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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사는 마케터 Z Feb 26. 2024

퇴사하고 수영장 딸린 집에서 사는 방법

[D+5] 허리디스크 환자에게는 수영장이 필요합니다

   

을 떴더니 하루가 지났다

캐나다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은 결국 으슬으슬한 몸을 못 견뎌 아무것도 못하고 쉬었다.

이게 Jet lag* 일까 아니면 감기기운일까?

집도 구했겠다, 마음이 놓여서 긴장이 풀린 걸지도...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도 알고 이걸 보는 독자도 안다.

원인은 영하의 기온과 미친 비바람이 부는 날씨에 온몸이 젖은 채로 나가 돌아다녀야 했던 게 문제였겠지.


* '집 뷰잉을 위한 빗 속 투혼'은 전 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한국에서 가져온 종합 감기약이 충분해서, 한 곽으로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몸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목폴라와 기모 후디, 수면바지와 오리털 패딩에 엄청나게 큰 목도리까지 둘둘 감고 Shoppers drug mart에 가기로 했다.(이 시점에서 한국인의 명예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내가 살아야지!)

캐나다에 도착한 지 꽤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이번 캐나다의 겨울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참 따뜻하게 보내는 중이다... 그러니까 내가 개고생 한 이 시기가 하필 '캐나다의 진짜 겨울'이었다는 뜻이랄까.



무지의 죗값은 여전히 치르는 중

무계획 워홀러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라고 해야 할지, 여러 가지로 숙소를 잘 못 고른 죄로 임시숙소에서는 요리도 불가능했다. 말하자면 '체크인 시간 전에 짐 맡기기가 불가능' 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


* '56kg 짐을 들고 6시간 30분을 보낼 뻔한 썰'은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캐나다의 민박이라는 것이 한국의 민박(사업)의 개념과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민박이라고 해서 갔는데 일반 가정집이었다거나, 방을 빌렸는데 정말 '방'만 있었다거나.

이런 일들은 전부 캐나다의 단기렌트가 말 그대로 '방을 빌려주는' 개념이라는 데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높은 집세를 덜기 위해 '집주인(사업자 X)'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공간'을 빌려주는 것이라, 그 안에 물건을 채워주는 것은 집주인의 마음이다. 정해진 규칙도 책임도 없다.

즉, 손 씻을 때 쓸 비누 같은 것들이 따로 필요한지, 혹은 공용으로 제공해 주는지,

기본적인 그릇(컵, 접시, 숟가락과 젓가락 등)이나 조리도구(프라이팬, 냄비 등)를 사용할 수 있는지,

개인 그릇을 써야 한다면 씻을 때 주방세제를 따로 구매해야 하는지 조차 확인을 했어야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챙길 필요가 없는 전문 단기 숙소 사업자도 있지만... 처음 숙소를 구할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지.



한국인은 밥심으로 사는데

그리하여 몸상태가 어떻든 일단 굶어 죽지 않으려면 집 밖으로 먹이활동을 나서야 했다.

임시 숙소를 잡은 상태에서 돈을 쓰고 싶지도 않고, 식당들을 찾아다닐 만큼 컨디션이 좋지도 않았기 때문에 단기숙소에 묵는 내내 주로 마트에서 가장 저렴한 냉동식품을 사 먹었다.

특히 쇼퍼스 드러그 마트의 PC(마트 자체 브랜드) 푸드가 저렴한데 '나쁘지 않은' 맛에 탄단지를 한 번에 섭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음식이라.

지금 생각해 보면 우버이츠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업타운의 저렴한 식당에도 갈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짬이 좀 찬 것이겠지.

그러나 도착 첫날 식당에서 한 끼를 먹고 약 1만 3천 원을 지불 했던(심지어 팁 제외) 기억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당시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 도저히 아무 가게나 찾아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3~5천 원에 이 정도 퀄리티면 보람차지.

그래도 뭔가 따뜻한 것을 먹고 회복에 힘썼더니 다음날 즈음에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문제의 임시 숙소를 선택했던 이유

(몰랐지만) 요리도 할 수 없고, (몰랐지만) 짐도 미리 보관할 수 없었는데도 이 숙소를 선택했던 것은 사실 다른 아닌 허리디스크 때문이었다.

