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3일째) 기한 없는 휴가

길 위의 명상

by 미정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평소보다 이른 5시 50분에 눈이 떠졌다. 미세먼지가 걷히면 달리겠노라 다짐했던 터였다. 수치를 확인하니 '좋음'은 아니어도 나갈 만한 수준이다. 이불속에서 뭉기적거리고 싶은 유혹이 고개를 들었지만 곧장 몸을 일으켰다. 러닝에서 '가장 힘든 구간은 침대에서 현관까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가' 싶었는데, 오늘이 금요일인 줄 알았더니 토요일이었다. 26년의 직장생활 중 법인차로 이동하거나 도보권에 살았던 1년 4개월 남짓을 제외하면, 내 삶은 늘 지하철의 리듬에 맞춰져 있었다. 이제는 지하철의 용도가 바뀌었다.

​출발지점까지 가볍게 달려가서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니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630 페이스(1km를 6분 30초에 달리는 속도)로 10km를 뛰었다. 심박수는 145 bpm 이하로 유지하는 강도다. 이후에는 530 페이스로 1km를 더 달렸다. 가벼운 조깅이라 생각했는데, 종아리에 전해지는 적당한 뻐근함이 정직하다.

​달리는 동안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내일의 걱정, 글감으로 써먹을 아이디어, 그리고 정체 모를 잡념들. 기한 없는 휴가가 주는 평온한 고요는 역설적으로 불안을 동반한다. '명함이 사라진 나는 이제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호흡 끝마다 걸려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막상 달리기를 마치면 그 수많았던 고민들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는 것은 꽤 괜찮은 운동을 해냈다는 담백한 성취감, 그리고 종아리에 남은 기분 좋은 뻐근함뿐이다. 머릿속의 복잡한 질문들이 몸의 통증으로 치환되는 순간, 비로소 나는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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