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어느 아침 식사 때였다. 우리 집은 부모님과 농담을 나누거나 속 깊은 이야기를 터 놓는, 티브이 드라마 속 가족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부모님이 말씀하시면 대충 예, 예 대답하는 평범한 집안이었다. 어쩌다 이야기가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남매 둘을 키우는 일이 힘들었다, 특히 딸이 태어났을 때는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이런 대화 끝이었던 것 같다. 당시 51세이던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우리가 널 낳고 싶어 낳았냐? 생겼으니 할 수 없이 낳았지. 아들이야 낳고 좋아했지만 넌 그것도 아니고.”
밥상 위에서 딸각대던 소리가 멈췄다. 어머니도 당황했고, 오빠는 아예 밥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른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귀가 멍해지고 다리가 풀린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이해했다. 휘청휘청 등교까지는 했는데, 하교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생겨서 낳아버린 자식이라면, 지금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편이 다행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지금은 안다. 51세라고 늘 할 말, 못할 말 가려가며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다. 50이 넘었다고 귀가 순해지거나, 하늘의 명을 알아차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철들지 않는다. 가장 쉬운 예가 나다. 그러니 당시의 아버지를 이해하느냐 하면, 그럴 리가. 당신의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할 수야 있겠지만,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기는 하다.
아이를 낳을 때, ‘바로 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소중하게 잉태되어 조심스러운 몇 달을 보낸 후 가까스로 만나봐야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있다. 생김새도 성격도 선택할 수가 없다. 유전자 조작 기술이 발달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그래 봐야 형질을 선택하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듯 ‘이것’을 콕 집어 선택할 수는 없다.
아이 입장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부모의 생김새도 경제력도 사회적 지위도 무엇 하나 선택할 수가 없다(태어나겠다는 의지가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니 ‘널 낳고 싶어 낳은 것이 아니다’는 어느 정도 진심을 품고 있는 말이다. ‘낳고 보니 너였다’와 ‘태어나보니 당신이 부모로군요’가 맞는 말이다.
말하자면 부모와 자식도 모른 채 만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갖춰야 하는 예의와 거리가 부모 자식 간에도 필요하다. 너무 훅 들어오거나 무심해지면 탈이 난다.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마음을 사라진다. 그러니 아이가 말귀를 알아듣게 되면 공부를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려줘야 한다. 물론 그것보다 급한 것은 내가 내 아이를 예의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이다.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어딘가로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사람, 꽤 많이 만났다. ‘가족’이라는 이름을 걸면 상대를 어떻게 다뤄도 좋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누군가 선을 침범하면 경보음을 내줘야 한다.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자는 마음으로 미적거리다 파국을 맞기 전에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그날, 결국 집에 들어갔다. 내가 갈 만한 곳에 모조리 연락해서 ‘일이 생겼으니 애를 만나거든 연락을 해달라’, 고 오빠가 미리 말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종일 학교에서 침울하게 지내다 친구 집에 도착했을 때 오빠가 달려왔다. 네가 원하는 만큼 아버지 얼굴을 안 마주치게 해 줄 테니 무조건 들어오라고 했다. 가출도 준비가 있어야 가능하다. 돈 한 푼 없이 헤매는 것보다는 ‘용돈 인상’도 포함된 오빠의 딜을 받아들이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들어갔을 때(당시 우리 집 통금은 10시였다), 부모님은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과는 오빠가 했다. 부모님과는 그 일에 대해서 말을 나눈 적이 없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나는 그 일을 잊지 않았다. 그 일은 나이를 먹은 후 ‘어른이 되어도 정말 밥 먹듯이 실수를 하는구나’의 영역에서 이해한 것일 뿐, 성장하는 내내 깊은 상처로 남았다.
아버지와 내가 타인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처럼 제대로 사과를 하고 설명하고 납득했다면, 관계가 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 채로 살았다. 아버지는 내가 스물여덟 살때 돌아가셨다. 이십 대의 나는 ‘사람이 오십 년 정도 살면 세상의 이치를 다 알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십 대란 그런 나이니까.
지금은? 물론, 아니다. 사십 대도, 오십 대도 철 좀 들자!
-오늘의 조언 :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받으면 가끔 도망치세요. 아주 등 돌리는 것보다는 시간을 가진 후 얼굴 보는 게 더 낫습니다.