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1988년 월북 시인의 작품이 해금되어 정지용전집이 출간되자 마자 그 중 1편인 시전집을 사 두었었다. 그때는 마악 해군장교로 임관한 때이어서 아직 바다를 잘 모르고 있을 때이다. 이후 배를 타고 바다를 경험하고 또 인생을 경험하고 이제 그의 시집을 펼치는데, 의외로 바다시가 많다. 바다가 어제인 듯 다가온다. 한국과 일본을 오며 가며 느낀 바다인데도 한국사 최고의 서정시인답게 바다를 한 아름 품었다. 바다에서 보낸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그의 시를 읽는다.
수박냄새 품어 오는
첫녀름의 저녁 때.........
먼 海岸(해안) 쪽
길옆 나무에 느러 슨
電燈(전등). 電燈.
헤염처 나온듯이 깜박어리고 빛나노나.
沈鬱(침울)하게 울려 오는
築港(축항)의 汽笛(기적)소리...... 汽笛소리......
異國情調(이국정조)로 퍼덕이는
稅關(세관)의 旗(기)ㅅ발. 旗ㅅ발.
세멘트 깐 人道側(인도측)으로 사폿 사폿 옴기는
하이얀 洋裝(양장)의 點景(점경)!
그는 흘러가는 失心(실심)한 風景(풍경)이여니......
부즐없이 오랑쥬 껍질 씹는 시름......
아아, 愛施利·黃(애시리·황)!
그대는 上海(상해)로 가는구료.........
(슬픈 印像畵(인상화) 전문, 1926년 6월 학조 창간호)
바다는 항구에서부터 시작한다. 첫 연과 끝 연의 말줄임표의 점이 9개인 것은 이번에 옮겨 적으며 알았다. 짭잘한 바다내음이 갑자기 달콤하고 향그러운 수박내음으로 변모하였다. 항구의 기적 소리와 이국 정조의 깃발이 눈에 선연하게 그려진다.
(쇠라의 점묘화가 느껴진다. 그것은 특히, ‘점경’ ‘실심’ ‘오랑쥬 껍질 씹는’ 에서 강하게 다가온다. 제목도 ‘~ 인상화’라고 고백한다. 전체적으로 쇠라의 화법(畫法)이 느껴지는 최고의 인상파 시작이다.)
나지익 한 하늘은 白金(백금)빛으로 빛나고
물결은 유리판 처럼 부서지며 끓어오른다.
동글동글 굴러오는 짠바람에 뺨마다 고흔피가 고이고
배는 華麗(화려)한 김승처럼 짓으며 달려나간다.
문득 앞을 가리는 검은 海賊(해적)같은 외딴섬이
흩어저 날으는 갈메기떼 날개 뒤로 문짓 문짓 물러나가고,
어디로 돌아다보든지 하이한 큰 팔구비에 안기여
地球(지구)덩이가 동그랐타는것이 길겁구나.
넥타이는 시언스럽게 날리고 서로 기대슨 어깨에 六月(유월)볕이 시며들고
한없이 나가는 눈ㅅ길은 水平線(수평선) 저쪽까지 旗(기)폭처럼 퍼덕인다.
바다 바람이 그대 머리에 아른대는구료,
그대 머리는 슬픈듯 하늘거리고.
바다 바람이 그대 치마폭에 니치 대는구료,
그대 치마는 부끄러운듯 나붓기고.
그대는 바람 보고 꾸짖는구료.
별안간 뛰여들삼어도 설마 죽을라구요
빠나나 껍질로 바다를 놀려대노니,
젊은 마음 꼬이는 구비도는 물구비
두리 함끠 굽어보며 가비얍게 웃노니.
(甲板(갑판)우 전문, 1927년 1월 문예시대 2호, 1926년 여름 현해탄 우에서)
배는 짐승처럼 달려가고, 외딴 섬이 해적처럼 문득 앞을 가린다. 바다 바람이 여인의 머리를 희롱하고 또 치마폭을 니치댄다. 갑자기 심청의 임당수가 생각났으나, 바나나껍질로 대신하였다. 하늘은 낮게 내려와 백금으로 작열하며 물결은 유리 파편처럼 반짝이며 끓는다. 바닷바람은 오히려 연인들의 피와 뺨을 뎁힌다.
海峽(해협)이 일어서기로만 하니깐
배가 한사코 긔어오르다 미끄러지곤 한다.
괴롬이란 참지 않어도 겪어지는 것이
주검이란 죽을수 있는것 같이.
腦髓(뇌수)가 튀어나올랴고 지긋지긋 견딘다.
꼬꼬댁 소리도 할수 없이
얼빠진 장닭처럼 건들거리며 나가니
甲板(갑판)은 거복등처럼 뚫고나가는데 海峽(해협)이 업히랴고만 한다.
젊은 船員(선원)이 숫제 하―모니카를 불고 섰다.
바다의 森林(삼림)에서 颱風(태풍)이나 만나야 感傷(감상)할 수 있다는듯이
암만 가려 드린대도 海峽은 자꼬 꺼져들어간다.
