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해진 날의 뜻밖의 위로

-오늘의 위로

by 지안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만 일어난다면 그것이야 말로 세상 불공평한 일이기 때문이다.


딱 꼬집어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뭔가 이상하게 일이 꼬이고, 내가 한 것이 분명한데 과연 내가 한 짓이 맞나 싶게 바보 같은 짓을 연발하는 기념비적인 날 말이다. 물론 내가 멍청한 탓에 일어난 일들이지만 과연 그것 만이 이 모든 불운의 유일한 이유일까 머리를 감싸 쥐게 되는 날. 이런 날은 크게 겉으로 다치지 않았더라도 심각한 내상을 당한다. 정신적 충격이 상당한 것이다. 스스로가 너무 하찮고 초라하게 느껴져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을 정도가 된다.


내게는 며칠 전 주말이 그랬다.



토요일, 붐비는 길을 헤쳐 출근할 때만 해도 괜찮았다. 무릇 주말 야근이란 퇴근 걱정을 하지 않아서 좋다. 평일 퇴근 때는 나의 퇴근시간과 타인들의 출근시간이 겹쳐서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출근했다면 일단 근무의 반은 성공이다.


자정을 넘겨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만들 무렵 인기척도 없이 불운이 찾아들었다.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받던 중 컵을 감싸고 있던 플라스틱 재질에 금이 갔다. 이유는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쥐고 있던 부분에 실시간으로 금이 가는 바람에 반쯤 물을 받다 멈춰 서서 멍하니 깨진 컵을 바라보았다. 깨진 컵을 타고 불운이 따라온 것이라면 버리고 왔어야 마땅하지만, 그 날의 내가 그 사실을 알 턱이 있나.


자정부터 새벽 2시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는 시간이다. 다른 시간대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적어도 커피를 마시면서 퇴근까지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고 시간 배분할 정도의 여유는 있다는 말이다. 그때 해 두지 않으면 퇴근 후 잊고 온 일이 하나 둘 정도 생기기 마련이다.


뜨거운 커피를 막 한 모금 마셨을 때 상사가 새로운 일거리를 들고 다가왔다. 그 역시 ‘급하니까’ 일을 들고 온 것이다. 예전에 만들어 둔, 참고할 만한 파일이 있었지만 정확하게 하려면 특정 국가의 정보를 열람해야 했다. 지금은 월드와이드 웹(WWW)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먹통이었다. 사이트는 열리지 않았고 간혹 접속이 되더라도 파일을 내려받을 수가 없었다. 급하다는 재촉에 예전에 만들어 둔 파일을 참고해 답신을 했다.



답신을 보내고 보니 실시간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밀려 있었다. ‘찝찝함’을 잠시 내려놓고 ‘빨리빨리’ 모드로 전환했다. 20년 차 직장인이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일에 ‘족보’ 정도는 지니고 있다. 일주일 정도 다른 곳으로 파견되었던 사이 ‘전달 방식’이 변경된 것은 알고 었지만,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은 같았다. 거의 자동모드로 관련된 메일을 보냈다. 체크는 잠시 후에 해보면 된다. 속성으로 할 일을 해치우고 ‘찝찝함’ 모드로 돌아왔다.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그때였다. 상사에게 보고한 지 30여분 후에 멀쩡하게 복구된 WWW덕분이다. 젠장.


어떻게 수정 보고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조금 전 메일을 받은 곳에서 연락이 왔다. ‘전달 방식’이 변경되어서 수신처가 잘못되어 있었다. 시간 내로 통보해야 하는 일이라 허겁지겁 다시 메일을 작성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죄송합니다’와 ‘미안합니다’라는 섬 사이의 어딘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구들을 연신 떠들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4시가 지나 있었다. 커피는 아까 마신 한 모금이 줄어든 상태로 식어 있었다. 어찌어찌 일은 처리했지만 사실은 아무 일도 끝내지 못한 것처럼 께름칙했다. 업무와 관련된 실수를 연달아 한 것이 얼마 만인가. 도대체 일하러 나온 인간의 본분을 하긴 한 것인가 자괴감이 밀려왔다.



축 늘어뜨린 어깨로 퇴근하는 길, 주말을 맞이하여야 ‘긴급보수공사’ 중인 도로가 쓸데없이 꽉 막혀 있었다. 이 정도 되면 ‘될 대로 되라’ 모드가 작동한다. 간밤의 실수에 관해 맨 정신의 이불 킥을 날리며 속절없이 씩씩거렸다.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몸은 극단적으로 피곤한데 정신은 실핀처럼 날카로웠다. 평소라면 핸드폰을 끄고 잠들었겠지만, 어제 처리한 업무 중 더한 실수가 나온다고 해도 납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던 나는 사무실에서 혹시 걸려올지 모르는 전화 때문에 잠 못 들고 있었다. 책을 읽을 수도, 잠을 청할 수도 없는 아침. 이미 환한 창밖을 보며 이것저것 의미 없이 핸드폰을 눌러댔다. 그러다 얻어걸린 오늘의 운세.


이것이 그 날 나의 운세였다

아, 그렇구나. 오늘 나의 실수들, 재앙에 가까운 불운들은 내 탓만은 아니었구나. 그래 그래, 오늘은 그저 '이런 날'이었던 거야. 오늘의 운세가 꼭 맞는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오늘은 위로가 된다. 한숨을 쉬며 뒤척이는 사이 어느새 잠이 들었다. 고맙다, 오늘의 운세.


-오늘의 위로 : 꼭 당신 탓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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