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몸을 도구 삼아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몸이 나를 도구 삼아 자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영 틀린 말은 아닌 것이, 내 일상의 상당 부분은 몸의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데 쓰인다. 회사에 눈치 보며 외출을 쓰고 꼬박꼬박 병원을 갈 때면 가끔 쓴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매일 먹고 자고 씻고 하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몸의 현재를 유지하기 위한 행위들이다. 꾸준한 운동에 대한 강박을 가지고 사는 것도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때로는 이 모든 것이 귀찮아 그만 두고 싶어도 육체적 고통과 죽음에 초연할 용기가 없으면 꼼짝없이 몸에 복종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주인은 몸이고 언제나 애지중지 섬기게 된다.
그런데 유일하게 몸을 객관화하는 순간이 있다. 손톱을 깎거나 머리를 자를 때이다. 그것도 몸의 일부라 어떤 식으로든 평소에 관리를 할 텐데, 한순간에 잘려나간 잔해를 보고 있으면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휴지에 싸매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미용실 바닥에서 쓸려나가는 나의 몸을 볼 때면 그저 사물에 불과한 느낌이다. 내가 몸을 아무렇지 않게 막 대하는 순간이고, 사물로 객관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고통 없이 잘라낼 수 있는 유일한 부위라는 사실이 주는 특별한 자유이다.
개인적으로 지난달은 정말 너무 끔찍했다. 회사에서 제출해야 하는 자료 마감일이 월말에 있었고, 나는 준비가 아직 안 되어 있었다. 나를 도와 같이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직원들은 사실상 책임을 나에게 미루어 놓고 최소한의 것들만 하는 상황이었다. 날마다 부담이 목을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매일 밤 12시에 택시로 퇴근했다. 잦은 야근에 체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3일 동안 샤워도 안 하고 출근했다. 집에 도착하면 샤워할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먹고 있는 약 부작용이 왔다. 소화가 좀 안 될 것이라는 말은 들었으나, 이건 소화가 안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뭘 먹든 바로 토할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모든 밥이 징그러워 보였다. 가뜩이나 쇠약해진 상태에서 밥을 못 먹으니 일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안 좋아졌다. 몸무게는 60kg(187cm)을 간신히 유지했고, 덩달아 멘탈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밤, 비쩍 마른 몸과 황폐한 정신으로 혼자 침대에 누워있자니 문득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버릇으로 말하는 ‘죽겠다’가 아니라 실체가 있는 위기감이었다. 순간 현기증이 밀려왔다. 눈을 감으니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쫓아낼 힘이 없어 그냥 내버려두었다. 어떤 장면이 조금씩 또렷하게 떠올랐다. 나는 손톱을 깎고 있었고, 손톱들이 슬로우모션으로 잘려나가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내 몸으로부터 절연하는 순간이 느리지만 선명하게 보였다. 내 몸이 타인의 것처럼 낯설게 다가왔고, 나도 손톱처럼 혹은 머리카락처럼 언제든 떨어져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대수롭지 느껴졌다.
더 먹으면 진짜 죽을 것 같아서 4월이 되자마자 약을 끊었다. 밥은 일부러 내 양보다 많이 먹었다. 야근도 한동안 안 했다. 분명 내일 고생할 게 보였지만, 그냥 아무 생각 않고 집에 갔다. 그리고 오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다. 그렇게 보름을 하니 1kg이 붙었다. 그리고 또 일주일이 지나자 1kg이 더 늘었다. 안 좋을 때 정확하게 고통을 반영하던 육신은 좋아질 때도 너무 정직했다. 조금씩 컨디션이 좋아질 때마다 느껴지는 그 안락함이 좋았다.
사람의 몸도 우주먼지로부터 왔다고 한다. 그 말의 방점은 우주가 아니라 ‘먼지’에 있다. 잘려나간 손톱처럼 몸도 한발 물러서서 보면 티끌 같은 사소한 대상이다. 때문에 몸에 대해 어느정도 초연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 여러모로 삶을 이롭게 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것을 요즘 어려움을 겪으며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몸에 속박된 인간의 숙명으로부터 나 역시 한발짝도 초연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그 앞에서 나는 오늘도 손톱을 깎는 것으로만 자유를 느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