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어릴 때 (고2),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4 김수영(지식산업사, 1981년 6월 10일 초판)을 사서 읽었다. 아마 나오자마자 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이 시리즈는 순차적으로 발간되고 있었는데, 나는 그중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만을 사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영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아니었다. 아니 알고 있던 시인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박재삼의 시에 푹 빠져 학교로 가는 방죽길에서 오며 가며 그의 시에 가락을 붙여 외고 있었다. 다만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이상하게 왠지 알아두어야 할 것 같은 그러한 현대적인 이미지가 느껴져서 사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집 맨 앞에 나오는 〈孔子(공자)의 生活難(생활난)〉에서부터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꽃이 열매의 上部(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장난)을 한다
나는 發散(발산)한 形象(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作戰(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 伊太利語(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事物(사물)과 事物의 生理(생리)와
事物의 數量(수량)과 限度(한도)와
事物의 愚昧(우매)와 事物의 明晰性(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孔子의 生活難〉 전문)
지금 4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나는 이 시가 불가해하다. 당시 내가 이 시를 읽을 때에는 견문이 짧아서 국수가 정말 이태리 말로 마카로니인 줄로만 알았다. 아마 대학교에 들어가서 그리고 청년시절 내내 그렇게 알았을 것이다. 유럽에 주재할 때 비로소 알았다. 마카로니는 구멍 뚫린 무슨 애벌레 같은 파스타인 것을... 그리고 마카로니는 국수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굳이 국수를 이태리 말로 하자면, 파스타나, 스파게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핀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출처를 명기하지 않은 네이버블로그에서는 다음의 설명을 하고 있다1).
'첫번째 연은 식물의 결실과정에 대한 묘사이다. 꽃이 열매의 상부 즉 위에 피어있다는 것은 식물이 개화기를 거쳐 열매를 맺는 결실기에 있다는 말이다. 모든 식물, 암꽃과 수꽃이 나뉘어져 있는 식물은 수꽃의 경우는 꽃봉오리만 매달려 나오게 되지만 암꽃은 열매와 꽃봉오리가 같이 매달려 나오게 된다... 암꽃은 열매 위에 꽃을 피우고 벌과 나비에 의해 수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수정이 이루어지면 꽃은 시들고 씨방이 커지면서 열매를 숙성시키게 되는 것이다.'
황현산은 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2).
'호박... 장미나 해당화... 사과도 가지도 오이도 토마토도... 상부에 꽃을 달고 있는 열매는 아직 어린 열매이며, 아름다움과 실질이, 유희와 삶이 분리되지 않은 시절의 열매일 뿐이다.'
하나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렇게 세부적인 식물학을 알아야 하는 것일까? 그 다음 줄넘기 作亂(장난)도 도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줄넘기는 여자아이들의 놀이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 그 줄을 끊는 장난을 하고 달아나다 성난 여자아이가 던진 돌에 등을 맞는 불상사를 겪은 적도 있다.
이런 추억을 회상하다 보니, 비로소 줄넘기와 국수가 연결되는 이미지이며 그 사이에 발산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러나 당시의 내게 이 시를 이해하는 것은 범접하기 힘든 상상력이었다.
