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방을 싸며 알게 되는 나

-오늘의 질문

by 지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맞다. 대개의 경우 그렇다. 한번 헤어졌던 연인과 다시 잘해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거다. 두 번째도 처음과 같은 이유로 헤어지기 쉽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아, 같은 사람이랑 세 번째, 네 번째 시작하지는 말자. 계속해서 엉망인 성적표 받는 것이 취미가 아니라면.


“큰일을 겪으면 사람은 변한다.”


이것도 맞다. 큰일의 범위를 어떻게 상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변하는 사람이 많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갑작스러운 경제적 상실, 엄청난 사고 같은 것들은 사람을 훅 변하게 만든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것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의 한순간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 앉기 전, 그곳까지 걸어오는 여정에서 얻은 것이 중요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깨달음의 순간은 ‘넛지’ 정도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마치 내가 여행가방을 싸고 풀고 하는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변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경제적으로 흠잡을 데 없던 적이 없다. 자랑도 뭐도 아니다. 그냥 고백이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빠듯한 시간과 함께 통장 잔고를 염두에 둬야 했다. 5성급 호텔에서 늘 숙박하고, 기사 딸린 렌터카를 이용하고, 비행기의 추가 수하물 요금 같은 것은 신경 안 쓰는 그런 사람이 못된다는 말이다. 필요한 것을 현지에서 그때그때 구입할 만큼 통도 크지 못하다. 가능한 숙박비 안에서 가성비 좋은 잠자리를 찾고, 생전 처음 들어본 저가 항공사를 이용하고, 수하물 무게를 20KG 아래로 맞추는 여행을 참 많이도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내 삶에 필요한 것의 목록’이었다. ‘나’를 아는 것, 사실 별 거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게 편한 환경을 아는 것이다. 행복이란 소심한 구석이 있어서 그 정도만 맞춰줘도 다가와 옆에 기대 준다. 누가 알아주지는 않는다. 물론 그럴 필요도 없다.



가방 싸기의 최고봉은 몇 년 전 했던 남미 여행 때였다. 페루에서 시작해 브라질에서 끝나게 되어 있었다. 남미 대륙을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는 여정이었고 사막에서 보드를 타는 것부터 빙하 트래킹까지 해 볼 생각이었다.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무게는 20KG. 자, 시작.


렌즈 착용자여서 관련 용품을 먼저 넣었다. 소모품은 현지 조달이 가능할 것 같았지만 모르는 일이다. 악성 곱슬머리인 내게 드라이어는 평생의 동반자이다. 두 가지 물품을 넣은 뒤 그다음 빈자리를 알뜰하게 이용해야 했다.


추워서 죽어버린다면 말이 안 된다. 먼저 빙하 근방에서 입을 패딩 한 벌을 넣고 나자 거짓말처럼 공간이 사라졌다. 비상약과 속옷과 실내용 슬리퍼와 샌들을 넣고 나자 한계에 슬슬 다가가기 시작했다. 우비와 즉석 한식 몇 개는 필수다(최대한 부피를 줄이기는 했지만). 그다음은, 그다음은.


화장품은 포기했다. 제대로 된 식당을 만나면 입겠다며 챙겼던 그럴듯한 옷들도 아웃. 여분의 운동화도 곤란했다. 노트북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몇 번을 쌌다 풀었다 하면서 완성된 짐 속에는 여름 티셔츠 두벌과 바지, 봄가을용 남방과 스웨터만 남았다. 거기에 책 몇 권과 노트 한 권을 챙기고 여벌의 이어폰을 넣었다. 이것으로 두 달을 버티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능했다. 여행은 힘들다. 낯선 나라이기 때문에,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길을 모르기 때문에 곤란하다. 아침이면 불쑥 올라갔던 기분이 점심을 먹기도 전에 다운되기도 한다. 여정은 남아있고 돌아갈 수는 없다. 어떻게든 기분을 끌어올려야 한다. 사는 일이 다 그런 것처럼 여행에도 조증과 울증이 난무한다. 나를 돌볼 사람은 나 밖에 없다.


낯선 도시를 돌아다니다 지칠 때면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 숙소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긴장을 풀고 안정감을 얻어 다음 여행지로 떠날 용기를 얻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때 읽은 책들은 어느 낯선 나라의 숙소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긴 공간에 소소한 기념품을 챙겨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에서 본 것도 있고 느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깨달음은 ‘내게 필요한 것’들의 목록이었다. 빠듯한 지갑 사정 때문에 숙소에서 간단히 음식을 해 먹고 화려하지 않은 밤을 보내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말 한마디 안 하고 지내는 며칠도 괜찮았고, 처음 만난 누군가와 십 년 된 친구처럼 잘 지내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꽤 놀라운 경험이었다(아르헨티나의 게스트하우스 직원과 두 시간 동안 술 마시며 떠들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영어만 조금, 그는 스페인어만 가능했다).



그 여행이 끝난 후 내 삶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목록이 조금 변했다. 경제적인 부분은 꽤 축소됐다. 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소리는 못하지만, 생활비가 그리 많이 필요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보다 절실한 것은 나를 위한 시간이고, 아무리 바쁜 일이 겹쳐 돌아가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부분이었다.


회사가 바빠도, 인간관계가 꼬여도 지금의 나는 매일 한 시간쯤은 비워 둔다.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할 때도 있고, 조용한 방 안에서 책을 읽는 날도 있다. 그저 멍하게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이에 복잡해 보이던 일의 해결책이 얼핏 보이기도 하고, 그건 나와는 관련 없으니 한 발쯤 멀어지자는 자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시간. 그 시간을 지내고 나면 다시 복잡한 관계 속으로 밀려 들어가도 어렵지 않게 감정을 조절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쉽게도 그걸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이것은 인생의 좋은 점일까, 아이러니일까?


-오늘의 질문 : 마지막 여행지는 어디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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