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 신곡 – 지옥편

-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by 지안

단테는 1265년 출생하여 1321년 사망한 이탈리아 피렌체의 시인이다. 그가 피렌체의 거리를 누비며 시를 노래할 때, 한반도의 사람들은 원나라 앞에서 꼼짝 못 하는 고려 왕족들을 모시느라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로 갈라져 있었고,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르네상스는 아직 기미도 보이지 않던 시기였다. 요컨대 매우 옛날 사람이라는 말이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게 ‘단테’는 바로 ‘베아트리체’라는 인물을 떠오르게 하고, 베아트리체는 조용필 씨의 노래 ‘슬픈 베아트리체’로 연결된다(젊은 분들은 이 노래 모르실 겁니다. 굳이 찾아서 들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ㅋ).


베아트리체는 단테가 9살에 처음 만난 소녀라고 한다. 24살에 죽은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영원한 사랑의 표상으로 남았고, 천국에서 단테를 지켜주는 인물로 ‘신곡’에도 등장한다. 그래봐야 실제 삶에서는 베아트리체가 죽은 2년 후 다른 여인과 결혼하지만, 아무튼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은 한반도의 한 가수가 노래로 만들어 부를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까 단테와 한반도의 상관관계란 아마도 ‘조용필 씨 노래’ 정도가 아닌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올해(2021년)가 단테 서거 700주년이라고 하더라도, 굳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단테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봐야 하는 이유를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오래전, ‘신곡’을 읽다 “나는 지옥행이군.”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어버렸던 나로서는 바로 그 ‘신곡 – 지옥편’이 무대에 올려진다는 사실이 조금은 불편했다. 지옥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일단 ‘내가 지옥에 간다’는 생각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까.




단테의 지옥은 총 9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로 갈수록 심각한 죄인들이 머무는 곳이어서 고통도 심하다. 나는 예전에 6층까지 내려가서 책을 덮었었다. 그곳은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인 에피쿠로스가 있는 곳이어서, ‘이거 뭐 나도 죽으면 따 논 지옥행’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책을 덮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이 연극에서 단테는 가장 깊은 9층의 지옥까지 두려움에 덜덜 떨고, 공포에 소리를 지르며 내려간다. 신곡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신곡’에 나온 지옥의 모습은 단테가 만들었지만, 이 연극의 지옥에는 단테가 처박아 놓은 인물들과 함께 좀 색다른 인간들이 머물고 있다. 어쩌면 이 연극은 단테 사후 700주년을 기념하자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그렇게 하다간 너희 지옥 간다’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게다가 연극이 지옥으로 모신 분들은 나 역시 지옥으로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때부터는 묘한 쾌감도 생긴다. 그러니까 이 연극 ‘단테 신곡’은 단테의 입을 빌려 말하고는 있지만, 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사람 누군가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 연극은 신곡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 와중에 신곡을 읽지 않은 분들을 배려하느라 설명조로 풀어놓은 대사는 더욱 연극의 매력을 떨어뜨린다. 신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믿는 자가 설명조로 풀어놓은 말들이 싱그럽게 들릴 리가 없다. 뭔가 자꾸 혼나는 느낌에, 지루한 강의를 듣는 처지가 된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한정된 무대에서 9층으로 이루어진 지옥을 표현하는 방법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열정적이고, 몸짓 하나하나가 아름답다. 배우분들의 발음도 명확해서 한 단어도 빠짐없이 귀에 꽂힌다. 700년 전의 인물이 하는 고뇌가 마음에 와 닿지는 않지만, 대신 ‘이 사람’, ‘저 사람’을 ‘이 구덩이’, ‘저 강물 속’에 모시면 되겠다 생각하는 의외의 재미가 있다.


20분의 인터미션을 포함해서 160분이 넘는 러닝타임이 조금 힘이 들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내 마음속의 그분들’을 지옥의 층층마다 배치해보는 즐거움도 있다. 물론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700년 전에 죽은 단테를 불러온 이유는 이런 반성을 주기 위함일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게 살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연극 '킬롤로지'(스포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