그 다음 초절정 난해시는 〈白蟻(백의)〉이다. 흰 개미란 뜻이다. 김수영은 백의를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비로소 餘裕(여유)를 갖게 된 것은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에 있어서도 저 무시무시한 白蟻를 보기 시작한 때부터이었다... 自動式文明(자동식문명)의 天才(천재)... 제가 갈 길을 自由自在(자유자재)로 찾아다니었다... 몸이 弱(약)하지 않은 點(점)... 雷神(뇌신)보다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고 뮤우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傷處(상처)를 쓰다듬어준다 叱責(질책)의 權利(권리)를 주면서 叱責의 行動(행동)을 주지 않고 어떤 나라의 紙幣(지폐)보다도 信用(신용)은 있으나 身體(신체)가 너무 矮小(왜소)한 까닭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를 않는다 古代(고대) 形而上學者(형이상학자)들은 그를 보고 「兩極(양극)의 合致(합치)」라든지 혹은 「巨大(거대)한 喜悅(희열)」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十九世紀(십구세기) 詩人(시인)들은 그를 보고 「逃避(도피)의 王者(왕자)」 惑(혹)은 「餘裕」라고 불렀다 그는 南美(남미)의 어느 綿工業者(면공업자)의 庶子(서자)로 태어나서 나이아가라江邊(강변)에서 隧道工事(수도공사)에 挺身(정신)하고 있었다 하며 그의 母親(모친)은 希臘人(희랍인)이라고 한다 兩眼(양안)이 모두 淡紅色(담홍색)을... 오랜 세월을 暗夜(암야) 속에서 살고 있었던... 나의 맏누이 동생이 그를 「하니」라고 부르고... 내가 어느날 그에게 「魔神(마신)」이라는 別名(별명)을 붙였더니 그는 대뜸 「오빠는 어머니보다도 더 頑固(완고)하다」고 하면서 나를 도리어 꾸짖는 척한다... 그는 韓國(한국)에 輸入(수입)되어가지고 완전한 孤兒(고아)가 되었고... 月刊(월간) 大衆雜誌(대중잡지) 위에 每月(매월) 그의 寫眞(사진)이 揭載(게재)되어... 어느 三流新聞(삼류신문)의 社會面(사회면)에는 間或(간혹) 그의 救濟金(구제금) 應募記事(응모기사) 같은 것이 나오고 있다... 白蟻는... 「希臘人을 母親으로 가진 美國人(미국인)에게 대한 呼訴文(호소문)」과 「精神上(정신상)으로 본 希臘의 獨立宣言書(독립선언서)」를 써서 前者(전자)를 現在(현재) 일리노이州(주)에 있는 自己(자기)의 母親에게 보내고... 나는... 그를 眞心(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詩人은... 나에게 辱(욕)을 하였다 「더러운 자식 너는 白蟻와 姦通(간통)하였다지?......」 ⸺白蟻의 悲劇(비극)은 그가 現代(현대)의 經濟學(경제학)을 等閒(등한)히 하였을 때에서부터 始作(시작)되었던 것이다'
(〈白蟻〉 중 발췌)
나는 오래도록 백의가 정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남미와 희랍에 대해 혈통적으로 연계된 무엇이 있는지를 정말 오래도록 숙고해왔다. 그 유명한 흰개미(Termite)의 식생에 대해서도 조사해보았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음 글을 보게 되었다.
'현경(김수영의 부인)이 이 작품을 원고지에 정서할 때... 그녀는... 제재인 '백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수영은 그것이 '밀가루'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것도 그냥 밀가루가 아니라 미국이 우리나라에 원조용으로 들여온 밀가루라고 분명히 가려 말합니다.'3)
참으로 간단한 설명이다. 이 한 구절을 몰라서 나는 백의에 대해 40년 동안 고민하였다. 그동안 고민한 것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보면, 전기, 전파, 이데올로기, 담배, 섹스심볼 등이다. 그러나 이들 후보 중 어느 것도 남미와 희랍을 동시에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니 남미가 남아메리카가 아니고 혹시 미국 남부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렇다면 또 얘기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흰 미국산 수입 밀가루를 뒤집어 쓴 바로 다음 페이지에 〈屛風(병풍)〉이라는 시가 병풍처럼 나를 가로막는다.
屛風(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주검에 醉(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屛風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하다
주검의 全面(전면) 같은 너의 얼굴 우에
龍(용)이 있고 落日(낙일)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끊어야 할 것이 설움이라고 하면서
屛風은 虛僞(허위)의 높이보다도 더 높은 곳에
飛瀑(비폭)을 놓고 幽島(유도)를 점지한다
가장 어려운 곳에 놓여 있는 屛風은
내 앞에 서서 주검을 가지고 주검을 막고 있다
나는 屛風을 바라보고
달은 나의 등뒤에서 屛風의 主人(주인) 六七翁海士(육칠옹해사)의 印章(인장)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屛風〉 전문)
여기에서 六七翁海士(육칠옹해사)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 어렵다. 먼저 황규관은 이런 설명을 한다4).
