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 치는 남자

-한양레퍼토리씨어터

by 지안

연극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은 ‘삼청교육대’다. 1980년 군부에 의해 설립된 ‘삼청교육대’는 깡패 및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지금도 전설처럼 이름이 전해지는 ‘양은이파’나 ‘서방파’의 조직원들이 검거된 것이 이때다. 형식도 없고, 재판도 없었다. 눈에 띄면 잡아가면 그만이었다. 꽤 많은 무고한 시민들도 피해를 당했다. 극 중 ‘오형원’같은 이들이다. 내 또래, 혹은 그보다 위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내장 안 어딘가 자리 잡은 돌멩이처럼 기분 나쁘고 무서운 기억이다.




시대는 1983년, 무대는 김문식이 운영하는 글짓기 학원이다. 고등학교 담임이었던 그는 아침 회의에 늦게 참석하는 바람에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어떤 결과가 생길지도 모른 채 오형원을 문제 학생으로 지목한다. 오형원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간다.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은 학교를 그만두고, 글쓰기 학원을 운영하며 죄책감 속에 살아간다. 어느 날 대공업무를 주로 하는 형사가 글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찾아온다. 이런 이야기다. 스포일러라고? 아니다. 이 극을 소개하는 기사에도, 팸플릿에도 다 적혀 있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연극은 이 내용보다 더 큰 무엇을 관객에게 보여줘야 한다. 물론 영화 소개 영상보다 못한 영화를 한두 번 본 것은 아니라, 다음번에 ‘이 감독이 만든 영화는 믿고 거르겠다’고 결심한 기억도 많다. 하지만 관객 입장에서 극장을 찾을 때에는 ‘연극’이나 ‘영화’가 소개되는 줄거리보다는 많은 것을 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이 연극의 배경은 40년 전이다. 그만큼의 시간 간극이 생겼고, ‘삼청 교육대’라는 이름을 역사책의 한 부분에서만 읽은 사람이 이미 많아졌다. 이 연극은 특정한 배경을 둔 보편적인 감정을 말하는 연극이 아니다. ‘삼청교육대’라는 특수한 사건과 ‘자유’나 ‘인권’을 말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던 어이없는 시대에 대한 배경이 없이는 한걸음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응답하라 0000’ 같은 드라마가 보편적인 연애담을 특이한 시대적 배경에 담아 색다른 느낌을 만들어 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 의미로 이 연극은 거칠고 불친절하다. 극 중반까지 관객은 김문식이 처한 상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중반이 되어서야 갑자기 피투성이 자루를 든 오형원이 튀어나온다. 이거야, 원.




입장과 동시에 관객을 맞이하는 배경음악은 오래전 음악방송 디제이의 목소리다. 극 중 김문식이 즐겨 듣는 유행가도 그 시절의 노래다. 군사 정권과 관련된 내용이나 삼청교육대와 연관 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저 그 시절의 방송이고 노래일 뿐이다.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구나' 이해될 수 있는 소품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없는 소음이다. '이종환과 방미'를 아는 1990년 이후 출생자가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 관객을 그 시절의 감성으로 돌려놓고 싶은 의도였을 것이다. 무대는 과거를 재현해 놓은 박물관 한 칸처럼 꾸며 놓았다. 과거 소품을 이용한 음식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에게는 1980년대 배경이라는 것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감성적 과거 여행이 ‘삼청교육대’를, 이 극의 배경이 되는 인권 유린의 상황과 그것을 둘러싼 떨치지 못한 감정들을 이해하는 데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극 초반부는 라디오를 켜 놓는 설정으로 대사 전달이 끊기기도 한다. 이 음악을 모르는 관객들에게는, 80년대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선택을 한 이유는 도대체 뭘까.



김문식 역의 김동현 배우의 연기는 세심하고 잘 조율되어 있다. 최경구 역의 최무인 배우는 실제 직업이 경찰이 아닐까 싶게 어울린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합이 잘 맞는다. 무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끌까지 읽는 맞춤법도 틀리는 형사란 상상할 수 없지만, 최무인 배우가 연기하는 최경구 형사라면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오형원이 등장하기 전까지, 두 배우의 연기는 꽤 입체적이다. 오형원의 등장 이후로 극은 마냥 무겁고 불쾌해진다. 배우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오형원이라는 인물이 그럴 뿐이다.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덩어리로 만들다 보니 사악하기 그지없는 평면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우리 현대사는 유독 아프고 슬프다. 잔인하고 불쾌하다. 그러나 40년의 거리가 생긴 지금이라면 이제는 좀 더 다르게 과거를 돌아봐도 좋을 것 같다. 친절하게 설명하고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도 분명 있을 것이다. 동시대에 벌어진 참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칠고 투박한 방법이 좋다. 설명을 곁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시대가 다르다. 물리적으로 때리는 것이 아픔을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아니다. 대사로도, 감정으로도 더 깊은 아픔을 전달할 수도 있다. 연기자들의 호연에 비해 많이 아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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