덴(Den; 창고형의 작은 방. 베란다에 가까운 휴식공간 같은 느낌이거나, 아예 창이 없는 미니 갤러리형 공간인 경우도 흔하다. 대략 고시원 한 방 정도의 사이즈)이라 방의 크기도 작고 창문은 커서 좀 추울 테지만, 한 겨울에 도착하는 것도 아니고. 잠시 머물 뿐인데 그 정도야. 게다가 창이 있는 덕에 방이 좁아도 그리 답답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숙소에 수영장이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허리디스크가 터지고 약 1개월, 나는 아직 재활운동이 필요했지. 그런데 콘도 지하에 수영장이 있어서 내가 내키는 대로 수영을 할 수 있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 '퇴사 직전 허리디스크가 터진 이야기'는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백수지만 수영장 딸린 집에서 삽니다

토론토의 콘도는 아파트라기보다 호텔에 가깝다.

시설을 관리하는 관리자 혹은 부서가 따로 있고, 입구에서 공용 현관키를 통해 로비로 입장한다. 아무래도 고층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모든 층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편.

쓰레기 처리 공간(분리수거, 음식물 쓰레기 처리 공간)과 세탁실이 집 밖에 갖추어져 있다.

콘도마다 다르지만 많은 콘도가 짐(헬스장), 커뮤니케이션 공간 등의 복지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수영장과 대여가 가능한 바베큐장 등을 갖춘 경우도.

호텔이나 아파트처럼 한 층을 여러 세대가 사용하는데, 한 호실에 보통 방 2개 이상과 거실, 화장실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서비스를 누리는 비용은 일반 하우스(주택)보다도 비싼 편. 나 같은 워홀러는 당연하게도 룸셰어(방마다 다른 사람이 사는 하숙 스타일)를 선택하게 되니 수영장 하나도 낭만을 누리기에는 기회비용이 엄청나게 드는 편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퇴사 후에 수영장 딸린 집에서 살고 싶으면, 서울에서 살기 위해 월세로 냈던 비용의 2배~2.5배를 지출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사는 캐나다(토론토) 콘도로 오면 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토론토엔 수영장 딸린 콘도가 정말 흔하니까, 수영장 딸린 집에 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지갑 수준이 아니라) 통장이 가벼워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지다 보니 눈물이 나긴 하지만.



수영장은 죄가 없다

감기를 앓는 동안은 정말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힘들어서 침대에 오래 누워있거나 기침을 하면 허리가 아팠다. 허리디스크가 악화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게다가 방은 좁고 건조해서 방안에서는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기에는 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그리하여 5일째에 들어서서 몸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자마자 콘도 수영장에 수영을 하러 가기로 했다.

내가 얼마나 수영(재활 운동)에 진심이냐면, 한국에서부터 수영복을 챙겨 왔다는 것 아니겠나.

사실 입장 직전에 몸을 씻는 과정에서 문제가 좀 있었다. 탈의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탈의실에 있는 건식 샤워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몰라 애를 먹었던 것.

샤워기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는데, 캐나다의 모든 샤워시설이 건식이라 공용 건식 샤워실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왔다.(심지어 수영장도 건식이었다... 풀 테두리에 물 빠지는 곳이 없고 배수구가 작고 멀더라.)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수영장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내가 살던 콘도의 수영장


평일 낮이라 그런지 휑하게 비어있는 수영장. 아, 너무 좋아!

게다가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캐나다에서 보는 첫눈인데, 수영장에 커다란 창이 있어서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걸 보면서 수영을 할 수 있다니! 세상에, 이런 호사가 있나.

게다가 내 키를 훌쩍 넘는 2.19m의 물 깊이가 진짜 행복했다. 한국에서는 만나기 힘든 물 깊이니까.

콘도가 확실히 호텔의 느낌이 강하다 보니, 수영장 안에 쉴 수 있는 소파들도 있고, 스파풀도 있더라. 한 껏 앓고 나서 콜록거리던 목도 습기가 가득한 수영장에 들어와서(그래도 한국에 비하면 엄청나게 건조한 편) 스파풀에 몸을 담고 있으려니 몸이 훅 플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목표는 가습기

아니, 확실히 건조함 때문에 목감기가 악화되었던 것 같았다. 캐나다의 겨울은 정말 놀라운 수준으로 건조하고 콘도의 공기는 너무나 나빴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1시간 여의 여유시간을 즐기고 나니 눈도 그치고 하늘도 맑아졌다.

오래간만에 이렇게 좋은 컨디션이라니. 이번 저녁으로는 오래간만에 밥다운 밥을 사 먹고, 아직 완벽하게 낫지 않은 목감기를 위해 거금을 들여서라도 가습기를 사러 가기로 했다.

가습기 하나를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일 줄은 몰랐지만. 아니, 어려워도 그때 가습기를 샀어야 했다.

가습기, 그놈의 가습기!


핀치역 근처 예쁜 하늘




* 오타 수정완료 :)

오타 지적 환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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