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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사는 마케터 Z Mar 11. 2024

퇴직금 털어 워홀을 왔는데 ATM이 내 돈을 먹었다

[D+8] 저주받은 캐나다 생활

저주받은 캐나다 생활 8일 차

며칠을 약과 함께 기절했다가 깨어나니, 벌써 캐나다 도착 8일 차였다.

아니,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사회적 인간으로서 이렇게 살 수만은 없으니, 오늘은 꼭 도서관에라도 들르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TTC(캐나다 교통국)에서 쓸 수 있는 프레스토카드(교통카드)를 무료로 나눠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마케터로서 이런 혜택 놓칠 수 없지.(그냥 사면 한화 5천 원 정도)

느긋하게 몸을 추스르고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출입구가 역사 안쪽에 있는 바람에 주변을 한참 돌았는데, 오... 들어가기도 전에 마주쳐버린 도서관 코너의 전면 유리창을 등지고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커플, 과 그 앞을 아무렇지 않게 청소하고 계신 청소부아저씨. 캐나다 8일 차, 이것이 미국(옆나라)식 오픈 마인드군. 하고 깨닫다.


도서관에는 항상 복지프로그램이 있다

토론토는 도서관이 큰 만큼 진행되는 프로그램도 많았다.(정확히는 내가 간 도서관이 큰 편인 곳이었다.) 카드를 받고 나서 한 일은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을 살피는 것!

그중에서도 특히 노스욕 라이브러리에서만 진행되는 보드게임이 너무 재밌어 보여서 꼭 참여해 보려고 따로 안내장도 받아왔다.

*저번 편에서 오늘 도서관에 보드게임을 하러 간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음 날 9일째의 일이더라.

평일 낮 시간은 참여하지 못할 테지만 저녁이라면 얼마든지. 개인적으로는 스타트업을 위한 강연도 듣고 싶었지만 어학원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 일단 패스.

사실 도서관에는 프로그램이 많은 대신 보통 평일 오후경 진행되는 시간 관계상 직장인(그러니까 내 또래) 사람들보다는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좀 걱정이 되긴 했다.

담당자에게

"혹시 참여하는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라고 물었더니

"너무 걱정하지 마 다 비슷비슷해"라고 대답해 줬다.

한국에서 복지센터를 밥 먹듯 다닌 나로서는 솔직히 믿음이 안 갔지만... 그렇다면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게다가 어차피 나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걸.

감기의 후유증으로 기침을 좀 하긴 했지만, 물병을 들고 다니며 자주 마시는 것으로 무마되는 수준이라 역시 캐나다 약이 독하군, 하는 생각을 하며 도서관 투어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일정은 은행에 가는 것이었는데,


평소에 하던 짓을 안 하면

워홀러 신분으로 개인이 하는 은행일이라는 게 별거 있을까. 현금으로 인출한 캐나다 달러를 캐나다 은행인 TD뱅크에 입금을 한다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한국 카드에서 현금으로 인출을 하고, 현금을 직접 들고 가서 은행에 입금한다는 과정이 좀 귀찮았지만 그것까진 괜찮았다. 현금인출은 어렵지 않았고 두 은행의 거리는 가까웠으니까.

문제는 인출한 돈을 들고 TD뱅크 ATM을 찾았을 때 발생했다.

한 달 생활비를 넣는 것이라 큰돈이었지만, 은행 안으로 들어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현금을 내 계좌에 넣어달라고 요청하는 시간이 좀 귀찮았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도서관과 가깝지만 어쨌든 집과는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지 않았달까. 그리고 한국인에게 ATM이란 얼마나 기꺼운 존재인가! 굳이 은행에 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있나. 그냥 입금뿐인데 말이다.

나는 오래된 블로거였으므로 은행 업무를 볼 때 항상 콘텐츠를 찍곤 했는데 그 와중에 또 영상을 찍을 핸드폰을 손으로 잡고 있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이미 은행에 몇 번 왔다 갔기 때문에 에이, 오늘 하루야 뭐, 하고 간편하게 생각하기도 했고.