'지금의 장례식 분위기와는 다르게 예전에는 망자와 산 자 사이에 병풍을 세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유중의 『김수영과 하이데거』(민음사)에서 '육칠옹해사'는 하이데거를 암시한다는 주장5)을 인용한다.
'첫째... 이 텍스트의 전반적인 내용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타난 죽음... 연관성... 둘째... 이 해('병풍'이 쓰여진 1956년)는 1889년생인 하이데거가 정확히 67세 되는 해라는 점. 셋째, 하이데거의 백화문 표기가 '해덕격(海德格, Hai de ge)'이라는 점... 셰익스피어는 '사옹(沙翁)'으로 톨스토이를 '두옹(杜翁)'으로 지칭해왔던 그간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김수영이 하이데거(해덕격(海德格)를 '해사(海士)'로 암시하려 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면서 그는 '이미 육칠옹이라고 불렀는데 왜 또 중국식 발음에서 해(海)자와 '옹'보다 젊게 느껴지는 '사(士)'는 왜 이어 붙였는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육칠옹해사(六七翁海士)”는 '60~70세가량의 바닷가 노인'이란 추정’을 은근히 제안하는데, 그가 비판하는 주장만큼이나 쉽게 수긍하기는 힘들다.
'김수영 50주기 기념 학술대회'(2018년 11월 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최원식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6)
'해사는 장동 김씨 벌열의 후예이자 고위직을 두루 역임한 데다, 서화가로도 유명한 '해사 김성근' (1835~1919) 일 것이라 말했다. 김수영의 누이동생 김수명씨는 이 병풍이 집안에 내려오는 가전이라 말한 바 있기 때문에, 해사 김성근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이다.'
그는 '육칠옹'에 대해서는 십(十)을 삽입하여 '육십칠옹해사'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육칠옹이 해사의 앞에 함께 써져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육칠옹 + 해사'라고 본다. 이것이 함께 모여 있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제시해야 종합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있다. 인장(印章)이다.
만약 해사 김성근의 작품이 그려진 병풍이라면, 그것은 인장이라고 하지 말고 낙관(落款,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준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김수영의 누이동생(김수명) 정도의 유명한 인텔리 문인이라면, 집에 있던 병풍이 누구의 작품이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 병풍을 해사 김성근의 작품이라고 증언한 내용은 없다. ('이 병풍'이란 뜻이 해사 김성근이 그린 병풍이란 뜻일까, 아니면 용, 낙일, 비폭 및 유도가 그려진 병풍이란 뜻일까?)
이런 상황에서 낙관이 아닌 인장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장은 수집가가 자신의 수집물에 자신의 인장을 새겨 표시한 것으로 이 경우, 병풍의 주인이라는 수식어와 잘 어울린다. 따라서 육칠옹해사는 병풍 그림 속의 인물도 아니오, 병풍의 작가도 아니며, 병풍의 소유주인 것이다. 그리고 그 병풍의 주인은 김수영이 병풍을 마주보는 시점에서 병풍 뒤에 안치되어 있던 주검일 가능성이 높다.
상가는 밤이 깊어 마당 위로 달빛이 환하다. 시인은 문상하면서 인생무상의 설움이 병풍으로 인해 무표정하게 차단되는 것에 놀란다. 이때 시인은 저도 모르게 병풍의 인장에 눈이 가고 달빛이 따라와 비춘다. 이와 같은 문상 장면이 내게는 또 하나의 병풍 속 그림처럼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어린 시절 나는 나의 시작에 도움이 되리라 믿고 김수영의 시를 줄기차게 읽었다. 그러나 김수영의 시는 이상의 시만큼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상의 시는 최소한 독자를 안내하는 단서가 있다), 또 내게 영향을 줄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해되지 않는 독서는 작용보다는 반작용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왜 시를 이렇게 주절주절 써야 하는지? 이 시인의 시의 어느 부분에 시적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전혀 알 수도 없었고, 배울 수도 없었다. 게다가 다음의 시 〈이[虱(슬)]〉는 또 얼마나 나의 정서와는 동떨어졌던 것인가?
