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창녕과 비화 가야

by 조영필 Zho YP

남재우 (2012), 기록으로 본 고대 창녕지역의 정치적 위상, 석당논총 53집.

백승옥 (2021), 比斯伐의 공간과 역사적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101, 39-77.



<남재우, 2012>

... [삼국지]의 不斯國, [삼국유사]의 非火伽耶, [삼국사기]의 比只國, [일본서기]의 比自㶱國... 창녕지역의 지명으로 추정되는... [진흥왕순수비]에는 比子伐, [삼국사기]에는 比自火 혹은 '比斯伐', [일본서기]에는 費智가 보인다.

...창녕이 언제 신라에 편입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진흥왕 16년(555)에 비사벌에 完山州를 두었다고 하므로...


... 신라의 삼국통일 후 경덕왕 16(757)에 창녕지역은 火王郡으로 개칭되고 현효현, 유산현, 계성현을 領縣으로 관할했으며, 영산은 상약현으로 개칭되어 밀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따라서 창녕은 ... 지금의 지명으로 개칭된 것은 고려 초인 태조 23년(940)이다.


창녕의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창녕지방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지석묘를 들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창녕군 장마면 유리 산 9번지에 위치하는 유리지석묘(경상남도 기념물 제2호)이다... 원래 10여기의 상석을 갖춘 고인돌이 분포디어 있었으나... 그 중 2기의 고인돌은 매우 특이한 하부구조(벽돌쌓기식)를 가지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밖에도 ... 지석묘군이 발견되고, 마제석검이 출토되었다.


특히 고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창녕교동고분군(사적 제80호), 창녕송현동고분군(사적 제81호), 계성고분군(도기념물 제3호), 영산고분군(도기념물 168호) 등이 대표적이다... 창녕의 중심고분으로 추정되는 교동고분군의 묘제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그외에도 ... 다수의 고분군이 남아 있으나... 대형분은 창녕읍, 계성면, 영산면에만 집중 분포하고...


고분과 관련하여 분포를 같이 하고 있는 성지로... 화왕산성(사적 제64호)과 목마산성(사적 제65호)... 신당산성이 있다.


삼한의 시작은 준왕집단과 위만조선의 몰락에 따른 유이민의 남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물론 마한의 형성은 준왕집단의 남하와 관련이 있고, 진·변한의 성립은 위만조선의 멸망에 따른 유이민의 남하로 볼 수 있다. 조선왕 準이 孝惠高后時(기원전 194~180)에 남하하여 韓王이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이 시기에 한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진변한의 형성은 위만조선의 멸망(기원전 108년)과 그 집단의 남하에서 비롯되었다. 삼한의 토기가 모두 瓦質土器라는 광의의 범주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마한과의 대비에서 진변한지역이 가지고 있는 강한 공통성, 창원 다호리 1호묘 출토의 칠기 및 붓의 존재, 진변한 지역에서 자주 확인되는 서북한지역의 문화요소 등은 진변한이 위만조선과 연결된다는 점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사료 11)(일본서기 권17, 계체기 23년(529) 4월조)에서는 신라의 이사부가 공략했던 4촌 중에 費智가 등장하는데 창녕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 가야시기 창녕군 지역에는 두 개의 정치집단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백승충, 2011). 즉 창녕·현풍과 영산·계성지역을 분리하여 삼한시기의 불사국과 변진미리미동국을 계승한 비자벌국과 탁기탄국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자벌국은 그 멸망시기를 알 수 없지만, 탁기탄국은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으므로 창녕지역의 신라 편입시기를 520년대로 이해하고 있다.


