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킬롤로지'(스포 많습니다)

-오늘의 위안

by 지안

연극 ‘킬롤로지’는 웃으며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종류의 연극이 아니다. 상황은 불편하고 음향은 잔인하며 그것들을 바탕으로 상상되는 장면들은 조금도 즐겁거나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한다.


처음 이 연극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뉴스 문화 코너였다. “온라인 게임 ‘킬롤로지’에서 사용된 방법으로 살해된 소년 ‘데이비’, 복수를 결심한 아버지 ‘알란, 게임 개발자 ‘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잔혹한 범죄와 미디어의 상관관계”를 잘 그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흠.. WHO에서 게임을 질병으로 분류했다는데, 이런 근래의 상황을 표현한 것인가?’ 정도의 생각을 하며 극장으로 향했다.



9살 소년 데이비는 오랜만에 나타난 아버지에게 강아지’ 메이시’를 선물 받는다. 집 나간 아빠와 가난하고 지친 엄마에게서는 받을 수 없던 애정을 강아지에게서 듬뿍 느끼던 데이비는 12살 어느 날 ‘자신의 탓’으로 메이시를 잃는다. 그리고 16살의 데이비는 온라인 게임 ‘킬롤로지’에서 사용된 방법 그대로 잔인하게 고문당하다가 죽는다.


경악할 지점은 데이비의 죽음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일군의 집단이 구타 및 성폭행 등을 개인에게 행사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남기고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는 기사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괴롭히다 옥상 끝으로 몰아 자살하게 만들어 놓고도 법정에서 히죽대며 웃고 있더라는 기사도 분명 읽은 적이 있다. 내 집 앞이 아니었을 뿐이지, 늘 걷던 거리 모퉁이나 가끔 한 번은 들러 봤던 골목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데이비가 살고 있는 곳을 그의 말로 설명해 보자면 “거리는 사이코들로 가득하고 매일 밤 집에 살아 돌아오는 게 순전히 기적”인 곳이다. 그곳에서 폭력을 당하고, 가하고, 배우면서 데이비는 성장한다. “내 목이 이렇게 생긴 이유가 이거구나. 바로 메이시가 머리를 편안하게 올리는 자리였던 거죠.”라고 기뻐하던 아이는 자신의 안부를 걱정하는 선생님을 의자로 내리칠 정도의 청소년으로 변한다. 이유는 하나다. 그 선생님은 착하기 때문에, 즉 약하고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완벽한 폭력의 내면화다.


‘킬롤로지’라는 게임을 만든, 그래서 시끄러운 명성과 엄청난 부를 거머쥔 폴의 이야기도 처연하긴 매한가지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이 청년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도 결국 실패한다. “부자로 태어난 것이 이미 성공이니, 더 나은 사람이 돼라’고 일갈하던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 만든 게임이 바로 ‘킬롤로지’다.


아들을 잃은 알란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걸 혐오”하며, 그런 본능적인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군대에서는 현실과 똑같은 훈련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결국 ‘킬롤로지’는 ‘인간의 혐오’를 없애는 동일한 방식의 훈련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든 사람을 처단하려 한다.



뉴스 소개대로 ‘범죄와 미디어의 상관관계’도 물론 있지만, 이 연극은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들에 대해 묻는다.


이 연극을 ‘‘넓고, 강이 보이고, 풍경이 아름다운 집’에 살고, 아픈 아버지를 위해 제트기를 전세 낼 수 있을 정도의 상류사회의 일원인 폴이 ‘만든 게임’에 의해, ‘사이코가 가득’한 동네에서 살던 메이시가 ‘실제로 죽는’’ 내용이라고 정의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게임과 실제는 달라야 하지만, 사는 차원이 달라지면 게임이 현실로 구현되어 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간단히 ‘게임은 게임일 뿐’이라고 주장하기가 어려워진다. 사회가 세상을 다른 차원으로 완벽하게 나눠버렸기에 결과적으로 벌어진 일이다. 게임은 ‘이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배울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와 착각하는 것은 비극이지만 가능한 결말이다.



극은 비교적 긴 1막과 15분의 인터미션, 짧은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2막의 데이비가 알란의 상상 속에서 사는 것인지, 다중 우주 속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 장면을 ‘완벽하게 다른 차원으로 구분되지 않은 사회’ 속 데이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사회가 극단적으로 나뉘지 않았다면(한 나라의 1%가 그 나라 부의 50%를 소유했다거나 하는 말은 현재 진행형이지 않은가), 그래서 실제와 가상을 구분할 수 있는 곳이라면 데이비가 누렸을 세상이라고 믿는다. 즉 데이비를 잃어서 슬프기도 하지만, 살아남아서 어렸을 때보다 훨씬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던 데이비의 ‘가능성’을 전부 빼앗겼다는 것이 이 연극의 가장 아픈 지점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부자이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보이는 폴도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저걸 치워 버려”라고 사랑을 부정하게 되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은 그저 하나뿐인 목숨이 내놔야 한다. 커트 보니컷은 그의 장편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빌어 “육군, 해군, 해병대의 주된 목적은 가난한 미국인에게 깨끗하고 깁지 않고 다림질한 옷을 입혀 부유한 미국인이 그들을 봐도 비위가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 생각하오.”라고 빈정거렸다. 커트 보니컷이 걱정하던 세상이 발전하면 킬롤로지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에 덧붙여 태어나서 처음 맺는 인간관계인 부모와 자식, 아버지와 아들. 이 시작이 틀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것 같다. 늘 부모가 문제다. 아아~ 아들을 죽인 자를 위해 살인도 저지르겠다는 알란은 데이비가 살아 숨 쉬는 동안은 뭘 했던 것일까. “자신의 죄를 대면하는 대신에, 그 게임 만든 남자를 비난하곤 있지 않나요?”라고 알란에게 묻는 질문이 가슴 아픈 이유다.


데이비도 알란도 폴도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았다. 행복해질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협업으로 망가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현실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슬프다.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버스, 창 밖으로 연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헤어지기 아쉬워 포옹하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였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풍경이지만 오래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해야 한다. 누구라도. 적어도 다른 데이비를 만나지 않으려면 말이다.


오늘의 위안 : 이 연극,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제게 줄 따뜻한 위안이 있으신 분은 부탁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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