倒立(도립)한 나의 아버지의
얼굴과 나여
나는 한번도 이(虱)를
보지 못한 사람이다
어두운 옷 속에서만
이(虱)는 사람을 부르고
사람을 울린다
나는 한번도 아버지의
수염을 바로는 보지
못하였다
新聞(신문)을 펴라
이(虱)가 걸어나온다
行列(행렬)처럼
어제의 물처럼
걸어나온다
(〈이(虱)〉 전문)
아버지가 도립된 것은 차라리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버지를 이(虱)라고 묘사하는 것은 나의 세계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거리는 시대적으로는 봉건과 근대만큼이나 멀었으나, 나는 나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수영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시대적 대립뿐만 아니라, 그에 더하여 적대감까지 느낀 것으로 보인다. 김수영의 평론가들은 여기서 신문활자를 이와 결속하여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문활자는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다. 신문활자의 보이지 않는 틈새에 이가 들어있다. 이러한 이의 존재 형태에 대해서는 보이는 '아버지의 수염' 속 보이지 않는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백의가 무엇인지 이제 와서야 어렴풋이 느껴진다. 걸어 나오는 이의 행렬이 황홀하게 눈물겹다!
김수영의 시에서 느끼는 특징은 개념어이다.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事物의 明晰性을'(〈孔子의 生活難〉에서), '風景(풍경)이 風景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速度(속도)가 速度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拙劣(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絶望(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絶望〉에서)와 같은 싯구들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다른 시인의 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근대적 시원함을 그에게서 느낀다. 이런 시의 최정점에 〈瀑布(폭포)〉가 있다.
瀑布는 곧은 絶壁(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規定(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向(향)하여 떨어진다는 意味(의미)도 없이
季節(계절)과 晝夜(주야)를 가리지 않고
高邁(고매)한 精神(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金盞花(금잔화)도 人家(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醉(취)할 瞬間(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懶惰(나타)와 安定(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幅(폭)도 없이
떨어진다
(〈瀑布〉 전문)
* 이 글에 나오는 김수영의 모든 시는 [김수영, 한국현대시문학대계 24, 지식산업사, 1981. 6. 5 초판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주석:
1) 네이버블로그 영래랑국어랑, 피터팬, 2008. 10. 10.
2) poemgate.com, 문학자료실, 황현산, 2001. 4. 11.
3) 오마이뉴스, 2013. 5. 6, 정은균, 내 멋대로 읽은 김수영 26화.
4) 뉴스민, 2018. 2. 5, 황규관, 김수영의 시적 여정 16.
5) 조선일보, 2007. 5. 22, 김유중 교수 분석.
6) 뉴스페이퍼, 2018. 11. 6, ... 최원식 평론가 ... 오독의 문제 지적해.
Note:
최근 30년을 격한 통화에서 나의 동인이 본인의 시의 지향이 김수영과 백석의 결합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EBS [명동백작]을 우연히 유투브로 시청하게 되었는데, 김수영 시인의 개인사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되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보니 그의 난해 싯구에 대한 연구도 흥미롭다. 그리하여 이번 기회에 내 나름의 김수영론을 한번 정리해둔다.
(2021. 9. 3)
해사(海士)라는 호를 가진 화가는 또 있다. 조선 후기의 도화서 화원인 안건영(安健榮)이 있다.
생애가 67세인 화가는 또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2021. 9. 6)
해사(海士)라는 호를 가진 인물은 더 있다. 홍한주(洪翰周, 1798-1868)는 지수염필(智水拈筆)을 지었는데, 해사(海士), 해옹(海翁) 등의 호가 있다.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준(李㑺, 1859-1907) 열사의 아호는 일성(一醒), 해사(海士)이다. 자는 순칠(舜七)이다.
생애가 67세인 인물로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 1897-1962)이 있다.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 1922년~1948년 <만세전(묘지)>, 1931년~1959년 <삼대>, 1952년~1953년 <취우>, 한국전쟁 때 해군 정훈관실 소속 해군 소령으로 활동. 김수영 시 <병풍>의 창작연대인 1956년과 어울리지는 않음.
