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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사는 마케터 Z Mar 04. 2024

15불짜리 에비앙 미스트를 일회용 가습기로 쓰게된 사연

[D+7] 살아남기 위해서는 못할 것이 없다

캐나다 겨울 감기 조심

캐나다에 도착한 지 6일 차 즈음, 한참 비를 맞아 걸린 감기가 떨어지질 않았다.

5일 차였던 어제까지만 해도 수영장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컨디션이 괜찮았고, 온수의 습기가 가득한 수영장에서는 기침을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선 건조한 공기가 내 컨디션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습기가 필요하다는 빠른 판단하에 집 근처 마트로 향했는데, 이럴 수가. 미용 제품이 아닌 가습기 같은 전자제품을 사려면 보다 큰 마트(Drug store가 아니라 전자제품까지 파는 마트)로 가야 한다는 게 아닌가.

나는 그만 여기서 안일한 판단을 하고 말았다. 수영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도 됐겠다, 근처의 마트를 둘러보는 데에 해가 져서(이 맘 때의 캐나다는 정말 오후 4시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좀 더 쉬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해 버린 것. 그건 사실이긴 했다. 내 문제는 기침이 나아지지 않는 거지, 컨디션 자체는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거기에 한국에서 가져온 약이 아직 많이 남았고, 챙겨 온 수건도 있으니 그걸로 가습기를 대체하면 될 거라고.


미션 : 방의 습도를 올려라

그러나 진짜 문제는 5일 차에서 6일 차로 넘어가는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300g짜리 호텔 수건 두 장을 푹 적셔서 가습기 대용으로 걸어두었는데도 기침이 잦아들지 않았다.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수건을 적셔 걸어놓아도 잠깐, 얼마나 건조한지 3~4시간이면 말라버리기 일쑤. 거기에 내가 자꾸 기침을 하니까 집주인분이 히터를 좀 더 강하게 틀어주신 것 같았는데, 히터가 돌아가면 공기가 더 건조해지고 방 안 카펫의 먼지가 일어나서(이건 청소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비염을 일으키니까 자다 깨고... 악순환이었다.

당장 죽겠는데 한국처럼 로켓배송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근처 마트에는 가습기가 없다고 하고. 내가 떠올린 것은 내 캐리어 한구석에 박혀있었던 일본산 에비앙 미스트*였다.

그러니까 그 비싸기로 유명한 물 브랜드에서 나온 화장품, 그것 맞다.

(미스트 : 스프레이형태로 피부에 직, 간접 분사해 피부에 수분을 공급하는 화장품의 일종)


인생은 정말 알 수가 없다

무려 버튼을 한 번만 눌러도 오래 분사되는 가스 삽입 형 안개 미스트! 농담이 아니라 좁은 방안에 분사하는 것만으로도 방 안의 습도가 확 올라가는 느낌이 와닿았다.

이 미스트를 가지고 오게 된 데에는 웃기지 않은 일화가 있다. 캐나다로 떠나오기 직전, 일본에 가족여행을 갔다가 기념으로 평소에 쓰지도 않는 미스트를 샀던 것. 평소에 쓰지 않는 제품이었으니 캐나다에 워홀을 와 있는 1년 동안 쓰레기가 될 것이 자명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가방에 욱여넣었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가습기 대용으로 사용하게 될 줄이야!

300ml짜리를 사는 데에 한화로 만원 정도 들었는데 이틀 동안 한 통을 다 써버렸다. 시간으로 치면 한 통을 다 쓰는 데에 24시간이 채 안 걸렸을 듯하다. 머리맡에 미스트 제품을 두고 잠에서 깰 때마다 뿌려댔으니 몇 번이나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얼굴이라는 국소부위가 아니라 공중에 뿌려댔으니 당연하다.) 대충 한 번에 2천 원씩 날아간 셈일까.

효과는 어땠냐 하면, 비싼 만큼 만족스러웠다...


단 한 번, 가습기로 사용하고 끝난 내 화장품.



캐나다에는 마스크가 없어요?

7일 차, 비싸디 비싼 가습기의 힘으로 정말 많이 회복했다. 기침이 줄었고 몸이 힘든 것도 줄었다.

아침부터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밖이랑 온도차가 별로 없는 것 같은 방에서 나와 따뜻한 온수가 있는 수영장까지 기어가서 몸을 좀 풀고 나니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물처럼 삼켜버린 약이 다 떨어져서, 결국은 다시 약을 사러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약을 살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안일한 생각의 결과를 톡톡히 치르고 나서는 감기의 싹을 말릴 때까지 긴장의 끝을 놓지 않기로.

그리하여 다시 향한 쇼퍼스에서, 실내에서 착용을 마스크를 함께 구입하고 싶었는데, 아니, 마스크가 없다고요?

한국에서는 두꺼운 새 부리 형 마스크(황사용)를 착용하는 것이 익숙해서 그런 마스크가 있냐고 물어봤는데, 나한테 전달된 것은 얇은 덴탈 마스크였다. 새 부리 형 마스크가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다른 마스크가 없다니요!

덴탈마스크는 먼지를 전혀 막아줄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물었지만 공사용 마스크를 제외하면 마스크는 단일품목이란다. 선택지가 없으니 어떡하나, 그거라도 사야지.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구입한 애드빌과 밤에 먹는 기침약, 그리고 목캔디 대용의 스트렙실도 함께!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건강해진다

겨울의 나라 캐나다답게, 11월의 토론토는 행사가 많았다. 대충 연말 바자회부터 크리스마스 퍼레이드, 전시회... 그런데 일주일 내내 정신이 들었다가 나갔다가 했으니 도착 직 후에 하나하나 표시해 둔 일정이 전부 쓸모없게 되었다.

네가 캐나다에 가면 일이 뭐 잘 풀릴 것 같냐던 사람들의 얼굴이 잠시 아련하게 스쳐 지나가고, 내가 이러려고 캐나다까지 왔는지 살짝 자괴감 들고 괴로울 뻔했으나... 이 자괴감은 필시 내가 감기를 앓느라 제대로 먹지 못해서 제대로 먹질 못해 판단력이 떨어진 것일 테 였다. 그리하여 마지막 힘을 짜내서 마트에서 호박죽(정확히는 Squash soup)도 사고 냉동 만두도 사서 아주 늦은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밥 먹고, 약 먹고, 스트레칭하고, 제정신 좀 차리고 밀린 일기도 좀 써야지. 호박죽은 분명 서양의 맛이었는데도 그리운 느낌이 나서 더 좋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니 피가 두꺼운 중국식 만두도 좀 짤뿐 괜찮은 맛 같았다.(같았다,라고 쓰는 이유는 코가 막혀서 맛이 반절밖에 안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일은 (캐내디언들과 만날 수 있을) 도서관 복지 프로그램을 알아보러가야하는데. 캐나다에서의 내 첫 소셜활동을 놓칠 수는 없지!


아, 그런데 애드빌 독하더라

그렇게 약까지 꼼꼼히 챙겨 먹고 침대 위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까지가 내 마지막 기억이다. 쇼퍼스에서 사 온 애드빌*이 그렇게 독할 줄이야? 사실 소문은 들어봤는데, 앉은 자세 그대로 기절하 듯 잠이 들 줄은 몰랐다.

(애드빌 : 캐나다 감기약 브랜드, 타이레놀 성분) 며칠 째 대낮에 잠드는 느낌이다, 아이고.




* 에비앙(Évian)은 프랑스 브랜드, 필자가 에비앙 제품을 일본에서 사 왔기 때문에 일본산이라고 칭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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