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인환

by 조영필 Zho YP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아리랑] 2-6호(1956. 6. 1))



Note:

박인환의 작품 원전과 노랫말은 거의 일치한다. 보통 우리는 <세월이 가면>의 원전을 [목마와 숙녀]라는 책에 소개된 표기 형태로 알고 있으나, 박인환 시인은 이 시가 [아리랑]에 투고하여 활자화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박인환이 '과거'로 쓴 것을 노래로 만들 때 '옛날'로 바꾸었다는 해석은 전혀 옳지 않다. 이미 시인 스스로 발표 당시 초고를 고쳐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진섭은 그 고쳐진 작품을 원본으로 하여 노래로 만든 것이다.

*[아리랑]은 삼중당에서 발행한 대중지로서 김규동이 주간을 맡았고 임진수가 편집장을 보았다.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는 지금은 증오와 안개 낀 현실이 있을 뿐... 더욱이 멀리 지난날 노래하였던 식민지의 애가이며 토속의 노래는 이러한 지구에 가라앉아 간다.

그러나 영원의 일요일이 내 가슴속에 찾아든다. 그러할 때에는 사랑하던 사람과 시의 산책의 발을 옮겼던 원시림으로 간다. 풍토와 개성과 사고의 자유를 즐겼던 시의 원시림으로 간다.'


현대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명과 세계관을 수립하기 위하여 모인 젊음의 그룹인 모더니스트들의 미학적 도전과 레토릭의 개발은 척박했던 전후 문화를 반영한 문화적 자산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박인환은 종군을 거친 후 낭만적 비가들을 다수 씀으로써, 초기 모더니스트로서 보여준 강렬한 현실 의지는 서서히 실종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그 안개 낀 종착역에 [세월이 가면]이라는 '시의 원시림'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던 것이다.

(유성호 (2013), 박인환 시편 [세월이 가면]의 원전과 창작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