창녕지역의 영산과 계성지역을 탁기탄국으로 비정하는 이유는 ... 고대 창녕의 행정단위는 지금의 창녕지역과 다르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火王群은... 진흥왕 16년(555)에... 下州라고 하였으며, 26년(565)에 주를 폐지하였다... 영현이 하나였다. 현효현은 본래 推良火縣(三良火라고도 하였다)이다([삼국사기 권제34, 잡지 제3, 지리1, 화왕군)


密城郡은 본래 推火郡이었는데... 영현이 다섯이었다. 상약현은 본래 西火縣이었는데... 지금(고려)의 靈山縣이다. 密津縣은 본래 推浦縣(竹山이라고도 하였다)이다... 오구산현은 본래 오야산현(구도 또는 오례산이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청도군에 합쳐져 속하였다. 형산현은 본래 경산현이었는데... 청도군에... 소산현은 본래 솔이산현이었는데... 청도군에...([삼국사기] 권제34, 잡지 제3, 지리1, 밀성군)


창녕과 영산의 행정단위가 달랐다... 삼국시대 당시 현풍현은 화왕군에 속하지만, 영산현은 밀성군에 속했다... 즉 신라가 창녕지역을 편입한 이후 의도적인 행정개편이든 지리적 조건에 의해서든 창녕현·현풍현을 하나로 묶어 화왕군으로 삼고, 독자성이 강한 이질적인 계성·영산군은 밀성군에 붙였는데, 후자를 탁기탄국이 자리잡았던 지역으로 이해하였다.


이를 종합하면 현재의 창녕군에는 삼한 시기에 '불사국'과 '변진미리미동국'이라는 2개의 정치집단이 존재했는데, 창녕읍·현풍읍 일대는 비사벌국, 계성현·영산현은 탁기탄국으로 성장했다. 이후 신라가 창녕지역을 복속시키면서 비자벌국 중심으로 행정구역을 재편하고, 반신라적 정서가 강했던 후자의 지역은 옛 이름을 상실하고 흩어져 밀성군의 속현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창녕이 언제 신라에 편입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16년(555) 정월에 비사벌에 完山州를 두었다."... 진흥왕 22년(561)에는 왕이 이곳을 순시한 후 진흥왕순수비를 세웠으므로 그 이전에 이미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면서 진흥왕 때에 신라에 완전히 병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진흥왕순수비로 볼 때 하주의 설치이후 창녕지역은 하주의 치소였으며, 주의 장관인 軍主의 군영인 比子伐停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외에 창녕의 정치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은 비문의 가장 말미에 보이는 '村主奕聰智述干麻叱智述干' 2인의 촌주이다. 창녕지역 촌주의 관등은 술간인데 외위 11관등 가운데 2등급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2등급인 술간의 관등을 지닌 촌주는 그 용례가 없다. 1등급인 嶽干은 그 용례가 없으며, 남산신성비에 나오는 安羅의 2인 촌주도 5등과 6등에 불과하다. 금석문상으로 3등인 高干도 알려진 예가 없다. 촌주의 인명말미에 智를 사용한 것은 일정하게 우대받았던 사실을 보여준다. 2인의 촌주가 존재하고, 관등이 높은 것은 창녕의 지리적 특수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561년까지 가야의 나라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던 대가야와 아라가야의 대안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높은 관등의 촌주를 창녕지역에 임명했을 가능성이 높다.


... 계성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에 새겨진 명문들이다. 명문은 '大干' 등 여러 글자가 보이는데... '대간'명문토기는 6세기 중·후반의 중·소형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대간'이라는 명문이 등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창녕식토기라고 불리는 독특한 형식의 토기문화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치세력의 규모를 보여주는 것이 창녕지역에 즐비한 대형고분군이다. 교동고분군, 송현동고분군, 계성고분군, 영산고분군 등의 존재는 고령의 지산동고분군이나, 함안의 말이산고분군에 버금가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승옥, 2021>

... 창녕에 대한 전론적 연구는 1990년대 초 백승옥과 박천수에 의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백승옥, 1992)... 박천수는 창녕 지역 특유의 토기문화에 관심을 갖고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결과를 석사 논문으로 제출했다 (박천수, 1993). 이형기 또한... (이형기, 1994).


