를 비교해 보겠다.
내물왕계보: 세한 -아도-수류-욱보-구도-말구 -내물-눌지
박제상계보: 혁거세-남해-유리-파사-아도-(미상)-물품-제상
눌지왕은 勢漢의 7대손, 제상은 혁거세의 7대손이다. 그래서 星漢을 혁거세의 다른 이름이란 주장이 일찌기 末松保和에 의해 제기되었다. 알영부인이 김씨족의 모계시조라면 박혁거세는 부계시조가 될 수 밖에 없기에, 이 견해는 주목할만하다. 혁거세는 박씨족(모시조인 동시에 신라의 건국시조다. 이에 대해 건국시조일 뿐, 김씨족과는 아무런 혈통적인 연관이 없다는 일반론이 있지만 박씨 집단이 김씨 집단과 主活動期間이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들과 혈통의 연관이 없는 박씨시조를 건국시조로 삼을 리는 없다. 소지왕때 시조가 태어난 奈乙에 神宮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있고 왕이 새로 즉위할때마다 시조묘나 神宮, 시조사당을 참배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시조가 혁거세가 아닌 다른 인물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시조를 알지, 미추, 내물, 성한 등으로 비정하는 연구자가 많다. 후대 부계혈통관념의 소산으로 봐야 한다. 『삼국사기』「雜志」祭祀條에는 혜공왕대 五廟를 세우면서 미추왕을 金姓 始祖로 포함시켰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도 진골정통의 독주체제가 굳어지면서 김씨족만의 시조관념이 생겨난 흔적으로 본다. 미추왕은 필자의 분석으로 보면 母가 박씨라고 했으므로 진골정통이 아니다. 그러나 진골정통의 남성시조인 구도의 아들이며 왕이었으므로, 부계적 관념에서 새로이 인식된 시조로 볼 수 있다.
VII. 金庾信家의 진골귀족 편입
금관가야출신인 金庾信家는 어떻게 신라에서 高官貴族이 되고 지배층에 합류할 수 있었는가? 폐쇄적인 혈통위주 신분제로 외부혈통의 진입을 철저히 봉쇄해온 신라왕실이 어떻게 금관가야 仇衡王 一族만은 선뜻 받아들여 지배층에 합류시켰는지, 기존자료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는 화랑세기를 통해서만 해명된다. 화랑세기는 모계혈통으로 신분이 결정됨을 나타내고 아울러 금관가야 왕실이 신라에 歸附하기 오래 전부터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신라왕실과 같은 모계혈통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신라인의 血統觀으로는 금관가야왕실이 신라왕가와 같은 혈통이었기에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158쪽) 世系는 <표3>과 같이 금관가야가 6대 좌지왕대부터 신라의 골품있는 여자를 왕비로 맞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내용과 『삼국유사』「가락국기」의 가야왕력을 비교하면 풀리는 의문들이 있다. 「가락국기와 人名은 대체로 일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가락국기」는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았다는 구절이 전혀 없지만 가야에 김씨와 박씨가 있는 점, 왕의 장인(왕비의 父)이 신라와 같은 관직을 갖고 있는 점, 가야왕력이 신라와 같이 왕비의 家系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점을 보면,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았다는 『화랑세기』의 내용에서 의문이 해소될 수 있다. 「가락국기」는 『화랑세기』와 유사한 원전을 인용했고, 그 중 신라여인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는 내용은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흔적이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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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가문과 도설지가 신라인의 혈통관념으로는 결코 이방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유신가문을 가야계로만 인식하는 것은 후대 부계혈통관념의 소산일 뿐이라고 본다. 후대 김유신의 후손과 왕실간에 갈등양상이 노출되는 것도 신라인이 부계적 혈통관념으로 김유신가문을 異族으로 인식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김유신의 조부 무력이 신라지배층에 합류할 시기에는 그런 혈통관념이 희박했다고 보여진다.
VIII. 맺음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화랑세기』를 부정하고 있다. 필자는 진본이라는 입장에 있지만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다만 지리한 논쟁만 할 것이 아니라, 『화랑세기』의 내용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냄으로써 어떤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그 속에 신라인만이 알고 있어야 할 古代사회의 斷面이 있다면,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이다. 母系問題는 신라사 연구자에게 있어 오랜 숙제가 되어 있었다......『화랑세기』에서 신라인은 시대에 따라 모계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른 점도 주목해야 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부계중심적 혈통관념으로 전환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역사학은 물론이고, 인류학분야에서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중국문물을 받아들이기 전 우리 고대사회의 원형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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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너무나도 명쾌하고 너무나도 훌륭한 기념비적 작품!!! 그러나 게재 학술지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Note : 지금 시점에서 필사본 <화랑세기>는 역사서라기보다는 창작으로 여겨지는데, 이 논문을 읽는 분들은 이런 점에 유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2025.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