水平線(수평선)이 없어진 날 斷末魔(단말마)의 新婚旅行(신혼여행)이여!
오즉 한낱 義務(의무)를 찾아내어 그의 船室(선실)로 옮기다.
祈禱(기도)도 허락되지 않는 煉獄(연옥)에서 尋訪(심방)하랴고
階段(계단)을 나리랴니깐
階段이 올라온다.
또어를 부등켜안고 記憶(기억)할수 없다.
하늘이 죄여 들어 나의 心臟(심장)을 짜노라고
令孃(영양)은 孤獨(고독)도 아닌 슬픔도 아닌
올빼미 같은 눈을 하고 체모에 긔고 있다.
愛憐(애련)을 베풀가 하면
즉시 嘔吐(구토)가 재촉된다.
連絡船(연락선)에는 일체로 看護(간호)가 없다.
징을 치고 뚜우 뚜우 부는 외에
우리들의 짐짝 트렁크에 이마를 대고
여덜시간 내― 懇求(간구)하고 또 울었다.
(船醉(선취) 전문,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
바다는 무섭다. 배는 이리저리 나부낀다. 배에 탄 사람들의 중력을 감각하는 감각기관들에 비상이 온다. 신부는 괴로움에 심장을 짜내고 있지만, 한가닥 문명의 체면으로 올빼미 눈을 하고 있다. 배는 간호는 않고 괜히 요란스럽다(뱃고동).
砲彈(포탄)으로 뚫은듯 동그란 船窓(선창)으로
눈섶까지 부풀어 오른 水平(수평)이 엿보고,
하늘이 함폭 나려 앉어
큰악한 암닭처럼 품고 있다.
透明(투명)한 魚族(어족)이 行列(행렬)하는 位置(위치)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라ㅅ속 같이
소란한 無人島(무인도)의 角笛(각적)을 불고―
海峽午前二時(해협오전두시)의 孤獨(고독)은 오롯한 圓光(원광)을 쓰다.
설어울리 없는 눈물을 少女(소녀)처럼 짓쟈.
나의 靑春(청춘)은 나의 祖國(조국)!
다음날 港口(항구)의 개인 날세여!
航海(항해)는 정히 戀愛(연애)처럼 沸騰(비등)하고
이제 어디메쯤 한밤의 太陽(태양)이 피여오른다.
(海峽(해협) 전문, 1933년 6월 카톨릭청년 창간호 <해협의 오전 두시>로 발표)
포탄으로 뚫은 듯한 동그란 선창으로 수평선이 선실을 엿보고 있다. 하늘은 암닭처럼 바다를 품고 훤히 내려다 보이는 물고기떼, 나도 횃대에 자리잡았다. 무인도의 새소리에 귀기울이다 보면, 새벽이 오고 바다는 고독의 원광을 쓴다. 마음은 그리운 항구를 향해 달려가는데, 한밤의 태양은 또 어디선가에서 붉게 타오른다.
正午(정오) 가까운 海峽(해협)은
白墨痕跡(백묵흔적)이 的歷(적력)한 圓周(원주)!
마스트 끝에 붉은旗(기)가 하늘 보다 곱다.
甘藍(감람) 포기 포기 솟아오르듯 茂盛(무성)한 물이랑이여!
班馬(반마)같이 海狗(해구) 같이 어여쁜 섬들이 달려오건만
一一(일일)히 만져주지 않고 지나가다.
海峽이 물거울 쓰러지듯 휘뚝 하였다.
海峽은 업지러지지 않었다.
地球(지구)우로 기여가는 것이
이다지도 호수운 것이냐!
외진곳 지날제 汽笛(기적)은 무서워서 운다.
당나귀처럼 悽凉(처량)하구나.
海峽의 七月(칠월)해ㅅ살은
달빛 보담 시원타.
火筒(화통)옆 사닥다리에 나란히
濟州島(제주도) 사투리 하는이와 아주 친했다.
수물 한살 적 첫 航路(항로)에
戀愛(연애)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
(다시 海峽(해협) 전문, 1935년 8월 조선문단 24호)
이번 해협은 지난번 해협보다 속도감이 있다. 열을 지은 말같이 물개같이 섬들이 반긴다. 배는 무서워서 뱃고동을 우는데 처량한 당나귀 보듯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느긋이 화통 옆에서 섬 출신 사람과 담배 피우며 항해를 즐긴다.
Note:
여기 실린 시는 모두 《정지용전집》, 민음사, 1988. 1. 30 발행본에 따랐습니다.
그의 시 중 〈선취〉는 1과 2가 있는데, 이 책과 최근 문헌들의 순서가 서로 다릅니다. 이 글의〈선취〉는 이 책에서는 〈선취 1〉로 되어 있으나, 최근 문헌들에서는 〈선취 2〉로 나타내고 있읍니다. 저는 저간의 사정은 잘 몰라서 단순히 〈선취〉로 기재하였습니다.
(2021. 9.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