(2021. 10. 13.)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Ernest Hemingway, 欧内斯特·海明威, 1899-1961)는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1936년 <킬리만자로의 눈>,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52년 <노인과 바다>, 1953년 퓰리처상,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노인과 바다>에서 어부인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아무 것도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되는 날 사흘 동안의 싸움 끝에 큰 청새치(blue marlin, 5.5m, 700kg)를 잡는다.
두 번 자살위협을 하다가 세 번째 성공한 「어니스트·헤밍웨이」가 그의 아내 「메어리」 여사에게 들려준 최후의 음성은 죽기 하루 전인 1964년 7월 1일 『투티·미·기아마노비온다』(그들은 나를 「블론드」라고 부르죠)하고 시작하는 즐거운 「이탈리아」 노래 마지막 대목의 화창이었다. 「헤밍웨이」는 저녁을 먹고 돌아와 이를 닦다가 아내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튿날 아침 그는 지하창고에 내려가서 잠가둔 열쇠를 열고 비둘기 사냥에 쓰던 쌍발 「보스」총을 꺼냈다.
아침 7시 40분 「스코트·얼」 박사는 눈썹 바로 위에 두 발의 총격을 받고 쓰러진 세기의 문호 「헤밍웨이」의 「상오의 죽음」을 목격했다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무기여 잘있거라』 『가진 자와 안가진자』 『살인자』로 이른바 「하드·보일드·스타일」이라는 「헤밍웨이」 특유의 문체를 20세기 문학에 유행시킨 「파파」의 마지막 말소리는 총성에 지워졌고 그 총도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메어리」 여사와 「애트킨즈」는 만년의 의식에 부조현상을 드러낸 「헤밍웨이」 자살의 흉기가 기념품 수집광의 손에 들어갈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케첨」 근처의 아무도 모를 곳에 조각조각 「블로·토치」로 작살을 내어 묻어버리고 만 것이다.
「헤밍웨이」처럼 죽음을 수시로 의식하고 결국 죽음을 스스로 택한 작가는 많지 않다.
그는 1918년 「이탈리아」 전선에서 다리에 부상을 하고 누워 있을 때 처음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주위는 온통 중기관총사격에 맞아 쓰러진 시체뿐이었다.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자살의 무기는 허리에 차고 있던 장교용 권총이었다. 눈사태에 묻히지 않고 「스키」를 타다가 죽는 것이 「로맨틱」하게 목숨을 끊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폴린」에게 1925년 「크리스머스」까지 그들의 정사에 결말이 안나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했다가 자살계획을 연기하기도 했었다. 그는 어머니 같은 「폴린」에게 자기만 죽어버리면 유부녀 「폴린」이 「해들리」와 이혼할 필요도 없고 죄는 자기가 지고 지옥에 가는 것이니까 괜찮다고 썼었다.
작가 「피츠제럴드」에게는 자기가 정말 죽는다면 「개스」관을 반쯤 열거나 손목의 겉가죽만 자르는 겁장이 노릇은 안할 것이라고 뻐기던 것도 그 무렵이다.
『하오의 죽음』을 탈고한 다음이었다. 1936년 그는 「맥리시」에게 쓴 편지에서 인생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쏴 죽여야 할 시기가 온다는 것은 『매우 역겨운 노릇』이라고 고백했다.
39년 그는 친구인 「클래러·스피겔」 여사에게 서로 자살의 유혹을 강렬히 느끼면 상대에게 먼저 알리자고 말했다가 그녀가 거절하는 바람에 당황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1944년 9월 13, 14일 22보병연대*에서 6명의 장교와 61명의 사병이 전사했다는 보도를 들은 「헤밍웨이」는 시를 썼다.
<그는 어제만 하여도 그년을 세번이나 거부했지만 지금은 늙은 갈보인 죽음을 끼고 그는 잠자고 있다. 자네는 이 늙은 갈보년이 합법적으로 결혼한 처라고 생각하나? 나를 따라 복창하게, 67번을, 그렇다고, 그렇다고….> 이런 시를 쓴 「헤밍웨이」의 죽음에 대한 집념은 「아프리카」에서 비행기사고로 입은 정신의 상처(트라우마)가 조금도 개선시키질 못했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보이는 영적인 죽음에의 애착은 마침내 이 어눌한 작가에게 죽음을 선택하는 길로 치닫게 만든다.
