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사
‘하지’와 ‘동지’가 중요한 절기였을 때가 있었다. 응급헬기 일을 할 때였는데, 두 날을 중심으로 근무 시간이 급증 혹은 급감했다. 당시 응급헬기는 해가 떠 있는 동안만 운영했다. 그래서 새벽 5시면 해가 떠서 20시가 다 되어야 깜깜 해지는 하지에는 준비시간을 포함 16시간 정도 근무해야 했다. 반면 8시가 다 되어야 해가 떠서 17시 정도에 져 버리는 동지에는 10시간 근무가 된다.
사무실에서 언제 울릴지 모를 응급콜을 기다리며 조마조마하게 하루 세끼를 먹느냐, 그래도 한 끼 정도는 사람처럼 ‘식사’할 수 있느냐는 꽤 중요한 문제였다. 동지가 되면 오늘을 기점으로 근무시간이 하냥 늘어날 것이라는 슬픔이 몰려왔고 하지가 돌아오면 지금은 힘들지만 곧 좋은 날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고문 같은 것이 생겨났다.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은 의미 없었다. 사람이 모이면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그것이 응급상황일 확률도 덩달아 올라갔다. 명절 따위 부질없었다. 사람일이 별 것인가, 나에게 필요한 것이 중요한 일이고 소중한 것 아니던가.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하지, 동지마저 챙기지 않는다. 설과 추석에도 일했고, 연말에는 야근하는 일정이다(2020년 설에도 일한다). 2019년에 출근해서 2020년 퇴근할 예정이어서 재야의 타종은 사무실에서 듣게 될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자고 일어났더니 피오나 공주가 되어 있다거나, 벌레가 되어 버둥거릴 일 없는 현실에 살다 보니 어제와 오늘, 저번 달과 이번 달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래도 새 다이어리를 정리할 때나 달력을 바꾸면서는 어쩔 수 없이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올해 뭔가 소득이 있었나? 혹시 기억 나지 않지만 하려는 바 혹은 계획 같은 것이 있었던가.
사무실 업무를 바꿔보고자 노력한 일은 조용한 실패로 끝났다. 어떤 일이건 계획 단계에서 확률을 따져 보기 마련인데, 내 짐작으로는 10퍼센트 이하의 가능성 정도가 점쳐졌었다. 워낙 팀장이 시원시원하게 오케이를 하는 바람에 혹시나 하는 희망의 벌렁거림을 느꼈지만 실패. 팀장 윗선에서 대답조차 못 듣고 끝나버렸다. 누차 사직서를 내던 황희 정승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계획했던 여행은 떠나지 못했다. 시간문제가 컸고 돈 문제도 있었다. 클림트의 그림 앞에서 질릴 때까지 시간을 보낸 후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겠다는 소망은 잠정 보류. 그 참, 인생 마음대로는 안 된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크로아티아의 성벽을 걷겠다는 소망은 다음 기회를 기다려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리가 나지 않는 책꽂이를 정리하겠다는 결심도 내년으로 미뤘다. 버릴까 말까 손을 뻗었다가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책장을 넘기는 일을 몇 번 되풀이한 후 내린 결정이다. 더 급해지면 하겠지, 뭐.
정기구독 중인 잡지에 소개되는 영화만이라도 챙겨보겠다는 결심도 땡. 넷플릭스와 집 근처 극장의 탓이라고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문제의 가장 큰 부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게으른 내가 그렇지, 뭐.
몇 개 공모전에 응모하려는 계획도 물론 실패다. 초반에 너무 떨어진 결과 초심을 잃어버렸다. 일정을 적어 둔 책상 달력에 먼지가 앉았다. 후반에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마음이 많이 다친 결과였다.
적어 놓고 보니 아무리 따뜻하게 말해도 ‘실패로 점철된 한 해’였다는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런이런……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에도 마찬가지다. ‘성공’이라는 마음 뜨거워지는 단어를 사용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로또를 맞은 적도 없고,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일도 없으며(이런 건 대부분 있는 줄도 몰랐던 삼촌 같은 사람이 해 줘야 제 맛이다), 첫눈에 반한 사람과 데이트하는 행운을 누리거나 하다못해 ‘홀인원’도 못했다. 물론 나는 로또를 산 적도, 연락이 끊어진 삼촌도 없으며, 새로운 사람과 차 한잔 마신 적도 없고 골프를 치지도 않는다. 공유처럼 근사하고 능력 있는 도깨비가 있다고 해도 내 삶에 개입할 여지가 아예 없었다는 말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평생을 이럴 수가 있나.
하지만 나의 삶 전체가 정해진 방향으로 꾸준히 가고 있기는 하다.
업무 변경은 실패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결과 다른 곳으로 ‘파견되어서’ 출근 중이다. 백종원 씨가 음식으로 도장깨기를 하고 다녔던 곳 중 하나로 떠나보려고 연초에 틈을 노리고 있다. 올해 달력은 아직 빈칸이지만, 누가 아는가. 여행지에서 ‘추진력’을 얻고 다시 힘을 낼 수도 있지. 넷플릭스가 힘을 내서 새 영화를 많이 보여주면 좋겠다. 영화 ‘두 교황’과 ‘결혼 이야기’ 너무 고맙다. 하~
닐 게이먼은 그의 책 [닐 게이먼을 만든 생각]에서 ‘프리랜서의 삶, 예술인의 삶은 무인도에서 병에 편지를 넣어 물에 띄우고, 누군가 내 병 중 하나를 건져서 읽어본 다음 다시 그 안에다 무언가를 넣어서 그 병이 내게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백 개를 보내야 하나쯤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는 ‘성공’이 ‘만족’이 그렇다. 백 개쯤 시도해야 하나 정도 가능했던 것 같다. 99개의 실패를 견디지 못하면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뭔가를 한다. 그것이 실패로 끝날 지 성공으로 안겨올지 모르지만, 시도하지 않고서야 결과를 알 수 없지 않은가? 아마 이런 마음을 쓸쓸한 자기 위안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