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의 역설

김근

by 조영필 Zho YP

한자의 역설




26쪽: 문자에 반영돼야 하는 한어의 특성은 무엇인가? 한어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한 음절이 하나의 의미를 갖는 음절 중심의 언어이자 각 음절이 발음될 때에 성조가 실현되는 성조언어라는 점이다. 음절 내에서 성조가 실현되는 곳은 모음 부분이므로 의미도 모음에서 결정되고 음이 변화하더라도 모음은 잘 변하지 않고 모음의 앞뒤에 붙은 자음만 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한어 음운학에서는 모음을 중심적 음소라는 의미의 원음(元音)이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27쪽: 이에 비해 음소문자를 사용하는 유럽 언어를 보면 한어와는 반대로 자음이 매우 발달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영어의 'script'라는 단어는 모음은 i 하나인 데 반해 자음은 다섯 개나 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Nietzsche)'의 이름을 한어로 음절화하면 Ni-cai(尼采)가 되는데, 한어에서 c라는 하나의 음소면 표기 가능한 것을 독일어에서는 무려 다섯 개의 자음(tzsch)을 동원해 변별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유럽 언어가 자음 위주로 의미를 변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사례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한어 음운학에서는 자음을 모음에 대한 보조적인 기능을 하는 음소라는 의미에서 보음(輔音)이라는 용어로 지칭한다.

중국에는 남북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 음운학이 있는데 이를 성운학이라고 불렀다. 성운이란 한어의 음절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라는 두 가지 음소로 분해한 것을 말한다... 운모가 모음과 다른 점은 모음 뒤에 붙는 자음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이다... 한자의 표기법으로 반절법(反切法)이라는 게 있다. 이것은 특정 한자의 음절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한자의 성모 및 운모와 같은 음가를 가진 다른 글자를 끌어와서 그 독음을 합성해내는 방법이다. 앞의 '동(東)' 자를 반절법으로 표기하면 '덕홍절(德紅切)'이 되는데, '덕(德)'은 '동(東)'과 성모가 같고, '홍(紅)'은 운모가 같으므로 이 두 음소를 합성하면 dong이 된다. 이때 '동(東)'의 성조인 평성은 운모인 ong에서 실현된다.


28쪽: 한어는... 단음절어로... 운 위주로 결합된 것이므로 이를 표기하려면 운을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다. 운을 표기하고 읽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형성(形聲)인데, 형성은 한자의 주요 조자법이다... 아무튼 한어가 단음절어 중심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글자(한자)를 갖고, 이는 다시 하나의 음절을 갖는다는, 이른바 '일사(一詞)-일자(一字)-일음(一音)'의 대원칙을 세울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중대한 모순이 발생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단어도 증가하는데, 그에 따라 글자 수가 늘어나는 것은 받아줄 수 있지만 음절 수의 증가는 현실적으로 제한돼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즉, 한어의 음운 구조 속에서 형태소가 될 수 있는 음절의 수는 대략 400여 개쯤 된다. 이 400여 개의 음절로 무한정 증가하는 단어를 변별력 있게 표기하자면 '일사-일자-일음'의 대원칙을 지킬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 음절로 여러 단어를 중복해서 표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한자에 기실 각기 다른 단어(글자)임에도 같은 독음으로 읽히는 이른바 동음이어가 많이 생긴 것이다. 동음이어는 같은 독음으로 읽혀서 어의 변별력이 약하므로 이를 보완할 기제가 필요한데, 이것이 한자의 시각적 변별 요소가 되는 자형이다... 이것은... '니체'를 변별적으로 쓰기 위해 자음을 'tzsch'와 같이 다수로 동원하는 것과 같은 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어에서도 모음 위주의 음절을 표기하고자 하는 수요를 벗어나 자음으로써 변별력을 추구하고자 하지 않는 한, 한자의 기능은 그 어떤 새로운 문자로써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한자의 폐지나 대체가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1쪽: ... 한자의 의미는 자연스럽게 두 가지 방향으로 생성되었으니, 하나는 字音이고 다른 하나는 字形이다. 즉 모호한(chaotic) 성격의 의미가 자음의 청각이미지를 통해 분화되기도 하고, 자형의 시각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를테면, '정치 정(政)' 자는 원래 자형으로써 의미를 추적하자면 '세금을 걷는 행위'가 된다. 정치를 세금을 걷는 행위로 규정하면 백성들이 정치를 불신하게 되므로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해석한 것이 "政이란 '바로잡다'라는 뜻이다.(政者, 正也.)"라는 훈고이다. 즉, 정치를 동음이어인 '正'으로 해석하면, '正' 자의 '바르다'라는 청각이미지로써 '政' 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감출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武' 자의 원래 의미를 자형으로써 추적해보면 무사가 어깨에 창을 메고 보무도 당당히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좌전]의 다음 고사는... 초나라 임금[楚子]이 모르는 소리 말라며 하는 말이 "글자 모양을 보더라도 전쟁(戈)을 멈추게(止) 하는 것이 武이다.(文, 止戈爲武.)"라는 윤리적인 해석이었다.

...'孝' 자의 자형이 자식이 노부모를 업고 있는 모양을 상징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39쪽:... 권력은 헤게모니의 유지를 위해서 항상 언어를 장악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는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 권력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고대 중국의 이른바 명물훈고(名物訓言古)는 바로 이러한 의도에서 시도되었다.


41쪽: 프로이트는 성의 역사성을 설명하면서 어린 시절에는 현재라는 순간에 살지만 나이가 들면서 기억이 현재의 인상을 제압한다고 설파했다. 그러니까 어려서 배우고 접한 텍스트는 현재의 실재로 받아들여지면서 세계로 고착되고, 나아가 주체의 여생의 형이상학적 세계가 된다... 따라서 텍스트의 제작은 권력의 진실을 기획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천자문]에 '축물의이(逐物意移)', 즉 "사물을 쫒아다니면 뜻이 바뀐다."라는 말이 있다.


