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여름

-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by 지안

절반쯤 무너진 것 같은 남자가 있다. 그가 결혼 6년 차라고 하면 듣는 사람 대부분은 그냥 수긍한다. 아무렴, 그럴 수도 있지. 건강에 관련된 칼럼을 스크랩까지 하면서 남편의 생활을 간섭하는 여자가 그의 아내라고 하면, 손뼉을 딱 칠 것이다. 아무렴, 그럴 수 있다니까.


그렇게 주인공 태민은 무대에 있다. 씻지도 않은 몸으로, 빨지도 않은 옷들이 쌓인 더러운 작업실에서 그는 아래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유명한 사진작가이지만 작업을 못 한지 1년이 다 돼간다.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을 뿐이다. 돈이 떨어진 지도 꽤 됐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밖으로 나간 아내는 번번이 뭔가를 잃어버렸다며 되돌아와 그의 시간을 방해한다. 후배 동욱의 말에 따르면 그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다. 무너진 나머지 절반의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극작가 나카타니 마유미의 원작이라는 <안녕, 여름>은 2016년 초연 이후 두 번째로 무대에 올려졌다. 그의 작업실로 설정된 무대 위에서 태민과 그의 아내, 태민의 충실한 후배인 동욱과 어떤 관계로 그 공간을 드나드는지 알 수가 없는 중년의 조지, 사진을 부탁하러 온 란이 부지런히 움직인다. 다른 이유로 그곳에 모여 있는 그들은, 그러나 모두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권태로운 사랑과 어설픈 사랑, 쉬운 사랑과 결국 찾아낸 사랑 등 여러 모양의 것들이 다른 빛깔로 무대 위를 채운다.


일본 영화 고유의 특성이 있는 것처럼 일본 극작가의 작품에는 나름의 유머 코드가 있다. 이 부분에서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데(저는 다행히 ‘호’ 쪽입니다), 불호인 분들에게는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부분으로 작용할 것 같다. 극 후반의 반전을 최대한 숨긴 채 초반부의 분량을 늘이려다 보니 벌어진 아픔이다. 하지만 출연진들의 연기가 워낙 출중해서 후반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상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두 사람의 사랑이 이제 너무 익숙해졌다고 느껴지는가? 만약 그런 상태라면 한 번쯤 봐도 좋은 연극이다. 이 연극이 묻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극 중 조지의 말처럼 ‘상처를 주지 않고 어른이 되는 방법은 없다’. 사랑을 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렇게 어른이 되고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후회를 하지 않도록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방법이 약간의 해결책이라면 해결책일 뿐.




태민 역의 송용진 배우가 너무 맛깔나게 맥주를 드셔서 극장을 나오자마자 참지 못하고 같은 이름의 맥주를 사서 시원하게 마셔버렸다. PPL은 아니었길 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송용진 배우는 참 느긋하고 편하게 연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 맛이 깊다. 멋지다. 여름 역의 박혜나 배우는 격하게 사랑스러웠다. '여름'이라는 여주인공에 백삼십 퍼센트 싱크로율을 보이는 것 같다.


지금 사랑, 혹은 지나간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연극이다. 혹시 방금 실연하신 분들은? 대환영이다. 아, 입장 전에 휴지는 한 손에 쥐고 가시길 당부드린다. 오늘도 관객석의 대부분이 마스크 위를 닦아내느라 잠시도 틈이 없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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