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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IMNI Jun 22. 2020

책에 줄을 친다는 것


책에 줄을 치면서 읽은 적 없다. 내가 책을 펴고 펜을 들었을 때는 오로지 교과서 혹은 전공이나 교양서적. 내게 책은 고결한 존재였다. 그 안에는 지나온 과거와 나아갈 미래가 있었다. 사람과 사랑이 있었다. 조금의 흠집도 용납할 수 없었다. 날개로 읽은 부분을 표시한다거나 모퉁이 한쪽을 접는 일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그런데 줄을 친다고? 연필이나 펜으로 자국을 낸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어도 머리에 남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난 기억력이 좋지 않다. 봤던 영화를 까먹고 했던 대화도 잊어버리는 내가 눈으로만 읽은, 가끔 입으로 소리 내 읽은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들 리 만무했다. 자연스러운 변화였다기에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생긴 습관이지만, 어찌 되었건 난 자연스럽게 책에 줄을 치고 있다.


좋은 단어, 곱씹고 싶은 문장, 매력적인 표현마다 연필로 줄을 친다. 가끔 인덱스로 표시하거나 노트에 옮겨쓴다. 두고두고 보기 위해.


책이 좋아 선택한 학과에서 책과 거리감만 느끼다 졸업했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글을 쓰며 돈을 벌고 있다. 몇 푼 되지 않는 돈일지라도 어찌 되었건 글을 써서 밥벌이한다. 밥을 먹으려면 글을 잘 써야 한다. 개인적으로 쓰는 글도 잘 써야 한다. 전자가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서라면 후자는 심적인 풍요를 위해서다.


글을 잘 쓴다는 건 어떤 걸까. 내 기준은 늘 하나다. 쉽게 읽히는 글. 화려한 미사여구나 사전을 뒤적여야 하는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이 아니라, 누가 읽어도 쉽게 읽히는 글. 그러려면 좋은 단어, 매력적인 표현이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작했나보다, 책에 줄을 치는 행위를.


오늘도 책에 줄을 잔뜩 쳤다. 잔뜩 치고 잔뜩 옮겨 적었다. 내 머리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부디 내 손이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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