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플맘 Oct 21. 2022

오, 나의 소비 9. 곰 한 마리 샀습니다.

고르고 고른 28,800원의 교훈

택배 상자를 뜯어 새로 산 트레이닝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봤습니다. 거울 속에는 곰 한 마리가 서있습니다. 그 곰은 바로 '저'입니다. 꽤 오랫동안 트레이닝복을 살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인터넷에서 고르고 고른 28,800원의 트레이닝복은 실패입니다.


작년 가을부터 트레이닝복을 사고 싶었습니다. 츄리닝 바지를 입고 동네 마실 나갔다 만난 친구가 츄리닝 밑단의 얼룩을 보고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화장실 청소하다 튄 락스 때문에 생긴 얼룩이라 말했습니다.

이런 건 버리고 새로 사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움과 민망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밑단의 얼룩이 생활에 찌든 사람처럼 보였을까, 궁핍한 사람처럼 보였을까, 나를 관리하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 보였을까 싶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새로 트레이닝복이 사고 싶었습니다. 츄리닝 바지만 사지 말고 트레이닝복을 사자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시급하지 않아서 늘 다른 것에 밀렸습니다. 사실살 마음이 딱히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밑단에 락스 얼룩이 든 츄리닝 바지를 입고 외출하지 않을 뿐 새로운 것을 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음 깊숙이 숙제처럼 새로운 트레이닝복을 사야 한다는 숙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신랑을 보았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신랑 역시 제대로 된 트레이닝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흔이 넘은 남자가 제대로 된 트레이닝복도 하나 없다니!' 속으로 혀를 차며 온라인 검색을 열심히 하여 무려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구매해주었습니다. 신랑은 자신이 처음으로 가져보는 무려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에 감격했고 행복해했습니다.

이 맛에 쇼핑하지!

행복해하는 신랑을 보니 저까지 덩달아 행복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제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돈으로 차라리 주식을 사고 말지 싶어 또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잦은 동네 외출할 때마다 청바지로 갈아입어야 하는 불편함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흔이 넘은 남자가 제대로 된 트레이닝복이 없다'는 것에 한탄한 저는 '마흔이 넘은 여자'인 저에게 기준이 발현되지 못했습니다. 발렌시아가도 몽끌레어도 디올도 심지어 룰루레몬도 아닌 그저 아디다스 트레이닝복도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온라인을 뒤졌습니다. 뒤지고 뒤져 내가 좋아하는 색의 좋아하는 촉감의 운동복을 고릅니다. 물론 제일의 기준점은 저렴한 가격이었습니다. 드디어 며칠의 고민 끝에 고른 트레이닝복을 시켰습니다.


택배를 받고 입었습니다. 온라인상의 이쁜 핏은 못 나와도 괜찮을 줄 알았던 저는 한 마리의 곰이 되었습니다. 이제 가서 연어만 잡으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게 뭐야 크크크크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배꼽이 빠지게 웃었습니다.

제가 또 화면 속의 이쁜 언니들에게 속았습니다. 화면 속 이쁜 언니들이 입은 옷태가 제가 입으면 그 옷태가 안 나오는 걸 알면서 한쪽 눈 감고 한쪽 뇌를 마비시키고 싸다는 생각에 사버린 것입니다. 일련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조금 비싸더라도 입어보고 다시 트레이닝복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번에 저는 곰, 웃음 그리고 함께 옷은 입어보고 사야겠다는 뼈아픈 교훈을 28,800원을 주고 샀습니다.

이전 09화 오, 나의 소비 7. 핑크 디스 버드 믹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