「미시마·유끼오」 「가와바다·야스나리」 같은 일본작가가 자살소동을 벌이기 훨씬 전 현대의 비정과 감성의 불모를 극명히 그리다가 지친 또 하나의 「노벨」상 작가는 자연의 섭리를 배반했던 셈이다.
(중앙일보, 1973. 6. 4., 죽음과 공존했던 「헤밍웨이」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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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6일 제4보병사단은 독일이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유타해안에 상륙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파리 시민군(civilian scout) 자격으로 제4보병사단(the 4th Infantry Division), 제22보병연대(the 22nd Infantry Regiment)와 함께 파리 해방전(the liberation of Paris)에 참가했다. 헤밍웨이는 "호밀밭의 하수꾼"을 써서 유명한 소설가가 된 제12보병연대 제롬 D. 셀린저(Jerome D. Salinger)를 만나 친구가 됐다. 헤밍웨이는 셀린저와 함께 벨기에와 독일본토 진격까지 참가했다. (출처: 컬러로 보는 제2차 세계대전, 네이버블로그, JK Park, 2016.11.19.)
“인간을 멸(滅)할 수는 있으나 패(敗)하게 할 수는 없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소름이 돋게 하는 이 말은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중앙선데이, 2011. 9. 18., ("인간을 멸할 수는 있지만 패배하게 할 수는 없다")
‘백의’가 무엇일까? 예전에(1992년 3월) 고민한 흔적을 옛 노트에서 발견하였다.
1. 자동식 문명의 천재 :
전화, 라디오, 티브이, 신문, 기계, 연예계 스타
2. 양극의 합치, 거대한 희열, 도피의 왕자, 여유 :
원자, 태극, 실크, 나일론, 시인, 비둘기
3. 수도공사(隧道工事) :
황동, 구리, 니켈 합금, 방부제
(이 시에서의 수도공사는 터널굴착공사를 뜻하는 것인데, 당시에는 상수도공사로 이해한 듯하다.)
4. 모친이 희랍인 :
연극, 시, 스포츠
5. 두 눈이 담홍색, 암야, Honey, 마신 :
립스틱, 유행, 향수, 교태
잡지에 광고로 게재되는 등, 전체적으로 ‘백의’는 백인 문명 전체를 뜻하는 상징으로 보인다. 그래서 백’s 로 ‘백의’라고 하지 않았을까?
(2022. 4. 24)
아무리 생각해도 시의 분위기 상... 백의가 담배(말보로) 또는 담배연기를 상정한 것이면, 가장 구체적일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모르겠는 것은 담배와 희랍과의 관련성이다..그리고 다시 본다면, 백의는 미국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시인은 여러 가지 이미지가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로 쓰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다면 왜 일리노이주일까? (그는 아는 데) 내가 모르는 그와 관련된 어떤 미국의 역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22. 7. 19)
〈공자의 생활난〉 이해 시도
'줄넘기'는 단순히 여자 아이들의 '줄넘기 놀이'라기보다는 선(線)을 넘는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국수는 미군정 이후 미국의 원조물자 공급으로 비로소 쉽게 구하게 된 밀가루로 만들게 된 음식이다. 나는 그가 이 시를 쓰던 시대(1946년)는 살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1970년대 초) 어머니가 해주시던 수제비를 즐겨 먹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회상하시기를 당시 끼니를 때울 게 없어서 겨우 생각다 못해 홀치기를 해준 곳을 찾아가 밀가루를 한 포 살 돈을 얻어 급하게 수제비를 만들어 주면 아이들이 잘 먹어서 기뻤다고 하셨다. 즉, 밀가루 음식인 국수는 우리에게 가난을 상징하던 음식이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를 '마카로니'라고 추켜세우면서 오히려 서양에서 건너온 고급음식이라며 애써 자위한다.
제1연 :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를 식물학으로 읽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성숙함의 상징(성징)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의 제목 〈공자의 생활난〉을 염두에 둘 때, 무언가 가난함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당시대를 살지 않은 나로서는 쉽게 알기는 힘들다.
