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이라고는 없는 요즘

-오늘의 질문

by 지안

인터넷으로 장을 봤다. 복숭아를 살 때 추가로 한박스를 더 구입하면 오천원을 할인하는 행사가 진행중이었다. 오, 이런 일은 참지 않지! 꾹꾹 장바구니에 눌러 담아 결제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을 든 딸이 나타났다. 화장품 매장에서 할인을 알리는 문자가 왔다고 했다. 나는 세일을 놓치지 않는 몹시 경제적인 사람이라구,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덥썩덥썩 물건을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어제와 그제, 또 그 전날처럼 비가 내리는 오후. 복숭아 두 박스가 도착했다. 껍질을 벗겨낸 후 설탕 넣은 물에 끓여 복숭아조림을 만들었다. 당분간 간식 걱정은 없겠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뒤돌아본 자리에는 커다란 종이 박스 두 개와 과일을 감쌌던 스티로폼의 잔해가 남겨졌 있었다. 벗겨낸 복숭아 껍질의 양도 상당했다. 밖에는 요란하게 천둥이 치고 있었다. 나는 재활용과 음식물 쓰레기를 내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몰아냈다.




역시 비가 내리는 다음 날 화장품 택배가 도착했다. 일삼아 종이와 비닐로 포장된 것들을 제거한 후 서랍에 넣고 뒤돌아보니 택배 박스와 그 안에 완충제로 담겨온 스티로폼 조각 및 포장 쓰레기가 거하게 남아 있었다. 내 집은 좁다. 다행인 점은 아파트에 재활용 쓰레기 장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 비에 종이를 들고 나서는 것은 무리다. 어딘가 뚫렸는가 싶게 비가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 ‘다음에’로 결정했다.


애써 쌓인 종이 박스 탑을 외면하고 있을 때 딸이 귀가했다. 점심을 먹다 옷에 쏟았다고 했다. 메뉴로 카레를 먹었다는 것은 근방 10미터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었다. 입고 나간 옷 뿐 아니라 실내에서 걸치고 있던 가디건과 담요까지 전부 카레와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허겁지겁 세탁기를 돌렸다. 집이 좁은 탓에 빨래 건조대를 슬쩍슬쩍 밀어내지 않으면 지나다닐 수도 없었다. 순식간에 집은 임시 보호소 같은 분위기가 났다. 미안하긴 뭘, 일부러 쏟은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삶의 질’이라는 것이 이런 작은 일에도 영향을 받는구나. 다음날 빨래는 5분의 4정도 건조되어 있었다. 빨래에게도 하루쯤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베란다에 쌓인 박스들의 무질서함과는 달리 다음날에도 어김없이 질서정연하게 비가 내렸다. 예약도서가 도착했다는 도서관의 문자를 한참 바라봤다. 코로나 19로 인해 폐쇄와 개방을 반복했던 탓에 언제 예약신청을 했던 것인지, 그 책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서는 벽돌 두 개를 붙여 놓은 것 같은 책 한권을 넘겨주었다. 도서관 창으로 불어난 홍제천이 보였다. 매일 걸어 다니던 산책로는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산책을 멈춘 지도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라디오에 출연해 ‘요즘 날씨’에 대해 설명하던 전문가는 ‘기후는 지속되어야 하고 날씨는 변화해야 한다’고 정리했다. ‘문명’이란 ‘기후’에 맞게 형성되었기 때문에 평균으로서의 기후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베리아의 기후가 내가 사는 이곳과 비슷해져서는 곤란하다. ‘이글루’로 대표되는 추운 지방의 문명은 남아 나지 못할 것이다. 날씨는 변화해야 한다. 여름의 ‘하루’는 그냥 맑은 날이지만, ‘일주일이 계속’되면 폭염이고, ‘한달이 유지’되면 가뭄이라는 말이다.


지금의 이 이상한 날씨를 ‘기후 변화의 결과’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기후 변화의 징후’로 볼 수 있는 증거는 점점 많아지고 있어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온난화’와 ‘기상 악화’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올 해 내 생일(네, 제 생일은 ‘소한’과 겹칩니다. 한 해 중 가장 추운 날이죠. 올 해 생일에는 비가 왔어요. 눈 아니고 비요.)에 느꼈던 싸한 기운이 이제는 제법 형태를 갖춘 좀비처럼 출몰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불안한 예감과 달리 반짝 해가 떴다. 서둘러 빨래를 걷고, 쌓여 있던 박스와 음식물 쓰레기를 치웠다. 눅눅한 날씨 탓에 꿈도 꾸지 않았던 물걸레 청소까지 후다닥 끝내고 보니 세상 환한 집이 되었다. 모처럼 말끔해진 거실에서 얼음소리가 청명한 냉커피를 타 마시며 생각했다.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모든 것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다(‘시인과 촌장’의 ‘풍경’이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라테 타령도 좋고 옛날에는 말이야도 좋으니 날씨만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줬으면 좋겠다.


피에쓰.. 폭우로 물 난리 난 곳이 많은 것 같습니다. 태풍은 오지도 않았는데, 장마에 둑이 무너지고 제방이 터지는 물난리라니. 앞으로 태풍도 올라올텐데 더 걱정입니다. 모쪼록 사람 다치지 말고 복구도 빨리 이뤄졌으면 싶습니다.


-오늘의 질문 : 다들 별 일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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