은행원에게 직접 가는 대신 ATM을 찾은 게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핀치까지 가기 귀찮아서 그냥 도서관에서 가까운 은행을 찾았던 게 문제였을까.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매일 찍던 콘텐츠를 건너뛴 게 죄였을까. 그날따라 육감이 삐용삐용 울렸는데 싸한 느낌 대신 추운 느낌일 거라 가볍게 생각하며 입금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늘 하던 행동을 안 하면, 아니, 그런데 이게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저도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요, 캐나다 은행 ATM이 돈을 먹을 수 있다는 건

토론토 은행은 ATM마다 사용법도 다 달라서, 어디는 1회 입금에도 한도액이 있고, 어디는 입금할 때 봉투를 쓰라고 한다. 내가 간 곳의 ATM은 봉투를 쓸 필요는 없었고, 단지 400달러(한화 약 40만 원)씩 입금 한도가 있어서 돈을 나눠 입금해야 했다.

한 달 생활비니 400달러로는 턱도 없어서 여러 번 나눠 입금해야 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 첫 번째 입금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현금을 입금하는데...


현금 400달러를 넣고 Next버튼을 눌렀는데, 네가 얼마를 넣었는지 확인하라는 화면에서 뜬 $0.00.

응?

응??

응????


오. 마이. 갓.

돈이 인식되지 않았으니까 돈을 다시 넣으라고? 그 돈 ATM 네가 먹었는데?

OK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그 와중에 내 카드도 ATM안에 들어있고.

천만다행으로 은행에 바로 붙어있는 기계였기 때문에 은행으로 들어가 말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들어간 사이 카드가 나와서 누군가 훔쳐가 버릴까 봐 너무 무서웠다. ATM이 가림막도 없이 오픈되어 있는 형태여서!


HELP! 외국어 실력은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빨리 는다

결국 잽싸게 안쪽으로 뛰어들어가 헬프를 외쳤다. 다행히 은행에 사람이 많지 않아 사람들의 줄 사이로 뛰어들 필요는 없었지만, 각 텔러의 자리는 가림막 없이 오픈되어 있는 바 형태였기 때문에 모든 텔러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긴 했다.

안 그래도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무슨 초등학생처럼

"내가 ATM을 이용하고 있었는데, 그게 먹통(Blocked)이 되었어! 그리고 그 안에 내 돈과 카드가 갇혔어(Stuck in)!"

라고 외쳤다.

내가 너무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으니까 직원이 바 밖으로 나와서

"Okay 무슨 상황인지 알았고, 우리가 해결할게.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이건 네 잘못이 아니고, 일단 카드부터 돌려줄게."

하고 나를 안심시켰다.

역시 생각이란 빛만큼 빠른 건지 내 머릿속엔 두 가지가 스쳐 지나갔는데,

하나는 당연히 내 잘못이 아닌걸! 단 한 번도 ATM이 돈을 먹을 거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그것도 캐나다에 온 지 8일 만에! 였고, 두 번째는 그동안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모든 장면을 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왜 안 찍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정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내가 그 돈을 넣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까 봐, 그리고 증명할 방법이 없을까 봐 너무 무서웠다. 내 돈!


한국인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

두 명의 텔러가 붙어서 카드부터 돌려줄 테니 안심하라고 했지만 ATM이 두 개가 나란히 있어서인지 카드를 찾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를 영어로 설명하는 게 그렇게 힘들 일이냐고.

우여곡절 끝에 카드를 먼저 찾았는데, 돈은 오늘 돌려줄 수 없단다.

직원분이 말하기를, 영업일 기준 5일 정도 걸릴 수 있어서 다음 주 화요일~수요일 사이에 돈이 들어올 수 있다고.

내가 돈을 입금했다는 증빙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건 우리 부서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아본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더 불안했다. ATM근처에 CCTV는 왜 안 달아 놓는 거야?

(그리고 이것과 관련한 내용을 나중에 알았는데, 그냥 전산과 들어온 현금을 사람들이 일일이 대조해서 결과를 찾아낸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계좌)만 남겨두면 확인해서 나한테 다시 돌려주는 구조. 다만 이 과정이 수동이다 보니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그래서 만약에 그때까지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 하니 자신이 직접 전화를 준다며 명함을 남겼다.

ATM으로 못 넣은 나머지 돈은 그 텔러를 통해 입금하고, 결과적으로 나는 오늘 잃어버린 40만 원의 불안함만 남긴 채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이 상태로 일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니, 캐나다 도착 8일째, 이 다사다난이 실화인 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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