42쪽: 새로 출시된 자동차 제품을 그냥 내놓고 소비자더러 스스로 선택해서 사라고 한다면 소바자는... 즉 탈것이라는 개념으로 신제품을 볼 것이고, 그러면 굳이 돈 들여서 바꾸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곧 사물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직접 보고 판단하는 '축물'의 단계이다. 이렇게 하면 수요가 일어나지 않아 자본이 권력을 잃게 되는 '의이'로 이어진다... 빚을 내서라도 신제품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담론을 유효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자본권력은 매체를 장악하려 하는 것이다.

한대에 나온 [설문해자(說文解字)], [석명(釋名)] 등을 비롯한 각종 문자서들이 관학으로부터 출현한 것은, 권력이 주체들(백성)의 욕망으로 인하여 다양하게 나타나는 환상들을 억압하여 권력의 담론을 형이상학적 실재, 곧 헤게모니로 인식하도록 하는 기획의 결과인 것이다. 중국의 경우 이러한 권력의 기획에 한자가 동원됐던 것이다.


43쪽: 우리가 경전이나 고전을 높이 떠받드는 것은 이 때문이며, 이는 또한 죽은 아버지라야 강력한 권위의 질서(거세 또는 금지)로 귀환한다는 殺父 신화의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살아서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거나 술주정이나 하면서 인간적 냄새를 피우는 나약한 아버지의 금지에 복종하거나 거세되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53쪽: 갑골복사의 문자들은 자음으로 읽힐 수 있음은 물론 한자의 조자 방법인 육서 체계를 그대로 갖추고 있으므로 현존하는 한자 중 가장 오래된 한자가 된다. 이들 갑골 유물은 대략 B.C. 1300년에서 B.C. 11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


62쪽: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관인은 대개 사각 모양, 즉 방형으로, 사인은 원형으로 각각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자를 방형으로 만드는 것은 관청은 공정하고 엄정해야 하므로 도장의 모양대로 '각지고 모나게(fair and square)' 업무를 처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후자는 개인들 간의 거래가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원형으로 만든 것이다.


131쪽: '세(稅)' 자는 '벼 화(禾)' 변과 '태(兌)' 방으로 이루어진 형성자이므로, 자형적 의미는 '벼 낟알을 헤쳐놓고 하나하나 세어보다'가 된다. [좌전] <선공 15년>에 보면 "처음으로 밭이랑대로 세금을 매겼다. (初稅畝.)"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토지에 세금을 매기는 '세(稅)' 제도를 시작했다는 기록이다. 그전까지는 조(租)라는 세제를 시행해왔었는데 이는 정전법(井田法)이라는 봉건예법에 따라 토지를 나눠준 영주의 땅을 무상의 노동력으로 경작해주는 것이었다. 영주의 입장에서 '조'는 불리한 제도였으므로 '세' 제도를 고안해낸 것이니, 이는 경작지에서 산출되는 작물의 양을 정확히 계산해 생산비를 공제한 후 나머지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걷어 가는 방식이다. 당시 작물의 양을 계산할 때에 곡식 낟알을 헤쳐놓고 일일이 세어보았는데, 앞의 '세(稅)' 자의 자형은 이 사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45쪽: 音同意近의 원칙은 중국의 언어생활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의 거리를 다니다 보면 대문이나 현관 앞에 福 자를 거꾸로 붙여놓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복이 이 문을 통해서 들어오기를 바란다'는 기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福 자가 거꾸로 돼 있다는 말은 중국어로 '푸다오(福倒)'인데, 이는 '푸다오(福到)', 즉 '복이 오다'라는 말과 발음이 같으므로 이렇게 한 글자를 뒤집음으로써 간단히 상징할 수 있는 것이다.

... 춘절, 즉 설이 되면 고궁의 정원에 들어가 다섯 마리의 박쥐 문양을 차례로 밟는 행사를 한다... 즉 '다섯 가지 복을 두루 받다'라는 의미를 상징하게 된다.

... 대추를 중국어로 '짜오(棗)'라고 하는데 이는 '일찍이'라는 뜻의 '짜오(早)'와 발음이 같다. 그리고 밤을 '리(栗)'라고 하는데 이는 '서다'라는 뜻의 '리(立)'와 독음이 같다. 그러니까 대추와 밤을 주는 것은 '짜오리(早立)', 즉 결혼을 했으니 일찍 자식도 낳고 재물도 모아 행복한 가정을 세우라는 격려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148쪽: 우리나라에서도 대구광역시의 지명을 원래는 '대구(大丘)'로 썼었는데 '언덕 구(丘)' 자가 공자의 이름과 같으므로 영남의 유자들이 이를 피휘해서 '언덕 구(邱)' 자로 고쳤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160쪽: 왕망은 제위에 오른 후에도 유씨가 다시 정권을 되찾는 노력을 시도할까 봐 매우 두려워하여 '유(劉)' 자를 기피했다. 당시 화폐 중에 금도(金刀)라는 게 있었는데, '금도(金刀)'가 '유(劉)' 자를 구성하는 글자라 하여 이름을 화천(貨泉)으로 바꾸게 했다.




감상:

책 제목에서 나는 중국인의 언어와 문자생활에 대해 역사적인 접근을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막상 책을 읽게 되면, 프랑스 구조주의적 시각으로 한자의 내면적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그게 그거인 것 같기도 하지만, 하여간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따라서 망외의 시각을 얻기도 한 책.


(2015. 03.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