'줄넘기 장난' 또한 내게는 성숙함과 관련된 선을 넘는 행동(성적 희롱)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것이 국수 가락을 뽑는 것에 대한 묘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요즘 중국집에서 하는 것처럼 밀가루 반죽을 판에 쳐대면서 국수가락을 뽑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 제면 방식은 아니었다. 보통 한국 가정에서는 칼국수의 방식으로 국수를 해먹었다. 그러므로 국수를 만드는 행위라기보다는 무언가 가난함 속에서 어떻게든 국수를 얻어내려 하는 행동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것은 정작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2연 :
처음에 목표했던 것을 달성하지 못했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작전 같은 것이라 어려웠다고 한다. 이는 처음에 계획한 상황은 이상적이었고 실제 맞부딪혀 보니 현실은 전혀 달랐다는 고백이다. 1연의 '작난(장난)'에 댓구로 '작전'을 사용하고 있다.
제3연 :
비록 지금 국수를 먹고 있지만, 서양의 고급음식이라고 자위하는 아큐(阿Q)(소위 정신승리)적 '공자스러운' 해명이다. 2연의 '어렵다'에 댓구로 '쉽다'고 하며 고급음식임에도 후딱 먹어치워버리는 반골적 대범함을 시연한다.
제4연은 3연에서 보이는 체모와 위선을 모두 벗어버리고 현실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다짐이다. 훗날 김수영은 당시에 드물었던 영어 전공 인텔리에다가 시인이란 체면을 다 떨쳐버리고 돼지를 키우며 현실적으로 살아갔다.
김수영의 첫 시가 김수영의 인생 궤적을 예견하고 있었음을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2022. 8. 21.)
시의 제목이 '공자의 생활난'이므로 공자가 가장 곤궁했던 '진채지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해 본다. 다음은 이인우의 소설 '논어 명장면'에 나오는 상황이다 (나들, 2013.2.5.).
이때가 기원전 489년, 노애공 6년으로, 공자 63살 때의 일이다.
이 진채지간(陳蔡之間)의 고난에서 공자를 수행한 제자는 자로, 자공, 재여(宰予·생몰 미상), 안연이다. 자로가 54살, 자공이 32살이고, 재여는 30대 초·중반, 안연은 20대의 파릇파릇한 청년이었다.
굶주림에 시달리며 들판을 헤맨 지 이레째 되는 날, 일행은 채나라 접경 마을 부근의 한 언덕에 도착했다. 그때 재여는 지치고 굶주린 상태에서 독초를 잘못 먹고 한구석에 뻗어 있었고, 안연은 나물을 다듬고, 자공과 자로는 불을 지피고 있었다. 숨겨둔 묵은 보리마저 바닥나 곡식 한 톨 없이 명아주 풀로만 국을 끓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공자가 거처하는 천막 안에서 또 거문고 소리가 난 것이다. 공자가 나즈막히 시를 읊는 소리까지 흘러나왔다.
“군자는 원래 궁한 법이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위령공’편 1장)
“군자는 환난에 처해서도 덕을 잃지 않는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은 서리와 눈이 내린 뒤라야 비로소 드러나는 법이다.”(臨難而不失而德 大寒旣至 霜雪旣降 吾是以知松柏之茂也, <여씨춘추> 제14권)
자로가 공자의 따끔한 일갈에 승복하지 못한 채 “비파 소리에 맞서 방패를 잡고 춤을 추었다.”(子路抗然執干而舞, <여씨춘추> 제14권)
자로는... "... 가서 직접 식량을 구해봐야겠다.”... 벌떡 일어나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자공이 뛰어와 자로의 행방을 묻고는 자기도 식량을 구해오겠다며 언덕을 내려갔다.'
이 진채지간의 고사를 아무리 살펴 보아도 꽃과 열매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공자의 생활난은 인간 공자와는 관계가 없고 공자로 대표되던 한국전통허례허식(또는 김수영의 인텔리성)의 곤궁을 뜻하는 것이리라.
(2022. 8.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