기사 속에 보이는 "변진(한)은 진한사람들과 뒤섞여 살며 성곽도 있다.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했다."라는 기사가 가장 잘 적용되는 지역이 바로 불사국이었던 오늘날의 창녕 지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弁辰彌離彌凍國의 경우 오늘날 경남 밀양 지역에 존재했던 소국으로 비정된다. 이는 불사국과 마찬가지로 낙동강 동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불사국과 달리 변한 소국이다.


박천수는 토기의 특징을 바탕으로 현풍 지역과 창녕 지역은 성격을 달리하는 집단으로 간주하였다. 다케다 유키오는 고총고분이 축조된 지역은 각각 독자적인 개별 세력이 존재한 것으로 보았다. 이희준은 창녕지역 정치체를 일대의 지리 지형 및 고총군 분포 등으로 볼 때, 달성 현풍 및 창녕 교동과 계성, 영산지구까지를 포괄하는 신라의 지방 세력으로 보았다. 백승충은 지리지 기록들을 상세히 분석하여 비사벌의 영역을 현 창녕읍과 현풍읍 일대에 국한하여 보았다. 계성과 영산, 밀진(영산 남쪽의 낙동강 동안)은 별도의 가야국인 㖨己呑이 존재한 것으로 보았다.


그림 2. 창녕지역 가야고분군 분포도


[일본서기] 계체기 24년(530) 9월조에 나오는 구례모라성<흠명기 5년(544) 3월조, 11월조에는 구례산으로 나옴>을 창녕의 화왕산으로 비정한 후...


가라왕이 신라왕녀를 아내로 맞아들여 마침내 아이를 가졌다. (중략) 결국 지나가는 길에 刀伽·古跛·布那牟羅 3성을 함락시키고 또한 북경의 5성을 함락시켰다([일본서기] 권17, 계체 23년(529) 3월조).


... 현풍 비슬산의 옛 이름이 包山인 점으로 보아... 지금의 창녕군 성산면에는 지금도 求禮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창녕군 성산면 구례동).



Note:

창녕지역, 지석묘, 낙동강 이동의 가야, 창녕식 토기, 다수의 고분군, 2인의 촌주...

신라는 금관가야, 대가야, 백제 등과 통혼할 때, 항상 비지배, 비조부, 비지 등의 딸이나 여동생을 혼인시키고 있다. 이 '비지', '비조'는 과연 어떤 뜻일까? 이들과 '비사벌'은 전혀 무관한 것일까?


Note: 나무위키-가야/왕사 참조

탁국(또는 탁기탄)의 마지막 왕 函()跛旱岐(544년, 2차 사비회의 시 백제 성왕의 520년 정세 회고 기사에 등장)

任那國主 龍主王의 손자 佐利王: 大和國 大伴造의 시조

任那國人 左利金(佐利己牟): 摂津國 豊津造의 시조; 摂津國 韓人의 시조

弥麻那國主 牟留知王의 후손: 右京 三間名公의 시조(이상 신찬성씨록)


Note: 더위키-탁기탄

탁기탄은 사서에서 몇 차례 언급되지만 ... 확실히 알 수 있는 정보는 신라와 가야 경계선상에 있는 작은 소국이라는 정도다. 김태식은 창녕 영산면과 남지읍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 창녕의 남부지역인 영산면 일대는 창녕 북쪽의 교동, 송현동 세력인 비자벌의 일파로 추정되므로 이러한 추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탁순 멸망 기사의 내용과 신라의 진출 방향성, 그리고 고지형과 고분군 양상을 고려했을 때 탁기탄이 위치한 곳은 ... 창원시 의창구 동읍에는 다호리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는데, 다호리 고분군은 기원전후부터 6세기 중후엽 횡혈식석실분까지 지속적으로 축조되었다. 고총의 경우 직경 30m에 달하는 것들도 있어 가야소국의 중심고분군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이를 보면 탁기탄은 창원 북부 혹은 김해 진영읍이 가장 유력한 기반지로 추정된다 (탁순국의 중심 고분군으로 여겨지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합성동 고분군과 맞먹는다).


(2021.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